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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4:36~44(42) 그 날과 그 때는 모르나니- 2024. 4. 14
얼마 전에 목양실에서 설교를 준비하는 도중, ‘아무도 없는가요’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을 열고 나가 보니 교회당 문 앞에 말끔하게 옷을 입은 중년 남자 분이 저는 보면서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저 남자가 어떻게 교회당 안으로 들어 왔는가?’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교회당 안으로 들어오면서 아마도 교회당 출입구 문을 잠그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들어온 남자는 편의점에 들어가다가 교회예배 안내 간판을 받고 교회당으로 올라 온 것이었고, 신앙상담을 받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저와 그 남자가 홀에 앉아서 잠시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남자분은 저에게 이런 저런 성경에 궁금한 것을 질문하다가 뜬금없이‘예수가 과연 재림하는가?’라는 말을 저에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심판주로 다시 오신다는 것이 기록되어져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은 확실한 것이라 말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증명하려고 한다면 아직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현재로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는 믿음의 영역이지 확인하고 확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교회에 다니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자신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데, 아내 되는 분이 교회에 다니면서 자주 집을 비워서 부부다툼이 많이 발생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제가 물어 보지도 않았는데, 아내가 ‘자주 예수가 곧 재림하기 때문에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가정을 소홀히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님의 재림은 확실하지만, 예수님의 재림을 핑계를 대면서 현실 생활에 불성실하고 올바른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내가 어느 교회에 다니냐?’고 물어 보았는데 ‘잘 모른다’고 말합니다.
약 30분 정도 대화를 나누고 그 분은 나가셨습니다. 평일 교회당에 들어오는 분들 99%가 돈을 얻으러 오시는 분이지만, 그 분은 돈 얻으러 온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 남자 분이 나가고 난 뒤에 제가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아직도 한국교회 안에서 과도하게 예수님의 재림 문제로 인해 문제를 일으키는 교회나 목회자가 있을까?’하는 의구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살펴보았더니, 의외로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극단적 종말론에 빠진 일부의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점입니다. 정상적인 기독교회라고 보기 어렵지만, 분명히 교회라는 이름을 걸고 그들만의 모임을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기성교회에 다니고 있는 교인분 들에게만 접근해서 포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단들이 기독교인들만 찾아다니는 모습과 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이 부분에 대해 말씀을 살펴보고 설교의 주제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이런 저런 문제가 발생한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이미 중세시대부터 이 문제가 드러났습니다.1493년 독일에서 뉘른베르크 연대기(Nuremberg Chronicle)라는 책이 발간되었습니다. 저자는 역사가이며 인문주의자요 의사인 하트만 쉐델 (Hartmann Schedel)입니다.
쉐델은 도서관에서 고전과 중세 작품들을 인용하여 뉘른베르크 연대기를 저술하였으며 지구의 종말이 1년 안에 온다고 예언하였습니다. 당시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각지에 쇼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유럽 전체의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빠져 버립니다.
예수님이 곧 재림한다고 하는데, 더 이상 돈 벌고 가정 꾸리고 자녀를 출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사회가 일대 대 혼란에 빠져 버립니다. 이런 배경 또한 중세시대의 혼탁한 사회상을 잘 반영한 것이고,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는 하나의 모습이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에도 30여년 전인 이장림이라는 사람을 큰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1992년 10월 28일 자정에 휴거가 일어난다는 이단 사상이 일어나 대한민국 사회 전체에 크게 물의를 일으켰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모든 기독교 교회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이단시하며 배격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미혹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수많은 사회적 피해가 도출되었습니다. 서울 마포구에서는 30대 주부가 아들을 데리고 경상남도에서 선교하겠다고 가출했으며, 전라남도 강진군의 여고생은 부모가 다미선교회에 못 나가게 막자 음독자살을 하기도 했습니다. 경남 마산시 합포구에서는 30대 여성이 ‘10월 28일 휴거를 앞두고 세상 살기가 싫어졌다’며 유서를 작성한 후 목숨을 끊었습니다. 또한 사표를 내고 다미선교회로 가서 휴거를 기다린 회사원도 있었으며, 종말이 올 때 구원받을 생각으로 휴가에서 복귀하지 않아 감옥에 간 군인도 있었습니다.
