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의 잔재정복
(삿 1:1-21)
요약 = 능력론
유다지파는 영적권세의 예표이다. 그런데 이라스엘의 전쟁은 우리의 씨름이 혈과 육이 아님을 보여주며, 유다가 앞장 섬은 영적권세에 설 때만이 승리가 있음을, 시므온지파의 협력이 필요함은 지식에 그치지 않는 육신을 포함한 전인적인 협력을, 아도니 베섹은 영력을 빼앗는 무지와 불신앙적인 요소를, 예루살렘을 칼날과 불로 진명함은 말씀과 기도의 신앙생활이 필요함을, 헤브론에서 죽인 아낙의 세 아들은 겸손할 때 탐욕을 이기게 됨을, 옷니엘의 드빌정복은 영적권세를 활용하는 자의 아름다운 열매를, 겐족속이 유다에 합류함은 영권을 유지하는 비결을, 호르마의 정복은 하나님 주권중심의 헌신을 각각 예표한다. 그러나 아직 점령하지 못한 철병거는 자아를 상징하며 이는 날마다 죽여야 할 최대 강적이다.
강해
그 동안 여호수아서를 강해했습니다. 오늘부터는 사사기를 강해하도록 하겠습니다. 간단히 사사기의 서론을 말씀드리면 책 이름은 히브리어로 '쇼페팀'으로 '사사들, 최고 지도자들' 이라는 뜻입니다. 시대적인 배경은 여호수아가 죽은 이 후 약 400년간의 이스라엘의 여러 굴곡 많은 역사입니다. 이 시대는 백성들이 진리에 서지 못하고 각자가 소신대로 행하므로 온갖 혼란과 재앙을 자초한 그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삿17:6, 18:1). 그래서 고난을 당하면 회개하고 회개하면 번영을 주시고 번영을 주시면 또 타락하고 타락하며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는 이러한 반복이 계속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불충과 배약의 자기 백성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붙들어 주시는 그 언약의 신실하심이 잘 타나나 있습니다. 이 책은 우리들에게 신앙의 문제점들을 많이 지적하여 말씀의 초석위에 올려주는 보배와 같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말씀드리기 앞서 여러분께서는 제가 성경을 해석한다는 생각을 떨어버리시고 다만 구약이야기라는 그릇에 신약의 복음을 담아서 전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떤 좋은 환경이나 대상을 만나면 그것을 놓치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비유로 여러 천국의 비밀을 담아서 가르치셨습니다. 성경은 문자적인 그대로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 역시 이 모든 것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성경기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여러 관점으로 성경을 접근했던 것처럼 구속사적 혹은 영적비유라는 방향에서 접근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 선입관을 벗어버리시고 이 본문의 구체적인 구조와 사건을 가지고 어떤 복음적인 진리를 담아서 전하는가 거기에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때 나타나는 그 오묘함을 체험하십시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유다의 잔재정복"입니다. 사사기의 시작은 먼저 유다지파의 미정복지의 전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유다지파가 기업의 주요 지점들을 정복했지만 아직도 정복하지 못한 곳이 많이 있었습니다. 여기 1장에 여호수아가 죽은 후 여호와의 분부대로 맨 먼저 유다지파가 가나안과 브리스 사람들을 쳐서 아도니베섹을 죽이고 예루살렘을 취하고 헤브론과 드빌과 블레셋의 가사와 아스글론과 에그론을 쳐서 취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여기 유다지파는 영적권세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이 유다지파의 전쟁은 우리 안의 악의 세력들을 어떻게 영적인 권세로서 이길 수 있는지를 잘 교훈합니다. 나아가 이는 성도들의 영적권세의 강화에 대한 예표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신자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원칙적으로는 모두 영적권세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권세를 어떻게 나에게 적용시키므로 나와 죄와 세상과 환경과 원수를 이기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기 유다지파가 세운 빛나는 전공에 중요한 그 열 가지의 영적원리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1. 잔재한 악의 세력은 영적전쟁으로 만이 가능합니다.
1절에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했습니다.
