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많은 것의 나아갈 방향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인류 자신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인류가 공통된 기원을 지니고 있고 서로에게 속해 있으며 미래를 함께한다는 인식이 부족합니다. 이러한 기본적 인식이 있어야 새로운 신념, 자세, 생활 양식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긴 쇄신의 여정이 필요한 커다란 문화적, 정신적, 교육적 도전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Ⅰ. 새로운 생활 양식을 위하여
203. 시장이 상품 판매를 위하여 강박적 소비주의를 촉진하는 경향이 있기에, 사람들은 과잉 구매와 불필요한 지출의 소용돌이에 빠지기 쉽습니다. 집착적 소비주의는 기술-경제 패러다임이 개인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과르디니가 이미 지적한 대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합리화된 계획과 기계로 만든 규격화된 상품이 강요하는 대로 생활용품을 구매하고 삶의 양식을 받아들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그것이 현명하고 옳은 것이라고 느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모든 사람이 이른바 소비의 자유를 누리는 한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게 만듭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자유를 누리는 이는 경제적 금전적 힘을 휘드르는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탈근대 세계의 인류는 아직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정립할 수 있을 만한 새로운 자의식을 갖추지 못하여, 그러한 정체성의 결여를 불안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보잘것없고 헛된 목적을 위한 수단들을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204. 현대 세계의 상황이 "야기하는 불안과 위기의식은 집단 이기심의 …… 온상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의식 안에 머물 때 탐욕이 커지기 마련입니다. 마음이 공허할수록, 사람들은 구매하고 소유하고 소비할 대상을 더욱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그 누구라도 현실의 한계를 받아들이기란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참다운 공동선조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태도가 한 사회 안에 만연할수록, 사회 규범들은 개인 욕구와 상충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존중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엄청난 기상 이변이나 커다란 자연재해의 위협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사회 위기에서 비롯되는 참사에 대해서도 생각해야만 합니다. 소비 지향적 생활 양식에 대한 집착은, 특히 소수의 사람만이 이를 감당할 수 있을 때, 폭력과 상호 파괴만을 가져올 뿐입니다.
205. 그러나 아직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은 최악의 것을 자행할 수 있지만, 또한 자신을 억압하는 모든 정신적 사회적 제약을 극복하여 자신에게서 벗어나 다시 선을 선택하며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솔직하게 살펴보고, 강력하게 불만을 제기하고, 참자유를 향한 새로운 길에 나설 수 있습니다. 그 어떠한 체제도, 진선미에 대한 우리의 열린 마음,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총에 응답하도록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심어 주신 그 능력을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 세상 모든 이에게 자신의 존엄을 잊지 말도록 호소합니다. 아무도 이 존엄을 빼앗을 권리가 없습니다.
206. 생활 양식을 바꾸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힘을 발휘하고 있는 이들에게 건전한 압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소비자 운동이 특정 상품들을 불매하여, 기업들이 환경에 끼칠 영향과 생산 모형을 재고하도록 압력을 행사함으로써 기업의 행태를 바꾸는 효과를 발휘할 때에 이루어집니다. 실제로 사회적 압력이 기업의 이윤에 손실을 입히면 기업들은 생산 방식을 바꾸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소비자의 사회적 책임을 일깨워 줍니다. "구매는 단순히 경제적인 행위가 아니라 언제나 도덕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환경 훼손의 문제는 우리의 생활 양식을 반성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207. 「지구 헌장」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자기 파괴의 단계를 벗어나 새 출발을 하도록 권유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이를 달성하는 데에 필요한 보편 의식을 발전시키지 못해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은 과감한 도전을 새롭게 제안합니다. "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공동 운명이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의 추구를 요청합니다. …… 우리 시대가 생명에 대한 새로운 경외를 일깨우고 지속 가능성을 이룩하려고 확고한 결심을 하며,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투쟁하고 삶의 흥겨운 축제를 위하여 노력한 때로 기억되도록 합시다."
208. 우리는 언제나 자신에게서 벗어나 타자를 향할 수 있는 능력을 다시 키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능력이 없으면, 우리는 다른 피조물들의 본질적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다른 이들을 위한 배려에 무관심하며, 우리 주변의 고통이나 환경 악화를 막으려는 절제를 하지 못합니다. 모든 형태의 자기중심성과 자아도취를 거부하는 자기 초월의 근본 자세는 다른 사람들과 환경에 대한 모든 관심의 바탕이 됩니다. 이러한 자세는 또한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대한 모든 행동과 모든 개인적 결정의 영향을 고려해야 하는 도덕적 반응을 일으킵니다. 개인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대안적 생활 양식을 효과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고 사회에 중요한 변화를 불러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Ⅱ. 인류와 환경 사이의 계약에 대하여 교육하기
209. 오늘날 문화와 생태 위기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은 새로운 습관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현재의 발전 그리고 오로지 물질과 쾌락에 탐닉하는 것이 인간 마음에 의미나 기쁨을 주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는 있지만, 시장이 그들에게 제공하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여깁니다. 소비 습관에 커다란 변화가 필요한 국가들에서, 젊은이들은 새로운 생태 감각과 관용의 정신을 지니며, 그들 가운데 일부는 환경 보호를 위하여 훌륭히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습관들이 자라나기 힘든 지나치게 많은 소비와 풍요로운 상황 안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육적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210. 환경 교육의 목표가 점차 확대되었습니다. 환경 교육이 초기에는 학문적 정보, 환경 위기에 대한 인식 고취와 예방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제는 도구적 이성에 근거한 근대성의 '신화', 곧 개인주의, 무한한 진보, 경쟁, 소비주의, 규제 없는 시장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다양한 차원의 생태적 균형 회복을 추구합니다. 곧 내적인 차원에서는 우리 자신과, 연대의 차원에서는 다른 이들과, 자연의 차원에서는 모든 살아 이쓴 것과, 영적으로는 하느님과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환경 교육은 신비이신 분을 향한 도약을 이루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신비이신 분께서는 생태 윤리에 가장 깊은 의미를 주십니다. 한편, 생태 윤리 교육 과정을 재정립할 역량이 있는 교육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연대와 책임을, 그리고 함께 아파하는 마음에 바탕을 둔 배려를 길러 나가도록 효과적으로 도와줄 수 있습니다.
