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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프라블럼 : No Problem 》
인도를 여행하는 도중에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 바로
이 '노 프라블럼'(No Problem : 문제 없어/괜찮아)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문제가 닥쳐와도
그들은 노 프라블럼이라고 말한다.
돈이 없어도 노 프라블럼이고
자전거가 펑크가 나도 노 프라블럼이며,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어도
이미 살아났으니 노 프라블럼이다.
기차가 무한정 연착을 해도 노 프라블럼이고,
인도 대사관에 비자 재촉을 해도 노 프라블럼이니 무조건 기다리라고 말한다.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정해져 있는 대로 모든 일이 잘 진행될 텐데, 왜 스스로 안달하고 초조해져서 자신을 괴롭히냐는 것이다.
한번은 뭄바이에서 여권을 분실한 적이 있었다.
어디서 분실했는지 몰라 당황하는 나에게 인도인들이 가장 많이 해 준 충고가 '노 프라블럼'이었다.
여권을 잃어버린 것만도 충격적인 일인데, 스스로 불안한 생각을 만들어 자신을 괴롭힐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마음을 평화롭게 가지라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여권을 찾게 될 것이고,
설령 찾지 못한다 해도 여권이 없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진 않는다는 논리가 그 '노 프라블럼' 속에는 담겨 있었다.
물론 그것이 말처럼 쉬운 건 아니었다. 여행자에게 필수품인 여권을 분실하고서도 마음을 평화롭게 가질 만큼의 수준에
나는 아직 올라 서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 종일 불안과 초조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가?
결국 여권은 배낭 속의 비상주머니 속에서 보란 듯이 발견되었다. 애초부터 노 프라블럼이었던 것이다.
내가 버스를 놓쳐 발을 구르고 있어도 인도인들은 버스를 세워주는 대신 노 프라블럼을 외쳤고,
이질 설사병에 걸려 한 시간이 멀다 하고 화장실을 드나들어도 노 프라블럼이 그들의 처방전이었으며,
잘 방이 없어 나무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있어도 노 프라블럼이라고 타일렀다.
노 프라블럼 명상법은 결론적으로 이것이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로 결코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다.
신발을 잃어버렸는가?
노 프라블럼이다.
인류는 수만 년 동안 맨발로 정글 속을 누비고 다닌 역사가 있다.
그러니 당신이 몇 시간 동안 맨발로 다닌다고 해서 원숭이로 퇴화하는 건 아니다.
대학 입시에 떨어졌는가?
노 프라블럼이다.
대학에 갖다 바칠 등록금으로 인도 여행을 떠나면 몇 년을 귀족처럼 다니면서 대학에서 배울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배울 수 있다.
누가 약속을 안 지켰는가?
노 프라블럼이다.
그 사람은 이미 그런 식으로 약속을 안 지키도록 수천 년 전부터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배역을 훌륭히 해낸 사람이다. 그리고 그가 그 배역을 당신 앞에서 해 보인 데는 분명히 어떤 교훈이 있을 것이다.
짐작컨대, 인도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틀림없는 희랍철학자 에픽테투스는 말했다.
"삶에서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경우에도 '난 이러 이러한 것을 잃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고 말하라.
그러면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을 것이다.
너의 배우자가 죽었는가?
아니다. 그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뿐이다.
너의 재산과 소유물을 잃었는가?
아니다. 그것들 역시 본래의 위치로 돌아간 것이다."
인도의 영적 스승 사티야 사이 바바는 말했다.
"사람들은 곧잘 아는 것이 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를 초월하는 자세가 더 큰 힘이다." (펌)
우리가 삶을 살아감에 있어 깨우치는 진리 중에 하나가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에 시간이 지나다보면 지난 일들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이 어찌보면 불행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잊혀져서 지우고 비울 수 있기에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는 건 아닐까...
"노 프라블럼"
긍정적인 사고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원동력은 아닐런지요...
