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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이 주 식
고향에 수령 250여 년 된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마을 중앙에서 뭇 생명을 포옹하며 자비를 베풀고 마을 어귀에는 이보다 작은 아우 나무가 손을 흔들며 오가는 이를 반갑게 맞이하며 배웅한다. 어릴 적 나무의 나이를 어르신께 여쭈면 각기 말이 달라 정확한 나이는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배꼽시계를 열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느티나무는 자생한 것이 아니라 마을의 화평을 기원하며 한그루는 마을 중앙에 다른 한그루는 나중에 마을 입구에 심었다 한다. 어쨌든 느티나무는 동시대를 함께 살아온 마을 사람의 영혼이 깃든 상징이자 표상이 되어 왔다. 마을 어귀에 느티나무는 액운을 막아주기 위해 심었으나 누군가 목을 매 가지를 잘라 내 볼품이 없었다. 어릴 적 외진 이곳을 지날 때는 머리가 섬뜩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도망치듯 벗어난 기억이 선하다. 지금은 고갯마루를 낮추고 도로확장으로 나무와 거리가 벌어져 으슥한 분위기는 사라졌다.
마을의 또 다른 상징나무는 느티나무 뒤편 산자락에 수령 300여 년 된 우람한 적송으로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신령스럽다 하여 “영(靈)소나무”라 부른다. 영소나무는 전란과 잇따른 산불, 낙뢰를 맞으면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아 마을주민들은 이 나무를 수호신처럼 여기며 숭배해 왔다. 지금은 토속신앙이 대부분 사라졌지만 1970년 새마을운동 이전만 해도 마을의 안녕과 가정의 복을 빌기 위해 나무에 금줄을 치고 떡을 해 고사를 드리는 풍습이 내려왔다. 영소나무와 관련한 이야기는 농번기를 맞아 갓난아기를 집에 잠재우고 어른들은 들에 나가 일을 하는데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내려 황급히 집으로 돌아오니 아기의 행방이 묘연했다 한다. 온 동네 사람들이 아기를 찾아 나셨으나 사흘이 지나도록 흔적조차 없어 용한 사람에게 물어보고 별짓을 다해도 헛수고로 결국 “호랑이가 물어갔다”며 체념할 즈음 어슴푸레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니 영소나무 밑에서 아기가 발견되었다 한다. 집과는 상당히 떨어진 곳이고 사흘을 굶었는데도 아기는 말짱하여 마을 사람들은 “영소나무가 아기를 지켜주었다.” 굳게 믿어 신령스럽게 모시게 되었다 한다. 요즈음 영소나무는 일부 가지가 떨어져 나갔어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마을의 버팀목으로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소나무는 혹시나 벌을 받을까 봐 감히 접근할 수 없었으나 마을 중앙에 자리 잡은 느티나무는 오가며 인사를 나누고 마음껏 올라타고 뛰놀아 정이 듬뿍 들었다. 부채모양으로 펼쳐진 나무그늘은 시원한 바람을 불어 농부의 구슬땀을 식히고 나그네의 여독을 풀어주었다. 새참을 먹고 낮잠을 즐기며 들녘좌담회 장소로 더할 나위 없는 쉼터가 되었다. 뭐니뭐니해도 느티나무의 첫 번째 친구는 동네 아이들로 하도 나무를 타고 오르내려 나무껍질은 반질반질 윤이 났다. 나무둥치에 돌을 받치고 친구들이 탑을 쌓아 어깨를 밟고 올라가거나 길게 늘어진 낮은 가지를 껑충 뛰어 손에 잡고 원숭이처럼 거꾸로 올라가기도 했다. 몇몇 아이들은 뽐내며 나무를 타고 놀았는데 이들은 뭇 아이들에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나도 그중에 하나였다. 느티나무는 보통 천 년을 산다는데 우리 동네의 나무는 20대 청춘으로 탄력이 좋고 싱싱하여 좀체 부러지지 않아 아이들이 나뭇가지를 타고 오르내리기에는 제격이었다. 방과 후에는 동네 아이들이 모여 “술래잡기”, “말타기”, “딱지치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제기차기” 등 온갖 전래놀이를 나무 밑에서 한껏 즐기다 저녁때가 되어야 집으로 돌아갔다. 밤에는 저녁을 자신 어르신들이 더위를 피해 들마루에 둘러앉아 구수한 이야기를 하다 잠자리로 돌아가면 동네 청년들이 독차지하여 이슥하도록 시시덕거리며 유행가를 부르곤 했다.
