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隨筆文學에 대한 소고(小考)
- 필자의 수필작법 중심으로-
김선화(수필가/한국문인협회 회원)
1. 장(場)을 열며
그동안 수필계에서 양적 팽창이니 질적 저하니 하는 문제는 수도 없이 다뤄왔습니다. 새로워져야 한다는 논의도 여러 차례 있어왔습니다. 그리고 수필의 격에 대해서도 무수히 이야기되고 있지요. 이런 이야기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수필을 잘 써보자’일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잘 쓸 것인가. 이에 대한 논의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겠지요. 그것이 변화를 꾀하는 지름길일 테고요. 수필에 대해 이미 많은 이론서가 나와 있는 터에, 제가 보태는 궤변이 수필 쓰는 이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 고심했습니다. 하여 현장에서 치열하게 쓰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최대한 쉽고 명확하게 글쓰기의 실체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 장에서는 수필문학의 내적 치열성과 외적 장르의 도입, 그리고 독자와의 친화력 등에 대해 다루어볼까 합니다.
필자가 문단에 나와 가장 듣기 민망하여 회피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타 장르 작가들로부터 “수필은 신변잡기야.”하는 식의 비하입니다. 그럴 때면 ‘당신은 과연 제대로 된 수필을 꼼꼼히 따져 읽어본 적 있는가? 수필의 진수가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아는가? 수필의 향기는 맡아보았는가?’하고 반문하지만 뒷맛은 적잖이 개운치가 않습니다. 그때마다 일일이 논쟁을 벌일 수도 없고, 타 장르라 하여 모두 명문만 떠도는가 하고 되묻지도 못한 채로 우물우물 넘어갈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수필을 애정의 눈길로 깊이 있게 읽어내는 시인이나 소설가를 더러 만나 힘을 얻습니다. “10여 매의 수필을 청탁 받으면 60여 매의 평론을 쓰는 일보다 더 어렵고, 한 편의 시를 쓰는 것보다 고민 많은 시간을 보내고서야 소기의 글을 완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어려운 글이라고 고백한다”고 한 채수영(蔡洙永, 시인 ? 문학평론가) 선생과 같은 분이 수필 쓰는 사람의 체면을 좀 세워주고 있는 예입니다. 이러한 글귀를 대할 때는 저도 모르게 수필의 불씨를 보유한 풍로에 마구 풍구질을 하게 됩니다.
2. 수필문학의 내적(內的) 치열성
1) 수필은 느낌이고, 여과이고, 생성이다
타 장르의 작가들이 무어라 하든, 내면에서 먼저 정신적인 치열한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가 자기 글에 얼마만큼 정열을 쏟았는가 하는 차별성에서 글의 성패가 갈린다고 봅니다. 그럼 어쭙잖은 저의 수필작법을 통해 이야기를 펼쳐보겠습니다.
저는 수필 쓰는 과정에서 글 속에 어떤 의미를 붙일까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느 때는 ‘바로 이거다’ 하고 단번에 붓이 나가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다 마무리 지었다 싶은 글도 그 의미가 약해 지우기가 일쑤입니다. 여기에서 공허해진 의미에 대해 혼자 실소할 때가 있는데, 그건 대꾸 없는 사람을 향해 마음을 보내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제가 쓰는 수필은 삶의 실체를 통한 대상의 연결입니다. 어떤 사물이나 대상으로부터 느껴지는 가슴속의 소리를 들었을 때 저는 그 울림이 반갑습니다. 그것이 수필을 든든하게 만듭니다. 그러한 파동이 아니고서는 글이 나가질 않습니다. 일단 고요하던 가슴에 이 북소리와도 같은 울림이 시작되면, 저는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시발점이 된 대상에 혼을 불어넣습니다. 사진이나 그림을 눈에 익히기도 하고, 현장에 몇 차례씩 다녀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소재가 되는 것에 대해서 천착해 들어갑니다. 그러기까지 여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건 처음 만난 소재가 곰삭을 때까지의 기다림을 수반하기도 합니다. 이런 절차 없이 성급했다가는 제대로 된 의미를 살려내기 어렵습니다.
