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려진 사무엘
(삼상 1:19-28)
요약
본문은 한나가 사무엘을 서원한 대로 하나님께 드리는 내용이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성화구원의 비밀을 교훈한다.
1. 성화구원은 신인협력이다.
19절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1) 문자적인 의미 - 여호와께서 한나의 태를 열어 주셔서 아들을 잉태함이다.
2) 신령한 의미 - 이처럼 성화구원은 신인협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2. 성화는 영적으로 성장하여 낳는 것이다.
20절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1) 문자적인 의미 -
2) 신령한 의미 - 불필요한 듯한 서술 속에 진리가 있으니 성화란 영혼에 심어 주신 새 생명이 자라나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갈4:19).
3. 성화는 자아처리가 잘 된 상태를 가리킨다.
21절 "그 사람 엘가나 ‥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1) 문자적인 의미 - 매년제는 한 해에 대한 감사제요, 서원제는 서원하거나 서원을 시인하는 제사로 남편이 한나의 동행 없이 이 제사를 드림은 마지 못함이 아닌 감사와 기쁨의 서원이었음을 보여준다.
2) 신령한 의미 - 나를 죽이고 기쁨으로 순복하는 마음이 성화적인 마음이다.
4. 성화는 유아기의 젖을 떼는 영적으로 장성한 상태이다.
22절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1) 문자적인 의미 - 아이를 여호와께 드리는 때가 젖 떼는 때이다.
2) 신령한 의미 - 신령한 젖을 먹여 죄악을 벗는 거룩한 단계에 이름을 성화 라고 부르며(벧전2:1-3)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신다(창21:8)
5. 성화란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다.
1:23하-24절 "‥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1) 문자적인 의미 - 이는 사무엘을 여호와께 드리는 세 번째의 행차이다.
2) 신령한 의미 - 그들이 드린 수소, 가루, 포도주는 인격의 3요소요, 일반 제 사의 3배의 제물은 온전한 마음 곧 성령의 열매이다(갈5:22-4).
6. 성화란 세상과의 정을 끊는 확고한 마음이다.
25-28절 "‥ 맹세하나이다 ‥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 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1) 문자적인 의미 - 모성애를 극복하고 아이를 맹세로서 드리는 장면이다.
2) 신령한 의미 - 이와 같이 성화란 세상과 정을 끊는 이별이다.
종합. 자기를 사무엘처럼 온전히 드림이 곧 성화이다.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롬6:19)
강해
오늘은 '드려진 사무엘'이라는 제목입니다. 한나의 기도와 서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한나에게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본문의 줄거리는 한나가 사무엘을 서원한 대로 하나님께 드리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어린이를 드리는 일은 사무엘 말고는 전무후무한 기사입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놀랍게도 성화구원의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화구원이란 구원론의 중요한 한 과정으로 죄성까지도 제거되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귀한 원리들이 있습니다.
1. 성화구원은 신인협력임을 보여줍니다.
우리 다같이 19절을 읽어 보십시다. "그들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태의 문을 열어 주셔서 한나가 아이를 잉태한 내용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분만 봐서는 안됩니다. 여기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아무리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어도 또한 사람이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신인협력의 원리입니다.
이처럼 성화구원은 신인협력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칭의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지만 성화는 신인협력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여 변화되려면 하나님의 은혜와 아울러 인간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원리입니다. 조직신학에서도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기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화에는 그 방편이 있습니다. 즉 그 방법은 말씀과 기도와 성례입니다. 즉 열심히 말씀 보고, 열심히 기도하고, 꼭 성례에 참여하면서 깨닫는 대로 믿고 회개하고 버리고 씻고 덧입고 순종해 나갈 때 날마다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2. 성화는 영적으로 장성하여 낳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20절을 다 함께 읽으십시다.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여기에 감추어진 성화론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성화란 우리 영혼에 심어주신 새 생명이 자라나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을 가리킵니다. 마치 한나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갈4:19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열심히 새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점진성 필연성 조심성 정성성 등이 있습니다. 마치 잉태된 아이가 서서히 자라듯이 성화는 점차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점진성입니다. 또 성화는 태중의 아이가 반드시 해산할 날이 있듯이 반드시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필연성입니다. 또 해산하기까지 얼마나 몸과 마음을 조심하고, 온갖 정성을 다합니까? 이것이 조심성이요, 정성성입니다. 이렇게 많은 수고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면 완전히 딴 세상이 기다리고 있듯이 성화구원을 받고 나면 성도는 성령 안에서 천국을 비로소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벧전1:8-9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했습니다. 이 기쁘고 즐거운 구원이 바로 성화구원입니다. 이 성화구원을 모르니까 예수 믿는 재미가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제 칭의구원만이 아니라 성화구원으로 나가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한나처럼 그것이 한이 되고 병이 될만큼 주의 형상 닮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3. 성화는 자아처리가 잘 된 것을 가리킵니다.
