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狎鳩亭, 狎鷗亭)
압구정(押鳩亭)은 1867년 건립됐다. 압구정은 한국전쟁때는 국군이 수복한 후 청웅초등학교 교사(校舍)로도 사용했다. 편액의 낙관에는 성재(惺齋)라고 적혀 있다.
효자 인덕정(仁德亭) 박번(朴蕃)과 관련이 있으며, 함양박씨(咸陽朴氏)로 효성이 지극하여 정려문이 세워졌고,
학정서원(鶴亭書院)에 제향됐다.
효행록(孝行錄)에 의하면, 하루는 병들어 누어 계신 아버지께서 물오리를 먹고 싶다고 하나, 계절이 물오리가 있을 때가 아니어서 구고 천변에 나가 탄식하고 있는데, 뜻밖에 죽은 물오리가 떠내려오고 있다. 선생은 감읍해 이 물오리를 주워다가 봉양하니 병이 쾌유했다. 이때부터 구고천을 효례천(孝禮川)이라 부르게 됐고, 자손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정자를 짓고, 압구정(押鳩亭)이라 했다.
압구(狎鷗)는 세상사 모두 잊고 갈매기와 벗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임실 학정서원
1660년(선조 33)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번(朴蕃) · 박훈(朴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청웅면 구고리 남쪽 압구정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1621년(광해군 13)에 압구정 북쪽 주천동(酒泉洞)으로 이건, 김천일(金千鎰)을 주벽으로 모시고 홍붕(洪鵬)을 추가 배향하여 서원의 규모를 갖추어 30여 년 유지해 오던 중 화재를 당하였다.
1656년(효종 7)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짓고 ‘학정서원’이라는 사액을 예조에 청원하였으나 같은 해 김천일의 원호가 다른 곳에 사액되어 중복할 수 없으므로 사액서원의 예로 향사토록 하고 관제물 물목을 봉하여 현감 제주로 향사하라는 하교가 내려졌다.
같은 해에 이흥발(李興勃), 1659년에 조평(趙平), 1855년(철종 6)에 김원근(金元根)을 각가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유림에 의하여 위패를 그 유허지에 매안(埋安)하고 제단을 마련하여 매년 음력 3월 3일에 향사를 유지해왔다.
틀림없이 토종 민들레다.
양지마을 효례정...
독립유공자 박준승선생 추모공원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전라북도 임실(任實) 출신이며, 천도교(天道敎)인이다.
1919년 2월경에 손병희(孫秉熙)로부터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고, 유태홍(柳泰洪)·박영창(朴永昌)·김의규(金衣圭)에게 독립선언서 5천 매를 배부하여 장성(長城)·임실 등지에서 궐기하게 하였다.
2월 25일부터 27일경까지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국장참배를 위해 상경했다가 손병희·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과 만나 3·1독립운동에 관한 설명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승낙하였다.
2월 27일 최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권병덕(權秉悳)·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양한묵(梁漢默) 등의 동지들과 함께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으며, 이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성명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민족대표로 손병희 등과 함께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의하여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 공원은 독립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분으로 조국 독립을 위하여 활동하셨던 박준승 애국지사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독립유공자 및 유족, 지역민의 자긍심 고취 위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