여기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어느 지파가 먼저 올라가서 싸우리이까 묻고 있습니다. 이 밀씀에서 우리는 전쟁이란 아무렇게나 싸우는 전쟁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지파가 뽑혔는데 이는 영적권세의 상징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씨름은 결코 혈과 육이 아닙니다. 그래서 엡6:10-13에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싸움의 성격을 잘 알아야 합니다. 즉 오직 영적전쟁 다른 말로 선한 싸움입니다.
2. 그리스도 안의 영적권세에 서야 합니다.
2절에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셨습니다.
여기에 늘 강조하는 복음이 또 나타납니다. 영적권세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신자들에게 모두 주어진 것입니다. 흔히 특별한 사람들만이 영적권세를 받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 모두에게 이미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거나 서지 못해서 그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엡2:6에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했습니다. 이 높게 되신 승리의 우편 보좌의 그리스도 안이 우리의 영적 현주소입니다. 이것은 우리는 단지 믿음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지금 믿습니까? 단지 믿는 이 믿음 이 방법을 통하여 이 은총을 누립니다. 이미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악의 세력을 다 붙이사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십자가란 못박아 죽이는 심판의 장소입니다.
그래서 롬6:6-11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악의 세력을 다 못박으시고 승리의 우편에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잔재의 처리는 복음을 아는 지식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3절에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나의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너의 제비 뽐아 얻은 땅에 함께 가리라 이에 시므온이 그와 함께 가니라" 했습니다.
여기에 귀한 전인적인 영육 간의 협력의 법칙이 나타납니다. 시므온지파의 기업은 마치 계란의 노른자위와 같이 유다지파의 영내에 위치해 있습니다. 일반적인 기업분배의 관념을 깨는 참으로 신비한 기업분배입니다. 그러므로 두 지파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유다를 돕지 않을 수 없었고 유다도 시므온을 돕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결과 유다지파의 승리와 더불어 시므온지파도 함께 승리하는 복을 받게 됩니다. 뒤의 나머지의 지파들은 모두 승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므온지파는 유다지파를 도운 덕분에 함께 승리하는 영광을 얻습니다.
이는 상징적으로 유다가 영혼이라면 시므온은 육신입니다. 시므온은 세겜에서 대살인을 벌였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혈기 즉 육신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두 지파의 지리적 위치가 분리될 수 없음은 영혼과 육신이 서로 분리될 수 없음과 같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시므온은 육체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서로 협력해야 하며 서로 돕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먼저 유다를 도우면 나중에 시므온을 돕기로 한 것처럼 먼저 영혼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그 결과 시므온도 승리한 것처럼 영혼을 먼저 위해 살면 하나님께서 육신도 따라서 잘 되게 하십니다(고전6:13). 그래서 영혼이 잘되면 육신도 잘되고 육신이 영적인 일에 부지런하면 영력이 생겨납니다.
육신이라는 것 흙으로 되어 있고 약하고 천한 것이지만 영혼을 위해서 협력할 때는 이처럼 귀하게 쓰여집니다. 영혼을 위해서 육신은 거의 절대적일 만큼 중요합니다. 저는 육신의 안일한 자가 능력을 받거나 유지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받아도 순식간에 상실하고 맙니다. 사울왕이 그랬습니다. 라마나욧의 강한 성령의 열풍의 영향으로 하루 선지자는 되었어도 그곳을 떠나는 순간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지금 사역자들이 성령의 불을 일으키려고 노력을 많이 하는데 삶 자체가 변화되지 않으면 모든 은혜의 역사는 부흥회가 끝남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므로 영성운동이란 영의 운동같지만 정반대입니다. 위로부터 부어주심이 부족해서 영성이 안된다면 모두 하나님 탓이 됩니다. 그러나 영성운동이란 복음이해만이 아니라 옛사람을 십자가에 내놓는 운동이요 육신을 바꾸는 운동입니다. 육신의 삶이 바꾸어지지 않는 한 영성운동은 순간의 감정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므로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마치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주님의 교훈과도 같습니다. 신약시대의 그 풍성한 은혜를 구약의 낡은 신앙수준과 그 신앙형식으로는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습관이 되실 만큼 육신으로도 부지런히 출입하시며 기도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함께 영성의 과정을 밟지만 육신이 게으르고 소극적인 사람들은 영성이 부진합니다. 그러나 의지를 사용하는 적극적인 사람들은 아름다운 영성을 형성함을 봅니다. 뛰어난 영성을 소유한 사람들을 보면 한결같이 헌신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남이 알지 못한 영적 지식을 소유함이 문제가 아닙니다. 알고도 행치 않는 게으른 삶은 받은 은혜마저도 감당치 못합니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의 영성도 메도디스트 즉 규칙쟁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철저한 육체활용을 통해 형성되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신앙훈련을 위해서는 사관생도 훈련처럼 최소한 몇 가지의 규칙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하루 몇 시간 기도하기, 하루 몇 시간 성경보기, 매사에 여쭈어서 하기, 시시때때로 감사하기 … 등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6:19-22) 했던 것입니다. 여기 지체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 육신을 드려 영성을 소유하는 비밀을 깨달으시오. 육신을 아껴서 능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4. 잔재처리를 위해서는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6절에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끊으매" 그랬습니다.