오랜 동안 사유의 숲을 거닐며, 거기서 만나게 되는 한 가닥의 명주실과도 같은 의미는 제 수필의 축이 됩니다. 그리고 그 사유의 과정에서 수필인의 고뇌를 맛보기도 합니다. 이 때에 의미가 주제의 성격으로 확실해지면 그 다음은 저절로 풀려나갑니다. 펜을 쥔 손에 가속도가 붙어 단숨에 끝을 내기도 합니다. 주변 사정으로 중지할 때는, 속도가 다시 붙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써 나갈 때는 되도록 단숨에 쓰고, 퇴고과정을 오래 갖습니다.
퇴고를 시작하면 그때는 제가 반쯤 미쳐있을 때입니다. 제 글 고치는 맛은 항상 새로운 것이 됩니다. 그러면서 한층 깊이가 있는 경지로 들어섭니다. 이때에 저는 수필 쓰는 맛을 더 느낍니다. 이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엄격함으로, 추호의 경박함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모내기철, 수차례 갈아놓은 논을 마지막 써레질하여 불순물을 제거하듯 수필문장에서도 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여 스스로가 만족할 때쯤이면 문장 하나하나에 녹아든 저를 봅니다. 그래서 저는 ‘글은 곧 사람’이란 말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수필 편 편마다에 제 영혼이 녹아 흐른다는 말은 사람과 사람사이에 잘 섞인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수필이란 장르 자체가 사람들의 삶을 외면할 수 없는 문학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그려내기 위해서는 수필 쓰는 사람이 그 안에 개입해야 하는 것은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글 쓰는 작업이 고독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지만, 적어도 제가 추구하는 수필은 살아있는 인간의 실체와 만나는 일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유대감, 또는 동반자로서, 선과 악 사이에서 일어나는 마찰음 등을 통해 그 진실을 보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저는 때로 수필쓰기에서 소재와 소재사이의 대비효과를 노리는데, 그것은 치밀한 구성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는 곧 평면적인 것을 입체적인 것으로 만들어내려는 제 성격이기도 합니다. 이미 정해진 소재의 겉을 보면서 이면까지를 보고자 하는 의미를 소중한 것으로 여깁니다. 거기에는 파도처럼 출렁이는 감동이 따를 수도 있고, 하고 싶은 말을 슬쩍 암시하는 무기교의 기교를 꾀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전부를 드러내지 않고 속뜻을 슬쩍 감춰놓습니다. 이런 수법은 독자의 몫으로 돌리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문학은 감동이 배제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든, 수필이든, 동화든, 소설이든 장르를 초월한 최고의 가치란 생명력 깃든 정교한 짜임에서 기인된다 하겠습니다. 감동의 요건은 작은 발견에 있습니다. 신선한 충격, 그것은 새로움에 대한 열정이며 치열성입니다. 이왕이면 가치 있는 충격이면 더욱 반갑겠지요. 그랬을 때 더욱 바람직한 의미를 생성해낼 수 있는 쪽에 다가설 수 있습니다.
2)자유로운 사고(思考)와 자유로운 형식
저는 글쓰기에서 어떠한 틀에 매이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사고도 경계합니다. 기우뚱한 생각은 기우뚱한 글을 낳는 법. 제가 표현해 내는 문장은 어디까지나 제 몫인 이유입니다. 발표 후에 따르는 책임을 스스로 져야하는 게 작가의 몫이기에, 이건 속세에서의 도닦기와 다름 아닙니다. 그러므로 수필 쓰는 사람이 이 점을 망각했다가는 어느 한쪽 모난 글을 낳기 십상입니다. 삶의 근본을 들여다본다 하여 다 난삽한 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원초적인 것을 다루되 수필인의 격을 잃지 않으면 얼마든지 해학과 유머로 주제를 이끌어내 문학수필로 승화시킬 수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데서 더욱 수필의 묘미와 희열을 느낍니다. 그리고 다 보여주지 않기에 유의합니다. 함축미를 살려 전달의 효과를 노리는 까닭에 각종 수사법을 동원하지만 가벼운 비유는 되도록 피합니다. 자칫 말장난이 될 수 있는 부분은 걷어내고자 하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주제를 말하기에 있어 빙빙 돌려 말하는 대신에 짧게, 후딱 지나가는 듯이 말하기도 합니다. 이는 사람 살아가는 모양새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래도록 마주보며 웃고 싶은 사이일수록 극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넘침도 안 됩니다. 그러면 서로간에 어려워집니다. 수필이란 이와 같지 않을까요.
