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과 댄스로 '문화 대통령'에
노태우 정부 말기인 1992년 4월 11일, 록밴드 시나위의 베이스 주자였고 고교를 중퇴했으며 정현철이라는 본명을 지닌 20세의 청년이 TV에 신인 댄스 그룹의 리더로서 출연했다. 그때만 해도, 그가 새로운 세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떠오를 줄은 아무도 몰랐다. 심사위원들은 심드렁했다. "노랫말도 새로웠으면 좋았을 텐데…."(양인자) "평가는 시청자들의 몫."(전영록) 그러나 그로부터 대한민국의 문화사(文化史)에서 아무도 '서태지'라는 이름 석 자를 빼놓을 수 없게 됐다.
정신없이 빠른 랩과 리드미컬한 비트, 메탈 사운드의 기타, 격렬하면서도 화려한 춤 동작, 그리고 "사랑을 한다는 말을 못했어/ 어쨌거나 지금은 너무 늦어 버렸어"('난 알아요')처럼 군더더기 없이 직설적인 가사에, 기성세대는 황당해 했고 10대와 20대는 열광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첫 음반은 두 달 만에 모든 차트의 정상에 올랐고 180만 장이 팔렸다. 노래만을 들려주던 전통적 가수들은 TV에서 퇴출돼 갔다. 서태지의 '저항'은 이념의 산물이라기보다 '소외된 자들의 리더를 자임하며 만들어 낸 분노'(평론가 임진모)에 가까웠다.
1993년부터 지식인들도 서태지를 문화적 지표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미메시스'라는 평론가 집단은 서태지를 "우리 시대의 혁명가이자 예술가"로까지 평가했다. 세상은 완전히 바뀌어가고 있었다. 1991년의 '분신 정국'과 소련 해체 이후 기존 운동권 이념은 쇠퇴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이 부상하는 가운데, 거대담론에서 벗어난 탈(脫)이념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자기 표현이 강한 세대가 대학에 입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TV를 보며 자란 이들은 불확실성과 지루함을 본능적으로 거부했으며 이미지와 속도감에 탐닉했다. '신세대'라는 말조차 금세 진부해져 'X세대'라는 말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문화적 소비를 위한 구매력 또한 이전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막강했다. 이들은 서태지를 스타로 만든 동시에 '서태지 세대'라는 칭호를 들으며 소비사회의 총아(寵兒)로 부상했고, 새로 등장한 PC통신의 이메일과 채팅을 통해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서울대 교수 송호근은 말한다. "신세대가 성공한 것은 기존 질서의 부정과 파괴까지였을 뿐이다. 그들은 그 자리에 어떤 대안적 질서를 세울 것인가에 대해서는 끝내 합의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