다미선교회가 한국사회와 한국기독교교계에 미친 영향은 여러 개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나쁜 영향이 무엇이냐? 하면, 한국기독교 교회와 한국성도들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올바른 신앙을 가진 성도라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아야 된다는 암묵적인 룰을 만든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이 이후로 한국교회의 설교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것이 사라져 버렸고, 재림신앙을 가르치고 언급하는 것도 소홀해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 재림신앙은 예수님이 재림하는 그 순간까지 가르쳐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런저런 수많은 박해를 받으며 목숨을 잃을 때에도, 그들의 신앙을 지켜 준 것이 재림신앙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한국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일제 강점기때 신사참배로 말미암아 수많은 성도들이 목숨을 잃고 모진 박해를 받을 때에도, 이들을 든든하게 만들어 준 것이 ‘예수님이 다시 재림하신다는 재림신앙’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세상 물질 문명에 빠져 들어서 신앙의 모습이 점점 나태해지는 이 시점에서 재림신앙은 다시금 강조되어야 할 모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종말의 때에 관해 궁금해 하고 닥칠 재앙을 피하려고 그날과 그때를 알고 싶어 합니다. 부지불식간에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서 사람들을 벗어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언제 오시는 것인가?’라는 사실도 궁금해 하지만, 내가 언제 갑자기 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우리를 흔들게 합니다.
이때 성경은 말합니다. 36절입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고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이 말씀이 직접 적용되는 내용은 예수님이 재림하는 시기는 하늘의 천사도 모르고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만 아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또 달리 적용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의 생사에 달린 부분입니다. 똑같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났는데, 어떤 사람은 사망하고 어떤 사람은 살아납니다.
그래서 내가 언제 죽을 것인가? 내가 죽는 날과 그 때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종말은 죽음으로 오는 개인적 종말과 예수의 재림으로 오는 우주적 종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종말도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합니다. 종말의 때를 알지 못하기에 시간을 귀하게 여기고 매 순간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루하루를 성실하고 귀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성실하고 귀하게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그 마지막 종말 때에 내가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서기 위함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아버지, 제가 저에게 주어진 한 평생의 삶을 잘 마무리하고 이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인생의 종말을 생각하고, 주님이 오셔서 심판하실 전우주적 종말을 생각하고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내 인생의 종말이 올 때까지 최선을 다해 사명을 감당하다가 주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종말을 맞이하는 바른 신앙이 되려면 무엇을 살펴야 합니까?
1. 나는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42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상반절에 보면, 그냥 아무런 조건이나 던서가 없이 ‘깨어 있으라’ 말하지 않고,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는 말은 깨어 있어야 할 조건과 단서, 또는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자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40절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절“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두 사람이 똑같이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합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함께 하고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하늘로 데려감을 당하고 누구는 땅에 버려둠을 당하는 그 기준이 무엇인가요? 밭일을 하거나 맷돌질을 할 때에 한 사람이 나태하게 잠을 자는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일을 하였지만, 한 사람은 택함을 받고 한 사람은 버림을 당합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42절에서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 있으라는 말이 단순하게 잠을 자지 말라는 말로 해석되기 보다는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깨어 있으라(헬, 그레고레이테)’인데 ‘주의하다, 경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정신을 차리고 주의하여 집중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마음이 콩밭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몸은 여기에 머물러 있지만 마음과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몸은 교회당 안에 있지만, 마음은 세상에 나가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얼굴은 목사를 쳐다보고 설교를 듣고 있는 모양새이지만, 정신과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는 분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버려둠을 당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바른 종말적 신앙은 때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몸만 교회당 안에 머물고 있다고 해서 다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함께 주를 위해 열려져 있어야 하며, 몸과 마음이 함께 주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항상 깨어 있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주일날 교회당 안에 머물 때에도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평일날 내가 머무는 직장이나 가정 또는 내 삶의 공간에서도 하나님과 교회를 생각합니다. 이런 모습이 항상 깨어 있는 모습인 것을 절대 잊지 맙시다. 그리하여 뜻하지 않은 시간, 내가 뜻하지 않는 장소에서 재림하는 주님을 맞이한다고 해도 부끄럽지 않도록, 깨어 주님을 맞이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캐나다 사회에 ‘깨워주기회’라는 모임이 있습니다. 캐나다는 62세에 퇴직을 하는데 퇴직한 사람의 반 이상이 5년 이내에 거의 죽는다고 합니다. 직장에 다닐 때는 오전 7시에 일어나야 했는데 직장에 가지 않으니 마음 놓고 자다가 9시까지 자고, 10시까지 자기도 하고, 11시까지 자고, 해자 중천에 떠 올라도 잠에 취해서 잠을 자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잠은 잘수록 신기하게도 자꾸 더 늘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루에 세 끼 먹던 식사를 두 끼로 줄이고 잠을 더 잡니다. 또 두 끼에서 한 끼로 식사를 줄이고 잠을 더 잡니다. 하루에 8시간 자던 사람이 20시간까지 잔다고 합니다. 그렇게 깨지 못하고 계속 잠들어 버립니다.