211. 그러나 '생태 시민 의식'의 형성을 목표로 하는 이러한 교육은 종종 정보 제공에만 머물러 습관의 형성에 이르지 못합니다. 법룰과 규범이 존재하고 심지어 효과적인 감독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그릇된 행위를 규제하기에 불충분합니다. 법규법이 의미 있는 지속적 효과를 거두려면,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적절한 동기 부여로 이를 받아들여 개인적인 변화를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확고한 덕을 기르는 것에서 시작할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생태적 사명에 헌신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더 많이 소비하고 지출할 수 있어도 난방을 하는 대신에 습관적으로 웃을 더 껴입는 사람은 환경 보호를 위한 신념과 태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작은 일상적 행동으로 피조물 보호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참으로 고결한 일입니다. 교육이 생활 양식의 참다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환경에 대한 책임 교육은 환경 보호에 직접적이고 중요한 영향을 주는 다양한 행동을 고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플라스틱이나 종이의 사용을 삼가고, 물 사용을 줄이고,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고, 적당히 먹을 만큼만 요리하고, 생명체를 사랑으로 돌보며,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승용차 함께 타기를 실천하고, 나무를 심고, 불필요한 전등를 끄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 최상의 면모를 보여 주는 관대하고 품위 있는 창의력에 속하는 것입니다. 뚯깊은 동기에서, 물건을 쉽게 내버리지 않고 재활용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존엄을 표현하는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212. 이러한 노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사회에 선을 퍼뜨려 우리가 가늠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결실을 가져옵니다. 이러한 행동은, 때로 눈에 잘 뜨이지 않지만 늘 확산되는 경향이 있는 선을 이 세상에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행동의 실천으로 우리는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우리 삶의 깊이를 더하고 이 세상이 살 만한 곳이라는 사실을 체험하게 해 줍니다.
213. 교육은 학교, 가정, 커뮤니케이션 매체, 교리 교육과 같은 다양한 영역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어릴 때에 좋은 학교 교육이 이루어지면 씨가 뿌려져 평생 그 효과를 거두게 됩니다. 그럼에도 저는 여기에서 가정의 커다란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가정은 "하느님의 선물인 생명을 적합하게 받아들일 수 있고, 당면한 많은 침해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고, 진정한 인간 성장이 요구하듯이 발달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죽음의 문화라고 불리는 것에 반대하여 생명 문화의 중심을 이룹니다." 가정에서 우리는 생명을 사랑하고 돌보는 습관을 처음 기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사물의 올바른 사용, 질서, 청결, 지역 생태계 존중, 모든 피조물 보호를 배웁니다. 가정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다양한 축면의 인격 성숙이 이루어지는 온전한 교육의 자리입니다. 가정에서 우리는 겸손하게 부탁하고, 우리가 받은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나타내어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는 법을 배웁니다. 또한 공격성이나 욕심을 통제하며, 해를 끼쳤을 때 용서는 청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러한 진심 어린 작은 친절한 행동이 더불어 사는 문화와 우리 주변을 존중하는 문화의 건설에 도움이 됩니다.
214. 정치와 여러 사회단체들도 양심의 형성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이러한 교육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저는 또한 우리의 신학교와 수도회의 교육 기관에서 사람들이 책임 있는 소박한 삶을 살고, 감사하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가난한 이들과 환경의 취약함을 배려하는 교육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중대한 위험에 놓여 있기에, 환경 훼손을 제재할 권력 기관도 필요하지만 우리 스스로 절제하고 서로 가르치는 것도 필요합니다.
215. 이러한 맥락에서, "훌륭한 미적 교육과 건강한 환경 유지사이의 관계는 결코 간과될 수 없습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우리가 공리적인 실용주의에서 벗어나도록 해 줍니다. 아름다운 것을 경탄하며 음미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우리에게 모든 것이 멋대로 사용하고 착취할 대상으로 변질되어 버린다는 사실은 당연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근본적인 변화를 바란다면, 사고방식이 우리 행동에 실제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 생면, 사회,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촉진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의 교육적 노력은 부족하고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이 없다면 대중 매체와 강력한 시장 활동의 부추김으로 소비주의 패러다임이 계속해서 거세질 것입니다.
