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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강해(11)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약2:14-26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무디(Dwight L. Moody)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 자신을 믿어보라! 실망할 때가 있을 것이다.
친구를 믿어보라! 언젠가 그들은 죽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대와 헤어질 것이다.
그대의 명성을 믿어보라! 언젠가 훼방하는 혀가 그것을 뒤집어엎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대는 현세와 내세에 후회함이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를 믿고 살고, 또 어떤 사람은 친구를 믿고,
돈을 믿고 명성을 믿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의 대상은 우리 주님밖에 없음을 깨닫고
저와 여러분이 다 주님을 믿음으로 현세와
내세에 후회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라>
주님을 믿는 믿음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 마음의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우리가 입술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고백이 없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마음으로만 믿는다고 하는 분들은 ‘이기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고 싶을 때는 고백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겠다고 것입니다
. 상황에 따라 다르게 처신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손해를 봐도, 목에 칼이 들어와도
우리는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분명히 고백해야 합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
그러나 믿음은 실천의 단계로 성장해 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믿음이 참인 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4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야고보 사도의 이 말씀은 이미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시인한 성도들을 상대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단지 입술로 고백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고백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은 영광입니다.
그러나 또한 책임감이 따르는 것입니다.
반드시 믿음에 따른 순종(행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 가운데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마7:20-23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
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예수님 자신이 이미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말만 하거나 화려한 구호를 외치신 분이 아닙니다.
즉 주님께서는 단지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너희를 죽도록 사랑한다. 그래서 매일 너희를 위해 기도한다.
그러니 너희도 힘을 내서 스스로 구원을 이루고 평화롭게 살아라’고
말만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늘의 영광까지 버리고 직접 내려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까지 감수하셨습니다.
순종과 낮아짐은 본을 실천함으로서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닦은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과 섬김의 본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말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행위의 열매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야고보는 말뿐인 믿음의 구체적인 예를 들고 있습니다.
15-16절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지나가다가 만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함께 모임도 갖고 예배도 드리는 ‘형제, 자매’를 말합니다.
즉 서로의 사정을 꿰뚫어 아는 사이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형제가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당장 끼니를 이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정을 잘 아는데도 불구하고
말만 하고 실제로 돕지 않는다면 그 말이
도대체 무슨 위로(이익)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화만 일으킬 뿐이지요.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이러한 예화는 예수님도 말씀하시 바가 있습니다.
마25:41-46에서 마지막 심판 때의 모습을 말씀하시면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마25:41-46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행함이 다르지 않는 믿음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17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죽었다는 말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 행함이 없는 믿음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열매로 그 나무를 알 수 있듯이 행함을 통해서만
그 믿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18절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즉 행위는 믿음의 열매인 것입니다.
믿음은 행위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이것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나무와 열매가 둘이 아니듯이 믿음과 행위는 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열매가 없는데 믿음이 있는 척 하는 것은 거짓이요
위선일 따름입니다. 그가 겉으로는 아무리 기도도
그럴듯하게 하고 예배생활도 경건하게 하는 것 같이 보여도
그 사람의 믿음은 실제로는 ‘죽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도 비판하셨던 바리새인의 믿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식으로만 하나님을 아는 것은>
어떤 이는 믿음의 열매인 사랑의 행위는 없으면서
단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자랑합니다.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것의 허구성을 잘 압니다.
19절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복음서에 보면 놀랍게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한 눈에 알고 달려와
엎드리는 귀신들이 있었습니다(참고 : 막1:24, 5:1-10, 눅8:26-33).
또한 그들은 자기들이 장차 무저갱이라는
무서운 곳에 가게 될 것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그들은 지금까지도 예수가 어떤 분인지,
또 지옥이 과연 있으며 또 있다면 어떤 곳인지 등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현대인들보다 신학적인 면에서
훨씬 탁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단은 성경 말씀을 가지고
주님을 시험할 만큼 성경에 능통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사단을 ‘신학적인 면에서 본다면
가장 예리한 신학자’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귀신들에 대해 주님은 어떤 태도를 보이셨습니까?
그들의 놀라운 지식에 탄복하며 칭찬을 보내셨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엄중하게 꾸짖으시며 자신 앞에서
물러갈 것을 명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식은 있었지만
진정한 믿음과 순종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성경 지식을 수단으로 이용하려고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렇게 순종이 따르지 않는
헛된 지식으로서의 믿음을 가진 자를 가리켜
“허탄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20절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 말씀은 단지 지식을
채워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실천을 위한 것입니다.
순종이 없는 지식은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존 베일리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면서도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자보다 더 크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위험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많은 이단들을 볼 때 매우 타당성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연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식을 늘리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말씀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행함으로 믿음을 보인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야고보 사도는 행함으로
그 믿음이 증명된 대표적인 두 사람을 예로 듭니다.
21-25절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첫째, 아브라함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어떤 아들입니까?
그야말로 100세에 얻은 아들입니다.
그런 소중한 아들을 죽여서 각을 뜨고 불에 태워서
드리라는 것은 천청벽력과 같은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약속의 자녀였습니다.
이삭이 없으면 하나님의 약속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리실 줄을 믿고 순종하였습니다(히11:17-19).
그의 순종은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가 참으로 믿음의 사람임이 그 순종으로 인해 증명된 것입니다.
그의 믿음과 순종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를 친구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순종은 우리의 믿음의 증거입니다.
위대한 순종은 위대한 믿음에서 나옵니다.
둘째, 라합의 순종하는 믿음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가나안의 진입을 앞두고 여호수아는 정탐꾼 두 명을 여리고 성에 보냈습니다.
이 정탐꾼이 여리고성에 들어가 기생 라합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정보가 새서 여리고 왕이 그들을 잡으러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그 때 라합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두 정탐꾼을
옥상에 숨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미 창문으로 탈출했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라합은 이런 기막힌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녀는 이미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먹이시고
어떻게 인도하시고 어떻게 전쟁을 치르셨는가를 들었습니다.
수2:9-11절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기막힌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그 수많은 기적을 보고
수많은 혜택을 다 누렸지만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들포도를 맺는데 이 여인은 소문으로 들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문에 줄을 달아 정탐꾼들을 피신시키고
구원의 증표로 붉은 줄을 달아 훗날 그녀와 온 가족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즉 라합은 그 믿음 때문에 자기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숨겨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참된 미음은 순종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 행함으로 그 믿음이 온전케 되는 것입니다.
<맺는 말씀 -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이제 야고보는 분명한 결론을 내립니다.
26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오직 행함을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믿음은 행함으로 완성되고,
행함은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야고보는 바로 우리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믿음과 삶의 일치’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생활’이 일치할 때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성령의 열매들을 맺어갈 때,
우리가 성령의 사람인 것은
세상에 온전히 드러낼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삶의 현장에서)
우리의 믿음을 행함으로 증명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온 몸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세상에 드러내는 복음의 투사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