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의미를 묻다
- 김설원 장편소설/『내게는 홍시 뿐이야』/2020/창비
이대영
❚ 혈연공동체에서, 가족은 집단의 최소 단위이며 사회구성의 기초 단위였다. 사회학습에 필요한 대부분의 교육과 기능이 가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의식주에 필요한 노동과 생산이 가족을 통해 이루어졌기에 그만큼 가족의 중요성은 컸다. 그러나 공동체 위주의 노동과 생산이 근대화로 기능이 분업화, 다양화됨에 따라 가족의 유형과 기능도 축소되기에 이르렀다. 이즈음, 우리는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자주 하게 된다. 이것은 그동안 위안의 요람으로 존재했던 ‘가족’의 성격과 가치가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가족은 주체의 꿈을 키우고, 훼손된 자존감을 복원하는 위안처였다. 그러기에 현대사회가 가족을 소환하는 것은 기존에 가족이 지녔던 가치에 대한 향수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가 불안하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애국심을 강조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가족의 문제는 곧 사회 국가적 문제를 진단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장편소설 『내게는 홍시뿐이야』는 현대사회에 있어, 가족의 의미와 그 가치를 묻는다. 가족이 와해 되었을 때, 가족과 그 구성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혈연의 의미와 의무는 어디까지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 이 소설의 발화는 집과 가족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집은 개인에게 있어 우주의 중심이며 사회의 출발지다. 집은 가족 구성원이 함께 사는 혈연공동체이며, 사회구성의 최소 단위이기도 하다. 작가는 해체된 가족을 중심으로 서사를 진행한다. 주인공 ‘아라’는 가족이 해체되어 집이 없다. 임대아파트 계약기간이 만료되고 재계약할 돈이 없자, 엄마와 아라는 각각 독립하여 생활하기로 한다. 아라는 엄마에게 부채가 있는 ‘또와아저씨’ 집에 가서 생활하며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또와아저씨는 제지회사에 다니다가 퇴직하고 ‘또와’라는 접두사가 붙은 음식점을 여러 번 운영하지만 실패한다. 그리고 끝내는 파산하여 집을 잃고 가족이 해체된다. 이에 아란은 학교를 그만두고 찜질방에서 생활하다 버스 종점 근처에 있는 월세 십만 원짜리 집을 얻는다. 그곳은 그 흔한 까치나 비둘기조차도 날아들지 않는 동네이다. 대문도 없이 나무로 가려진 집 안채에는 두 자매와 그 어머니가 살고 있다. 이들은 이른 새벽이나 밤에 빨간 캐리어를 끌고 외출하며 자주 집을 비우곤 한다. 아란은 학력과 나이를 숨기고 치킨집에서 일을 시작한다. 치킨집 사장인 ‘치킨홍’은 지적장애가 있는 배다른 남동생 ‘양보’와, 외삼촌의 아들인 ‘첸’을 돌보며 치킨집을 운영하고 있다. 그녀는 사업을 하며 전국을 떠돌던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엄마가 죽은 지 일 년이 지나 새엄마를 데려왔다. 그녀가 중학교 2학년 때 그녀보다 세 살 많은 딸과 함께였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를 전전하다, 고향에 돌아와 결국 양보를 떠맡게 된 것이다. 게다가 외삼촌이 뇌출혈로 식물인간이 되어 입원하자 첸까지 돌보고 있다.
아라는 퇴근길에 들른 슈퍼에서 노파로부터 자신이 사는 방에서 주인집 남편이 2년 전에 죽은 사실을 알게 된다. 공장이 문을 닫자 다른 사업장을 전전하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두 딸은 대학을 그만두게 되었고, 엄마가 두 딸을 보호할 목적으로 자주 외출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이 소설에서 보여주는 가족해체의 원인은 아비의 부재이다. 그동안 아비의 부재는 한국의 전후 소설에서 주요 소재로 활용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아비의 부재, 그로 인한 가난과 가족의 해체는 지난했던 민중의 삶을 현시하고 있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 아비의 부재 요인은 실직으로 인한 생활의 궁핍과 연결된다. 이로 인해 가족이 해체되고 그 구성원은 홀로서기를 위해 삶의 복판으로 내몰리게 된다.
