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서전을 쓴다면 두꺼운 투병기 한 권이 될 것이다.
내 기억이 흘러가 머무는 곳, 그곳엔 늘 병마의 짙은 그림자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소년이 있다. 날마다 치유의 희망을 안고 잠자리에 들지만 신은 그에게 은총을 베풀지 않았다. 초등학교 문턱에 들어서기도 전에 시작된 난치병과의 투쟁은 내 나이 마흔 중반,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까지 계속되고 있다. 병을 이겨내기 위해 의사가 되고 과학자가 되고 다시 병원 레지던트로 활동하는 지금까지…. 그 기나긴 여정 내내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한글도 못 깨친 꼬맹이 시절부터 아버지가 구해오신 결핵 주사약을 들고 동네병원을 전전했다. 주사 자국으로 퍼렇게 멍든 엉덩이를 까고 눈물을 참으며 주사를 맞던 기억이 생생하고, 시내에 있는 방사선과에 가서 무시로 엑스레이 촬영을 하던 장면도 떠오른다.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 이번에는 코가 문제를 일으켰다. 콧속 염증은 재발을 거듭하며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언젠가는 축농증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당시의 수술법은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엔 벅찼다. 지금처럼 내시경으로 간단하게 하는 시술이 아니라 입 안을 절개한 뒤 광대뼈 아래쪽을 부수고 들어가는 수술법이었다. 결국 부모님은 차선책으로 콧속을 마취시키고 바늘을 넣어 콧속 농을 씻어내는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코 외에도 몸 이곳저곳에 염증이 생겼다. 온몸에서 감염성 질환이 떠날 날이 없었다.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서양의학은 내 병을 잡아내지 못했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오는 호흡기 증상과 함께 코, 귀, 기관지에 염증이 계속 발생했다. 기존 의학은 내가 가진 질병에 대해 해줄 게 없었다.
온몸 덮은 염증
내 몸에 분명 문제가 있는데도 “세균감염이 되기 전까진 손쓸 방법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서양의학. 마침내 어머니는 여린 자식을 구원할 방책을 찾아 세상을 헤매기 시작했다. 용하다는 한의사와 비방(秘方)의 명인들을 찾아냈고, 그들이 건네준 ‘명약’, 정체불명의 약물은 아무런 검증 절차 없이 고스란히 내 어린 몸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저 건강해지겠다는 일념으로 나는 그 어떤 쓰디쓴 약도 참고 삼켰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아이가 어떻게 그런 역겨운 맛과 향의 약을 불평불만 한번 털어놓지 않고 받아먹었는지 기특하기만 하다.
사진처럼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어머니 손을 잡고 기차를 타고 간 어느 시골마을, 마을에 들어서서도 한참을 걸은 후 다다른 자그마한 집, 그곳 할머니가 건넨 편지봉투 속의 작은 환약들, 그리고 그 봉투를 들고 나오며 새 희망에 부푼 어머니와 아들…. “몸을 바로잡아주겠다”며 자신 있게 쏟아내던 자칭, 타칭 명의들의 지시사항대로 한 치 틀림없이 몸을 돌봤지만, 그 어떤 비방도 내 병을 고치지 못했다. 그 ‘명약’들에 들어간 돈은 넉넉지 않은 우리집 살림을 축내고 허탈감만 안겼다.
온갖 명약과 비방을 다 써봐도 차도는 없었다. 어머니는 콧속 염증을 더 이상 방치할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나는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했다. 수술 전 여러가지 검사를 했는데 방사선 검사 결과가 좋지 않아 이비인후과에서 내과로 옮겨야 했다. 폐 엑스레이 검사 소견이 안 좋아서 일단 치료를 시작해봐야 축농증 수술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당초엔 폐렴으로 내려진 진단이 2주쯤 지난 뒤엔 ‘기관지확장증 같다’로 바뀌었다.
“서울의 큰 병원으로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세요.”
결국 폐 질환 치료를 마치지 못한 채 이비인후과로 옮겨져 양쪽 축농증 수술을 받고 병원을 나섰다.
무지막지한 진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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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병근씨(오른쪽)와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꼽는 부인 유정현씨.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대학원생 연구상을 수상하던 날 찍은 사진이다.
시도 때도 없이 닥쳐오는 염증도 문제였지만 내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 것은 걷기조차 힘든 호흡기 관련 난치병이었다. 어릴 때부터 이런 증상이 조금씩 나타났지만, 이마저도 중학교 시절 축농증 수술을 하다 우연히 발견됐다. 당시에도 의사들은 구체적인 병명을 알아내지 못하고 그저 “폐렴 같다” “기관지확장증 같다”라고 언급할 뿐이었다.
난치병과 전쟁을 치르며 나는 자연스럽게 의사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하얀 가운은 병약한 소년에게 곧 치유의 희망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힘들게 시작된 고교시절, 호흡기 증상은 일상생활을 방해할 정도로 심해졌다. 제대로 치료를 받아보자는 생각에 훗날 모교가 된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그때 만난 분이 고(故) 한용철 선생님이다. 그는 내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던 날 병원장으로 졸업식장에 나오셔서 친히 내 손을 잡아주셨다. 미래에 존경하는 스승이 될 분을 고교시절 내과병동에서 주치의로 처음 만난 것이다.
입원한 뒤에도 병실의 불을 밝히고 공부하던 내가 기특했던지, 선생님은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셨다. “여기 들어와서 의사가 되면 내 병을 고칠 수 있느냐”는 물음에 “들어만 와”라면서 환히 웃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러나 인자하신 의사선생님의 모습과 달리 그 시절의 의학은 차갑기만 했다. 서울대병원에서 내가 받은 것은 진단뿐이었다. 치료법이 없는 질환을 진단하는 과정에 몸은 더 황폐해져갔다. 아마 그때가 내 생애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순간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당시의 기관지확장증 진단법은 무시무시했다. 어떻게 그런 진단법을 만들어냈는지 의사가 된 지금도 이해하기 힘들다. 지금은 CT 촬영으로 간단하게 진단할 수 있지만, 그때는 요즘 위장관 사진을 찍을 때 흔히 들이켜는 하얀 색깔의 조영제를 기도를 통해 폐 속으로 쏟아넣고 기관지확장증 여부를 판단했다.