얘야, 성인(聖人)이 되는 길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언젠가 한 봉쇄 수녀회를 방문해서 수녀님들을 위한 월 피정 강의를 했습니다. 참으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많은 반성도 했습니다.
머리 털 나고 그런 강의는 처음 했습니다. 저는 격자 창살 이 쪽에서 강의를 하고, 수녀님들은 창살 반대편에 앉아 강의를 들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수녀님들의 강의 집중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또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열렬한 반응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부작용도 큰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황금만능주의, 출세지상주의, 물질문명의 극치 속에 살아가다 보니, 은연중에 눈에 보이는 것만 중시하는 경향이 우리 몸에 배어 있습니다. 교회나 수도 공동체 역시 이런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특별하게도 그 수도자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창살 안에 가두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손과 발을 결박했습니다. 스스로 문명 세계를 등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평생을 그 좁은 테두리 안에서 마무리 짓습니다.
이분들의 선택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람이 싫어서 그 길을 선택했을까요? 세상에 혐오감을 느껴서일까요? 그도 아니면 실연이라도 당했을까요? 세상에서 먹고살기 힘들어서였을까요?
그런데 그분들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몸만 가두었을 뿐 그분들의 영혼은 얼마나 자유로워 보였는지 모릅니다. 삶 전체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할까, 얼마나 불행할까, 생각했었는데, 그분들의 얼굴에는 ‘행복해 죽겠네’하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비록 그분들은 세상을 등졌지만, 그 누구보다도 세상의 아픔과 상처에 민감했습니다. 그분들의 입술에는 세상을 위한 기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보다 완전해지기 위해, 보다 영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보다 완벽히 스승 예수님을 닮기 위해, 결국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스스로 그 험한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 때로 알다가도 모를 분이십니다. 때로 한없이 여유로우시고, 끝까지 인내하시고, 모든 것을 수용하시는 분이시지만, 때로 요구가 얼마나 많은 분인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읽은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해온 한 청년에게, 그 지키기 어려운 계명들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철저하게 지켜온 요즘 보기 드문 청년에게 큰 상급을 내리시거나 칭찬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욕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특별히 열심히 신앙생활 해나가는 사람들에게 더욱 그렇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더 이상 뭘 더 어떻게 하라고, 하는 사람일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저희 살레시오회의 창립자 돈보스코 역시 자신들의 어린 제자들에게 힘에 부치는 요구를 많이 하신 분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이제 겨우 열두 살, 열세 살 된 어린 소년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너는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단다.”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 깜짝 놀라 이렇게 반문하곤 했습니다.
“신부님, 제게 지금 장난치고 계신 거죠? 나 같은 것이 어떻게 성인이 될 수 있단 말이예요?”
돈보스코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얘야, 성인(聖人)이 되는 길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네게 매일 주어지는 일과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정성껏 미사에 참석하는 것, 고백성사를 잘 준비하는 것, 그것으로 너는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단다.”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 마음으로 이렇게 다짐하곤 했습니다.
“그래, 나는 반드시 성인이 되고 말거야.”
은혜롭게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화의 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활짝 열려있음을 만천하에 확실하게 공표했습니다. 성인이 되는 길은 더 이상 성직자 수도자의 전유물이 아님을 명확히 했습니다. 성화의 길은 하느님 백성들이면 누구나가 다 접근 가능한 보편적인 길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우리 모두를 성화의 길로 초대하시는 하느님 은혜에 감사드리며, 일상에 대한 충실과 꾸준한 기도 생활로 보다 완전함에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https://m.blog.naver.com/syj1212ad/223188272009
엄마와 아빠의 서로 다른 역할의 차이
2023년 가해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오 19,16-22
‘금쪽같은 내 새끼 92화 강압적인 아빠와 숨 막히는 3남매’에 나온 사연입니다. 이번 가족은 재혼 가족인데, 가족 구성은 5남매와 뱃속에 1명으로, 이미 자녀가 셋인 상황에서 재혼 후 2명을 더 낳았고, 1명을 임신 중인 상황이었습니다. 20살 1호 금쪽이, 19살 2호 금쪽이, 17살 3호 금쪽이 3남매는 하고 싶은 것도, 즐기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반면에 아빠는 출산을 앞둔 엄마를 위해 6살 4호 금쪽이, 4살 5호 금쪽이들을 돌봐주고 엄마를 돕길 원하면서 갈등이 시작됩니다.
