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례미야 시대)유다 왕들
1.요시아(640~609)
요시아는 여덟살에 임금이 되어 서른 한 해를 다스렸다. 요시아가 다스릴 때 유다는 처음에 번영을 누리는 안정 시대를 맞는다. 아시리아가 쇠퇴하면서 유다는 일시적으로 독립을 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요시아는 영토를 회복하고 사회와 종교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유다왕국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아시리아와 이집트의 동맹으로 발발된 이집트와의 므기또 전투에서 요시아가 전사하였다. 요시아 임금이 므기또에서 전사한 다음 4년 동안은(609-605) 이집트와 앗시라아가 동맹을 맺어 바빌론에게 빼앗긴 하란 탈취의 명목으로 전쟁을 벌였다. 이집트는 하란을 탈환하지는 못했지만, 전쟁의 소득으로 팔레스티나와 시리아를 장악하였다.
2.여호아하즈(609~609)
여호아하즈 요시아가 전투에서 죽자 그의 아들 여호아하즈가 스물 세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석달동안 다스렸다. 이집트 파라오 느코가 하맛 지방 리블라에서 그를 체포한 후, 폐위시키고 이집트로 압송하였다. 여호아하즈는 이집트에서 죽었다. 이집트 느코는 요시아의 다른 아들 엘야킴을 여호야킴으로 개명시키고 왕위에 앉혔다. 또한 유다로 하여금 전쟁 배상금을 바치게 하였으며 조공을 바치게 하였다. (2열왕 23,30-34; 2역대 36,1-4)
3.여호야킴(609-598)
유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집트 왕 느코는 여호아하즈의 후계자로 그의 형 여호야킴을 임금으로 세웠다.(609년) 여호야킴은 스물다섯 살에 임금이 되어 열한 해 동안 다스렸다. 그는 자신의 안락과 호사만을 쫓아, 다시 우상숭배와 이교도 풍습이 판을 쳐 요시아의 개혁은 물거품이 되었다. 동시에 국제 정세를 올바로 판단하지 못하는 우둔한 군주로 그는 601년 바빌론에 반기를 드는 무모한 모험을 단행하였다(예레 22,13-19; 2열왕 24,1).
605년 바빌로니아 네브카드네자르는 카르크미스 전투에서 이집트를 대파하고 시리아 하맛까지, 이집트 마른내에서 유프라테스강까지 이집트 임금에게 속한 땅을 점령하고 이집트를 본국으로 후퇴시켰다. 네브카드네자르가 604년 바빌로니아 왕권을 이어받은 뒤 아스클론(블렛셋)을 치자, 이집트에 조공을 바치던 여호야킴을 비롯한 팔레스티나 군주들은 모두 바빌론 아래에 들어갔다.
601년 네브카드네자르와 이집트 느코가 이집트 국경에서 다시 전쟁을 하였다. 그러나 양쪽이 모두 승산이 없자 본국에서 멀리 떠나온 네브카드네자르는 재충전을 위해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이 때를 포착하여 여호야킴이 반기를 들었다.(601년; 2열왕 24,1) 네부카드네자르는 즉각적으로 보복을 취하지는 않았지만, 속국인 아람과 모압을 부추겨 유다를 괴롭히게 하였다. 여호야킴이 죽자 그의 아들 여호야킨이 임금이 되었다.(2열왕 24,6;바빌론 압송(2역대36,6)
4.여호야킨(598~598)
여호야킨은 열여덟살에 임금이 되어 석달간 다스렸다. 예레미야서는 애칭으로 고니야 또는 여고니야라고도 부른다. 기원전 598년 네부카드네자르는 여호야킴 왕 시대에 일어난 반란을 응징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직접 공격하였다. 네부카드네자르는 3개월만에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 여호야킨 왕을 폐하고, 대신 그의 삼촌 치드키야를 임금으로 세웠다.여호야킨은 7,000-10,000명에 이르는 왕과 왕족,종교*정치 지도자들, 장인들, 전쟁을 할 수 있는 건장한 이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이것이 1차 유배사건이다.
이 시기에 해당되는 예레미야서 본문은 여호아하즈가 이집트로 귀양 갈 것이라는 신탁(예레 22,10-12), 여호야킴 왕궁 건축에 대한 예레미야의 부정적인 신탁(22,14-19), 예레미야의 저 유명한 성전 설교(7,1-15;26,1-24), 깨진 질그릇의 상징(19,1-15),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난 예레미야의 항변(20,1-6), 예레미야의 신탁을 기록하는 바룩(36,1-31; 참조 25,1-12), 바룩에 대한 소개(45,1-5), 아람인들을 피해 도피중인 레캅인들에 대한 예레미야의 가르침(35,1-19), 여호야킨에 대한 기록(22,24-30), 무화과 두 광주리의 환시(24,1-10)등이 있다.