조영제가 기관지를 타고 흘러들어가면 자연스레 기침이 나온다. 의사들은 기침을 참으라고 한다. 기관지를 촬영해야 하기 때문에 기침을 하면 안 된단다. 의식을 잃을 만큼의 고통이 몰려와, 촬영을 마치고 나면 기진맥진 상태가 된다. 그런 다음에는 기침을 해서 조영제를 뱉어내라고 한다. 기침을 하면 하얀 조영제가 쏟아져 나온다. 검사를 받으면서 이미 탈진 상태가 됐는데, 그 기력에 기침을 하라고 한다. 며칠 터울을 두고 양쪽 폐를 촬영했는데,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시던 아버지가 나보다 더 고통스러워하셨다.
이런 진단법은 환자를 단순한 객체로 생각하는 일방통행적 의료철학의 산물이다. 진단 결과에 따라 치료법에 큰 차이가 난다거나 기존의 치료법에 변화를 줘야 한다면 모를까, 치료법도 제대로 없는 질환에 정밀한 진단만 해서 뭘 하자는 것이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쉽다.
“치료법이 없다”
서울대병원에 다녀온 후 나는 앞으로 의사가 되면 내 병을 고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고교시절을 보냈다. 고교 3년간 내가 다닌 곳은 학교, 독서실, 병원뿐. 내 고교시절은 투병과 학업이 전부였다. 3년 동안 극장 한 번 안 갔다면 요즘 젊은 친구들은 믿을 수 있을까. 어머니는 학교로 도시락을 실어 나르셨고 나는 공부에만 매달렸다. 늘 병원을 드나들며 항생제 주사를 달고 살았지만 의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버텼다. 주위의 많은 사람이 내가 고등학교 3년을 못 버틸 것이라고 염려했지만, 나는 ‘치유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붙들고 절대 쓰러지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나는 그토록 꿈꾸던 의사가 된다는 희망으로, 그래서 이제 내가 짊어진 난치의 질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쁨으로 들떴다. 관악에서 보낸 예과 시절은 고통을 잊을 수 있게 할 만큼 꿈이 차오르던 시절이다. 그런데 예과 2학년, 한창 즐거운 캠퍼스 생활에 젖어갈 무렵 내 가슴엔 긴긴 세월 씻기지 않을 생채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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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이오 주립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의 하병근씨.
저작권 협약이 체결되면 곧 의학 원서 값이 폭등할 거라고 해서 미리 사본 본과용 의학서적. 내가 가진 병에 대한 궁금증에 재빨리 넘겨본 본과 3학년용 내과 책에서, 거기에서 보지 말아야 할 부분을 보고야 말았다. 의학의 냉정하고 잔인한 선고.
‘치료법이 없다.’
나는 그 자리에서 고드름이 되어버렸다. 다시 한번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 외로움에 몸서리쳤다. 그리고 깨달았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껏 서양의학이 내게 해준 것은 더 이상의 악화를 막아보자는 소극적인 방어술일 뿐 치료법이 아니었다는 것을. 몸에 염증이 끊임없이 생겨나는데 서양의학은 늘 “염증이 더 심해지거나 완연한 감염증이라고 느끼면 병원으로 오라”고 했다. 당장도 견디기 힘든데 ‘더 힘들면 오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돌이켜보면 의대 본과시절은 친구들에게 내 병을 들키지 않으려 부단히도 애쓰던, 그래서 몸이 어느 때보다 힘들던 시절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한번은 여자친구가 가족들과 북한산 등반을 간다고 했다. 내 몸으론 산을 오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무조건 함께 가겠다고 했다. 그리 무겁지 않은 배낭을 메고 북한산 산행이 시작됐다. 숨이 차오고 머리가 아파왔지만 계속 걸었다. 중간쯤에서 여자친구가 걸음을 멈추고 “이제 정상에 오를 사람만 가자”고 했다. 그 말에 차마 나는 여기서 쉬겠다는 말을 못하고 정상을 향해 박차고 올랐다. 그렇게 올라선 북한산 정상은 참으로 신선했다. 스치는 바람이 땀을 서늘하게 씻어주는 상쾌함을 느끼며 산을 내려왔다.
산을 내려와서 함께 간 여자친구의 집. 기침을 했는데 선혈이 나왔다. 폐 속의 혈관이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린 것이다. 그때 목도한 그 시리도록 붉은 피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병원에서 환자들이 출혈을 하면 “괜찮다”는 말 한마디로 지나치곤 했지만, 정작 내 입에서 선혈이 터져 나오니 갑자기 공포가 밀려왔다.
그랬다. 내 젊은 대학생활이 그랬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져보려고, 할 수 없는 것을 해보려고 부딪치고 애썼다. 젊은 혈기, 그래서 그때 피가 그렇게 붉었던가.
의학이 떠난 자리
의과대학에 들어갔어도 치료법을 찾지는 못했다. 어머니는 여전히 전국의 명의들을 찾아다녔고, 그렇게 찾아낸 용한 의사들의 얘기를 내게 들려주셨다. 번번이 계속되는 좌절에도 포기할 수 없는 모정은 이제 의사가 다 된 장성한 아들마저 그런 사이비 명의들의 진료실에 세웠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소년이 아니었다. 의학을 알고 나서 듣는 ‘사이비 명의’들의 말은 ‘천편일률’ 그 자체였고, ‘어떻게 이런 논리를 앞세워 돈벌이를 하나’ 하는 생각에 역겨움이 밀려왔다. 그들만의 비방은 백약이 무효였다. 진료실을 돌아 나오면서 늘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했지만, 어머니의 내리사랑은 내 발걸음을 다시 그리로 이끌었다. 어느 하늘 아래 있을 또 다른 명의의 진료실을 향해.