모호한 표현은 피할 일이나 독자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끔 여운의 자리를 남겨놓는 일, 저는 이러한 기법을 고집합니다. 작가가 펜을 쥐었다 하여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면, 그 다음 글은 읽지 않아도 뻔한 연유입니다. 수준 높은 독자는 글쓴이의 시시콜콜한 사연에 치중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사건이, 즉 어떠한 소재가 어떠한 의미의 멋스런 옷을 입고 등장하느냐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사고로 정신적 세계에서 훨훨 날되, 혼자만 아는 글은 쓰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그러한 글은 시일이 지난 뒤 다시 보면 부끄럽기가 그만입니다. 그리고 형식의 구애를 받지 않는 것도 독자층의 흥미를 돕는 일이므로, 글쓰기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것이 스스로에게 자유를 부여합니다.
3. 외적(外的) 장르의 도입
1) 시와 수필
초현실주의 시인 정귀영(1917년 생~) 선생은 80넘은 고령에도 억양의 장단고저에 거침이 없었습니다. 10수년 전, 안양지역의 한 초청강좌에서 마치 구름 위를 거니는 듯한 어조로 청중을 사로잡았습니다. “우리가 장독대에서 간장을 뜰 때에도 그 장독을 들여다보며 새로움을 찾아내야 합니다.”하고 열변을 토할 때 객석에는 찬물을 끼얹은 듯 숨소리조차 크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간장독엔 검은 빛 뿐입니다. 아무것도 헤아릴 수 없는 무(無)입니다. 거기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내야 한다고 열변하는 노(老) 시인 앞에서 30대 후반의 저는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우리가 ‘문학’이라 이름 붙여 노니는 이 큰 울타리 안엔 뭔가 확실치는 않지만 보이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 존재할 것 같았습니다. 하여 일상을 뛰어넘어 이면의 현상을 만나기 위해 더욱 분발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시인들이 이토록 깊고 너른 정신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매진하는데, 수필가라 하여 그 정도의 선에 가 닿지 못할 것이 무엇이며 그만한 글을 못 쓸 것이 무엇이냐 싶었습니다.
편의상 필자의 5매수필을 예문으로 놓겠습니다. 제 글 중 가장 시적 장치를 차용한 수필로 응축의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략>
‘구곡폭포’다. 거세게 떨어지던 물줄기가 아예 푸른빛으로 멎은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눈 덮인 언덕에서 잠시 휴식에 든 물의 능청이라 하면 어폐가 있을까.
그 아래로 울툭불툭한 빙판이 거대하다. 흐르는 물을 받아 안고 펄떡이던 증거다. 내리꽂히는 물줄기를 수용하다가 덩달아 얼어버린 저 품을 보자. 대기 속의 기운을 응고시킨 겨울의 결정체. ―겨울심장이다. 갑자기 가슴이 저릿저릿해진다.
눈을 돌려보니, 가느다란 갯버들이 얼음계곡에 허리를 묻고 서있다. 시릴 것 같으면서도 포근해 보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일부를 맡기고, 내부에서 무수한 언어를 나누는 연인들 같다. 그 경이로운 모습 앞에 나는 말을 잃는다. 표면을 얼린 계곡은 나무의 근본을 보듬음으로써 추운 날에도 저렇듯 버티는구나 싶다. 버들의 허리께까지를 얼싸안고 굳은 척하는 저 심장의 유희가 부럽다.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살을 나는 안다. 그건 견고한 척하는 사람의 내면이다. 그래서 들여다볼수록 매력이 있다. 알고 보면 마음결이 여리고 한없이 따사롭다. 나는 그걸 찾아내는 데에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래서 얼음의 두께를 밀치고 솟구치는 소리를 듣는다. 그 미세한 결의 박동에 곧잘 매료당한다. 표면에 잘 나타내지 않지만 무궁한 에너지의 원천을 품고 있는 사람을 보는 것 같다. 그럴 땐 내 몸의 피돌기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진다.
