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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화평케 하는 자가 받는 복 (하편)
(마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팔복, 그 일곱 번째.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복을 받는다는 말씀, 하편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받는 복, 상편을 쓴 이후로 벌써 4주가 지났는데,
그 사이 이라크 전쟁이 미국과 영국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북한의 핵문제가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끝이 없지요.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는,
전쟁 통에 죽고 다친 무수한 사람들의 안타까운 사연들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국민들이 전쟁 덕분에 자유를 얻었고 어쨌든 이라크에 평화가 왔다는 시각도 있고,
그런가 하면 이제 미국의 전쟁욕을 아무도 못 말리게 되었고,
앞으로 시리아, 이란, 북한 등등 무시무시한 살육이 계속될 거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이라크에는 과연 평화가 온 걸까요?
전쟁을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 말들이 많았지만,
전쟁 전이나, 전쟁이 끝난 지금이나, 이라크에는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없습니다.
전쟁이 없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을 하느냐 안 하느냐와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느냐 못받느냐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전쟁과 큰 관계가 있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그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전쟁 중에 죽은 이라크인들이 안타깝지만 그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죽습니다.
전쟁 중에 다친 이라크인들이 안타깝지만 그들뿐만 아니라 다치는 사람들은 어디나 있습니다.
안 죽고 안 다치는 세상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세상은 어디에도 없지요.
전쟁 중의 이라크가 지옥이라면 이 세상은 다 지옥입니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죽고 다치는 일이 일어나니까요.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죽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받는 복, 상편에서
우리는 세상이 주는 평안과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 어떻게 다른가를 성경 요절 안에서 살펴보았었지요.
세상이 주는 평안은 우리의 본능을 충족시키는 것이고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우리의 본능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가능할 것 같지만 불가능한 일이고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불가능할 것 같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설혹 순간적으로 얻었다 해도 금방 사라지는 것이고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영원한 것입니다.
(요 4:12-14)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예언하셨던 그 평안입니다.
(사 55:2-3)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이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바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복락, 즉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함으로 얻는 평안입니다.
살건 죽건 상관없는 일이요, 풍부와 궁핍에도 관계가 없는 일이지요.
살고자 하는 본능도, 풍요롭고자 하는 본능도 다 사라진 신비한 평안입니다.
임마누엘이 이루어진 모습이지요.
이것이 이론이 아니라 실제라는 것을 절대로 잊으면 안 됩니다.
평안을 잃을 때면 나에게 본능이 남아 있기 때문인 것을 깨닫고 열심히 회개하고,
평안이 임하면 나에게서 본능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진정으로 감사하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내가 주님 주시는 평안을 차지하는 과정이지요.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과정입니다.
자, 이제 화평케 하는 자가 받는 복을 받기 위한 성경요절로의 두 번째 여행을 떠납니다.
상편에서의 첫 번째 목적지는 ‘화평이란 무엇인가’ 이었는데,
이제 우리가 가야 할 두 번째 목적지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처음에 생각했던 곳, 바로 ‘이웃을 화평케 하는 방법’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차지한 이 신비한 화평을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이웃도 차지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사실은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저들에게도 일어나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증인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제일 먼저 일어난 일이 무엇입니까?
본능이 제거된 일이지요.
그러면 이제 우리가 어떻게 저들의 본능을 제거하지요?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 우리 이웃이 본능을 잃어버리게 될까요?
물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지요.
(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세상 사람들은 본능에 의해 움직이지만
성령으로 난 사람은 움직이는 동기가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동기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게 가능한 일일까요?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완벽하게 불가능한 일이지요.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옛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서 열심히 사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외식하는 자, 즉 위선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하나님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고, 이웃을 속이고
결국은 자기의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는 것이지요.
자, 그러면 저들을 자기 본능을 위해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자로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하셔야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입니다.
사실 그렇지요.
이제 하나씩 풀어나가 봅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본능이 제거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이 신비한 일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저는 환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는 삶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환난.
십자가 앞에서 무릎이 꺾어지는 환난이었지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히 12:10-11)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아마 여러분 중에는 다른 경로를 거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기적이지요.
(막 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 첫 과정에는 두 가지 종류의 입구가 있습니다.
하나는 징계로서의 환난, 다른 하나는 기적입니다.
이것 때문에 성령을 훼방하는 우리의 능력이 부서지는 것이지요.
즉 성령을 훼방하는 우리의 본능이 제거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면 성령께서 일을 시작하십니다.
무슨 일일까요?
말씀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새언약”입니다.