‘난치의 질환을 짊어진 젊음’은 그렇게 자신이 의사라는 자존심마저 내던지게 했다. 함량 미달인 사이비 의료인들의 진료실을 찾고 신들린 할머니의 주문 앞에 서기도 하면서 나는 그렇게 내 등에 지워진 짐을 떨쳐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짐은 운명처럼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 무렵 여동생이 경희대 한의과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동생을 통해 한의학적 방법으로 병을 치료하는 사람들을 알게 됐고, 그들로부터 기적적인 치유 경험도 들을 수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이, 자신들이 치료하고 있는 환자가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있다며 찾아왔다. 나는 신경과 병동 입원실에서 환자에게 건네지는 한약 꾸러미를 봤다. 이를 건네받은 보호자는 의료진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연신 허리를 굽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러고선 들릴 듯 말 듯 “의사나 간호사가 보지 않을 때 몰래 한약을 먹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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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다니는 미국 교회에서 비타민C와 글루타치온에 대해 강연하는 하병근씨. 아래쪽은 가족사진(가운데가 딸 하지안).
세상에 이런 난센스가 또 있을까. 이렇게 해선 투병하는 환자에게도, 치료하는 의학에도 이로움이 없다. 서로 이해하고 마음을 열어도 치유의 길이 보일까 말까 한데 말이다. 이렇듯 동서양 의학이 반목하며 돌아선 빈 자리엔 환자만 남겨진다.
1990년 의대를 졸업한 나는 2년간 기초의학을 공부하고 1년간 임상경험을 쌓은 후 1993년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기존 의학이 하지 못한다면 내가 공부해서 직접 내 병의 치료법을 찾아내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때 내린 결론은 이랬다.
‘서양의학의 치료법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동양의학은 철학의 모호함에 안주해 정체되어 있다. 치료의학의 범주를 벗어나 현란한 보신의학의 늪으로 침잠해가는 한의학에 내가 더 기대할 게 없다.’
여행용 가방 두 개를 밀고 미국 공항을 나서며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돌아갈 때는 반드시 지금 병상에 누워 신음하는 환자들을 일으켜 세울 새로운 의학을 들고 갈 것이다.’
치유된 환자에게 답이 있다
미국에 도착한 나는 삶에 두 가지 목표를 갖게 됐다. 기존 의학에 과학의 영역을 접목한 공부를 하겠다는 게 하나이고, 나와 같이 서양의학이 손을 든 환자들이 미국에선 어떠한 치료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알아보겠다는 것이 둘째였다. 그래서 낮에는 오하이오 주립대 신경과학 박사과정을 공부하며 시험관을 잡았고, 밤에는 환자들의 의학을 배웠다.
난치병 환자들이 치유에 대해 품는 희망은 강렬하다. 그 희망에는 세상 그 무엇도 흉내 낼 수 없는 순수와 간절함이 있다. 그런 간절함은 세상을 울린다. 간구함이 열매를 맺어 이적(異跡)의 치유를 만들어낸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와 그들을 치료한 의사들의 이야기를 찾아다녔다.
의학이 아무리 부인하고 수용하지 않는다 해도 치유의 흔적은 환자들의 몸에 고스란히 남아 있게 마련이다. 현란한 수사(修辭)로 치장된 의학논문이 허위를 꾸며낼 순 있어도 환자의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치유과정에 나타난 생명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렇다면 왜?’라는 물음을 던진 후,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면 길이 열리는 법이다.
나는 새로운 의학의 버팀목이 되어줄 논리를 환자와 의사들의 체험기를 통해 열어갈 수 있었다. 도서관과 책방을 전전하며 환자들의 투병기들을 찾아 나섰고, 난치 질환을 치료해낸 의사들의 경험담도 끌어모았다. 한국에도 수많은 건강서적이 나와 있지만 의사들이 펴낸 책들은 자신을 광고하는 도구로 전락한 듯 알맹이가 없었고, 환자의 처지에서 쓴 책들 역시 감상에 치우쳐 투병에 대한 모든 자락을 보여주지 못했다.
신대륙을 발견하다
하지만 미국 건강서적의 모양새는 아주 달랐다. 과학서적을 연상케 할 만큼의 논문자료를 참고자료 목록에 올려놨고, 자신의 생각이 어디로부터 흘러나왔는지도 알려줬다. 그렇게 찾은 책들에 실린 논문자료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나를 새로운 의학의 세계로 인도했다. 나는 이들을 등대 삼아 스승도 없고 교과서도 없는 그 길에 항해를 계속했다. 효과가 있다는 제제들은 모두 내게 투여해봤다. 내 몸이 내 의학의 실험실이 돼준 것이다. 실망감만 안기고 지나치는 치료법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다양한 치료법을 경험하게 됐다.
그러던 중에 만난 것이 비타민C와 글루타치온이다. 이후 비타민C와 글루타치온은 내 의학을 끌고 가는 양대 축이 됐다. 이것들을 만나면서 ‘자연의학’이라는 궤도를 발견했다. 그 궤도 위에서 코엔자임 큐텐(Coenzyme Q10, 코큐텐)과 오메가3 지방산도 만났다. 어느 것 하나 의사가 되는 과정에서 질병 치료제로 배운 적이 없는데, 이미 이들을 치료제 삼아 환자들을 치료하는 의사가 적지 않았고, 그 결과를 보고한 논문도 많았다. 이런 제제들이 나처럼 끊임없이 만성적 염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린 이들도 있었다.