인적이 끊어지고 적막한 밤이 오면 잠결에 홀연히 애간장을 녹이는 구슬픈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주인공은 시각장애인 노총각으로 이 분은 이슥한 밤에 홀로 느티나무 아래서 퉁소를 불었다. 신역이 고된 농부들은 밤잠을 설치는 경우가 있었으나 누구도 선뜻 나서서 말리지는 않았다. 이 분이 이사를 가면서 한밤중 퉁소 소리도 사라졌으나 막상 떠나니 모두 섭섭함이 역력했다. 요즘은 장애인 차별이 금지되었으나 당시 동네 청년들은 “날 잡아봐라.” 하며 이분을 놀리면 소리가 나는 쪽으로 마구 돌을 던져 옆에서 놀던 우리도 맞을까 봐 조심조심 자리를 피하곤 했다. 이분의 조상 산소가 우리 집 뒤에 있어 벌초 때가 되면 영락없이 오는데 시내로 이사를 한 후 짝을 찾았고 점술과 안마를 해 그럭저럭 산단다. 이제 이분의 연세가 70을 넘어 몸도 불편한데도 굳이 자녀들을 대동하고 성묘를 다니는 모습은 요즈음에는 보기 드문 일로 본보기가 되고 있다.
5월에 잎과 꽃이 같이 피는 느티나무는 색상이 유사하고 크기도 작아 꽃을 맨눈으로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어른들은 나무의 새순을 보고 풍년과 흉년의 점을 치는데 봄에 일제히 싹이 트면 풍년이 들고 듬성듬성 피면 흉년이 든단다. 느티나무가 사람과 친숙하게 된 이유는 넓은 그늘이 한몫을 하지만 벌레가 범접하지 않고 꽃가루, 열매 등이 떨어져도 인체에 해가 없어 마냥 뒹굴어도 괜찮다. 나무의 키가 크고 그늘이 넓게 퍼져 인근 농경지에 손해를 끼침에도 땅 주인은 나무의 큰 덕에 전혀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긴다.
느티나무가 아름다움의 절정을 이룰 때는 한 송이 꽃으로 물드는 가을이라 하겠으나 그보다 더 아름다운 때는 5월 5일 단오절일 거다. 단오절을 앞두고 느티나무에 멜 어른 팔뚝 굵기의 새끼줄을 꼬는 일은 동네 청년들이 도맡았다. 가마니를 만드는 새끼줄은 보통 두 가닥을 양손으로 비벼서 꼬지만, 그넷줄은 최소한 다섯 사람이 공동작업을 한다. 한 사람은 꼰 줄을 잡고 세 사람은 세 가닥의 새끼줄을 비벼 꼬면 또 한 사람은 볏짚을 계속 집어주어 단단하고 질긴 그넷줄을 만든다. 단옷날은 온 동네 사람들이 느티나무에서 천렵하며 한껏 그네타기를 즐기며 흥겹게 놀았다. 색동치마 저고리에 댕기머리 단장을 한 처자들이 하늘하늘 그네를 타는 진풍경은 선녀가 따로 없어 사내들의 눈을 홀렸다. 그네를 뛰는 자태와 분위기를 보면 서로의 관계가 들어나 금세 뜬소문이 퍼졌다. 동네 처녀 총각이 정분이나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성공하지만, 서로의 가정사를 잘 아는 부모들의 절대적인 반대로 불장난으로 끝나고 대부분 외지 사람과 중매결혼을 했다. 이렇게 단옷날이 가고 나면 그네는 동네 아이들이 독차지하여 겁 없이 줄을 타고 놀아 어른들은 위험하다며 그네 줄을 싹둑 잘라 내 꼬박 일 년을 기다려야 했다.
느티나무는 악동들의 재롱과 청춘남녀의 밀회, 어른들의 투기 등 모든 것을 받아들여 풀어주고 감싸주어 화합의 장이 되나 때론 이탈의 장이 되었다. 나보다 3년 선배인 형은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일찍이 객지생활을 하다 농촌으로 돌아와 느티나무를 무대로 골목대장 행세를 하였다. 아리따운 처자가 지나가면 희롱을 하고 멋진 청년이 지나가면 시비를 걸어 골탕을 먹이곤 했다. 한번은 낯선 청년이 다가오자 시비를 걸다 상대가 고분고분하게 응하지 않자 멱살을 잡고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 상대의 손이 형의 등을 “팍” 찍었다. 이때 형이 비명을 지르며 “이놈이 감히 잭나이프를 쓴다”며 웃통을 벗어 던지고 청년을 마구 짓밟았다. 다행히 칼이 깊이 들어가지 않아 위기는 모면했다. 이때만 해도 기차역, 버스정류장, 뒷골목에는 으레 골목대장들이 행패를 부려 어설피 대들다가는 몰매를 맞기도 했다.
