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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강한남자 & 예쁜여자 원문보기 글쓴이: 르네상스.·´˝°³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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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골피'는 20대 초반 여성 솔로 가수로, 부르는 노래의 장르는 록발라드라고 한다. 장윤정의 '어머나', 이승철의 '서쪽 하늘' 등을 작사·작곡한 윤명선 프로듀서가 '마골피'의 음반 제작과 매니지먼트를 맡았다는 것과 '동방신기'의 믹키유천, '슈퍼쥬니어' 김희철·강인·신동이 마골피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한다는 소식은 알려졌지만 얼굴은 공개되지 않아 많은 네티즌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천방지축마골피 성씨 중국 유래, 임금 하사 많아" 그러나, '마골피'하면 뒤이어 '천방지축'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 흔히들 천·방·지·축·마·골·피 이 7개 성씨는 조선시대 천민들의 성씨라고 알려진 것에서 이 말이 유래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상식. 현재 주변에 '천방지축마골피' 7개 성씨 중 하나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 조상을 천민이라고 생각해선 안된다. 3만여권의 족보를 소장하고 있는 부천족보전문도서관의 김원준 관장은 "천민은 기본적으로 성씨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단언했다. 천민은 성씨를 가지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 성을 가진 사람의 조상은 천민'이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왕조시대에는 민란 등 중죄를 일으킨 이에게 동물을 뜻하는 글자를 성씨로 부여하는 일은 있었지만, 이 경우에도 그 성이 자손에게 대대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죄인임을 뜻하는 성을 자손들이 잇지 않고 다른 성으로 바꿔버리기 때문. 김 관장은 "현재 '천방지축마골피'와 같이 희귀한 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중국에서 넘어 와 정착한 이라든지 새 왕조를 여는데 공헌한 개국공신으로서 임금에게 새 성씨를 하사받은 이의 후손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 관장은 이어 "성씨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가 생겨났다가 하는 것"이라며 "족보가 대중화되는 시점부터 누가 양반이고 천민인지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다"고 강조했다. |
●‘천방지축마골피’는 잘못된 통설
그런데 희귀 성씨에는 잘못된 통설도 적지 않다. 흔히 ‘천방지축마골피’를 천계(賤系)의 대표인 것처럼 말하지만 근거가 없다. 먼저 ‘축씨’와 ‘골씨’는 1985년 조사 때의 275개 성씨 중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천씨는 ‘하늘 천(天)’자와 ‘일천 천(千)’자를 쓰는 두 경우가 있다. 천(天)씨는 조사에 따르면 밀양 등 5개 본관에 1351명이 있는데, 조선 정조 때 천명익이 진사시에 합격한 것으로 봐서 천계는 아니다. 영양 천씨(潁陽 千氏)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구원군으로 온 귀화 성씨로서 중시조 천만리가 자헌대부와 화산군에 책봉 받았으니 이 또한 천계가 아니다. 방씨도 대표격인 온양 방씨(溫陽 方氏)의 경우 중간 시조로 알려진 방운이 고려 성종 때 온수(온양)군(君)에 봉해지자 온양을 본관으로 삼은 것이다. 남양 방씨(南陽 房氏)는 고려 때 벽상공신 삼중대광보국을 역임한 방계홍을 1세 조상으로 하고 있으며, 개성 방씨(開城 龐氏)도 고려 때 원나라 노국대장 공주를 따라 온 원나라 벼슬아치 방두현을 시조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천계는 아니다. 지씨의 대표격인 충주 지씨(忠州 池氏)는 지용수(池龍壽)가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일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조선 시대 때는 문과 급제자 10명을 배출했다는 점에서 역시 천계가 아니다. 호사가들이 악의적으로 만든 것이 통설이 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 사례에 불과하다. 두 글자 이상을 쓰는 복성(複姓) 중에는 남궁(南宮)·독고(獨孤)·사공(司空)·선우(鮮于)·제갈(諸葛)·황보(皇甫)씨 등 비교적 많이 알려진 성씨 외에 강전(岡田)·장곡(長谷)·서문(西門)씨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성씨들이 있다. 