숨이 차고 가슴이 한없이 죄어오던 날 입안에 털어넣은 메가 도스(다량)의 비타민C 분말, 그리고 뱉어낼 수 없을 만큼 짙게 고인 객담을 배출하기 위해 들이켠 글루타치온 생성물질 NAC(N-Acetyl Cysteine).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 어떤 치료제에도 말을 듣지 않던 내 몸은 그들에게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논문을 찾고 비타민C로 직접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나는 서서히 비타민C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때껏 의과대학에서 배운 비타민C 지식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광활한 대자연처럼 펼쳐지는 비타민C의 세계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에 견줄 만했다. 그 신대륙은 미래의 세계에 있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 먼지를 뒤집어쓴 채 창고에서 잠자고 있었다. 비타민C를 이용한 치료법을 찾던 나는 ‘비타민C 치료법으로 소아마비를 고쳤다’는 논문이 인용된 한 저술을 보게 됐다. 그런데 그 논문의 발표시점은 1948년. 이미 반세기가 지나 있었다. 논문을 찾으러 한달음에 오하이오주립대 의대 도서실을 찾았지만 워낙 오래 전 것이라 바로 찾을 수 없었다. “창고에 보관 중”이라는 사서에게 “그래도 꼭 찾아달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얼마 후 드디어 내 손에 들어온 고전들. 반세기 전의 저널에 실린 논문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의학의 뒤안길을 따라갈 수 있었고, 주류의학이 전하지 않고 물려버린 의학의 단면을 마주하게 됐다. 소아마비 치료에서 간염을 비롯한 여러 바이러스 질환 치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비타민C 치료법이 논문으로 소개돼 있었다. 왜 이런 사실을 의사가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비타민C를 이용해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들이 있는데 왜 그들이 전하는 치료 효과는 알려지지 않은 걸까, 주류 의학이 받아들이기에 충분할 만큼의 임상례를 확보하고 있는데 왜 그동안 임상시험조차 시도하지 않은 것일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비타민C와 NAC의 기적
자연의학에 관심이 많은 과학자 마크 노블 박사를 만난 건 2001년 즈음이었다. 그와의 만남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는 로체스터 대학 교수로 줄기세포와 글루타치온 생성물질 NAC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와의 첫 만남은 내가 일하던 실험실에서 이뤄졌다. 당시 우리 실험실은 척수손상 연구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척수손상을 입은 쥐의 척수에 줄기세포를 이식해 신경조직을 재건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줄기세포에 대해 연구하던 마크 노블은 다른 과학자들이 신물질 연구에 혼을 쏟는 것과 달리, 이미 잘 알려진 물질인 NAC에 심취해 있었다. NAC는 타이레놀 과다복용으로 응급실에 실려온 환자들에게 해독제로 쓰여 더 잘 알려져 있었지만, 그는 줄기세포의 분화와 암세포 연구에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나와 마주앉은 노블은 과학 얘기도 했지만 거의 모든 시간을 비타민C와 NAC 이야기로 채웠다. 내가 개인적 체험을 토대로 비타민C에 몰입하고 있는 것처럼 노블 역시 자신의 체험을 발판으로 NAC의 효과를 재조명하고 있었다. 노블은 자신도 비타민C를 연구에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거미에 물린 경험을 들려주며 “NAC에 강력한 항산화 작용과 항염증 작용이 있다”고 했다.
“거미에 물린 적이 있어요. 심하게 부풀어 오르더군요. NAC를 투여했더니 가라앉기 시작하더군요. 이것이 NAC 효과인지 확인하기 위해 NAC를 투여하지 않자 다시 부풀어 올랐어요.”
“나도 객담을 묽게 하고 숨쉬기 편해지도록 하기 위해 NAC를 투여해봤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 무렵 나는 ‘객담을 묽게 하고 폐 기능을 돕는다’는 문헌자료를 토대로 내 몸에 NAC를 투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헌이 잘못됐는지 별다른 효험이 없었다. 내 말을 듣자 노블은 “NAC를 어디에서 샀느냐”고 물었다. 건강식품점에서 샀다고 했더니 그는 대뜸 “그런 건 쓰레기(garbage)”라고 했다. 그는 “미국에서 제대로 된 NAC를 구할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뿐이다. 그래서 나는 독일 등 유럽에 가면 오랫동안 사용할 만큼의 충분한 양의 NAC를 사온다”라며 생산회사 이름과 상품명을 가르쳐줬다. 그리고 그 독일 제제를 수입해 파는 캐나다 회사의 이름도 가르쳐줬다.
NAC는 그 자체로도 강력한 항산화물질이지만 인체에 꼭 필요한 항산화제 글루타치온을 만들어내는 물질이기도 하다. 타이레놀을 과다 복용하면 간독성이 나타나는 것도 간에서 글루타치온이 고갈되기 때문이다. 글루타치온은 유해한 타이레놀 대사 물질을 무해한 성분으로 바꿔 배출하는데, 타이레놀의 양이 글루타치온의 처리능력을 벗어날 만큼 많아지면 간세포가 부서지며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 이때 NAC를 투여하면 글루타치온을 재생시키고 새로운 글루타치온을 만들어내 간의 제독 작용을 원상복구시킨다.
왜 내게 이런 일이…
나는 노블이 알려준 곳에서 제제를 구해 투여하며 그 효과를 다시 관찰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그 고약한 객담이 묽어진 것이다. 숱한 처방약과 고가의 신약제제가 해내지 못한 일을 NAC가 해낸 것이다.
논문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결국 NAC가 나타내는 많은 작용은 글루타치온의 작용과 연결되며, 글루타치온은 세포 내에서 비타민C와 더불어 강력한 항산화 작용을 하고 세포의 건강을 책임지는 첨병 노릇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미 많은 의료인이 비타민C와 NAC를 비롯한 여러 항산화제가 난치의 만성 소모성 질환 환자들을 도울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은 사실도 알게 됐다. 그런데 정작 의사인 내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글을 쓰고 책을 펴내기 시작했다. 국민을 계몽하고 의사들을 교육하기 위해서였다. ‘신비로운 비타민C’ ‘우리집 홈닥터 비타민C’ ‘숨겨진 비타민C 치료법’ 등이 그것이다. 2003년, 드디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격무에 시달렸지만 고국에서 강연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난 것이다.
그런데 내가 꿈꾸던 의학을 내 나라에 전한다는 흥분에 나는 몸을 혹사하고 말았다. 의대 재학 시절 한달음에 산을 오르며 피를 쏟았던 그 순간처럼 나는 내가 30대 후반의 난치병 환자라는 사실을 잊고 뛰었다. 시차 적응도 안 된 상황에 서울대병원으로 달려가 선후배 및 동료 의료인들에게 강연했다. 다시 일반인을 상대로 강연을 한 후 나는 몸에 이상이 왔다는 느낌을 받았고 서둘러 미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 와서 오하이오 주립대 병원에 입원했다. 그런데 그만 이곳에서 의료사고가 났다. 의사들이 기관지 내시경 검사를 하다 폐 속의 동맥을 터뜨려버린 것이다. 그들은 터뜨린 동맥을 잡아내는 데 5시간을 허비했고, 나는 이틀간 의식을 잃은 채 중환자실에서 잠들어 있었다. 눈을 떴을 때 내 몸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 출혈로 이곳저곳에 커다란 피멍이 생겼고 얼굴과 몸은 심하게 부어올랐다. 폐 속 터진 동맥을 잡기 위해 대퇴부 안쪽을 절개하고 심장으로 향하는 카테타를 넣었는데, 첫 시도가 실패했는지 한쪽 다리에는 커다란 피멍 자국이 남았고 다른 쪽 다리에는 카테타가 그대로 달려 있었다.
