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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로 세상 읽기
그런데 막상 주위에 시 한 편도 시집 한 권도 옆에 없다면 어찌해야 하나? 그때는 귀를 열고 들으면 된다. 세상의 여러 소리를 듣는 행위도 책을 읽는 행위와 별로 다를 게 없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기형도 「엄마걱정」 전문²
이 시의 어린 화자는 찬밥처럼 오도카니 방에 담겨 열무를 팔러 시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 간절하게 엄마를 기다리는 행위는 엄마의 배추잎 같은 발소리를 기다리는 일이다. 그러나 그 소리는 환청일 뿐 화자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엄마의 발소리 대신에 숙제를 하는 동안 금간 유리창틈으로 가는 빗소리만 들릴 뿐이다. 화자의 외로움과 공포는 빗소리를 더욱 크게 받아들였을 것이고,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자신의 울음소리로 현재의 처지를 확인한다. 이 어린 화자는 혼자 방 안에서 귀를 통해 들리는 모든 소리로 세상을 인지하고 상상한다. 이처럼 귀로 소리를 듣는 일은 세상을 읽는 일과 다름없다. 다음 시도 보기 드물게 청각 이미지를 매우 적극적으로 수용한 시다.
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황동규, 「풍장 27」 | 전문³
밤비 소리를 듣기 위해 세상 뜰 때 귀만 두고 가겠다고 한다. 손과 발과 입과 눈은 가지고 가겠다고 한다. 오직 귀만 두고 가는 이 마음 역시 세상을 귀로 읽으려는 귀한 자세다. 시를 쓰는 사람의 귀는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힐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이 세상을 향해 오감을 활짝 열어놓을 때 가능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를 쓰는 일은 세상을 두루 공부하는 일이다. 습작習作이란 단순히 글을 잘 쓰는 연습에 그치는 게 아니라 세상을 부단히 배우고 익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習’은 새의 날개깃을 뜻하는 ‘羽’와 태양을 뜻하는 ‘日’의 결합이다. 즉 새가 햇볕 아래 날아오르기를 연습하는 형상이다. 또 해가 떠오를 때 새가 날개를 퍼덕이며 둥지를 떠나가려 한다는 뜻도 된다. 어떻게 해석하든 ‘習’이란 어린 새가 여러 번 반복해서 날아오르기를 준비하는 과정을 말한다. 여태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과정으로 인해 ‘習’은 “학습, 공부하다, 배우다”의 뜻으로 의미가 파생되었다. 미숙한 것에서부터 익숙하게 이해하는 과정의 의미로 “숙련되다. 익숙하다, 능하다”의 뜻을 함께 지니게 되었다. 어린 새가 둥지 바깥으로 날아오르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습작도 노력을 거듭해야 하는 고통스런 작업이다.
그런데 글쓰기의 괴로움이 단지 괴로움으로만 끝이 날까? 창조의 즐거움이란 없는 것일까? 한 편의 시가 명예와 부로 곧바로 치환되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공부한 자에게는 새로운 세상에서 사는 즐거움이 보상으로 따라온다. 한 편의 시에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생각해보지도 못하고, 꿈꾸지도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분명히 있다. 한 편의 감동적인 시를 읽었을 때 그 설렘으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다. 마음에 드는 한 편의 시를 썼을 때 땅을 박차고 솟구치는 자아의 충만감을 느낄 수도 있다. 옛 선조들도 다르지 않았다. 다산은 시를 알고 뜻이 맞는 인들과 시사를 결성하고 그 모임의 규약을 이렇게 정했다.
살구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복숭아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차례 모이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 서지에 연꽃이 피면 구경하기 위해 한 차례 모이고, 국화꽃이 피어나면 한 차례 모이고, 겨울에 큰눈이 오면 한 차례 모이고, 歲暮에 화분의 매화가 피어나면 한 차례 모인다.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준비하여 술을 마시며 시를 읊조릴 수 있게 해야 한다.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부터 준비물을 마련토록 하여, 차례대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까지 한 바퀴 돌아가 다 끝나면 다시 시작하여 돌아가게 한다. 그러는 사이에 아들을 낳으면 한턱내고 고을살이를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또 한턱내고 벼슬이 승진한 사람도 한턱내고 아우와 아들 중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있어도 한턱내도록 한다.⁴
아, 당신도 시를 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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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91, 127쪽,
3 황동규, 『풍장』, 문학과지성사, 1995, 46쪽
4 정약용, 『다산문학선집』, 박석무·정해렴 편역, 현대실학사, 1996, 54쪽.
2024.7.6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