이 중 서문씨를 예로 들면 안음 서문(安陰 西門)씨는 1985년 조사 때 2328명이 조사되었는데, 공민왕 때 노국대장 공주를 따라 들어온 서문기가 안음군에 봉해지면서 본관이 되었다. 발음이 희귀한 성씨로는 궉씨가 있다. 조선시대 학자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순창에 궉씨가 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으며 중국의 성이라고도 한다’는 기록이 있고, 실학자 이덕무의 앙엽기(葉記)에는 ‘선산에 궉씨촌이 있는데 선비가 많다’는 기록이 있다. 조사에 따르면 선산, 순창, 청주의 세 본관과 243명이 있다. 인구가 100명 이하인 극희귀 성씨들도 적지 않다. 사(謝)씨는 진주와 한산의 두 본관이 있는데, 1960년에 19명이 있었으나 1985년에는 4가구에 30명으로 늘었다. 삼가 삼(三嘉 森)씨는 1930년 국세조사 때는 나타나지 않은 성씨인데 1985년에는 85명이 확인되었다. 연풍, 전주, 한양의 세 본관에 66명이 있는 애(艾)씨는 1930년 국세조사 때도 있던 성씨이다. 조사 때 80명이 확인된 파평 옹씨(坡平 雍氏)는 원래 순창 옹(邕)씨였는데 1908년 민적 기재 때 옹(雍)씨로 잘못 기재되었다고 전한다. 탄(彈)씨는 조사에 따르면 진주, 해주의 두 본관에 94명이 있는데, 증보문헌비고 등에는 나타나지 않다가 1930년도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구한 말 무관학교 교관 중에 탄원기(彈元基)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전부터 실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희천 편(扁)씨는 조사에 따르면 68명이 있는데, 1930년 국세조사 때 처음 나타난 성씨로 충북 옥천에 1가구가 살고 있었다. 그 외에 51명의 연안 단(單)씨와 36명의 한산 단(端)씨 등이 있다. 조사 때 정확히 100명이었던 교동 뇌씨(喬桐 雷氏)는 강화도 교동이 연산군을 비롯해 여러 선비들의 귀양지였다는 점에서 귀양 갔던 선비의 후예로 추측된다. |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성씨와 관련하여 자신의 무지에 기인한 잘못된 상식과 낭설로 남의 성씨를 빚대어 천민이니 상놈이니 하여 비방하거나 왜곡하는 무지하고 몰지각한 사람들이 있다. 이는 해당 성씨 자손들의 피해는 물론, 곧 그 가문의 역사와 뿌리를 왜곡하는 것이며 훌륭한 조상들을 욕되게 하는 행위로서 요즘의 일본, 중국이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보다 더 치욕적이고 묵과할 수 없는 작태라 할 것이다.
이러한 작태를 아무 죄의식이나 스스럼없이 주절대는 무지랭이들은 설사 자신의 무지에 기인했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 있어서는 안될 암적 존재로서 일제청산과 더불어 하루빨리 사라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남의 귀하고 자랑스러운 가문의 역사를 한낱 무지랭이들이 이를 왜곡하거나 비방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뜻에서 여기에 관련 자료들을 수집, 정리하여 나름대로 밝은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코자 한다. 아울러 우리 스스로도 역사와 뿌리에 대하여 한번더 심사숙고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조상들의 바램에 한점 부끄러운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천방지축마골피와 賤民, 상놈과의 관계
천방지축마골피가 천민의 성씨라느니, 옜날에는 상놈이나 노비였다느니 하는 허무맹란한 속설들이 있는데 그 진위여부를 가리기 위해 우선 우리의 성씨와 천민, 상놈 노비의 개념부터 알아보자.
우리 성씨(姓氏)의 발생근원은 정확한 기록이 없어 상세히 알 수는 없으나 대략 중국 성씨 제도의 영향을 받아 고조선 시대에 왕족으로부터 사용한 것으로 전해 온다. 고대 씨족사회로 접어들면서 그 집단을 통솔하는 지배자가 나타나는데, 통솔에 필요한 정치적 기능을 부여함에 있어서 정치적 신분을 표시하는 중요한 의미로 나타났다고 본다.
따라서 성(姓)은 초기의 왕실이나 귀족에서만 국한되어 사용하다가 국가에 공이 큰 공신들이나 귀화인들에게 세거지역이나 강·산의 명칭을 따라 사성을 하면서 확대되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 성씨의 역사를 보면 일반서민들의 성씨 사용은 과거제도가 발달되는 고려 문종 이후에서부터 일부 사용되고 조선초기부터는 양민에게까지도 점차 보급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 수가 없었다.
실제 상민과 노비를 포함한 모두가 성을 갖게 된 것은 조선말 개혁정치가 시행되면서 부터이다.
우선 조선시대의 신분계급을 분류 해보면
1) 양반 : 관료경력이 4대를 넘지 않는 관료나 자손들을 총칭.
2) 중인 : 중인에는 기술관을 비롯하여 서얼, 중앙과 지방의 서리(중앙:녹사(錄事)·서리, 지방:호장·육방향리층),
군교 · 토관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잡과를 통해서 통역 · 법률 · 의료 · 천문 등의 실무에 종사하였다.
3) 양인 : 평민 또는 상민계층을 일컫는다. 농민이 주축.