방송 내내 아빠는 강압적인 태도와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으로 자녀들을 억압했습니다. 아빠가 퇴근할 때 집에 자녀들이 없으면, 바로 전화로 소집 명령이 떨어집니다. 밖에 나가서 자유롭게 놀지도 못하는 자녀들은, 대화할 때 역시 아빠의 눈을 못 마주치고 시선을 회피합니다. 아빠와 대화할 때 자녀들의 눈빛이 참 슬퍼 보입니다. 자녀들이 아빠와 반대의 목소리를 낸다면 이야기는 이내 극단적인 예시로 향합니다. 김치, 쌀 같이 식량이 떨어져 봐야 알겠냐느니, 돈이 없어서 고생해야 하느니 하는 극단적인 예를 들며 아이들을 압박합니다.
아빠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힘겹게 살아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태어난 지 50일 만에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가난은 물론이요,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금전적으로 자유롭게만 해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결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이들의 더 큰 문제는 어머니 역할의 부재라고 생각합니다. 재혼했기 때문에 이미 다 성장한 아이들에게 어머니는 어머니로서의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훈육을 책임지기는 하지만, 어머니는 자기가 낳은 아이들이 아니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에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욕구는 다른데 행동만 바르게 해야 하는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부자는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선한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는 계명들을 다 지킨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당신을 따름은 계명을 지키는 것보다 ‘욕구’에 더 관련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탐욕은 욕망입니다. 당신은 욕망을 없애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며 탐욕과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끝마칩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들은 모든 율법을 다 지켜도 기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아버지만 만나려 하기 때문입니다. 육아도 어머니와 아버지, 둘의 합작품입니다. 아버지는 행동을 잘하게 만드는 분인데, 먼저 어머니에게 욕망을 제어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이렇게 행동은 잘하지만 기쁘지 못한 삶을 살게 됩니다.
엄마는 욕구를 죽여줘야 하고 아빠는 행동을 바꿔줘야 합니다. 엄마가 욕구를 죽여주는 방식은 자녀를 위한 피 흘림입니다. 아빠의 피 흘림만으로 자녀의 욕구가 줄어들 수 없습니다. 결국 아빠는 행동에 관여하고 엄마는 욕구에 관여하기 때문입니다. 그 역할이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둘이 합쳐져야 완전해집니다.
‘아빠는 훈육하면 안 돼’ VS ‘아이 문제는 훈육 못 한 엄마 탓!’, 양육 방식 차이로 인한 부부 갈등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새끼 64회’엔 토할 때까지 먹는 예비 초1 남자 금쪽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는 행동에 대한 단호한 훈육을 엄마가 하고 아빠는 감싸주는 역할만을 합니다. 하지만 아이는 엄마에게서 포근함을 얻어 욕망을 절제하고 싶고 아빠에게서 삶의 방식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뀌니 욕망도 절제되지 못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엄마 아빠의 역할은 명확해야 합니다.