<중략>
양지쪽, 묵은 풀포기를 헤치며 잴잴거리는 냇물이 반짝인다. 그 투명한 물에 손을 담가본다. 짜릿한 기운이 온 몸을 휘감는다. 이 결을 만나러 내가 이 먼 길을 달려온 것일까. 칼바람에 코가 얼얼한데도 15리가 넘는 내리막길이 짧기만 하다. 외려 후끈한 기운이 가슴에 일렁인다. 그 견고한 겨울심장을 내가 통째로 품어버렸나 보다.
- 필자의 수필‘겨울심장’ 中에서
2) 소설과 수필
소설은 아무리 진실만을 담아냈다 하더라도 ‘논픽션’이란 전제가 없는 한 ‘픽션’으로 읽힙니다. 하지만 수필은 소설적 구성으로 이뤄졌다 해도 어디까지나 진실입니다.
수필의 문학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허구를 허용해야 한다는 일부의 견해는 수필가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주는 단면이라고 봅니다. 허구를 끌어대는 대신에 수사법으로 대치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수필쓰기에서 각종 수사법을 활용하면 수필의 문학성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 중에서도 수필문장의 표현을 돕는 수사법으로 상징과 은유(隱喩)를 빌면, 구태여 허구를 논하지 않아도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나 소설이 수필을 넘나들 듯 수필도 타 장르를 넘나들자는 장르해체 얘기도 떠도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저는 소설과 수필이 엄연히 장르적 차별성을 띠는 바, 장르해체란 말엔 동의하지 않습니다. 긴긴 세월동안 선각자들이 갈고 닦아온 어엿한 길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무너뜨린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수필에도 마음만 먹으면, 다양한 수사법을 동원하여 곱절의 표현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특히 상징이나 은유적 표현은 직설을 피할 수 있어, 정의 문학인 수필에 향기를 더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럴 경우 읽는 이의 지루함을 극복할 수 있고, 수필이 천편일률적이다 하는 문제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겠지요.
“명문은 세월이 아무리 흐른 뒤에 읽어도 명문이다.” 하는 말이 있기에 전통과 새로움 사이에서 고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던 끝에 낳은 결과물이 소설적 심리묘사를 꾀해 삶의 진실을 토로해 보자는 아래의 글입니다.
대전과 공주사이, 유성방향으로 ‘공암’이란 마을이 있다. 금강 변을 달려 구불구불한 순환도로를 지나면 동학사와 인접한 그곳에 다다른다.
입춘이 지난 화창한 날에 친정식구들과 그 마을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앞좌석의 어머니가 팔을 뻗어 한 절벽을 가리켰다. 산 아래 석벽(石壁)에는 검은 굴이 퀭하다.
“저기, 굴 보이지? 금인지 석탄인지를 캐낸 자리란다.”
“예.”
“어떤 남자와 여자가 저 굴에서 소낙비를 피하다가 정을 통해 아이를 낳았단다. 그런데 장성한 아들이 어느 날 그 아버지를 찾았단다.”
“예.”
그 얘기를 듣고 나서 내 머릿속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쪽의 지리여건 상, 5일장에 나왔던 사람들이 비를 만났지 싶다. 아니면 집안의 경조사(慶弔事)에 다녀오는 길이었던가. 그도 저도 아니면 절에 불공드리러 가던 길이었을까.
그들이 비를 피한 곳은 길가의 뉘댁 처마도 아니고, 나무 아래도 아니며, 사방이 뚫린 원두막도 아니다. 하필 어두침침한 동굴이다. 그곳에 누가 먼저 들었을까. 급작스런 소낙비로 둘이 동시에 뛰어들었을까. 아니면 어느 한쪽이 비를 긋느라 들고 보니 앞서온 인기척이 있었던 것일까. 상념의 끝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실상 사건의 발단이야 뭐 그리 중요한가. 두 사람을 그렇게 엮은 비가 원죄이지.
