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위진, 『입상立像을 위하여』, 시문학사, 2006.
무제(無題) ‧ 1
짙은 잎새들 사이로
반짝이며 쏟아지는
보석 같은 햇살 받으면
천년千年 한恨도 녹는 듯하고
바람도
한 세상 맺은
매듭 풀고 가라 한다.
입상立像을 위하여
애哀 환歡도 번거로워
하늘 위에 띄우고는
줄도 아예 태웠건만
염주알로 내려와서
밤잠을
고스란히 앗으며
백치白癡처럼 웃고 있다
나의 시는
봉선화 씨방에서
면벽한 한 스무해
아직껏 덜 여물어
조바심을 하고 있다
그 언제
물방울 튀듯
까만 씨로 허울벗나.
삶
가을산 나무들이
단풍 피워 단장하듯
사람도 노을녘엔
석류알로 익었으면
난 지금
무슨 빛으로
어떤 향을 간직했나.
간석지 모래 무늬나
졸고 있는 바다결은
숨소리 잔잔해도
살아서 옹아리를
맨발로
나올 밟고 걸어도
내 가슴엔 찬바람.
낙조落照
서천을 가는 저 해는
하늘하늘 농익은 홍시
산마루에 턱 고이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들녘은
땅거미 지고
산은 장삼 갈아 입고
길
엄마는 가마 타시고
나는 충실 등에 업혀
친 외가 나들이길
낭자하던 두견노래
그 많은
세월을 감고
물레 돌아 나만 왔다.
고갯길 앉아 쉬면
하늘른 코발트빛
길섶의 풀꽃들은
문병이 갈아 엎고
환하게
트인 한길이
실뱀처럼 기어간다.
동행同行
네탓 내탓 해가면서
낯도 드러 붉히지만
백년을 동행 한들
새 그림자 잠시 머문 자리
메아리
산 고을 울리며
먹뻐꾸기 날고 있다.
소금
대장간 칼 벼리듯
벼려온 수도승의 기
갈고 닦아 바랜 심성
속살까지 투명하다
세상사
간 맞춰 절이는
휘디 흰 보살의 손
춘설春雪
밤새내 나목 가지가
송이송이 피운 눈꽃
아침에 햇살 받아
신부新婦처럼 부시더니
하룻밤
춘몽보다 더 짧은
이어없는 생애生涯여.
독도獨島
해풍에 피고 지는 왕호장근 흰꽃 군락
이 나라 수문장으로 끄떡 않는 너의 의지意志
사계를 철갑 두른 어깨 서릿발이 얹혔다.
파도도 사생결단 밀려와선 부서지고
갈매기 군무에 뜨는 탕건봉이 빛을 띠면
사랑도 뭍을 향한 일념一念 손끝에서 지는 조국
구리빛 팔뚝으로 해를 띄워 지우면서
살금살금 숨어드는 도둑떼를 물리치는
든든한 바닷벌 너머 초록 비둘기 구구 운다.
□ 왕호장근 : 독도에 군락 자생하며 흰 꽃을 피울 땐 괭이갈매기가 나는 듯 현란하다.
불암사
-정선에서
가린 것 하나 없이
마음도 옷도 벗고
허욕을 다비하여
동안거冬安居에 드신 산사山寺
뒤안을
병풍 두른 서리꽃
하얀 염주 꿰고 있다.
바이칼호
알혼섬 하늘에 뜬 수정 같은 별을 따러
자작숲 푸른 바람과 손 마주쳐 인사도 하고
반공을 활개치면서 날아가는 파랑새들
환성을 지르다가 등도 툭툭 쳐보지만
호수는 양반다리한 채 실눈으로 맞이하고
양뗀 양 무리갈매기 반색하며 내닫는다.
밤새별이 내려 속삭이다 떠난 새벽
언덕에 함초롬히 이슬 젖은 솜다리 꽃
춘원이 「유정」에 심어놓은 바이칼의 애화哀話여.
알혼섬 떠나온 길에 노을을 발아래 깔고
가없는 초원을 갈아타는 해도 불 먹은 새
신기루 서리는 대륙에 비취빛 꿈 떠오른다.
후기後記
젊은 날 세파世波에 휘말려 어지럽게 살 때는
그렇게도 세월이 더디너니
요즈음은 작년일이 어제만 같고,
죽숙처럼 자라던 손자들이 어느새 하늘 찌를
대나무로 자라 있다. 그러니 내가 떠받쳐 떠받쳐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가. 해 놓은 일 하나 없이
생애生涯가 저물아가고 회오悔悟만 남는다.
일곱 번째 시조집 원고를 다듬다보니 너무나
미숙未熟한 쭉정이들이 눈만 바드반들 나를 올려다 본다. 기가 막힌다.
전에는 그래도 신들메 고처 매고 다시 시작하겠다는 투자라도 있었건만……
이걸 작품이라고 받아 읽으실 독자 여러분께 민망하다
번번히 못난 작품들 마다지 않고 출판을 맡아주시는 시문학사詩文學社 김규화 선생님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병술년丙戌年 성하盛夏
청구한정聽鳩閑庭에서 나선那善
□ 후기 전문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