아빠가 행동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서 아빠를 그리워합니다. 아빠의 훈육이란 다름 아닌 ‘모범’입니다. 아이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무기력이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생존 욕구에서 나오는 것들 외에 스스로 의미 있는 것을 원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누군가가 나에게 원하는 것을 원하고 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가 부모를 만나지 않는다면 두 발로 서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원하는 능력도 그것을 할 수 있는 이에게서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버지는 나의 목적지입니다. 계명이 우리 목적인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처럼 완전하여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려는 노력과 함께 그리스도를 거쳐야 합니다. 욕구를 버릴 수 있어야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려는 목적으로 가며 순간순간 기쁨을 느낍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걷는 기쁨을 느끼려면 어때야 할까요? 먼저 배를 버린 것에서 오는 공허감을 이겨야 합니다. 욕망이 없어야 합니다. 가차 없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머니를 만났다는 증거이고, 그리스도처럼 따라 하면서 조금씩 나아갈 때 비록 물에 빠지기는 해도 나아지는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도 만났다는 증거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23년 8월 21일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https://m.cafe.daum.net/bbadaking/4Zol/6811
너희 재산을 처분하라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니면 흐뭇합니다. 언제든지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쓰지 않아도 든든합니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불안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깁니다. 저는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닙니다. 평상시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간혹 주머니에 돈이 없는 것을 알게 되면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주머니를 비워놓던 사람은 그런 것에 자유롭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답을 알려 주셨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19, 21). 그러나 젊은이는 답을 얻었으면서도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답을 얻었으면 그대로 해야 합니다. 답을 얻었으면서도 그대로 하지 않아 하늘의 보화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본인의 책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영생에로 인도하면서 길을 알려 주시고 동행하여 주시지만, 본인이 거부하는 데는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부자에게는 돈이 전부입니다. 그의 재산은 곧 목숨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은 단순히 자선을 베풀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재산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이 있으니 문제입니다. 사람 나고 돈 났다는 것을 알지만 돈에 매이는 것이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재물로부터의 자유를 갖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님을 우선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 것은, 훌훌 털어버리고 따름으로써 예수님께서 주시는 더 큰 자유를 얻게 됩니다. “먼저 그리고 항상 주님”을 앞세울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5). 버림으로써 얻는 신비에 눈뜨는 하루 되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이라는 것은 또다른 무엇으로부터 옭매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것에 자유로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에게서 모든 것이 솟아납니다. 주님을 오롯이 사랑한다면 무엇이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포기할 수 있고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먼저 내려놓으면 더 큰 것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생활성서 - 소금항아리
2023/8/21/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https://m.blog.naver.com/biblelife83/223176931115
230821.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
오늘 <복음>에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습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
그는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켜라.”(마태 19,17)
이는 생명을 얻는 데는 선한 일을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지키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젊은이는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 19,20) 하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완전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질병이 없고 건강한 사람, 실수하지 않고 죄짓지 않는 사람, 악습이 없고 상처주지 않는 사람, 상처가 없고 성숙하고 교양 있는 사람, 능력 있고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도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완전무결한 사람일까?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당신께로 와서 따르라고 하십니다. 곧 재물의 노예가 되지 말고, 받은 복을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복을 받은 이는 복을 주는 이가 되라고 하십니다. 곧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팔라”, “주라”, “오라”, “따르라”는 네 가지를 실행하라 하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부자 청년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자기 자신을 가리고 있는 껍데기의 옷이 발가벗겨지고, 자신의 실상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사실, 부자는 율법을 지켰다 하나 단지 자신을 위하여 죄를 짓지 않았을 뿐,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지는 안했던 것입니다. 곧 사랑을 행하지는 안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신을 지키는 것을 넘어서, 자신을 비우라고 할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자신을 남에게 내어주고 선을 실행하라고 하십니다.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마태 19,21-22)
우리도 오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따라 나서는지, 아니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청년처럼 머뭇거리고 주저하거나 슬퍼하고 되돌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들려주신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말씀을 따름으로써,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
주님!
주님께서는 저의 허울을 벗기십니다.
가리고 있는 겹겹의 옷을 벗기시고, 벌거숭이로 만드십니다.
제 자신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으면서도
타인을 위해서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이기심의 옷을 벗기십니다.
이제는 이기심과 자애심을 버리고, 가진 것을 다 나누게 하소서.
나아가, 낮은 이를 섬기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던 당신을 위하여 하고, 당신께 찬미와 영광이 되게 하소서. 아멘.