여기 아도니 베섹은 브리스 족속의 왕입니다. 아도니라는 뜻은 주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그는 스스로 당당한 베섹의 우두머리요 주권자요 통치자요 주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얼마나 고약한 통치자였는가 하면 그의 수하의 칠십 왕들을 모두 수족의 엄지를 잘라 자기 상 아래서 음식을 주워서 먹게 했습니다. 발의 엄지를 자름은 걷기 어렵게 함이요, 손의 엄지를 자름은 무기를 쓸 수 없게 함입니다. 그러니까 전투력을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노릇을 못하게 하고 모두 구걸하는 걸인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칠십 명의 왕들은 영적 능력받을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칠십 명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영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가서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했습니다. 그런데 칠 십명의 왕들이 수족의 엄지를 아도니 베섹에게 찍혔으니 무슨 능력이 있겠습니까? 그럼 아도니 베섹은 과연 무엇을 뜻할까요? 무지와 불신앙의 상징입니다. 그는 브리스의 왕인데 브리스란 무식한 '시골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깊은 산골에서 농사와 소작만을 고집하며 문화와 문명과 등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상투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래서 브리스는 바로 무지와 불신앙의 상징입니다. 지금 우리 하나님의 안타까움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을 주셨건만 그것을 알지도 믿지도 않으려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무식이 용감이라고 무지와 불신앙이 바로 아도니 베섹입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성도들은 예수 믿을 때 이미 권능을 받은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건짐을 받았을 때 이미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된 것과 같습니다. 마치 계란 속에 닭의 모든 가능성이 다 포함된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중생으로 새생명을 받을 때 그리스도 안의 모든 가능성을 다 받은 것입니다. 다만 얼마나 나타났으며 자랐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이 자람도 믿음의 자람이니까 자라기를 기다리지 말고 믿어야 합니다. 그 믿는 믿음의 정도가 자라면 그 믿음만큼 자랍니다. 그러나 복음이란 그 것만은 아닙니다. 에베소서 1-2장에서 복음을 설명한 다음 3-5장에서는 성도들의 삶 그리고 6장에서는 악의 세력 앞에 섬을 소개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복음을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폭 넓게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세요. 아도니 베섹이 어디에서 죽습니까? 7절에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고 했습니다. 아도니 베섹은 다른 데서는 죽지 않습니다. 반드시 예루살렘에서만 죽습니다. 영적으로 예루살렘은 무엇일까요? 예루살렘은 신앙의 성지입니다. 사2:3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또 이곳은 예배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장소입니다. 즉 말씀이 있고 예배가 있으면 무지와 불신앙은 사라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깨달으면 불신앙은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서 아도니 베섹은 죽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영의 엄지 손가락과 영의 엄지 발가락이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나는 못한다. 나는 능력없다. 나는 안된다. 난 받지 않았다. 나는 해도 안된다는 불신의 소리를 한다면 말씀을 알지 못한 무지와 불신앙으로 인해 엄지가 잘린 영권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입니다.
5. 말씀과 기도로 예비하신 영권을 취해야 합니다.