사람은 양쪽 폐 중 하나만 온전해도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다. 나는 긴 세월의 투병으로 폐 하나에 해당하는 만큼의 기능을 잃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더 주저앉으려는 폐 기능을 내가 배운 의학으로 이제 막 잡아가고 있는데 그만 이런 사고가 난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후 자리에서 일어나 걸으려 하자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숨이 차올라 세수조차 할 수 없었다. 내게는 산소통이 주어졌고 그 산소통을 메지 않고는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다. 가혹한 운명의 시련은 나를 또다시 절망의 늪으로 몰아갔다.
불면의 밤이 이어졌다. 숨을 쉬는 게 너무나 고통스러워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몹쓸 생각도 했다. 수면제에 절었고 수면제가 가져다주는 유쾌하지 못한 느낌 속에서 절망의 세월을 보냈다. 왜 내게, 왜 내게…. 하려던 일을 진정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그렇게 무너져버렸다.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내 몸은 부서졌다. 성경을 붙잡고 찬송을 불렀다. 그것말고는 의지할 데가 없었다.
의료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의학의 길에서 피할 수 없는 걸림돌이기도 하다. 하지만 누구든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사람은 없다. 사고 후 남아 있는 폐 기능을 살핀 의사는 “이 정도의 폐 기능을 가진 내 환자들은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그때 나는 내가 찾은 의학을, 환자를 치료하는 임상의학으로 옮겨놓기 위해 병원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동물실험을 통해 아무리 효과를 보여줘도 환자에게 적용되지 않는 현실을 뒤집기 위해 실험실을 박차고 나오기로 한 것이다. 이런 계획을 들은 주치의는 내게 “현실적으로 생각하라(Be realistic!)”라고 했다. 그는 ‘불가능’만을 생각했다.
“약은 있다”
폐 기능 검사치의 숫자만 지켜볼 뿐 내 얼굴에 비친 투병 의지를 읽어내지 못한 의사는 자신이 배운 것만 이야기했다. 낮아진 폐 기능 검사 수치에 주눅이 든 듯, 그에게서 희망의 이야기란 찾아볼 수 없었다. 숫자의 볼모가 된 의학의 현실을 보면서 이후 나는 재활에 온 힘을 쏟았다. 숨이 턱에 차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몰려들었지만 이겨냈다. 누구도 가능하다고 생각지 않던 그 순간을 내 삶의 의지가 열었다. 재활 프로그램을 완전히 소화하고 난 후 무리 없이 걸어 다니기 시작한 나를 보고 의사는 “Possible!”이라면서 더는 내 앞길을 막아서지 않았다.
이후 나는 생을 건 전쟁을 벌였다. 불가능이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무한도전을 감행했다. 걷는 것만으로도 도전이 되는 인고의 삶. 말을 듣지 않는 몸. 그럼에도 끝없이 달려나가는 마음 그런 심신의 괴리는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왔다.
나를 무엇보다 더 견디기 힘들게 한 것은 ‘왜 내게?’라는 의문, 그리고 희망을 던져주지 못하는 의학의 고질적 패배주의였다. ‘왜 내게?’라는 물음으로 되살아나는 잔인한 기억이 가져오는 고통. 그 고통에 무뎌지는 데만 3, 4년이 걸렸다. 계단 위를 오르기 힘들어지면 주차장 건물 계단을 한달음에 달려 올라가던 예전 내 모습이 떠올랐고, 몇 걸음 옮기지 못하고 숨이 찰 땐 볼링장에서 몇 시간씩 공을 굴리며 즐거워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지금의 내 모습을 받아들이기 힘든 순간, 그 순간이 가장 힘들었다.
그 후에도 주류의학은 내게 잔인한 이야기들만 쏟아놓았다. 의사만 만나고 오면 풀이 죽어 절망감에 빠져드는 내 모습에 아내는 “더 이상 의사를 만나지 말라”고까지 했다.
“폐를 좋아지게 하는 약은 없다.”
‘다시 일어서야 한다’
내게 끊임없이 던져지던 한마디. 한계에 다다른 의학의 패배주의는 이 한마디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지금 이 말을 믿는 호흡기 내과 의사가 있다면 당장 이 모토를 지워주기 바란다. 사람이 아픈데 쓸 약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간 엄청난 연구비를 소모한 의학이 “약이 없다”라는 말만 반복하면 되는가. 정말 없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생각하는 답은 ‘아니올시다’이다. 내가 눈물로 찾은 의학에는 분명 치료약이 있다.
요즘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내가 어린시절에 느끼던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다. 숫자가 점령한 컴퓨터 의학, 머리로 하는 의학보다 가슴으로 하는 의학이 더 큰일을 할 수 있는 법인데 현대의 의학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미래를 향한 의지로 투병하는 환자들 앞에서 냉정한 숫자에 얽매여 그 희망을 꺾어버리는 ‘잔인한 조언’만은 그만뒀으면 좋으련만 의학은 내게 늘 ‘차가운 선택’만을 제시했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 해도 완전하지 않은 의학의 절대적 예견은 큰 가치가 없다. 세상에는 아직 주류의학이 알지 못하는 치료법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대체의학자의 논리도 아니고 보완의학자의 주장도 아닌, 의학을 공부한 동료·선후배 의료인들이 자신의 진료실에서 환자들을 도운 바로 그 치료법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얘기다.
웃음과 비타민C 치료법으로 난치병을 극복하고 ‘질병의 해부(Anatomy of an Illness)’라는 베스트셀러를 쓴 노먼 카슨스는 이런 말을 했다.
“의학이 당신에게 내린 진단을 결코 부인하진 마세요. 하지만 그 진단과 함께 따라 들어오는 잔인한 예후의 선고는 절대 받아들이지 마십시오(Never deny your diagnosis, but do deny the verdict that may go with it).”