비는 사람의 감정을 쥐고 흔드는 마력을 지녔다. 그래서 비 내리는 날엔 전혀 예기치 못한 일도 일어난다. 더구나 소낙비는 급하기가 이를 데 없다. 그 급함이 그날의 남녀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이리라. 이렇듯 세상일 다반사가 어떠한 계기로부터 비롯되는 것을 따져볼 때, 그날의 진범은 누가 뭐래도 ‘소낙비’이다.
이런 저런 생각에 골몰하던 나는 불쑥 말문을 열었다.
“그날 그들은 과부 ? 홀아비가 아니었던 모양이지요?”
“글쎄, 그래도 ‘나는 아무개요’하고 이름 석자는 알려줬으니 훗날 아들과 만났겠지.”
“그렇긴 하네요.”
“아이 참, 누나는? 처녀총각이었으면 결혼하면 됐고, 과부 ? 홀아비였어도 문제는 간단했죠.”
운전하던 동생의 참견에 나는 괜히 머쓱해졌다.
“그것도 그러네.”
그러나 스쳐 지나온 그 동굴에 대한 인상이 쉬 가셔지질 않는다. 봄비 찰박대는 날이면 감성이 먼저 내달려 소낙비를 맞고 섰다.
- 필자의 수필 ‘소낙비’ 全文
다음은 시점의 변화를 시도한 수필입니다. 실험정신으로 쓴 수필인데 필자가 언제 어느 부분에서 말을 아끼고 있는지 보이시지요? 이 글을 주절주절 떠벌리면 자칫 시집살이에 지친 한스런 여인네의 푸념이 될 수 있어, 3인칭 시점으로 글을 끌고 가면서 압축의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여기에서 ‘개’라는 객관적 상관물이 커다란 상징작용을 하며 문장을 끌고 갑니다.
<생략>
드디어 밤은 이우는데 개 짖는 소리만이 간간 들려온다. 그 소리가 먼 곳에서 들리다가 점점 가까워져 사랑방 흙벽을 타고 흐르면, 새댁은 화들짝 일어나 귀를 세운다. 그러나 사람의 발자국소리는 들리지 않고….
새벽녘, 문고리를 풀고 나오는 새댁을 향해 대청마루를 내려서던 어머니가 한마디 한다. “얘, 넌 애비 본지가 얼마나 됐다고 또 오라고 했니? 어제저녁 연락 왔더구나. 차 놓쳤다고.” 새댁은 어머니의 눈길을 피해, 대문간으로 종종걸음 쳐 빗장을 연다.
그런데 대문밖엔 온 동네 개들이 모여 우글댄다. 숫제 검둥이는 목장집 치와와와 한 덩이가 되어, 사람을 보고도 마당바닥에서 일어날 줄을 모른다. 사태를 알아챈 어머니가 물바가지를 들고 나와 발을 구른다. “어이! 어이! 어이….” 하면서도 차마 물세례는 안기지 못하는데, 몸집이 송아지만한 수캐 한 마리가 엉덩이를 골목에 빼고 으르렁댄다.
<하략>
- 필자의 수필 ‘개 짖는 밤’ 일부
4. 독자와의 친화력
1) 평이함에서 벗어나야
문학은 글 쓰는 이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문학 장르속의 수필에 있어서야 더 말할 나위 없겠지요. 잘된 수필 한편은 글 쓴 사람은 물론이고, 읽는 이의 가슴에 정화작용을 합니다. 원고 매수 몇 장으로 독자의 심금을 울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감동은 진실의 교류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함축적인 수필에서 더욱 느낄 수가 있습니다.
훌륭한 수필은 잘된 문장에서 읽어내는 것이지요. 뢴트겐 사진과 같이 정교한 눈은 물론이고, 그늘진 곳의 단면까지를 헤아릴 수 있는 작가적 정신이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읽는 이의 미소를 자아낼 수 있는 해학수필, 또는 얼음장같이 냉철한 비판정신도 가미된다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출렁거리는 감동으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때로는 지성의 번뜩임으로 삶의 결을 꿰뚫는 안목도 갖춰진다면 금상첨화겠지요. 이러한 요인들이 바로 독자들과의 친근감을 자아내는 비밀이라 생각합니다.