4) 천민 : 공사노비(公私奴婢) · 승려 · 기생 · 무당 · 백정(白丁)
(여기서 소위 말하는 상놈이란 천민(노비)란 지칭하는 말이 아닌 양인(평민, 상민)을 양반들이 더 낮춰 상놈이라고 낮춰부른 말이며, 천민은 양반들의 눈에 사람축에도 들지 못하였으므로 상놈과 천민은 구분되어졌다.)
이러한 기준에서 볼때 당시 이미 성을 가진 신분의 사람들은 천민이나 상놈은 분명 아니며, 더구나 천한 성씨가 따로 있을수도 없는 것이다.
또 흔히 ‘천방지축마골피’를 천계(賤系)의 대표인 것처럼 말하는데, 해당 성씨들의 역사적 인물들을 보면
(1) 천(千)씨 - 천씨는 ‘하늘 천(天)’자와 ‘일천 천(千)’자를 쓰는 두 경우가 있다. 천(天)씨는 조사에 따르면 밀양 등 5개 본관에 1351명이 있는데, 조선 정조 때 천명익이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영양 천씨(潁陽 千氏)는 중시조인 천만리(충장공)가 자헌대부와 화산군에 책봉 받았다.
(2) 방(房)씨 : 방씨 대표격인 온양 방씨(溫陽 方氏)의 경우 중간 시조로 알려진 방운이 고려 성종 때 온수(온양)군(君)에 봉해지자 온양을 본관으로 삼은 것이다. 남양 방씨(南陽 房氏)는 고려 때 벽상공신 삼중대광보국을 역임한 방계홍을 1세 조상으로 하고 있으며, 개성 방씨(開城 龐氏)도 고려 때 원나라 노국대장 공주를 따라 온 원나라 벼슬아치 방두현을 시조로 삼고 있다.
(3) 지(池)씨 - 태조왕건시대에 시조 지중익이 어(魚)씨 성을 하사받아 지씨와 어씨 두 개성씨로 고려, 조선을 이어온 성씨입니다. 지씨의 대표격인 충주 지씨(忠州 池氏)는 지용수(池龍壽)가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일등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조선 시대 때는 문과 급제자 10명을 배출했다.
(4) 마(馬)씨 - 마씨(馬氏)는 삼한시대 부족국가에서 발원(發源)된 우리 나라 토착성씨(土着姓氏)로, 고대 씨족명(氏族名)을 이천여년 동안 계승해 온 유일한 성씨(姓氏)입니다. 마려(馬黎)는 마씨의 시조로 백제 온조(왕)과 함께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백제(십제국)를 건국한 백제의 건국공신이다.
목천마씨로는 고려 문종(文宗)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낸 중시조 마점중(占中)이 있으며, 장흥마씨로는 조선초 전라도 병마절제사(全羅道兵馬節制使)를 역임한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에 충정공을 하사받은 마천목(馬天牧)을 비롯하여 전후로 많은 인재들이 있다.
(5) 피(皮)씨 - 홍천 피씨의 시조는 원나라에서 금오위 상장군을 지낸 피위종(皮謂宗)으로, 충렬왕 때 우리나라에 건너와 그의 맏아들 인선(寅善)이 홍천군(洪川君)에 봉해졌으며, 조선의 개국공신 중의 한 사람이었던 득창(得昌)이 있다.
그리고 ‘축씨’와 ‘골씨’는 1985년 조사 때의 275개 성씨 중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기록들을 볼때 "천방지축마골피" 에 해당하는 성씨는 천한 성씨가 아닌 오히려 사대부 명문가이며, 소위 천한 성을 지칭한다는 속설은 전혀 근거가 없는 속설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근거없는 속설들이 통설처럼 와전되어 전해오는가?
그에 대한 근원은 정확이 알수 없으나 일부 자료에 의하면 일제 식민지 시절 한국인의 창씨개명을 유도하기 위한 일본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 순사들이 근거없이 지어내 주민들에게 퍼트린 말들이며, 이런 말들이 그럴듯하게 들리자 유식한 듯 한 일부 몰지각한 식자층에서 인용한 말들 중 하나가 '천방지축 마골피' 등등 입니다. 이 후 이러한 한민족 이간책으로 지어낸 말들이 친일파들이나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몰지각한 호사가들에 의해 지금까지 와전되어 왔다는게 현재 가장 신빙성 있는 이유일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이런 근거없는 잘못된 속설들을 마치 通說이나 지식인양 무책임하게 인용하거나 사용하는 무지하고 몰지각한 사람들이 없어야 할 것이며, 아울러 남의 귀하고 자랑스러운 가문의 역사를 한낱 무지랭이들이 이를 왜곡하거나 비방하는 일이 결코 용서되어서도 안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