2007년 2월 겨울이 다 지나가던 어느 날 오후, 의학은 내게 또 맥빠지는 이야기를 했다. “수년간 치료해왔지만 나아지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서 나빠진 폐를 다시 좋아지게 만들 약은 없다는 뜻을 내비쳤다. 나는 긴 상념에 빠졌다.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부모가 아닌 이상 다 떠난다는 그 자리, 그 긴 시간을 불평불만 없이 지켜준 아내 정현. 피아노를 치던 가녀린 몸으로 이제 어떤 궂은일도 마다않는 아름다운 사람. 함께 뛰어놀아주지 못하는 아빠를 탓하지 않고 늘 내게 따뜻하고도 어른스러운 눈빛을 보내주는 내 아이 지안이. 함박눈이 쏟아지던 어느 겨울 날, 혼자 바깥으로 나가 눈 위에 뒹굴다 어쩌다 만들어진 눈사람을 보고 마냥 좋아하던 얼굴이 눈에 선했다. 서울에 계신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고 시카고에 계신 장인, 장모님의 얼굴도 그려졌다. 나를 위해 간구의 기도를 해주던 많은 이, 병실을 찾아 기도해주시던 목사님도 스쳐갔다.
서양의학은 ‘반쪽 의학’
내 마음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랐다. 상처 받은 내 정열이, 내 희망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내 의학을 이제야 찾았는데 이렇게 주저앉을 순 없다’는 생각과 ‘내가 아니면 이 험난한 길을 걸어갈 의료인이 없을 것이다’라는 생각에 나는 다시 일어섰다. 아니 일어서야만 했다. 병상에 누운 환자들을 위해서라도 박차고 일어서야 했다.
의료사고를 당한 후 나는 주류의학의 치료법을 한걸음 물리고 내가 추구하던 의학을 다시 전면에 내세우며 새로운 투병을 시작했다. 주류의학이 한계를 보이던 날 내 의학으로 돌아와 힘찬 투병을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부숴놓은 몸이지만 이제 추스를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었고, 나를 세울 의학 역시 그간 주류의학에 의해 한지로 밀려난 바로 그 의학이었다.
내가 찾은 의학으로 힘차게 투병을 재개한 후 다시 만난 의사들은 내게 “좋아졌다”고들 했다. “어떻게 한 것이냐”는 물음에 그간의 치료법들을 알려주고 그 논리를 설명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야기를 진료기록에 꼼꼼히 적어넣는 호흡기 내과 의사도 있었다.
10여 년간 혼을 쏟아 미국에서 공부한 나의 의학은 자연의학이다. 기존의 주류의학이 크게 의존하는 신물질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눈을 돌려 나를 구원할 물질을 찾아온 길. 그 길에서 나는 의학을 다시 배웠고 왜 서양의학이 그 긴 세월 내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는지도 알게 됐다. 왜 끊임없이 염증이 지속되며, 불타오르는 내 몸에 왜 진화제를 뿌려줄 수 없었는지 그 이유도 캐냈다. 이러한 깨달음은 곧 내가 찾은 의학이 나와 같은 환자들을 도울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줬다.
서양의학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질병을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 편향돼 있어 치료법이 답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대학 문턱을 넘어서던 20여 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의 서양의학은 훨씬 화려하지만 그 뒤안길에 가려진 골은 더 깊어졌다. 그때도 고칠 수 있던 질환들은 차세대 신약들이 쏟아져 나오며 치료법이 계속 개선됐지만, 난치로 묶여 있던 질환은 여전히 난치 상태로 남아 있다.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단 말인가.
도그마를 깨라
환자는 의학의 스승이다. 의학은 환자들의 고통을 담보로 발전해왔고 그들의 고통이 밀알이 되어 성장해왔다. 그 고통에 대한 의학의 선물은 치유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 주류의학은 환자들의 고통과 시련을 새로운 치료법으로 승화시키지 못했다. 환자들의 고통은 대답 없는 메아리일 뿐. 의학의 한계라고 말하지만 그건 패배자의 변명일 뿐이다.
건강은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듯 질병을 잡아낸다고 환자의 건강이 저절로 지켜지는 것도 아니다. 건강과 질병은 0과 1의 디지털 개념이 아니라 아날로그 선으로 이어지는 연속선상의 개념이다. 그래서 의학은 질병관리와 더불어 건강관리도 함께 해줘야 사람들에게 건강한 삶을 돌려줄 수 있고 질병으로 빠져드는 것도 막아낼 수 있다.
지금 난치병으로 규정된 질환들은 대부분 서양의학이 질병관리 측면으로만 접근하다 두 손을 든 것들이다. 질병관리가 벽에 부딪히면 치료법이 없다고 널브러진다. 그래서 지금의 서양의학은 반쪽 의학이다. 질병관리가 벽에 부딪히면 건강관리로 돌아서 치료에 임해야 한다. 그런 것이 의학이고 그런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 의사다.
서양의학의 질병관리에 사용되는 물질은 대부분 신물질이다. 다국적 제약사가 ‘특허’라는 이름을 걸고 들여와 자본을 바탕으로 의학을 교육하고 진료실로 옮겨놓은 신개념의 치료제다. 이러한 신물질들은 서양의학을 발전시키는 데 커다란 기능을 해왔고 인류를 여러 질환으로부터 구원한 고마운 것들이다. 항생제와 같은 신물질 치료약들은 인류의 수명을 연장시키고 전염병의 공포로부터도 해방시켰다. 하지만 항생제의 눈부신 성공은 이후의 의학을 신물질을 이용한 공격 일변도의 의학으로, 질병관리에 편향된 의학으로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한 살생의 공격철학은 이제 서양의학의 도그마가 되어버렸다. 항암제를 보면 그런 도그마의 무한질주가 얼마나 큰 부작용을 낳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의학 교과서 역시 질병관리에만 집중했다. 신물질로 만든 치료제만이 치료약인 듯 서술돼 있다. 이로 인해 자연물을 이용한 건강관리의 중요성은 의료인의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 건강관리를 팽개치고 질병관리에만 치중하면 그 부작용은 환자의 몸으로 고스란히 받아내야 하고, 호미로 막아낼 병을 가래로 막아야 하는 역효과도 나타난다. 수술은 잘됐는데 환자가 사망했다든지, 암 조직은 항암제로 초토화시켰는데 환자의 상태가 더 악화됐다든지 하는 사례들은 결국 질병관리에 치중한 반쪽 의학의 결과다.