이상의 풍요로운 조건 속에서도 작가가 글거리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독자와의 친화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이미 나와 있는 것이지요. 독자와 가까이 있을 것인가? 멀찌감치 뚝 떨어져 혼자만의 노래에 빠질 것인가? 다소 냉정한 말 같지만 이 모두 작가의 몫이고 곧 역량입니다.
수필에서 작품 속의 나는 곧 화자이고, 이 화자는 자신이 그려내는 문체를 통해 그 개성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즉 화자인 ‘나’의 성격이 수동적인지 능동적인지도 문체에서 드러나고, 온유한 성품인지 강성의 소유자인지도 문체에서 어느 정도 판가름 나는 것이지요. 화자가 작품 속에 얼마만큼 녹아드느냐의 차이에서 평면적일 수도 있고 입체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의 성격에 따라, 그리고 작가의 의도에 의하여 동적(動的)일 수도 있고, 지극히 정적(靜的)일 수도 있습니다.
이번엔 필자의 글 중 그런대로 수필답다 싶은 글 한 편으로 여운을 대신합니다.
기후에 민감한 것이 사람 마음이지만 눈 내리는 날처럼 짙은 서정에 잠기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것도 새해 첫날에 내리는 눈은 ‘서설(瑞雪)’이라 하여, 상서로운 기운을 느끼게 한다.
이십여 년 전, 그해 첫날에도 함박눈이 내렸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나는 모처럼의 연휴를 맞아 귀성(歸省)길에 나섰는데, 당일차표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우왕좌왕하며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을 헤맨 끝에야 가까스로 대전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는 교통편을 해결했다는 안도감에 빠져들었다. 차창 밖 풍경에 도취되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천안을 알리는 푯말이 눈에 들어오는데, 버스가 속력을 못 내는 것으로 보아 대전까지는 오래 걸릴 모양이었다.
무려 일곱 시간 만에 도착한 대전엔 이미 땅거미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거기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시골 정류소에 내리니, 발목을 덮는 눈길만이 어둠 속에 펼쳐졌다. 밝은 날에 걸어도 실히 사십 분은 되는 거리를 어떻게 헤쳐가야 할지 암담했다. 그때서야 나는 진작 되돌리지 못한 발걸음이 후회되었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나보다. 내 사정을 알아본 생면부지의 사람이 앞을 향해 냅다 소리쳤다.
“거기 누구, 안터까지 가는 분 계시우?”
“예~” 하는 소리와 함께, 훤칠한 키의 한 남성이 눈길을 허우적거리며 되짚어왔다. 나와 한 동네에 살다가 정류소 가까운 마을로 이사한 서너 살 위의 청년이었다. 그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평지를 벗어나자 길은 더욱 험했다. 그때 저만치 앞서 걷는 그림자가 인기척을 보내왔다. 헛기침소리만으로도 우리 마을의 방앗간 집 어른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소달구지를 몰고 그 일대의 볏가마니를 실어 나르던 노인이다.
어둠 속에서 만난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 길에서 인사를 나누었다. 희다 못해 푸른 눈길을 발이 시린 줄도 모르고 걸었다. 앞서 걷는 어른은 두루마기자락이 눈밭에 끌리는데도, 길이 험하니 당신이 내는 발자국만 따라오라고 하였다. 나는 그분의 뒤를 따르고, 청년은 내 뒤를 따랐다. 청년이 사는 마을은 등 뒤로 가물가물 멀어져 가는데…. 간간이 들리는 헛기침소리만이 그 밤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그해 눈 내리던 날의 이야기는 지울 수 없는 한 폭의 그림이 된다. 훗날 내가 그 방앗간 집 어른만큼 노인이 되었을 때, 나도 과연 누군가를 향해서 내 발자국만 따라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게 한다.
- 필자의 수필 ‘눈 내리는 날의 삽화’ 全文
2) 신선한 소재 취택과 충분한 사고
참신한 소재 찾기는 모든 문학인들의 관건일 것입니다. 좋은 소재를 만났을 때 작가는 글의 반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흔히들 ‘소재의 한계성’을 호소합니다. 저는 그런 말을 들을 때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글거리가 부족한 게 아니라, 작가 스스로 사고의 폭이 충분히 열려있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는 것일 테지요.