2023년 8월 21일 (월)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복음 묵상 (마태 19,16-22) (이근상 신부)
https://m.cafe.daum.net/ignatius/OPYg/997
230821.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당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를 한번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전문을 외우지는 못하지만 모두의 마음을 움직이는 구절이 있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시인은 꽃 한 송이 피기까지 온갖 정성과 노력이 있었음을 이야기합니다.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가 기울여야 하는 노력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어떻게 해야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친절하게 말씀하십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사람을 죽이지 말고, 거짓증언하지 말고, 남의 재산 탐하지 말고, 남의 아내 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전해 준 ‘십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저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살았습니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칭찬하시면서 더 좋은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지금 이곳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미 동북부 제 42차 남성 꾸르실료 봉사자’ 모임에 함께 했습니다. 저는 모임을 함께하면서 이분들이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는 그런 마음으로 봉사에 임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봉사자들은 매주 수요일에 모여서 8월부터 10월까지 3달 동안 꾸르실료 체험자들을 위한 준비모임을 합니다. 저는 시작 미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 농부가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발견하면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남성 제42차라는 밭에서 보물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보물은 꾸르실료 교육에 참가하는 체험자들입니다.”
봉사자들에게는 3달 동안 준비하는 과정에 ‘숙제’가 있었습니다. 숙제에는 ‘묵주의 9일기도, 희생, 선행, 단식, 매일미사 참석, 성체조배’가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는 것은 봉사자들 본인의 영적인 성장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꾸르실료 체험자들이 교육을 통해서 변화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니 남성 제42차 꾸르실료라는 꽃이 활짝 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니 남성 제42차 꾸르실료는 좋은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은행에 잔고가 많으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것처럼 이렇게 기도은행에 기도를 많이 쌓아 놓으면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채워 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이방의 신을 섬겼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올바른 길로 올 수 있도록 ‘판관’을 보내 주셨습니다. 판관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앞장섰습니다. 세례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리에 다른 것들을 모시곤 합니다. ‘재물, 권력, 명예’라는 삼종세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빛과 소금이 될 것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미 빛과 소금이 되었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믿음, 희망, 사랑’이라는 삼종세트를 가지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전하는 ‘판관’이 되어야 합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홍주 신부의 짧은 묵상
/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이웃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을 증거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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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어떤 사람>
많이
가져서
많이
줘야 하기에
슬픈 사람
많이
가져서
많이
줄 수 있어
기쁜 사람
요셉 신부님 -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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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1.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을 읽고 있으면 자신 있게 주님께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왔습니다.”라고 말하는 청년이 부럽습니다. 한편으로는 ‘어떻게 저렇게 당당할 수 있지.’하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오늘 복음 속의 대화는 영원한 생명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물음을 젊은이가 주님께 던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신 후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저는 이 마지막 말씀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마지막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주님을 따랐던 수많은 제자, 그리고 12사도 역시 모든 것을 다 지킨 후 주님을 따랐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따르면서 여러 가지 악습과 죄에서 벗어나게 되었음이 더 맞는 말일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자격증을 따듯이 그렇게 합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하더라도 실수하더라도, 같은 잘못이나 죄에 자주 걸려 넘어진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위해, 하늘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냥 그분의 향기에 이끌려 걷는 것뿐이고 그분의 말씀에 이끌려 함께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순간순간 무엇을 멀리해야 하는지, 무엇을 끊어내야 하는지, 어디로 방향을 잡아야 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와서 나를 따라라
이 말씀을 가슴에 간직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비 오는 날
비오는 날에는
딩굴딩굴
밀가루 뭉쳐놓고 딩굴
곰탕 팩 한 봉지 열고 딩굴
애호박, 노란 지단, 고명들 만들고 딩굴
비오는 날에
수제비 한 그릇 뚝딱
그리고 다시 딩굴딩굴
이런 날도 있는 거죠. 뭐.