8절에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치고 성을 불살랐으며" 했습니다.
여기 예루살렘은 장차 거룩한 도성이 될 성지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을 취하는 일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여리고 성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견고한 성입니다. 즉 예루살렘은 삼면이 깊은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나머지 한 면도 험한 산곡과 겹겹의 성곽에 둘러 쌓여 있는 난공불락의 도성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다윗이 이 성을 정복할 때 접근할 틈을 찾지를 못해 수구를 통해서 정복하는 기상천외한 특공작전을 벌입니다. 그리고 로마가 가장 어렵게 정복한 성이 바로 예루살렘 성이었습니다. 그 만큼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영적권세로 충만함을 입어 큰 사역자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그 몸부림과 같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유다지파가 예루살렘을 칼날과 불로써 정복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칼은 성경말씀이요, 불은 기도를 통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조화가 되어야 합니다. 앞서 교훈한 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섰어도 몸바쳐 드리는 기도의 삶이 부족하면 안됩니다. 반대로 기도생활은 충실한데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위에 서지 않으면 역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을 주신 것을 믿고 이 말씀에 서서 감사 찬송하고 예배하며 뜨겁게 기도의 생활을 하면 받은 능력은 저절로 나타난다는 교훈입니다. 초대교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잘했습니다. 복음에 서서 이것만 잘하면 능력이 옵니다. 능력받는 것 어렵지 않습니다.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특수한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초대교인들처럼 말씀 듣고 거기에 서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그러면 받은 능력이 실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 들으시고 용기를 가지시고 지금부터 실천에 옮기시기를 바랍니다.
6. 죄악의 잔재는 겸손의 위치에서 제거가 가능합니다.
10절에 "유다가 또 가서 헤브론에 거한 가나안 사람들을 쳐서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죽였더라 헤브론의 본 이름은 기럇 아르바였더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14장에서 아르바는 가장 큰 거인이요 이는 사단의 예표라고 했습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 갈렙에 의해 처단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그 아낙의 소생 세 사람을 죽이는 사건이 나타납니다. 그 세 사람이 바로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입니다.
이 세 거인들의 이름을 연구해 보면 모두 우상의 이름들입니다. 골3:5에 탐심은 우상숭배라 했습니다. 사단이 이 소생 셋을 데리고 사람들의 영력을 죽이고 있는데 그 셋은 요일2:16에 나타난대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우리는 주신 영적권세에 설 때만이 세상의 탐욕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 영적권세란 양면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그리스도 안이지만 하나는 반대로 저 낮은 곳을 향하여라는 십자가의 위치입니다. 우리 성도의 영의 주소는 바로 이 두 곳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흥이란 북을 치며 거리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치며 울며 십자가 아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겸손해 질 때 비로소 허락하신 그 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에서와 같이 그 위치를 이탈하는 들나귀가 되면 우리의 복은 허락하신 땅에서 붕 떠서 실재가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헤브론을 연구해 보면 헤브론은 아브라함이 헷족속에게 사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 등의 조상들이 묻힌 막벨라굴이 있는 유서 깊은 장소입니다. 그런데 이 장소가 가나안에서는 가장 높은 지대로 해발 약 927미터나 됩니다. 즉 헤브론은 이스라엘의 근본이 있는 것으로 영적으로 높이 되신 그리스도 안을 예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믿음과 아울러 마음의 위치는 십자가 아래로 내려와야 합니다. 제가 이 관계를 모를 때 복음에 섰으나 실재가 되지 않아 얼마나 방황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성 프란시스처럼 십자가의 위치로 내려와야 합니다. 바울도 그랬고 스데반도 그랬습니다. 이 십자가가 바로 영성의 비결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지만 죽으심이 없는 부활이 어찌 있겠습니까? 이 겸손함으로 이 죽으심의 연합에도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헤브론의 세 거인을 처단함은 즉 교만할 때 온갖 탐욕에 사로잡힘을 보여줍니다.
7. 영적권세를 믿고 담대해야 아름다운 열매가 맺힙니다.
11절에 "거기서 나아가서 드빌의 거민들을 쳤으니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 했습니다.