작가의 의식은 항상 열려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소재를 잡는데 있어 과히 어렵지 않겠지요. 이야기의 ‘소재 취택’과 ‘구성의 기법’, 그리고 ‘표현 방법’ 등으로 다양하게 주제를 형상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수사적 기법에서 작가의 기량은 물론이고 작품이 한껏 돋보일 수 있겠지요.
정지용, 이태준 등 굵직굵직한 작가를 제자로 둔 가람 이병기 선생은 ‘겨자씨 하나에 3천 가지의 생각이 어린다’ 하였습니다. 작은 씨 톨 하나에서도 무진장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번뜩이는 정신. 그것이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수필에 있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어떠한 소재를 택하든 문장의 흐름이 글의 성패를 좌우하는 까닭이지요.
다음 글은 겨자씨보다 수백 배는 큰 그림에 대한 사유입니다.
아롱진 한복 갖춰 입고 허리선 질끈 동인 여인 하나. 머리채 모아매고 두 손을 무릎위에 포개 얹은 모습이 고풍스럽다. 단아한 이마에 가지런한 눈썹, 살며시 감은 눈과 오뚝한 콧날. 목을 늘이고 앉은 측면의 얼굴에 닫힌 입매가 얌전하다.
옆에 놓인 옹기항아리엔 들국화 한 묶음이 기우뚱하니 꽂혀있어, 무심한 듯 유심하고 유심한 듯 무심하다. 나뭇가지 끝엔 노랑나비 한마리가 살포시 앉아있다.
나는 평소 은은한 색감의 산수화풍을 좋아한다. 그림에 대한 이해 부족인지 정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깊은 가을날, 화가가 누군지도 모를 정물 한 폭을 받고나서 그림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비교적 단조로운 그림을 대하며 수많은 이야기들을 유추해보게 된다. 그린 이의 심성에 자꾸만 마음이 쏠린다. 심지어 말 없음으로 그려내는 율동미에 사로잡히기까지 한다. 정물 속의 나비는 그저 가만히 앉아있을 뿐인데, 금세라도 분가루를 날리며 포닥거릴 것만 같다.
보면 볼수록 가슴이 따스해진다. 화폭 가득한 화가의 내면을 읽는다. 출렁이는 마음결이 정물 한 폭을 메우고, 그것을 보내온 이의 심적 색채로 흐른다. 그것이 다시 내게로 전이된다.
―나는 그 그림에 ‘기다리는 마음’이라 이름 붙여 두었다. 말하기에서나 글쓰기에서나 말 않고 말하기의 대명사가 바로 이러한 것이지 싶다. 그런 여백의 힘은 종종, 나를 그림 속으로 끌어당긴다. 화가가 아니면서도 화가이고 싶게 한다.
다시 가을바람 소슬 분다. 내 상념의 뜰을 지키는 정물 한 폭에 무시로 눈길이 간다.
- 필자의 수필 ‘정물 한 폭’ 全文
3) 작가의 책임
저는 늘 수필쓰기에서 독자의 마음을 감화시킬 내용의 글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삶의 원초적인 곳까지 들여다보아 독자의 답답한 심중까지를 헤아릴 줄 아는 수필가, 그래서 독자의 가슴이 우물청소를 한 것처럼 시원해지는 기능을 꾀하는 수필, 이것이 바로 수필가의 정신이라 여기는 까닭입니다. ‘문학은 어떠한 형태로든 그 시대를 반영한다’는 말이 있듯이 진실을 바탕으로 하는 수필에서는 더욱 이것이 요구됩니다.