봄부터 여름까지 느티나무는 하늘을 다 덮을 듯 성장하지만, 가을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림자마저 지운다. 들녘을 넘실거리던 황금 물결은 자취를 감추어 허전하지만, 추수철이 오면 햇곡식으로 집집이 떡을 해 고사를 드려 마음만은 풍성했다. 고사는 마을의 영소나무를 선호하나 느티나무에서 지내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집에 금줄을 치고 떡방아를 찌면 영락없는 고사 집으로 소문은 금세 퍼졌다. 영소나무는 두려움에 접근을 못 해도 느티나무에서 고사를 드릴 때는 가까이에서 지켜보다 고사가 끝나면 잽싸게 달려가 떼어놓은 고사떡을 먹곤 했다. 배짱 있는 아이는 아예 느티나무 위에 올라가 숨어 있다가 떡을 독차지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때 먹는 고사떡은 꿀맛으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우리 집도 일 년에 서너 차례 부엌과 뒤뜰, 산에 나무와 바위 밑에 제단을 차려 정성을 다해 고사를 드렸고 당시 시골에는 이와 같은 풍습이 계승되었다.
나무를 영험한 수호신처럼 받들거나 친근하게 여기는 것은 아낌없이 모든 것을 주며 지구 상에서 최고의 생명력으로 우주의 섭리가 깃들어 있다는 믿음에서가 아닐까? 구약성서 출애굽기 편에는 시네산 떨기나무에 하나님이 강림하여 모세에게 계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나님이 나무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 인간과 소통하고 있다. 왜 인간의 모습이 아니고 하필 나무의 형상으로 인간과 대면하였을까? 부처는 6년간의 고행을 하다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어 마음에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자유로워졌다고 한다. 성인이 나무를 통해 신의 계시를 받고 우주의 진리를 깨우친 것이나, 일반인이 나무에 기원하여 집안의 복을 들이는 것은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나약한 인간이 신의 섭리라 여기는 순수한 자연물을 숭배하는 것은 자연으로부터 온 인간으로서 자연적인 현상이 아닐까 반문해 본다.
우리나라에 최고령 나무는 울릉도 도동항 입구 암벽봉우리에 자생하는 향나무라 한다. 울릉도 발전연구소에서 나이테를 조사한 결과 5천 년~6천 년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해 주목을 받고 있는데 기암절벽에 해풍을 맞아 1년에 2~3mm 정도 자라며 극한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한다. 몸체의 대부분은 괴목의 형태로 일부 줄기만 살아 세월의 무상함을 현신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화이트마운틴의 브리슬콘 소나무로 수령이 4,767년으로 밝혀졌다. 이 나무는 해발 3,000~3,400m 식물생장의 한계점인 고산지역에서 평균 최고·최저기온은 2℃·-32℃, 연간강우량은 100mm 정도로 이것도 비가 아닌 눈을 맞으며 1년 중 3개월의 생장기간에서 연평균 0.25mm의 낮은 생장으로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몸에 간직하고 있다. 이 나무도 울릉도 향나무와 같은 형태로 장수 비결은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며 환경에 적응한 결과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역사가 반만년이라고 하는데 이 나무는 지구의 역사와 문명의 변천 과정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와 소통할 수 있다면 동시대의 상황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세계에서 최대로 큰 나무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고원지대인 세쿼이아 국립공원에 있는 “제너럴 셔먼” 이란 나무이다. 이 나무는 세쿼이아 종으로 수령은 2,000년이 넘었으며 키 약 84m에 지름 11m, 둘레 31m, 무게는 뿌리를 포함 약 2,500톤 정도라니 정말로 어마어마하다. 이 거대한 나무가 태풍과 산불에도 살아남은 것은 나무의 뿌리가 서로가 하나같이 엉켜 지탱하며 61cm의 두꺼운 껍질은 어지간한 산불에는 화상을 입지 않는다고 한다.