질병관리의 측면으로만 접근했을 때 도저히 해답이 나오지 않는 질환들이 있다. 자가면역 질환, 여러 바이러스 질환, 수십 년째 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만성 폐쇄성 폐질환들이 그러하다. 이러한 질환들은 건강관리 개념으로 돌아서 접근하면 치료의 길이 열린다. 이러한 난치 질환들이 몸 속에 뭔가 부족해서 생기는 질환이 아닌지,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면 질병을 이겨낼 수 있지 않을지를 고민하다 보면 뜻밖의 길이 열린다.
서양의학이 두 손 들고 물러나고 숱한 동양의학 대가들이 객기를 부리다 도망간 내 몸,그렇게 부서져 들어가던 내 몸을 겨우 돌려세울 수 있었던 것은 자연물을 이용한 건강관리 측면에서 내가 지닌 난치병을 들여다보고 그 해법을 찾아가다 발견한 치료약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내 몸은 그 자연물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여왔고 이러한 반응은 내 몸에서만 일어나는 특이한 반응이 아니라 이를 투여받은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자연적 현상임을 깨닫자 벅찬 감격이 몰려왔다.
씨앗보다 밭이 중요
더 이상 나와 같은 불행한 젊은이가 나와선 안 된다는 생각과 내가 겪은 잔인한 고통을 우리 아이들에게 대물림해선 안 된다는 신념으로 나는 이렇게 글을 쓰고 홈페이지(vitamincworld.ohpy.com)를 만들어 내가 찾은 의학을 알리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찾은 의학, 즉 건강관리 측면으로 접근하는 치료의학은 어떤 모습으로 설명될까.
곡식과 채소를 풍성하게 거둬들이려면 좋은 씨앗이 있어야 하고 병충해를 막아줘야 하고 농부의 부지런한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씨앗을 길러낼 토양이다. 밭에 씨를 품어낼 능력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종자를 심고 병충해를 완벽하게 차단한다 해도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없다.
서양의학은 인간에게서 씨앗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모든 질병의 원인을 씨앗에서 찾으려 들고 병충해와 같은 외부 환경에서 찾으려 한다. 씨앗을 개량하고 병충해를 막아서는 것에 서양의학은 모두 걸기를 했다. 그런 모두 걸기가 듣지 않으면 서양의학은 “치료법이 없다”고 한다. 밭으로 눈길을 돌려보면 해법의 실마리가 나타날 법도 한데 좀체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내가 미국으로 건너와 과학을 공부하던 1990년대, 의학은 유전학에 심취해 있었다. 분자생물학과 유전학으로 대변되는 현대과학의 흐름은 휴먼 게놈 프로젝트를 만들어내며 ‘유전자를 바로잡으면 질병이 치료된다’는 환상을 세상에 불어넣었다. 막대한 자본이 여기에 쏟아 부어졌고 그 자본으로 연구를 진행하던 위대한 과학자, 의학자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올해의 논문’을 쏟아냈다. 그때 인류 구원을 외치던 ‘올해의 과학자’ ‘올해의 의학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그들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이젠 다들 ‘줄기세포’가 답이란다. 유전자면 된다던 그들이 이젠 줄기세포면 모든 것이 된단다. 그리고 또 10년이 지나면 그들은 어디에 가 있을까. 밭을 이해하지 못한 유전자와 밭을 이해하지 못한 줄기세포는 환상일 뿐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누구나 안다. 농사에 견주면 밭이 바로 환경이다. 인체를 구성하는 세포 역시 자라나는 환경에 커다란 영향을 받고, 이 세포 안팎의 환경이 바뀌면 외부 자극에 대한 세포의 반응도 크게 달라진다. 음이 양이 되고 양이 음이 된다. 세상에 음양이 있듯 세포에도 음양이 있다. 세포의 음양은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도 판이하게 만들 만큼 강한 조절작용을 한다. 그런데 서양의학은 이 부분을 놓쳤다.
세포를 살려낸다
세포 내의 음양은 비타민C와 글루타치온이라는 두 가지 주요 조절물질에 의해 좌우된다. 최근 들어 항산화제가 화제에 오르면서 사람들이 비타민C에 조금씩 눈을 뜨고 있고 한국에서도 비타민C가 화두가 되고 있지만, 한국의 비타민C 이야기는 아직 예방의학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타민C는 사람이 만들어내지 못하는, 그래서 외부로부터 섭취해야 하는 항산화제로 세포 내의 음양을 조절하는 강력한 물질이다. 비타민C는 세포 안에서 혈액 속 양의 10배가 넘는 고농도로 존재하면서 음양을 다스린다.
비타민C와 더불어 또 하나의 강력한 음양조절 물질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글루타치온이다. 글루타치온은 인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강력한 항산화제이지만 외부 환경의 변화, 노화, 약물복용, 그리고 질병 등으로 인해 현저히 저하되어 있는 물질이다. 이렇게 글루타치온이 부족해진 사람에게는 인위적으로 공급해줘야 하는데 경구용으로 복용해서는 체내 흡수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초 재료, 즉 NAC를 투여해 세포 내 글루타치온의 농도를 상승시켜야 한다.
비타민C와 글루타치온으로 세포 내의 음양을 적절하게 조절해주면 세포가 살아난다. 염증에 시달리던 세포가 다시 살아나고, 무섭게 분열하던 암세포의 성장이 둔화된다. 만성 질환에 허덕이던 환자가 생기를 찾는다.
2007년 4월, 나는 10여 년간 추구해온 나의 의학을 미국 의사들에게 설명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던 나의 논리를 그들이 안아들기 시작했다. 백혈병 환자들을 세포 내 음양 조절로 도울 수 있다고 하면서 그 원리를 설명하고 참고 논문을 제시했다.