현관 앞에 배달한 우유가 쌓여 있는 노인의 집에 들어 가보면 죽어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100미터만 나가면 아름다운 공원이 있는데도 잠만 자다가 죽어버립니다. 깨어나지 못하고 죽는 노인들을 위하여 ‘깨워주기회’를 조직하고 서로 깨우는 전화를 걸어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동사무소에서 지역에 사는 무의탁노인들에게 식사 도시락을 제공하는데, 아침에 배달된 도시락에 낮 시간에도 그대로 문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면 집안에서 변고가 발생한 것으로 알고, 따로 연락을 취한다고 합니다.
깨어 있지 못하고 잠만 자다가 죽는 사람이 어찌 캐나다 노인들만의 이야기겠습니까? 세상과 짝하여 살면서 영적으로 잠에 빠지는 사람이 많아지는 현실이기에 더욱 안타깝습니다. 우리 모두 깨어 있는 신앙인으로 주님의 재림을 기쁘게 맞이하는 신앙인이 되길 소망합니다.
2. 항상 준비하는 신앙인의 모습이 필요 합니다.
44절.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여기의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은 ‘한 번만 준비하고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예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내 신앙이 잘 준비되어 있고 흔들림이 없을 그 때만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신앙이 흔들리고 교회생활이 무뎌지는 그 순간에도 어김없이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고 대비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성도는 늘 믿음을 가지고 올바른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종에 대한 교훈을 주십니다. 칭찬 받는 종은 준비된 종이며 준비하지 못한 종은 악한 종이라고 경고합니다. 악한 종은 자신의 신분을 잊은 채 먹고 마시고 즐기며 주인의 오심을 전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즐거움과 향락은 준비하였지만, 주인이 오는 것을 준비하지 못해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종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고 육신의 편안함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세상 것만 바라보고 세상 것만 준비하다가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것을 준비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때에 주님이 재림하시게 되면 우리는 책망 받는 종이 될 수 있다는 무서운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19세기 미국사회를 위시하여 큰 부흥의 불길을 일으켰던 부흥사였던 무디 (D.L. Moody)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무디 목사님에게는 다른 목사님과 비교되는 놀라운 큰 능력이 설교에 있었습니다. 집회를 할 때마다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 납니다.
그래서 종종 다른 목회자들로부터 “어떻게 능력 있는 설교를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때마다 무디목사님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설교할 때마다 이 설교가 끝나기 전에 예수께서 이 자리에 오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설교가 마지막 설교라고 생각해서 최선을 다한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저도 신학교 다닐 때에 무디 목사님의 이 이야기를 듣고 설교에 최선을 다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고, 지금까지 제가 가진 달란트를 최대한 활용하여 설교를 작성하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되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런 무디 목사님의 생각과 행동을 오늘날 모든 성도들이 본 받고 새겨 들어야 할 모습과 생각입니다. 오늘 내가 살아가는 이 하루가 내 인생의 마지막 하루라는 생각을 한다면,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놀고 먹고 즐기고 잠을 자면서 허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하루라고 생각한다면, 사고방식이 올바른 사람들은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보다 더 보람 있는 모습으로 내 인생의 하루를 마무리할 것입니다.
성도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오늘 드리는 이 주일이 나의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주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설교를 듣는 것에 소홀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음 주일이면 다시 만나 보지 못하는 다른 성도님들이라고 판단한다면, 오늘 내가 만나는 모든 분들에게 더 사랑하고 더 살갑게 다가설 것입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내 신앙의 모습이 더 아름답고, 더 풍성하게 이어지는 성도가 되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