본문 11-15절은 수15장에 나왔던 내용의 반복입니다. 이것은 성경기자의 실수가 아니고 본문 내용 구성에 있어서 필요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영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갈렙의 약속에 따라 갈렙의 조카 옷니엘이 기럇 세벨을 쳐서 갈렙의 딸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이렇게 한 것은 그만큼 기럇 세벨을 정복함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가장 험악한 지대를 유다지파가 분배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험하고 어려운 전쟁이 바로 이 전쟁이었습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옷니엘의 용기입니다.
우리는 옷니엘처럼 담대하게 영적권세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에게 아내가 생기고 밭이 생기고 남방 땅이 생기고 윗샘과 아랫샘이 생기듯 하나님께서 놀라운 이적과 열매로 역사하여 주십니다. 예를 들면 심령이 성령의 열매로 아름다워집니다. 주의 사역의 길이 열립니다. 성령의 생수가 터져 나옵니다. 그러므로 산과 같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복음에 굳게 서서 적용시키십시오. 옷니엘이 정복한 기럇 세벨은 결코 무의미한 이름이 아닙니다. 기럇 세벨이란 '책의 성읍'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것은 무엇이든지 담대하게 믿음으로 누려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약속은 모두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내게도 그렇게하여 주실까? 의심하지 말고 담대해야 합니다. 히10:35에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하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크고 아름다운 것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8. 끝까지 경건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16절에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이라 그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 종려나무 성읍에서 올라가서 아랏 남방의 유다 황무지에 이르러 그 백성 중에 거하니라" 했습니다.
여기 모세의 장인은 겐족속입니다. 이 겐족속들이 유다 백성들과 합류하는 내용입니다. 아주 의미 깊은 내용입니다. 겐족속이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철저한 경건주의자들입니다. 렘35장을 보면 그들은 조상 요나답의 가훈을 300년동안이나 지켜 떠돌이 장막생활을 하고 목축과 대장장이 일을 하면서 남과 싸우지 않고 금주하며 철저한 여호와 신앙으로 무장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으면 날마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는 일을 주업으로 삼은 특이한 족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후손 중에 영영히 제사장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본문에 나오는 것은 참으로 영성을 유지하려면 이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성회복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유지가 문제입니다. 능력받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감당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갑자기 겐족속이 나타나 유다지파와 합류하는지 결코 우연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즉 겐족속처럼 돈 명예 권세 정욕 미움 다 버리고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고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철저하고 순수하고 열열한 신앙이 없이는 영적권세를 지켜나가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능력 받아도 일시적일 뿐이요 도리어 교만해져서 나중에는 버림을 받게 됩니다. 마술사 시몬처럼 돈과 함께 망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울왕도 하루 선지자는 멋있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루 밖에는 감당치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경건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러한 사례들을 많이 봤습니다. 능력을 받는데 까지는 좋았는데 감당치 못하여 잘못된 사람들 말입니다. 왜 그토록 철저한 경건주의자들인 겐족속이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지 우리는 이해해야만 합니다. 구약성경의 신비가 이것입니다. 구약은 본문 한 부분 한 부분이 마치 한 편의 설교처럼 펼쳐집니다.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게 각종 진리의 비밀들을 순서대로 가르쳐 주는지 그래서 성경이 신비한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능력받았다고 교만하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능력을 경험하고 3년 이상 유지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말이 있습니다. 금방 교만해지거나 그 실재를 상실해버립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서야 합니다. 성경의 경고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 겐족속의 신앙이 없으면 능력이든 축복이든 받지 않은 것만 못하는 것입니다. 돈도 초월하고 명예도 초월하고 권세도 칭찬도 정욕도 다 초월하고 여호와로 나의 생명을 삼아야 합니다. 겐족속은 혹시 가족들의 방해가 있을까봐 독신자가 많았고 가정까지도 초월했다는 기록이 기독교 대백과사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형식을 취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정신을 취하라는 것입니다. 능력을 끝까지 유지하고 지켜가려면 이런 철저한 정신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런 경건, 이런 겸손, 이런 절제, 이런 신앙의 기초 없이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9.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쓰임 받는 도구여야 합니다.