인디언들은 이 나무를 “할아버지 나무”라 부르며 이 오래되고 거대한 나무들은 “자연의 기억을 표상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영혼처럼 신성하게 여긴다고 한다. 135년 전에 시애틀의 추장은 그의 부족이 새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강제로 이주당하면서 미국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내가 하는 말은 별들과 같아서 떨어지지 않는다. 이 땅의 모든 것은 내 부족에게 신성하다. 반짝이는 솔잎 하나도, 어두운 숲의 안개도, 숲 속의 모든 공터도, 윙윙거리는 풀벌레들 하나하나도 내 부족의 생각과 경험 속에서 신성하다. 나무를 타고 오르는 수액은 붉은 민족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고 그로부터 117년이 지난 후에 나온 백과사전에는 다목(Redwood, 세쿼이아)이라는 표제어 아래에 “세쿼이아 나무 : 촘촘한 백목질과 분홍빛 심을 갖고 있고, 가볍고 유연하고 견고해서 건축재나 가구용으로 높이 평가된다.”고 쓴 이 설명은 우리 문명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으로 지구 상에서 가장 오래된 생명체 중의 하나이고 자연의 기념물인 다목이, 백과사전에 가구 공업을 위해 품질이 보장되는 제재로 전락하고 있다. 부끄럽지만, 백과사전에 쓰인 이 내용이 오늘날 우리의 지성과 걸맞은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영혼을 제쳐놓고 우리의 이성만으로 자만하면서 당당하게 걸어온 길이 이런 것이라는 하나의 징표가 된다. 캘리포니아 세쿼이아에 깃들어 있을 영혼을 생각하며 한편의 졸작을 올린다.
할아버지 나무
생명의 신성한 상징 2000년 역사의 세쿼이아
인디언의 꿈과 노래가 깃들고 붉은 수액이 끓어올라
태양처럼 빛나는 오라
오랜 기억 속에 잠들고
둥지를 잃어 떠도는 무수한 영혼을 위해
제자리를 지켜 서서 사랑과 평화의 에너지를
온 누리에 발하고 있다
생존을 위한 약탈과 살생 없이
빛과 물만으로도 베풀며 사는 법을
현신의 거울로 비추고 있다
침묵과 향기로 세상을 움직이며
지구의 안테나로 우주와 소통하는
빛의 영혼인 할아버지 나무
그분과 소통할 수 있다면
그분을 느낄 수 있다면
지구를 감싸 안은 숲처럼
청초하고 고결한 세상은
한 발짝 앞으로 오지 않을까
“나무와 영적인 대화를 한다”는 “도로시 맥클린”은 큰 나무들은 강력한 파장들을 보유하고 우주의 에너지와 교류한다고 믿고 있다. 마음을 열고 사랑으로 식물을 대하면 누구든지 그들과 얘기할 수 있고, 큰 나무들의 정신은 해박하고 고결해서 에너지를 이끌며 우주의 힘을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다고 한다. 지구와 모든 생명체의 생존을 위해서 지금 우리의 자아로부터 더 자라나 지구를 구해야 하며 우리가 큰 나무들을 보존하지 않으면 지구의 에너지는 파괴된다고 나무는 말한다고 한다. 미국의 오리건 주에서는 나무의 의사전달에 대해 실험을 하였는데 측정 실험을 통해서 나무들 사이에 신호전달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한다. 도끼로 나무에 상처를 내고 실험한 결과 다친 나무는 신호를 보내고 다른 나무들은 그 신호를 받는다는 것이다. 벌목할 나무들에 띠를 둘렀는데 이 나무들은 많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는데 그것은 자연의 자기보존 기능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오라 생명학”에서는 생명의 빛은 정보를 전달하는 전달자로 그 빛은 한 생명체의 몸 안에서만 작용하는 게 아니라 밖으로 나가서 다른 생명체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으로 모든 생명체는 하나도 빠짐없이 서로 정보를 주고받고 있다는 결론 내린다. 식물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식물의 내면세계를 느낄 수 있는 능력에 있다고 한다. 식물과 의사소통을 하는데 이성적인 잣대로는 분별할 수 없으며, 자연의 보편적인 의사소통은 오직 영혼으로 이해할 때만 이루어진다고 한다, 사람은 지능과 이성 때문에 자연과 자신의 영혼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했고, 자연과 이야기를 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한다. 사람은 끊임없이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자연 속에서 팩시밀리 앞의 원숭이처럼 행동한다고 묘사한다.
