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차
운율, 음성의 효과를 노리자
1. 운율의 전통
운율은 시에서 성조와 억양, 강세, 리듬, 음장을 포괄하는 음성적 형식입니다. 거기다가 휴지와 의미, 분행, 분절, 구두점의 종류 및 유무와 심지어 한글과 한자의 시각적 효과까지도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¹³⁾ 시의 내용을 이해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느끼게 하기 위한 수사적이고 미학적인 장치입니다.
우리는 시를 행과 연을 쌓아서 구성하는 문예물로 쉽게 이해합니다. 그러나 실제 음절이 모여서 음보가 되고, 음보가 모여서 행이 되고, 행이 모여서 연이 되고, 연이 모여서 한 편의 시가 되는 것입니다. 시가 산문과 달리 행과 연을 가르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행과 연의 일정한 반복을 통하여 음악적 율동감을 고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음악적 반복의 효과, 즉 청각적 효과를 통한 정서적 환기를 조성하는 것이 시입니다.
다만 과거의 정형시는 겉으로 소리의 길이가 드러나나, 현대의 자유시는 내면적으로 율동을 창조하면서 음악성을 실현합니다. 산문시 역시 외형상으로는 행과 연이 없는 것같이 보이지만 내적 운율을 형성합니다.¹⁴⁾
워렌(A. Warren)은 “시를 구성하는 두 개의 주요한 원리는 운율과 은유”라고 하여 현대시에서도 운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정주의 아래 시를 읽으면 어떤 음악성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나무나무 향나무.
오갈피나무 향나무.
오시는 임 門前에
오갈피나무 향나무
저렇게도 쑥 같은 울타리에 영창에
애꾸눈이도 탐 안 낼 너울이나 쓰고 살라면,
속에 속에 창문 닫고, 미닫이 닫고 살라면,
안에다만 불 밝히고 단둘이서만 살라면,
밭사랑에서도 안사랑에서도 아무개 씨도 모르게
삼삼하신 사랑노래사 一萬年은 가겠네.
안사랑에서도 사랑에서도 아무개 씨도 모르게
삼삼하신 사랑노래사 일만 년은 가겠네.
나무나무 향나무.
오갈피나무 향나무
오시는 님 門前에
오갈피나무 향나무.
- 서정주, 「오갈피나무 향나무」 전문
위 시를 들여다보면 음악성을 느끼게 되는 제일 중요한 요소는 반복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의 음악성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전 정형시에서 발전한 것입니다. 정형시는 운과 율의 반복을 통해 율격을 형성하며, 시조와 같은 현대의 정형시에서도 율격은 여전히 중요시 됩니다.
서정주보다 시대적으로 앞선 김소월의 시를 한편 보겠습니다. 편의상 음보에 /표를 하겠습니다.
그리운/ 우리 님의/ 맑은 노래는
언제나/ 제 가슴에/ 젖어 있어요
긴 날을/ 문 밖에/ 서서 들어도
그리운/ 우리 님의/ 고운 노래는/
해 지고/ 저물도록/ 귀에 들려요
잠들고/ 잠들도록/ 귀에 들려요
-김소월, 「님의 노래」 부분
인용한 시는 현대시에 속하지만 외형적인 특징은 과거의 전통적 4음보를 답습한 것으로 3음보의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과거 4음보 시행에서 세 번째와 네 번째의 음보를 합하여 1음보화 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3음보의 시행은 우리의 대표적인 민요인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아리랑」)의 3음보와 일치하는 것으로 우리의 전통적인 가락이 3음보라는 사실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¹⁵⁾
이러한 민요를 수용한 현대시를 민요풍의 시라고 합니다. 시행의 일정한 규칙성은 한국 고대시가나 한시, 그리고 영시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시의 율동감을 드러내기 위한 방식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민요나 과거 시가의 운율을 답습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입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랐다
얄리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한 나도
자고 니러 우니노라
얄리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
- 고려가요, 「청산별곡」 전문
위 시는 한 행이 일정한 음의 마디 단위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살어리/살어리랏다” 의 3음보 형식입니다. 민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민요 「아리랑」 부분)나 “도라지/도라지/백도라지”(민요 「도라지」 부분) 역시 3음보가 되는 것입니다.
대동강 너븐디 몰라셔
배내여 노한다 사공아
- 고려속요, 「서경별곡」 부분
위 고려 속요 역시 3음보의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위 시는 3음보의 정형시이며, 3음절이 한 음보를 이루고 있습니다.
현대시에 영향을 주고 있는 우리의 전통 시가 중에 시조와 가사가 있습니다.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반드시 한 줄에 4음보의 보격을 갖추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직도 현대 정형시인 시조는 이러한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 길재, 「회고가」 전문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관동/ 팔백 리에/ 방면을/ 맡기시니
어와/ 성은이야/ 가디록/ 망극하다
연추문/ 들이달아/ 경회남문/ 바라보며
하직고/ 물러나니/ 옥절이 /앞에 섰다
- 정철, 「관동별곡」 부분
위에 인용한 시가는 시조이고, 다음 것은 가사입니다. 시조의 경우 3행의 완결된 형식인데 가사는 행이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들 시행은 산문과 달리 어떤 격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조는 3행으로 되어 있고 3/4/3/4의 자수율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사의 경우도 대략 같은 자수율의 반복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 행마다 4음보로 읽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¹⁶⁾
이러한 정형성은 한시나 영시에서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한시의 경우 절구(絶句)에 5언 절구와 7언 절구가 있고, 율시(律詩)에도 5언 율시와 7언 율시가 있는데 이는 한 행에 5자나 7자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규칙을 의미합니다.