17절에 "유다가 그 형제 시므온과 함께 가서 스밧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쳐서 그곳을 진멸하였으므로 그 성읍을 호르마라 하니라" 했습니다.
여기 호르마란 '바쳐짐'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 받으려면 완전히 내가 바쳐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주권중심은 영권사역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오늘날 성령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을 부리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다 쓰러 뜨리려고 합니다. 내가 큰 권능을 받아서 큰 일을 하리라 결심합니다. 말이 맞는 것 같지만 그 마음의 상태가 문제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것인지 내가 하나님을 부리는 것인지 구분이 안됩니다. 혹은 사람들이 자기의 욕심대로 계획을 세워놓고 하나님께서 역사해 달라고 하나님을 부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부릴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 준비되어져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필요한대로 강하게 쓰시는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빌립처럼 시공간을 초월하셔서 우리를 들어 쓰시기도 하시고, 베드로나 바울처럼 성령의 은사로 들어 쓰시기도 하시고, 우리가 봉사하고 도울 자를 만나 봉사하게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좀 한적한 곳에 가서 쉬어라 하시면 쉬어야 합니다. 즉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애통하지 마십시오. 왜 그토록 불안해 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기만 한다면 나타남도 주의 뜻이고 나타나지 않음도 주의 뜻입니다. 여기에서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호르마 즉 "바쳐짐"입니다. 이 성령론의 비밀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런 기초적인 성령론 지식은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하나님을 부리려고 하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준비를 부정하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열심히 준비해야 합니다.
10. 날마다 자아의 출현을 조심해야 합니다.
19절에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했습니다.
이것까지 완전히 쫓아내야 하는데 그 믿음 좋다는 그들도 그 철병거가 두려웠습니다. 그럼 영적으로 이 철병거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놀랍게도 사단도 아니요 세상도 아니요 원수도 아니요 칼날도 아니요 내 속에 있는 자아입니다. 이 자아는 권능받았다고 굴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놀라운 영적 지식으로 충만하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예로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그의 자고의 위험은 도리어 그의 능력충만과 받은바 영적지식의 지극히 큼에 있었습니다. 다른 것들은 모두 이 능력과 지식 앞에서 해결되지만 자아만큼은 그렇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이 큼이 바울로 하여금 자고의 위험을 높여주었습니다. 그래서 특이한 것이 자아입니다. 그러므로 잘 관리하지 않으면 큰 낭패를 맛봅니다. 그래서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던 자아가 바로 이 철병거입니다. 마치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가 철병거를 몰고 이스르엘 골짜기를 누비는 것과 같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내 안에 자아가 문제입니다. 죽여 놓으면 또 살아나고, 죽여 놓으면 또 살아나고 참으로 파괴되지 않은 철병거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야빈과 시스라의 나라도 이미 여호수아에 의해 진멸된 하솔왕 야빈의 나라가 사사시대에 다시 부활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아는 죽여도 다시 살아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의 증축을 불허한 것입니다. 이는 여리고가 다시 건설될 수 있다는 가망성을 암시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신 대로 이 자아가 문제를 일으킵니다. 바울도 많이 이룬 자였으나(빌3:15) 항상 자기를 쳐서 복종시켰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자아의 속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거의 다 이루었지만 이것만은 언제나 문제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육체의 가시를 주셔서 바울이 자고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겸손과 순종이 곧 자아가 죽은 모습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아래 나아가 자아의 철병거를 철저히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영적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권세가 이제 강한 능력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삼손이 능력을 상실했을 때 얼마나 비참했습니까? 우리는 신앙의 유다지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말씀에 서서 불신앙을 몰아내야겠습니다. 그리고 힘써 강한 말씀과 기도와 찬송 생활을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죄와 탐욕을 회개합시다. 그리고 겐족속과 같은 경건과 호르마와 같은 헌신과 담대함 그리고 자아를 죽여 그 능력 안에 머물러 있어야겠습니다. 그래야 완전한 영적 유다지파로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최고의 축복에 도전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부터 여러분께서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믿음에서 서서 좀 더 영적인 일에 투자하십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영권받아 세상을 이기고 주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시는 강한 성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