수필은 그 시대의 사회상을 조명하는 정신문화사적인 글입니다. 지적 충족에서 오는 쾌락이기도 하고, 삶의 본질을 반추하는데서 맛보는 심적 정화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수필의 이상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소재나 구성, 표현 등. 어느 편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글을 다루었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새롭게 만나는 작품들마다에 맨얼굴로 다시 시작해야 글마다의 독특한 기운이 느껴지니까요. 그럴 때 작가는 작품 편 편마다에 충실할 수 있고, 독자는 문장 하나하나에 녹아든 작가를 만날 수 있겠지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글쓴이의 성향이 문장 속에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웬만한 수준의 독자라면 그것을 잘 찾아 읽습니다. 하지만 타 장르와 비교할 때 노출의 한계가 따르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 점에서 수필문학의 변화를 위해 무한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속되지 않게 자신을 드러내는 기법 등에 대해 다양하게 연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변화를 위해 새로운 기법을 꾀하긴 하되, 수필의 전통성을 잊지는 말자는 말씀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흐름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수필의 전통성을 훼손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새로움을 추구해 나가는데 게을러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필은 우리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본질을 다룬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욱 작가적 책임이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5. 닫으며
독일의 낭만주의 시인이자 이론가 노발리스(Novalis 1772~1801)는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닿아있고, 들리는 것은 들리지 않는 것에 닿아 있으며, 생각나는 것은 생각나지 않는 것에 닿아있다”고 역설한 바 있습니다. 저도 수필 쓰는 길에서 이 말을 종종 확인할 때가 있습니다. 수필을 쓰기 위한 몰입의 시간 속에서 전혀 예측 못한 제3의 문장을 만나는 까닭입니다.
아울러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詩로 잘 알려진 러시아의 대작가 푸시킨(Pushkin, 1799.6.~1837.2.)도 시와 소설, 희곡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어쩌다 보니 장르를 넘나드는 입장의 저로서는 수필의 진실성과 소설의 허구성에 대해 늘 고심합니다. 제가 소설을 써냈을 때 저를 수필 쓰는 사람으로 인식한 독자들의 의식 속에서는 ‘이거 다 진실이야.’ 할 수 있을 것이고, 필자를 소설 쓰는 사람으로 아는 독자들에게는 진실을 써도 ‘이거 다 허구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 때는 제가 두 명, 세 명이었으면 참 좋겠다는 하나마나한 생각도 해봅니다.
하지만 그러한 장르의 한계점을 안고 가는 것 역시 시와 수필, 소설과 수필을 아우르고 가는 저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단 각기 다른 장르에서의 특성을 살려 기운 닿는 대로 그려낼 따름입니다. 이 세상에 글 쓰는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제게 주어진 소명을 다해 언어를 갈고 닦아갈 것입니다. 언어가 새롭게 말하게 하기 위하여 언어에게 자유를 부여하려 합니다. 때로는 한 사람의 작가로서 장르를 넘나듦이 버겁기도 하지만, 제게 지워진 짐을 오히려 즐거이 여기며 걸어갈 참입니다.
거듭 밝히지만 그때그때의 상(像)에 마음이 비쳐져 되돌아오는 소리를 받아 적는 것이 글쓰기입니다. 그 길에서 저는 언어에 갇히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고정된 틀에 매이는 것을 경계합니다. 하여 어떠한 수평적 환경에 안주하는 것을 몹시도 거북해 합니다. 일상적인 사물을 지켜보며 ‘참 평화롭구나’ 하다가도,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느닷없는 파동을 만날 때 신들린 듯이 그것이 반갑습니다.
이는 작가로서 살아가는 동안, 아니 제 숨 다하는 날까지 놓치고 싶지 않은 소망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저로 하여금 응축된 시를 쓰게 하고, 차근차근 풀어가는 수필을 쓰게 하며, 질곡 심한 소설을 쓰게 하는 까닭입니다. 이 소박한 자산이 존재하는 한 저는 얼마든지 수필장르 안팎에서 문장과 씨름하며 놀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번 더 짚고 넘어가자면, 수필에 대한 호평이나 혹평은 모두 우리 수필가들이 떠안고 갈 몫입니다. 특히 일상을 뛰어 넘지 못한다는 흔한 평가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문장의 날을 벼리어 가야 할 일입니다. 그랬을 때만이 꽃 피고 새 지저귀는 아름다운 수필정원이 우리들을 에워싸고 향기를 낼 것입니다.
이상으로 장르 안과 밖에서 접근하는 수필문학에 대한 저의 두서없는 소견을 마치겠습니다.
첫댓글 수필의 본질에 대한 견해와 더불어 수필가로서 작품쓰기에 대한 자세를 잘 지적하는 좋은 글이라 하겠습니다. 수맆을 쓰는 많은 이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