렉시오디비나
2023년 8월 21일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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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1.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마태 19,16)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그리고 보십시오. 한 남자가 예수님께 와서 ‘좋으신 스승님,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젊은이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온 사악한 위선자라고 합니다. 저는 이 사람이 욕심 많고 탐욕스러운 사람이라고 주저 없이 이야기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가 이런 사람임을 보여 주셨으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이 사람을 위선자라고는 절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확실치 않은 것을,특히나 누구를 탓하는 일에,함부로 단정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한 짓이기 때문입니다. 마르코가 이 사람이 위선자라는 의심을 거두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마르코는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르 10,17)고 하고 또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마르 10,21)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가 분명히 보여 주듯이 돈의 폭정은 위력이 대단합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덕을 실천하고 있을지라도 탐욕이 그 모든 것을 헛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50가지 예수 모습 / 안셀름 그륀
예수님은 나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셨을까?
내가 소개한 50가지 예수님의 모습에는 내가 예수님에게 느낀 매력과 감동이 듬뿍 담겨 있다. 예수님의 신비를 더 많이 발견하려고 이 모습들에 대해 묵상했다. 예수님의 이 모습을 보면서도 의문은 아직 남아 있다: 예수님이 어떻게 나의 삶을 이끌고 계시나? 예수님을 통해 내 삶이 달라졌나?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나의 삶에서 무엇을 변화시키셨나? 예수님을 몰랐다면 지금과 다르게 살았을까? 무엇이 달랐을까? 예수님을 통해 무엇을 배웠나?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게 되었나? 나는 삶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예수님은 내 마음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셨나? 예수님은 하느님과 나의 관계,사람들과 나의 관계,나의 일상,참된 삶을 찾으며 고심하는 나의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나? 예수님은 나의 신앙에 어떤 역할을 하나? 어디서 나는 실제로 예수님을 만나고 있나? 나는 언제, 어떻게 예수님을 생각하나? 그분은 어떻게 나의 생각과 감정에 영향을 끼치나?(234)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의 날
루카 5,1-11
고기잡이 기적 -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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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 서철 바오로 신부,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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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
-주님과 만남과 따름의 여정-
어제의 새삼스런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얼마전 두주간의 여름 휴가를 끝내고 귀원한 도미니코 형제를 봤을 때의 반가움과 더불어 깨달음도 생각났습니다. 약4개월 동안 뉴튼수도원을 경유해 쿠바 선교 체험을 떠났던 안토니오 형제가 마침내 어제 귀원한후 끝기도때 모습을 발견했고, 반가움에 형제들의 끝기도 소리도 힘찼던 듯 싶었습니다. 끝기도후 반가움에 포옹하던 형제들의 아름다운 장면도 감동스러웠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도 먼저 도착한 형제들의 반가운 환대도 이렇지 않겠나 하는 묵상도 했습니다. 긴 휴가인 듯 하지만 지나고 나면 금방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귀원합니다. 우리의 지상에서의 휴가시 귀원 날짜는 확실하지만 인생 휴가 끝난 후 귀원 날짜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느 날에는 죽음과 더불어 인생 휴가도 끝난다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얼마전 이런 깨달음을 표현한 “새삼 무슨 휴가?”란 짧은 시도 생각났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휴가나온
인생인데
남은 휴가
얼마
안 남았는데
날마다
휴가인데
새삼 무슨 휴가?”
예외없이 누구나 인생 휴가 끝나면 죽음과 더불어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입니다. 천상병 시인은 귀천이란 시에서 휴가 대신 소풍으로 바꿔 귀천의 마지막 연에서 다음처럼 노래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과연 이 세상 인생 휴가 끝내고 귀천하는 날, 이렇게 가서 아버지께 인생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을자 몇이나 될런지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화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는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말씀 하십니다. 강물처럼,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문제는 영원한 생명의 체험입니다.