또한 절구는 4행, 율시는 8행, 배율은 12행의 규칙을 따르도록 규정되어 있어 연의 구분 방법도 미리 정해놓고 이 규정에 따라 시를 창작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짝수 행의 끝은 동일한 운으로 맞춰야 합니다.
國破山河在(국파산재) 나라가 망하니 산과 강만 있고
城春草木深(성춘초목심) 성안은 봄이 되어 초목만 무성하다
感時花濺淚(감시화천루) 시절이 슬프니 꽃마저 눈물을 뿌리고
恨別鳥驚心(한별조경심) 이별의 한스러움은 새들마저 놀라게 한다
烽火連三月(봉화연삼월) 봉화불이 석 달이나 계속 오르니
家書抵萬金(가서저만금) 집에서 온 편지 너무나 소중하다
白頭搔更短(백두소경단) 흰머리를 긁으니 자꾸 짧아서
渾欲不勝簪(혼욕불승감) 아무리 애써도 비녀를 못 꼽겠네
두보, 「춘망(春望)」 전문
인용한 한시는 줄마다 다섯 자로 규격화되어 있는 오언율시입니다. 시는 수연(제1, 2구), 함연(제3, 4구)과 경연(제5, 6구)이 대구로 되어 있습니다. 미연(제7, 8구)에서는 쇠약해진 자신의 몸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안녹산 난에 의하여 폐허가 된 서울의 봄 경치를 바라보면서 지난날을 생각하고 시국을 근심하고, 가족을 그리워하고, 자신의 늙어 감을 한탄하는 시입니다. 두 행으로 한 연을 이루고 있고, 연의 마지막 글자를 보면 심, 심, 금, 잠의 음가를 가지고 있어 짝수의 행말에 각운'ㅁ'을 붙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¹⁷⁾
이렇게 시에서 음악성의 문제는 아주 긴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고전 『시경』에 실린 시나 우리의 옛 시에서 확인되듯이, 시는 옛날 노래에 실린 가사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후에 노래가 약화되어 낭송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거의 읽는 시가 되었습니다. 노래하기 → 낭송하기 → 읽기로 진화하여 온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시에 노래와 낭송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시 창작에서 음악성은 여전히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페이터(W. Pater)는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율격은 음수율과 음보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수율은 시의 외형률 중에 하나로 자수율이라고도 합니다. 중국의 오언이나 칠언, 우리 시에서 4.4조니 7.5 조니 하는 명칭은 이런 입장에서 채택된 용어입니다.
특히 우리 시가에서는 고시조를 3.4.3.4 / 3.4.3.4 / 3.5.4.3(기준음절 3, 4음)음으로 조직된 3, 4음절 내외의 정형시를 설명할 때 음수율(자수율)을 말합니다. 아래 시조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고인도/ 날 못보고/ 나도/ 고인 못봐
고인을/ 못 봐도/ 가던 길/ 앞에 있네
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가고/ 어떨고
- 이황, 「도산십이곡」 부분
보리밥/ 풋나물을/ 알맞게/ 먹은 후에
바위 끝/ 물가에/ 슬카지/ 노니노라 *슬카지: 실컷
그밖에/ 여남은 일이야/ 부랄 줄이/ 있으랴 *여남은: 다른 남은. *부랄: 부러워
- 윤선도, 「산중신곡」 부분
나무는/ 서성이며
백년을/ 오고가고
바위야/ 앉아서도
천년을/ 바라본다
짧고나
목련꽃 밤은
한 장 젖은/ 손수건
지성찬, 「목련꽃 밤은」 전문
그러나 위 이황의 시조를 보면 음수가 3.4.2.4 / 3.3.3.4 / 3.5.4.3으로 총 음수가 41개에 불과합니다. 또 윤선도의 시조는 3.4.3.4 /3.3.3.4 / 3.6.4.3으로 총 음수가 43개, 지성찬의 현대 시조 역시 43개입니다. 이러한 음수의 불안정 때문에 우리 시는 음수율이 아니고 음보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글은 조사가 어미에 붙는 첨가어이기 때문에 음수가 고정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음수율을 지킨 작품보다 음보율을 지킨 작품이 다양한 리듬감을 살려 주지요. 2음보, 3음보, 4음보라고 할 때 바로 음보율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말 어휘는 2음절과 3음절로 된 것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이 어휘에 조사나 어미가 붙어서 실제로 운용되는 어절은 3음절 내지 4음절이 됩니다. 따라서 시가에도 3음절 내지 4음절이 기본단위가 됩니다.
정리해 보면, 3음보와 4음보가 우리 시행을 이루는 기본율격임을 알 수 있습니다. 3음보는 우리 미의식과 결부된 고유 율동으로 서민계층의 세계관과 감성의 표현입니다. 4음보는 중국문화의 영향으로 사대부계층의 세계관과 감성의 표현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현대시에도 3음보와 4음보의 율격이 은연중에 습합되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현대시에서는 기계적 형식인 율격이 중요 요소가 될 수 없습니다. 전통 율격을 파괴하고 소리와 의미에 충격을 주는 율동이 중요합니다. 율동은 한 편, 한 편 시에서 언제나 새롭게 형성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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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이지엽, 『현대시창작강의』, 고요아침, 2005, 127~128쪽 참조.
14) 미국에서 자유시의 발전은 휘트먼이 풀잎(1855)으로 종래의 영시 운율을 대담하게 깨뜨리고 행갈이 산문시를 시도한 데서 비롯되었고, 엘리엇은 생활언어의 리듬에 가까운 자유시를 썼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양의 문학을 받아들이던 20세기 초에 자유시가 등장하면서 종래의 정형적 운율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15) 홍문표, 『시창작 원리』, 창조문학사, 1991, 140쪽 참조.
16) 홍문표, 137쪽 참조.
17) 홍문표, 138~139쪽 참조.
2024. 2. 20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