“동양에는 음양사상이 있습니다. 음양철학은 한국의 태극기 문양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여기 이 여가수의 가슴에 그려진 문양이 바로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태극문양입니다….”
음양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이방인들을 내 논리로 끌어들이기 위해 우선 태극기를 보여주려 했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변변한 태극기 이미지를 찾기 힘들어 겨우 찾아낸 것이 가수 장윤정이 2006년 독일월드컵 때 태극기 옷을 입고 한국팀 경기를 응원하며 노래하는 장면이었다.
“이러한 음양의 개념은 여러분 곁에도 늘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동양이 서양을 만납니다.”
‘East meets West’ 라는 말과 함께 펩시의 로고를 보여주니 모두가 웃었다. 이들이 내 음양론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펩시는 한국 정부에 태극문양 로열티를 줘야 한다”고 우스갯소리도 했다. “동양의 이런 철학은 여러분이 익숙한 서양의 과학과 의학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음양철학으로 세포를 다시 들여다보면 그동안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들에도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러고는 세포의 도안을 보여주고 이들이 음의 영역으로 다가섰을 때와 양의 영역으로 다가섰을 때를 초록색과 붉은색으로 각각 달리 채색해 대비시켰다.
“이처럼 우리 몸속의 세포는 음과 양의 세계를 수시로 넘나듭니다. 음양을 넘나드는 세포는 그들이 그 음양선상의 어느 곳에 서 있는지에 따라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이 달라집니다. 이러한 세포 속 음양은 여러분이 익숙한 서양의 과학으로는 리독스(redox)로 풀어낼 수 있습니다. 환원을 의미하는 리덕션(reduction)에서 ‘red’ 세 글자를 가져오고, 산화를 의미하는 옥시데이션(oxidation)에서 ‘ox’ 두 글자를 가져와 조합하면 ‘redox’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세포가 갖는 산화 환원의 지표이고 동양철학이 말하는 음양입니다.”
이방인들의 눈이 열리고 동양의 음양이 자연스럽게 서양의 리독스로 풀어지면서 내 이야기는 이들의 머릿속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암세포는 미친 듯 세포분열을 계속하며 자기복제를 합니다. 이런 암세포는 양의 기운이 넘쳐나는 세포들입니다. 그래서 산화 환원 지표인 리독스 역시 산화상태에 치우쳐 있습니다. 이러한 양의 기운을 음으로 대체하면 뜻밖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양의 기운이 넘쳐 분열하는 암세포의 환경을 환원상태로 전환하면 암세포는 분열을 멈춥니다. 세포 내에 음기운을 불어넣으면 분열하던 세포는 분열을 멈추고 분화하게 됩니다.”
세포 내의 산화환원을 조절해 암세포와 줄기세포의 성장을 조절할 수 있다는 기존의 연구결과를 보여주고 “앞으로의 암 치료법은 암세포를 죽이는 데에만 집착하는 단편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차세대의 암 치료법은 음양조절을 통해 세포라는 밭을 전환하는 새로운 접근법도 안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이곳 병원으로부터 백혈병 환자들의 혈액을 이용해 실험을 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내가 추구하는 ‘리독스의 음양론’을 미국 땅에서 실존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서막이 열린 셈이다. 나는 이 연구에 온 정열을 바쳐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십년째 난치병, 불치병으로 낙인찍힌 자식을 구원하기 위해 전국의 명의를 찾아 헤매고 있을 수많은 모정(母情)이 있고, 치유의 희망을 간구하며 눈시울을 적시고 있을 조국의 젊음이 눈에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의학의 잔인한 한마디에 상처 받은 가슴들을 데워주고 이 땅의 의학에 희망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나는 목숨을 걸고 달릴 것이다.
의학의 본질은 ‘사랑’
마지막으로 내 나라의 의학과 의료인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내가 진정 난치병 환자들을 도울 수 있는 치료법을 가장 많이 배운 곳은 의학교육을 받은 서울대 의대도 아니고, 과학교육을 받은 오하이오 주립대도 아니며, 지금 일하고 있는 메트로헬스 메디컬센터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치유의 희망을 간구하는 환자로서 내 스스로의 모습과 이를 차마 저버릴 수 없었던 의사로서의 내 모습이었다. 냉철한 머리로 하는 의학보다 뜨거운 가슴으로 하는 의학이 더 큰 것을 보게 해준다는 것을 전하면서 내가 늘 가슴속에 담고 사는 말 한마디를 옮겨본다.
“Cure Sometimes, Heal Frequently, Help Every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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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병근 ● 1966년 부산 출생 ● 서울대 의대 졸업,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박사(신경과학) ● 現 미국 클리블랜드 메트로헬스 메디컬센터 레지던트(병리학) ● 2007년 월간 문학세계 신인문학상 ● 저서 : ‘히포크라테스의 번민’ ‘비타민 박사의 비타민C 이야기’ ‘신비로운 비타민C’ ‘우리집 홈닥터 비타민C’ ‘숨겨진 비타민C 치료법’ | |
의학은 때로 환자를 완치시키고, 자주 치유하지만, 늘 환자들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완치를 바랄 수 없다고, 치유를 기대할 수 없다고 환자에게 “해줄 게 없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의사가 되던 날 가슴에 손을 얹고 선서한 히포크라테스 정신과도 거리가 멀다. 병상에서 의사가 쥐어주는 따뜻한 손길, 그 손길 하나에도 두려움이 걷어지는 여린 사람들이 바로 환자이고, 의사의 따뜻한 눈길 하나에서도 희망을 찾는 사람들이 환자다. 희망이 살아 숨쉬는 곳이나 두려움이 몰려드는 어두운 공간에서나 그 어느 순간에도 의학은 환자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의학이고 그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우리들이다.
치료법이 없다면 공부하자. 현재의 의학이 던져놓은 그 좁은 텍스트만 부여안고 있지 말고 새로운 의학을 찾아보자. 우리가 배운 의학은 반쪽일 뿐. 그렇다면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가야 한다. 그 길에서 우리는 환자를 도울 수많은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의학은 그 본질 자체가 사랑에서 출발한다. 무엇으로도 흉내 낼 수 없는 그 무한의 사랑 앞에 불가능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