이 소설에서 아라는 경제적인 이유로 어머니와 헤어져 홀로서기를 하고 있다. 또와 아저씨 가족 역시 연속되는 사업의 실패로 가족이 해체된다. 아라가 월세로 사는 집은 가장이 실직하고 뇌출혈로 사망하자 가족이 비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기존의 소설들은 가족이 해체되었을 때, 아비의 몫을 어미가 대신하거나, 장자를 내세워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아비의 부재를 가족 누군가가 대신하지 않는다. 아라의 어머니는 딸을 또와아저씨 집에 보낸 후 연락 두절이다. 또와아저씨네 역시 가족이 해체된 후 할아버지의 요양비를 딸이 책임지도록 한다. 아라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치킨집 여주인은 배다른 지적장애 동생과 외삼촌의 딸까지 부양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묻게 된다. 가족의 의미는 무엇인가? 가족 부양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이것은 단지 현대사회에 발생하고 있는 가족의 문제를 짚어보고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지. 기실 그에 대한 정답을 요구할 문제는 아니다.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가족 구성원이 지닌 유대의 끈이다. 그래서 작가는 아라를 통해 엄마가 좋아하는 홍시를 모으고, 끊임없이 엄마에게 문자를 보내고 대화를 시도하게 한다.
“엄마, 또와 아저씨 집이 망했대. 곧 빚쟁이들이 쳐들어온다고 각자 알아서 떠나래. 엄마, 나는 어디로 가? 왜 전화를 안 받아? 무서워 죽겠어. 빨리 연락 좀 해줘.(p.72.)
“식구들 몰래 집을 나왔어. 갈 곳이 없어서 공원 벤치에 앉아 있어. 지금 새벽 여섯 시 삼십 분이야. 되게 추워. 엄마, 나한테 왜 이래?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그동안 꾹꾹 참고 있다가 뒤통수치는 거야? 진짜 어이없다. 엄마는 미친 여자야.(p.73.)”
엄마에 대한 애증의 감정이 교차하지만, 아란은 서운한 문자를 보낸 후에는 곧 반성의 문자를 보낸다. 그리고 새로 얻은 방에서 같이 살자고까지 한다. 또와아저씨의 딸인 선양 또한 투덜대면서도 요양원에 있는 할아버지의 부양의무를 대신하려 한다. 치킨홍 역시 아비와 외삼촌의 부재를 온몸으로 느끼며 감내한다. 특히, 소설의 결말에서 치킨홍의 가족과 아라가 사진을 찍는 장면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끈끈한 연대의 정을 이어가려는 긍정의 힘을 보여준다.
또한, “어쩌면 오늘 해수욕장에 가서 휴학생이 아닌 자퇴생의 사연을 키킨홍에게 들려줄지도 모르겠다.”라는 아라의 마지막 발화는 긴 여운으로 남는다.
❚ 이 소설은 ‘집’과 ‘가족’, 아비와 어미의 부재, 그로 인한 가족의 해체로 파생되는 당혹감과 홀로서기의 과정을 보여준다. 작가는 아비와 어미의 부재가 비단 우리의 문제만이 아님을 베트남 동화 <엄마를 찾아서>를 통해 제시한다. 그리고 치킨홍의 발화를 통해 예나 지금이나, 또 국경을 초월해서 어째 엄마들은 하나같이 식량을 구하러 나가면 돌아오질 않으며, 아버지들은 죄다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서술한다. 어찌 보면 동화의 내용처럼, 엄마는 망하거나 부재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식량을 구하러 집 밖으로 나선 것이다. 그러나 그 엄마마저 식량을 구하지 못하고 어딘가를 헤맬 때, 가족은 각자도생을 모색해야 한다. 그럼에도 가족은 엄마를 찾고, 또 그를 기다린다. 왜냐하면 그가 ‘엄마’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가족은 끊임없이 해체되고 아비와 어미는 집을 떠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한 어려움은 남은 가족이 고스란히 감내하며 홀로서기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무너지지 않는 두 무릎과 소중한 꿈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어미와 아비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기다림 때문이다. 그것이 막연할지라도 말이다.
가족, 혹은 우리가 긍정의 힘을 지탱하는 요소는 서로 흩어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으려는 의지와 연대의 끈이다. 가족과 이웃은 무너져도 재회를 위해 그들은 또 일어서고 일어선다. 바닷가에서 작중인물들이 카메라 렌즈에 동시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연대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시대를 초월하여 긍정의 힘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