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여행 / 안희석
햇살 고운 날 아침, 집 근처 회사 사무실에 잠시 들렀다가 9시에는 동해에서 출발했다, 한 시간 거리의 태백시 철암역 앞에는 친구 내외가 운영하는 가게(주전부리)에서 차 한잔하고, 2시간 30분 거리의 예천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연로하셨지만 아버님께서는 정정해 보이셨는데 어머님은 왠지 안색이 수척해 어딘가 불편해 보이셔서 잠시 말씀을 나누고는 부모님과 함께 예천 읍내로 나가 고깃집에서 점심 식사를 맛있게 드셨습니다, "기력이 없을 땐 고기를 드셔야 힘이 생깁니다"라고 환갑 넘은 큰아들이 팔순 노모 앞에서 너스레를 떤다. 식사하고 나니 어머님 안색이 한결 좋아 보여 다행이다 싶네요~♡
나이 드신 노모에게는 자식이 보약이라는 주변 어르신들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따뜻해진 오후엔 뵈온 지 오래된 근처 고모부님 댁에 방문하여 인사도 드리고 차도 한잔하고 나왔습니다. 가까운 곳에 삼강주막이 있어 잠시 들렀습니다, 초막에 앉아 부침개와 막걸리라도 한잔하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식사하고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운전도 해야 하고….) 옛 정취가 물씬 나는 초가집도 구경하고 나니 아버님께서 군밤 한 봉지를 사서 건네 시네요, 어머님 아버님 그리고 아내와 함께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삼강주막은 국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주막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주막에는 평일이라서 그런지 한적합니다. 또 이동해서 개포면에 소재한 선몽대를 찾았습니다. 선몽대는 임진왜란(1592~1598)이 일어나기 전 조선 중기 1563년(조선 명종 18) 퇴계 이황의 문하생인 우암(遇巖) 이열도(李閱道: 1538~1591) 선생이 세운 정자로 선경(仙景)을 이룰 만큼 경치가 좋은 정자라고 합니다. 선몽대를 선비 흉내를 내면서 뒷짐도 지고 양반걸음으로 천천히 둘러보았습니다, 정자 앞으로는 탁 트인 강가엔 넓고 고운 백사장이 펼쳐져 있고 아름다운 내성천이 흐르며, 뒤로는 빽빽이 들어선 노송들이 즐비하여 옛 선비의 기개와 여유로움이 흠뻑 느꼈습니다.
선몽대를 뒤로하고 나와 가까운 곳에 "백송 제사"에 들러 8대조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백송 제사는 노포(蘆浦) 安 俊 선생을 모시는 사당이며, 선생께서는 고려 말 문신으로 우왕 때 남양 부사.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를거쳐 우왕 11년(1385) 삼도 체찰사(전라, 충청, 경상도 지사)를 지내셨고, 고려말 不事二君의 굳은 충정으로 조선에 충성치 않아 우현보(禹玄寶), 김진양(金震陽)과 함께 경남 의령으로 유배되었다가 이곳 개포로 옮겨 평생 정치에 나서지 않고 도롱이를 걸치고 농사일만 하시며 생을 마감하시었다.
노포 안 준 선생은 우리 집안 8대조 어르신이며, 선생의 비각과 묘소가 제사(祭舍) 인근에 있습니다. 아울러 저는 29대손입니다, 이렇게 예천의 유명 관광지를 산책 겸 봄나들이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님 아버님께서 좋아하시는 모습에 저희 내외도 한껏 즐거웠습니다. 어머님 아버님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인심 좋은 예천은 선비의 고장♡
♡예천은 사랑입니다~♡
오는 길에 다시 철암 친구 집에서 들러 함께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동해로 귀가했습니다. 긴 시간 여행으로 안사람이 많이 지쳐 보이네요~
♡당신도 수고하셨어요~♡
25년 3월 6일
개포면
마을 나들이 전설/설화
전설/설화
고려(高麗)의 충절(忠節) 노포(蘆浦) 안준(安俊)
노포 안준은 고려 말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경혜공 손주(景惠公 孫柱)의 아들이다.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에 이르렀다. 그가 벼슬하던 당시 고려(高麗)의 국운(國運)이 기울어져 정도전(鄭道傳), 조준(趙浚), 남은(南誾), 배극렴(裵極廉) 등이 시중(侍中) 벼슬에 있던 이성계(李成桂)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하던 때였다. 그들의 음모(陰謀)를 알고 있는 그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등과 고려를 중흥(中興)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기회를 엿보던 중 1392년(공양왕 4) 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왕세자(王世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李成桂)가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게 되었을 때 “기회(機會)가 바로 이때다”하고 그들을 제거(除去)하려 하였으나 천운(天運)이 따르지 않았다. 그들의 눈치를 챈 이방원(李芳遠 : 조선 태종)이 그날 밤으로 황주에서 개성(開城)으로 돌아오니,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이어서 정몽주는 이방원(李芳遠)과 단심가(丹心歌)와 하여가(何如歌)를 주고받고 돌아오는 길에 선죽교(善竹橋)에서 조영규(趙英珪)에게 격살(擊殺)당하고 도리어, “정몽주 일당(一黨)은 나라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다”하고 죄명(罪名)을 씌워 안준(安俊), 우현보(禹玄寶), 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귀양(流配)갔으니 그곳은 지금의 경남 의령(宜寧)이었다. 그해 7월 조선(朝鮮)이 건국(建國)되고 이성계가 등극(登極)하니 태조(太祖)이다. 그 후 안준을 불러 벼슬을 주고자 하였으나 고려를 위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버리지 않자 태조(太祖)도 그의 충절(忠節)에 감동하여 그의 뜻에 따라 배소(配所-귀양살이하던 곳)를 예천(醴泉)으로 옮겨 주었으니 노포리(蘆浦里)이다. 그는 이곳에 와서 호를 스스로 노포(蘆浦)라고 부르고 삿갓을 쓰고 자연을 벗하며 망국(亡國) 고려(高麗)를 붙들지 못한 회한(悔恨)을 달래면서 부귀영화(富貴榮華)를 초개같이 버렸으니, 그의 굳은 충절은 길이 빛나고 있다. 그의 시호(諡號)는 충정(忠靖)이며, 용궁(龍宮)의 기천서원(箕川書院)에 모셨다.
*백송 제사(백송길 53)
*삼강은 낙동강, 내성천, 금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삼강 나루(三江津: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와 문경시 영순면 달지리 사이)와 삼강주막(三江酒幕: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이 있어 그 옛날에는 물류와 소금을 실은 배가 낙동강을 이용해 이곳을 거쳐 금천, 내성천을 타고 경상도 북부 내륙 지방과 영주로 향했으며, 영남 지방에서 과거 보러 가는 유생들 또한 이곳을 거쳐 금천 줄기를 타고 문경새재로 향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