참으로 인생 휴가 중 영원한 생명을 체험했을 때,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났을 때, 비로소 인생 아름답고 행복했다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긴 듯 하지만 짧은 인생,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나지도 체험하지도 못하고 귀가의 죽음을 맞이할 때 참 허무하고 아쉽기 그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이런 목마름을 고백하는 어떤 사람의 다음 물음은 옛 사막 교부들을 찾았던 구도자들은 물론 우리의 공통적 물음이기도 합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이 물음을 읽고 저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미사중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 모시는데,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바로 눈앞에 두고, 무지에 눈이 가려 보지 못하고 영원한 생명에 대해 물으니 어처구니 없다는 생각입니다.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선한 일을 많이 해서 영원한 생명의 체험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나 따를 때 비로소 영원한 생명의 체험이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어떤 구도자는 영원한 생명은 주님을 만났을 때의 은총의 선물인데 업적의 산물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구도자의 속내를 꿰뚫어 직관하신 주님은 ‘웬만한 계명들은 다 지켜왔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냐?’는 항의성, 도전적 질문에 참으로 강도 높은 처방을 제시합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바로 이 구절은 사막의 안토니오를 회심시킨 복음입니다. 과연 이 말씀을 받아들일자 몇이나 될런지요? 그러나 복음의 구도자는 참으로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에 슬퍼하며 떠났으니 그 원흉은 많은 재물이었습니다. 많은 재물이 결정적 장애가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보게 하는 참된 회개로 이끄는 주님의 권고 말씀입니다.
참으로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났다면 계명의 자발적 준수는 물론 저절로 자연스럽게 재물의 포기도 뒤따랐을 것이나 이 부자는 주님을 눈앞에 보고도 참으로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오늘 복음의 부자는 이런 주님과의 만남이 평생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혹시 후에 재산을 정리하고 주님을 따랐을지도 모릅니다.
계명을 잘 지켜서 영원한 생명의 선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나 따를 때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의 선물입니다. 바로 복음의 제자들은 주님을 만났을 때 저절로 모두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복음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 기념하는 성 비오 10세 교황을 비롯한 모든 성인들이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만났고 평생 주님을 따랐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은총의 선물임을 오늘 본기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 복된 비오 교황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톨릭 신앙을 지키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도록 천상 지혜와 사도의 용기를 주셨으니, 저희에게도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그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르고, 영원한 생명의 상급을 받게 하소서.”
영원한 생명의 상급이라며 영원한 생명은 은총의 선물임을 분명히 합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모두가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런 자각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찬미와 감사기도입니다. 한두번 영원한 생명의 체험이 아니라, 날마다 주님을 만나 따름으로 영원한 생명을 체험함으로 영원한 삶의 참행복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영원한 생명, 주님과 만남과 따름의 여정"이라 강론 제목을 택했습니다. 날마다 참된 회개를 통해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나니 우리 삶은 회개의 여정이라 할 수 있고 회개와 더불어 날로 영원한 생명의 체험도 깊어갈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부터 시작되는 판관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가 어디 있는지 잘 드러납니다. 악순환의 패턴의 반복입니다. 바로 오늘 화답송 시편 106장이 이런 악순환의 인간 현실을 보여줍니다. 판관들을 통해 구원해 내면 잠시일뿐 또 우상숭배에 빠지고 또 울부짖으면 주님의 구원이 뒤따르고, 다음 또 배신하고 계속 반복되는 구제불능의 사람같습니다. 원판불변의 법칙이란 말도, 사람을 고쳐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우리 현실을 봐도 악순환의 반복이요 과연 사람에게 희망은 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래서 저는 자주 광야인생중 ‘성인이냐 괴물이냐 폐인이냐?’ 셋중 하나라고 말하곤 합니다. 답은 하나 주님과의 만남뿐입니다. 판관기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으로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주님을 만나 참된 회개가 뒤따를 때 비로소 악순환의 늪에서 탈출이요, 영원한 생명의 선물에 성인의 삶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자발적 회개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이런 영혼들에게 하사되는 영원한 생명의 선물입니다. 결코 값싼 영원한 생명의 선물은 없습니다. 진인사대천명, 최선을 다해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날마다 선물로 받는 이 거룩한 미사전례시간입니다.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조두레박신부님의 영적일기 <성 비오10세 교황 기념일
https://youtu.be/Z3f2pmHCn10
[매일5분 아침묵상]
- 헤아리는 마음 / 김연희마리아 수녀
https://youtu.be/GWOgrIYJxg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