독도시사뉴스에서는 늘 독도문제를 다뤄왔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중점으로 알찬 내용을 독자여러분께 바르게 알리기 위해서 노력 하던 중 이번에 전 국민에게 애국심을 심기위해 새롭게 말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이런사람’을 통해서 애국자(독립운동가)를 소개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특별기획 독립운동가 열두 번째 이야기 -1
독립운동가 김구 민족의 영원한 지도자
출생 - 사망
1876. 7. 11.(음력) ~ 1949. 6. 26.
1876년 7월 11일(양력 8.29) 황해도 해주(海州)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에서 부친 김순영(金淳永)과 모친 현풍 곽씨(玄風郭氏) 낙원(樂園)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다른 이름으로 창암(昌巖), 창수(昌洙), 두래(斗來), 구(龜), 구(九)를 쓰고, 자는 연상(蓮上),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이다.
1879년(4세)에 천연두를 앓아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으나 천행으로 목숨을 건졌다. 9세가 되던 1884년 비로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16세 때에 당시(唐詩), 대학(大學), 과문(科文)을 익혀 17세(1892)가 되던 해에 과거에 응시하였다. 하지만 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합격자 이름이 나도는 타락한 과거시험에 실망을 느꼈다. 그 뒤로 김구 선생은 풍수, 관상에 관한 책과 손무자(孫武子), 오기자(吳起子), 육도(六韜), 삼략(三略) 등의 병서를 읽어 나갔다. 관상공부를 하던 김구 선생은 자신의 관상이 좋지 않아 크게 실망하다가, 그 책에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身好不如心好)”는 구절에 빠졌다. 아무리 관상이 좋아도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는 이 말에 김구 선생은 호심인(好心人)이 되기로 마음을 굳힌 것이다.
이듬해(1893) 동학에 들어가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사람으로 뽑힌 김구 선생은 충북 보은에서 최시형 대수주(大首主)를 만나 팔봉도소접주(八峰都所接主)로 임명되었다. 1894년 9월 탐관오리를 내쫓고 서양오랑캐와 왜를 물리치자는 깃발을 올리며 동학군의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海州城)을 공격했으나 관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나라 위한 평생의 첫 걸음이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무너져가는 국가를 지탱하는 데 몸 바칠 것을 결심
20세 되던 1895년 2월 동학 봉기가 한계에 다다르자, 김구 선생은 신천군에 사는 진사 안태훈을 찾아가 몸을 맡겼다. 그의 아들 안중근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부친을 따라 동학군 토벌에 나섰으니, 어린 날 두 영웅의 만남은 매우 미묘한 것이었으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같았다.
이곳에서 당시 황해도 지역에서 명망이 높은 학자인 고능선(高能善)의 지도로 한학을 배웠다. 고 선생은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에서 일사보국하는 길을 일러주면서, 청국이 청일전쟁에서 패한 것에 대해 원수를 갚으려 들 것이니, 그 나라에 가서 국정을 조사하고 인물을 사귀어 두었다가 뒷날을 도모하는 것이 좋겠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이에 공감한 김구 선생은 안태훈 진사 집에서 만난 김형진(金亨鎭)과 같이 평양, 함흥, 갑산을 지나 압록강 기슭을 돌아 만주로 갔다.
행선지는 임강, 환인을 거쳐 관전에서 임경업 장군의 비각을 보고 삼도구에 이르렀다. 김구 선생은 그곳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고 있던 의병장 김이언(金利彦) 의병부대를 만나 이에 합류하였다. 1895년 동짓달 초에 김구 선생이 참가한 의병부대는 고산리(高山里) 승리의 여세를 몰아 강계(江界)를 공격하였다. 여기에서 실패한 김구 선생은 할 수 없이 고향을 향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일본인 스치다를 국모시해죄로 처단하다
1895년 명성황후 살해에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온 나라에서 의병항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만주를 다녀온 김구 선생은 안악으로 되돌아오다가 한 사건과 마주쳤다. 1896년 2월 치하포 주막에서 일본인 스치다(土田讓亮)를 만난 것이다. 이때가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 넉 달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 뒤 석 달 지나(1896. 5. 11.), 철퇴와 철편을 든 수십 명 관원에게 붙잡힌 김구 선생은 해주감옥에 갇혔다.
김구 선생은 옥중에서 서양문물에 눈을 떴다. 중국에서 발간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誌) 등을 탐독하여 신학문을 익히면서, 서양이란 무엇이며 세계형편이 어떠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선생 자신과 우리나라에 대한 비판의식도 갖추어 나갔다.
발췌
[네이버 지식백과] 김구 [金九] - 민족의 영원한 지도자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제공처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