5.치드키야(598-587)
바빌론은 여호야킨왕을 석 달 열흘만에 폐위하고 그의 삼촌인 치드키야를 왕위에 앉혔다. 치드키야는 자기 백성이 바빌론에 포로로 붙잡혀 간 여호야킨을 합법적인 유다 임금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하며 살았다. 치드키야 치세 동안 유다 내부에서는 저마다 다른 정치 성향을 띤 집단(친이집트. 친바빌론)들이 서로 세력 확장을 위한 당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치드키야가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슬기로운 정치를 펴나가는데 큰 걸림돌이었다. 595/594년 바빌론 제국 내에 내란이 일어났고, 동쪽에서 엘람인들이 쳐들어 오는 바람에 바빌론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속국 민족들에 대한 경계를 다소 늦추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에돔.모압.압몬.띠로.시돈의 대표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모반을 꾸몄으나 별다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헤어졌다. 589년 치드키야는 독립을 쟁취하기로 결심하고, 이집트의 지원에 힘입어 띠로와 시돈을 반란에 가담시켰다. 588년 정월 네부카드네자르는 유다를 공격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차례로 다른 도시와 성읍들을 함락시켰다. 이집트 지원군이 예루살렘을 향해 오고 있다는 희망찬 소식이 전해지면서 바빌로니아가 한때 포위를 풀기도 하였다(예레 37,5). 그러나 그 해가 저물어 갈 무렵 유다 성읍 중 남은 것은 예루살렘과 라키스와 아제카 뿐이었다(예레 34,7). 587년 치드키야는 항복하려 했지만 신하들이 두려워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 해 7월 바빌로니아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치드키야는 성을 탈출하여 유다 광야로 피신하려고 요르단 강으로 도망쳤으나, 예리고 근처에서 붙잡혀 시리아 리블라에 진을 친 네부카드네자르에게 압송되었다. 거기서 치드키야는 자신의 두 아들이 살해를 목격해야 했고, 그런 다음 자신의 두 눈이 뽑힌 채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갔다(2열왕 25,5-7). 바빌론은 8월에 친위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을 약탈하고 도시를 불태워 폐허로 만들었다. 그리고 종교 정치 관리들을 다수를 살해하고 나머지 왕족과 사제와 관리와 장인들을 포로로 잡아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이것이 두 번째 바빌로니아 유배 사건이다(기원전 598년). 이 시기에 관련된 예레미야서 대목은 속국 대표들의 방문(반 네브카드네자르 동맹 모반)에 즈음한 멍에를 걸머진 예레미야의 상징적 행위(예레 27,1-22) 예레미야와 하나니야의 대결(28,1-17) 바빌로니아 포로들에게 보내는 예레미야의 편지( 29,1-32), 치드키야 임금의 운명(34,1-7) 노예들의 해방과 속박(34,8-22). 이집트 군대의 진격과 바빌로니아 포위 일시 해제(37,1-10), 예레미야의 수감(37,11-21), 웅덩이에서 구제된 예레미야(38,1028), 밭을 사는 예레미야의 상징적 행위(32,1015) 등이다.
5. 예루살렘 함락 이후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든 네부카드네자르는 유다를 바빌로니아 제국의 한 지방으로 편입하고 미스바(예루살렘 북쪽 위치)를 수도로 정한 뒤. 유다 귀족 가문 출신이며 치드키야의 의전관이었던 그달리야를 유다 총독으로 임명하였다(2열왕 25,22-23);예레 40,5). 그달리야는 유다의 남은 자들에게 바빌론의 예속을 권고(2열왕 25,24)하자, 요르단 강을 넘어 도피했던 유다인들 다수가 그달리야를 믿고 귀환하였다.(예레 40,11-12). 그러나 왕족의 후손인 이스마엘와 그 추종자들이 그달리야를 거슬러 암살하였으며, 바빌론 수비대와 경비병들과 미스바 주민들까지 살해하고 암몬으로 도망쳤다(2열왕 25,25; 예레 40,7-41,15). 그달리야의 추종자들과 미스바의 남은 주민들은 바빌론 제국 네부카드네자르의 보복이 두려워 이집트로 도망쳤다. 이 때 그들은 예레미야를 바룩과 더불어 인질로 삼아 데리고 갔다(예레 42,1-11, 43,7,43-44장; 참조 2열왕 25,26). 예레미야의 최후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예레미야 전기를 기록한 사람으로 알려진 바룩이 그보다 먼저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예레 52,30절을 보면 기원전 582년 네부카드네자르 치세 23년에 유다인들이 또 다시 포로가 되어 유배를 간 것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그달야 살해와 미스파 파괴에 대한 응징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