(렘 31:33-3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제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지요?
이웃에게 환난을 일으키는 일이거나 기적을 일으키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 환난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 아닙니다.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쓰임 받는 것이 사명이 아니지요.
오히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 오직 가롯 유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능케 한 인물이었지만
차라리 나지 않는 것이 나을 뻔한 인생이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기적을 일으키는 일입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 아시지요?
(마 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 말씀을 들고 인도주의를 실천하고자 열심히 뛰어다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소금은 세상 사람들 음식에 간 맞추는 소금이 아닙니다.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 부패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소금은 세상 사람들의 본능을 충족시켜주는 소금이 아닌 것이지요.
이 소금은 세상 사람들의 아름답고 활기찬 삶을 확 절여 버리는 소금입니다.
(벧전 1:24-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베드로 사도가 이사야 40장 6-8절의 회복의 선언을 인용하는 것도
복음이란 세상 사람들의 멋진 삶을 포기시키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기적으로......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사망의 냄새를 맡게 되고,
따라서 우리를 핍박하는 것이지요.
(고후 2:15-16)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마찬가지로 빛도,
세상 사람들이 열심히, 신나게 살아가는데 조명을 비추어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본능을 채우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니 가서 그 길을 밝혀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죄를 비추는 서치라이트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그 죄 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저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보게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서 하셨던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눅 5:1-11)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이 요절에 나오는 기적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고기를 풍성히 잡게 해 주시려고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베드로는 감사의 찬양을 했겠죠.
그러나 베드로는 고기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 떠나 달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통해 베드로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보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이지요.
베드로는 감사는커녕 숨이 막힙니다.
우리도 기적을 통해 우리의 이웃이 자기들의 죄를 보게 해 주는 것입니다.
(마 10:1)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요즈음 주위를 보면,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치료해서 예수 믿는 자들이 이 땅에서 잘 살게 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양 착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치료해도
그 사람들은 몇 년 후, 혹은 몇 십 년 후에 반드시 죽습니다.
더 심한 병이 걸리거나, 끔찍한 사고를 당하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살해를 당하거나 해서 말입니다.
주님께서 살리신 나사로도 결국은 죽은 것처럼 말이지요.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은 우리의 본능을 채워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고기를 많이 잡아 배불리 먹게 해 주시는 것도 아니고,
이 땅에서 영원히 살게 해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로 회개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본능을 위해 살던 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되는,
즉 말씀이 그들에게서 이루어지는 일을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우리로 영생과 영원한 복락을 얻게 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이제 우리가 그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케 만들어 주는 자입니다.
우리에게 그래서 예수님처럼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주시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착한 행실”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일입니다.
이웃의 본능을 채워주는 인도주의적인 선행은 자기에게 영광이 돌아올 뿐입니다.
그러면 구제는 뭐냐구요?
구원받기 전에 굶어 죽거나 얼어 죽으면 안 되니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기적과 마찬가지로 구제도 우리 이웃의 거듭남을 위한 수단인 것이지요.
그들을 진정 화평케 하기 위한 수단 말입니다.
구제를 행함으로 이웃의 본능을 채워주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목적인 듯 생각하는
휴머니스트들이 소경인 것처럼,
기적을 일으킴으로 이웃의 삶이 행복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인 듯 생각하는
소위 은사자들도 마찬가지로 소경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란 자신의 본능을 위해서 살던 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로 회복되는 일입니다.
처음 창조되었던 모습이지요.
영원한 생명을 차지했고,
부족한 것이 없으니 본능이 필요 없습니다.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삶처럼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과 화목케 된 삶이지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 삶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삶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다 이루었다”는 선포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화평케 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또 동시에 기적을 행하는 것입니다.
말씀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고 기적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검으로 쓰셔야 하는데 성령을 훼방하는 능력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으니
말씀과 함께 기적,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람들의 능력, 즉 자기의 본능을 채우기 위해 살아가는 능력을 부수는 것이지요.
(렘 1:9-10)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를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그것이 바로 화평케 하는 자의 삶입니다.
오직 그것을 위해, 오직 그 일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 삶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복”을 받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웃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이웃 사랑과는 전혀 다른,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이웃사랑인 것입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칼럼을 읽으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 복된 삶이 임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말씀이 깨달아지고,
그리고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가 임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화평케 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고,
하나님과 내 이웃이 하나가 되고,
그리고 내 이웃과 내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화평' 말입니다.
이 모든 일을 위해 먼저 자기의 본능이 제거되는 놀라운 기적을
여러분이 체험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