고향 아랫동네에는 우리 마을의 나무보다 밑동이 2배 정도나 큰 느티나무가 있었다. 우리 마을의 느티나무가 청년이면 이 동네의 느티나무는 할아버지로 격으로 가운데가 썩어 구멍이나 사람의 손을 타 점점 커졌다. 70년대만 해도 정월 대보름에는 풍년 농사를 기원하며 어른들은 달집을 태우고 아이들은 망우리를 돌리며 쥐불놀이를 하다 장난기가 발동한 아이들은 마을간 망우리를 뺏는 격한 놀이를 하다 싸움으로 번지곤 했다. 아랫마을에서는 철모르는 아이들이 느티나무 구멍에 불을 질러 나무의 속이 타들어 가는 수난을 몇 차례 겪으면서 결국 500년 이상 된 고목이 고사하여 현재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요즘 마을의 상징나무는 보호수로 지정하여 사람과 같이 외과수술도 하고 나무주사와 병충해 방제 등 철저한 관리로 훼손을 방지하고 있으나 30년 전만 해도 보호수에 대한 개념이 희박하여 손을 쓰지 못했다. 아랫마을 사람들은 느티나무가 드리운 500년 하늘과 그와 공생해온 무수한 생명을 잃어버리고 영혼을 깃들지 못해 배회하지는 않나 상념에 젖어본다.
느티나무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세상을 위해 자신의 귀한 몸을 보시하며 간다. 아랫마을 느티나무 고사목은 마을 사람들은 쓸모없다고 방치하였는데 누군가 장비를 동원해 거저 가져갔다. 최근 느티나무 고사목은 경매에 붙여져 공예품 재료로 고가에 팔리고 있다. 뒤틀린 팔다리와 굽은 허리, 어깨로 등받이가 되고, 살라온 궤적을 드러내 탁자가 되고, 화초를 드리운 장식이 되어 기우뚱 모퉁이에 서 있을망정 여생을 아낌없이 주며 영원히 지지 않은 꽃을 피우며 가지 않는가.
고향을 떠나 온 지 올해로 30년이 흘렀다. 돌담 오솔길을 나서면 호박넝쿨이 발을 걸고 우물가 수다 빠는 아낙네들이 방망이로 물탕치며 놀리던 샘물은 현대화의 물결로 허물어지고 묻혔다. 고추를 내놓고 미역 감던 시냇물, 털썩 주저앉아 마냥 뒹굴던 모래밭, 매미 잡다 미끄러져 떨어진 미루나무, 폴짝폴짝 건너뛰다 자빠진 징검다리, 반갑다 노래하던 까막까치, 어르고 달래던 어르신 모두 다 어디로 가고 낯설기만 고향. 다행히도 고향의 느티나무는 지금도 옛 추억을 간직한 채 건재하여 마을을 지키며 영혼의 쉼터로 오가는 사람을 보듬고 있어 그 옛날의 정취가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그러나 그 옛날처럼 느티나무를 타고 노는 아이들은 구경할 수 없어 어린 시절의 분위기와는 사뭇 대조적으로 허리가 땅에 닿는 촌로들이 쓴 소주를 마시며 한풀이를 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싱싱하게 늘어져 아이들이 매달려 재롱을 부리던 나뭇가지는 메말라 부러지고 반질반질 윤이 나던 나무 밑동은 거친 각질이 벌떡벌떡 일어난다. 나무에 금줄을 치고 제물을 차려 복을 빌던 풍습은 까마득하고 단오절에 그네를 타며 마을 사람들이 흥겹게 어우러지던 문화도 사라졌다. 청년들이 힘을 기르기 위해 만들어 놓았던 철봉, 평행봉은 흔적도 없고 느티나무 곁을 지나는 나그네는 뭐가 그리 바쁜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차를 몰아 쌩하니 지나쳐 간다. 마을 회의는 마을회관이나 경로당에서 천렵은 가든에서 편안하게 앉아 자연의 소리를 차단하고 TV와 노래방 마이크를 잡고 시끌벅적하게 한다. 느티나무 옆에는 언제부턴가 마을회관과 경로당이 들어서 일부 자리를 내어주어 그 옛날 초원의 느티나무가 아니다.
그래도 그 몸에는 무수히 오고 간 길손의 체취가 묻어 있고 그 머리에는 서로 나눈 이야기가 담겨 언제고 기억이 되살아나 소통할 것이다. 한 세월이 흘러 고목이 된다 해도 그 품 안에 잠든 영혼이 깨어나기를 한결같이 발원하며 큰 나무로 우주를 품고 뭇 생명을 깃들이며 영원을 향해 동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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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나라 향나무가 그리 오래 사는줄 몰랐습니다 선생님 귀한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