Ⅲ. 생태적 회개
216. 그리스도교 영성의 풍요로운 유산은 이천 년에 걸친 개인과 공동체 체험의 결실로 인류를 쇄신하려는 노력에 값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 신앙이 확신에서 솟아나는 생태 영성에 관한 몇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복음의 가르침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고 살아가는 방식에 직접적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는 관념에 대하여 말하는 것보다, 더욱 열정적으로 세상을 돌보도록 영성이 불어넣어 주는 동기 부여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에게 힘을 주는 신비 없이, 곧 "우리의 개인적 공동체적 활동에 자극과 동기와 용기와 의미를 주는 어떤 내적인 힘" 없이, 오로지 교리만 가지고 이 위대한 일에 투신하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서 교회에 주신 보화를 언제나 받아들여 증진시켜 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영성은 육체나 자연, 또한 세상의 실재에서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과 일치를 이루며 그 안에서 그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217. "내적인 광야가 엄청나게 넓어져서 세계의 외적인 광야가 점점 더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생태 위기는 깊은 내적 회개를 요청합니다. 그러나 신심이 깊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일부는 현실주의와 실용주의를 내세워 환경에 대한 관심을 우습게 여기고 있음도 인정해야 합니다. 또 일부는 수동적이어서 자신의 습관을 바꾸려는 결심을 하지 않고 일관성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생태적 회개입니다. 이는 예수님과의 만남의 결실이 그들을 둘러싼 세상과의 관계에서 온전히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 작품을 지키는 이들로서 우리의 소명을 실천하는 것이 성덕 생활의 핵심이 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 체험에서 선택적이거나 부차적인 측면이 아닙니다.
218. 우리는 아사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범을 기억하며 피조물과 맺는 건전한 관계가 인간의 온전한 회개의 한 차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또한 자신의 잘못이거나 죄, 악습, 태만의 인정, 그리고 참된 회개와 내적 변화를 요청합니다. 호주 주교들은 피조물들과의 화해라는 의미에서 회개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화해를 이루려면 우리의 삶을 성찰하며 우리의 행위와 방관으로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의 피조물에 해를 끼쳐 왔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회개, 곧 마음을 바꾸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219. 그러나 개인이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는 현대 세계가 직면한 매우 복잡한 상황의 해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개인은 도구적 이성의 논리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를 상실하여 결국 윤리 없이그리고 사회와 환경에대한 인식 없이 소비주의에 굴복하게 됩니다. 사회 문제들은 단순히 개인적 선행의 총합이 아니라 공동체의 협력망을 통하여 해결해야 합니다. 이 임무는 "인간에게 엄청난 과제이기에 개인적 노력이나 개인주의적으로 자란 인간들이 연합하여 노력을 기울여도 완수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결집된 힘과 일치된 노력이 필요합니다." 지속적인 변화를 이루는데에 필요한 생태적 회계는 공동체의 회개이기도 합니다.
220. 이러한 회개에는 여러 가지 태도가 필요한데, 이러한 태도들이 서로 어우러져 관대하고 부드러움이 넘치는 돌봄의 정신을 촉진하는 것입니다. 먼저 감사와 무상성의 태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세상을 사랑으로 선물하셨음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이, 아무도 보지 않고 인정하지 않더라도 거져 주는 희생의 태도와 관대한 행위를 일으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또한 이런한 회개는 우리가 다른 피조물들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우주의 다른 존재들과 더불어 커다란 우주적 친교를 이루고 있다는 사랑에 넘치는 인식을 포함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세상을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바라보면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모든 존재와 결합시켜 주신 유대를 깨닫습니다. 생태적 회개는 하느님께서 우리 저마다에게 주신 고유한 능력을 증진시켜 창의력과 열정을 북돋아 주어,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하느님께 자신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봉헌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탁월함을 개인적 영광이나 무책임한 지배의 근거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에서 비롯된 막중한 책임감을 부여하는 특별한 능력으로 이해합니다.
221. 이 회칙의 서두에서 제시한 우리 신앙에 대한 여러 확신들이 그러한 회개의 의미를 풍부하게 해 줍니다. 여기에는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모습을 어느 모로 반영하여 우리를 가르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또는 그리스도께서 이 물질 세계에 몸소 오시고 이제 부활하시어 모든 존재의 내면에 현존하시며 사랑으로 감싸 주시고 당신 빛으로 밝혀 주신다는 확신이 포함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며 그 안에 인간이 무시하지 말아야 하는 질서와 역동성을 새겨 주셨다는 인식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참새들에 대하여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라고 하신 말씀을 읽고서도, 새들을 소홀히 대하거나 해칠 수 있습니까?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회개의 이 차원을 분명히 드러내어, 우리가 받은 은총의 힘과 빛이 다른 피조물과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맺는 관계에서도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사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토록 훌륭하게 실천한 모든 피조물과 이루는 숭고한 형제애의 증진에 이바지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