21절을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 "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여기 엘가나는 새 자아의 상징입니다. 또 두 가지 제사가 나오는데 매년제는 한 해를 마무리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제사요, 서원제는 서원하거나 이미 서원한 것을 정식으로 시인하는 제사입니다. 왜냐하면 아들은 공동자식이요 남편이 가장이므로 서원법에 따라 남편이 시인해야 효력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그 해의 일을 감사하는 매년제와 함께 아들을 드리기로 확증하는 서원제를 아울러 드리러 갔다는 것는 이 서원이 마지못함이 아닌 감사와 기쁨의 서원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온전한 자원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한나는 남편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아내에 대한 사랑 때문에나 혹은 억지로 끌림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즉 남편에게 자발적인 서원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차후에 어떤 후회도 원망도 있지 않도록 했습니다. 참 지혜로운 여자였습니다. 그 결과 23절에 남편이 쾌히 수락합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여기서 보여주는 진리는 이처럼 우리의 자아처리가 잘 되어야 성화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죽이고 언제나 감사와 기쁨과 자원함으로 하나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성화구원에서 자아처리는 대단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를 자기의 것으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영혼은 이미 하나님 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자아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자아란 바로 나를 자아라고 하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순복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대신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엘가나처럼 스스로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아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음 문을 열라고 문 밖에서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내 뜻대로 살아왔습니다. 이것이 습관화 인격화 의식화되었습니다. 주인 없는 광야의 야생마처럼 살아온 우리였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시간과 경험과 말씀과 시행착오와 연단과 징계와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가 죽어야 예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죽되 자아포기 정도가 아니라 기쁨과 감사와 자원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적극적인 자아로 죽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성화의 모습니다.
4. 성화를 위해서는 젖을 떼야 합니다.
다같이 22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여기 사무엘이 여호와께 드려지는 시간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때는 젖을 떼는 때입니다. 창21:8에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젖 떼는 때에 큰 자치를 배설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유아기의 젖을 떼고 장성한 자가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젖먹이는 지각이 없어 무엇을 가리지 못하듯 영적인 어린이는 아직 육신에 속해서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조차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젖을 떼라는 말씀은 젖이 나쁘다는 뜻도 혹은 성장하기도 전에 젖을 떼라는 뜻도 아니고 열심히 먹여서 속히 장성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벧전2:1-3에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속히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히5:13-14에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했습니다. 즉 젖을 먹는 사람은 의의 말씀을 경험치 못한 자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무엇이 영적인 삶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의의 말씀을 먹으면 지각이 열려 영에 속한 것과 육에 속한 것을 알기 때문에 영에 속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선악을 분변한다는 뜻입니다.
육신의 어린이도 젖을 떼고 성장하면 대소변도 가릴 줄을 알고, 밥도 흘리지 않고, 안전한 것 위험한 것도 구별하고, 좋은 것 나쁜 것도 깨달으며, 가족도 알고, 예절도 알고, 신앙까지도 점점 알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지각입니다. 이처럼 영적 지각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의와 죄, 선과 악, 생명적인 것과 아닌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등등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을 통해서 깨닫습니까?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축복 축복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러니 대연을 배설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롬12:1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사랑을 동원하여 너희를 권한다고 핸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성화를 위해서 젖을 떼고 의의 말씀을 많이 먹어야 합니다.
5. 성화란 내게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1:23 하반절에서 24절을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 떼기까지 기다리다가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이 말씀은 이제 세 번째 사무엘을 드리는 행차를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무엘과 함께 여호와께 드리고자 한 제물 세 가지가 있습니다.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였습니다. 수소, 가루, 포도주 이 세 가지는 우리의 인격을 뜻합니다. 가루는 지, 포도주는 정, 수소는 의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성물은 일반 제사의 3배에 해당하는 제물입니다. 세 가지에 세 배였습니다. 한 배는 인간의 마음이지만 세 배니까 온전한 마음 곧 성령의 감동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화란 무엇인가? 성령의 열매로 충만하는 것입니다. 내 의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입니다. 갈5:22-4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했습니다. 이 성령이 나타나야 내 인격에 예수가 나타납니다. 그 인격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했는데 이 말씀을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는 말씀으로 바꾸면 이해가 더 잘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이 전체 문맥의 흐름입니다. 이렇게 성령은 그리스도와 그 공로를 우리에게 적용시킵니다. 그래서 예수가 우리 인격에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6. 성화란 세상과의 정을 끊는 확고한 변치 않는 마음입니다.
다같이 25-28을 읽으십시다. "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한나가 가로되 나의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이 말씀은 한나가 사무엘을 맹세로서 드리는 장면입니다. 맹세가 필요했다는 것은 자녀를 향한 모성애가 얼마나 작용하고 있었는가를 암시해 줍니다. 그래서 24절의 "아이가 어리더라"는 말씀은 단순히 어리다는 뜻이 아니라 모성애를 자아내는 가슴을 찢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한나는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드리되 다시는 물려 받을 수 없게 온전히 맹세로 드렸습니다.
이와 같이 성화란 얼마나 세상과 정을 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안됩니다. 철저하게 세상의 탐욕을 끊고 청산해야 합니다. 마치 양 어머니의 그 애 끊는 간곡한 요청을 거절했던 모세처럼 세상의 정을 끊으시기 바랍니다. 정말 피를 토할 것만 같은 모성애를 자기에게서 제거해 내고 눈물 한 방울 없이 맹세로서 자식을 드린 한나처럼 세상과 이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세상을 생각지도 사랑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생각하지도 돌아가지도 믿지도 말고 심지어는 전쟁이 나도 그 곳에는 피난을 가지도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침략한 바벨론으로 피한 사람은 살았어도 애굽으로 피한 자는 모두 죽었습니다. 이 세상 정을 끊는 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우리는 사무엘을 온전히 드리는 데서 성화의 비밀을 발견하게 됩니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작업이 성화입니다. 그래서 롬6:19에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것만큼 변화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화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영혼을 성장시켜야 합니다. 자아를 처리해야 합니다.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정을 끊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우리 모두 성화를 사모하십시다. 그래서 성화구원의 놀라운 은총을 경험하시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