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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 사라진 편지 백 통
수요일 오전 열 시.
은솔우체국 앞에는 창립 50주년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스무 해를 건너온 편지
2006년의 내가 2026년의 나에게
20년 전 은솔우체국은 주민 백 명에게 미래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받았다. 편지들은 개봉하지 않은 채 나무상자에 보관되었다.
그리고 창립기념일인 오늘, 편지를 쓴 사람들에게 돌려줄 예정이었다.
은솔신문 기자 한서윤 세실리아는 행사 취재를 위해 아침 일찍 우체국을 찾았다.
“편지를 공개해서 읽는 행사인가요?”
우체국장 윤대식 바오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편지는 작성한 분께 그대로 돌려드립니다. 돌아가신 분이나 연락이 끊긴 분의 편지는 가족과 상의해 처리할 예정이고요.”
“20년 전에 쓴 편지를 읽으면 기분이 묘하겠어요.”
“꿈을 이룬 분도 계실 것이고,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 분도 계시겠지요.”
윤대식은 편지를 보관해둔 2층 기록실로 한서윤을 안내했다.
그런데 기록실 문을 연 순간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방 한가운데 있어야 할 나무상자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군요.”
“상자를 다른 곳으로 옮기셨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윤대식은 보관장을 차례로 열어보았다.
편지 백 통이 든 상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바닥에는 끊어진 붉은 봉인 끈만 떨어져 있었다.
“편지가 사라졌습니다.”
은솔경찰서 이도현 형사는 신고를 받고 우체국에 도착했다.
우체국 직원들과 행사 관계자들이 이미 2층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도현은 사람들을 물러나게 한 뒤 현장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상자를 본 시간이 언제입니까?”
우체국장이 대답했다.
“어제 오후 여섯 시입니다. 제가 직접 봉인을 확인했습니다.”
“기록실 열쇠는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저와 기록 담당 직원, 시설관리 담당자까지 세 명입니다.”
“강제로 문을 연 흔적은 없습니다.”
한서윤이 물었다.
“편지를 훔쳐서 어디에 쓰려는 걸까요?”
“다른 사람의 과거를 알아내거나 협박에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형사님, 너무 무섭게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이 제 일입니다.”
그때 우체국 직원 한 명이 급히 올라왔다.
“국장님, 이상한 전화가 왔습니다.”
“무슨 전화입니까?”
“시장의 생선 가게 앞에서 오래된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답니다.”
이도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잠시 뒤 두 번째 전화가 걸려 왔다.
이번에는 은솔초등학교 운동장 벤치에서 같은 모양의 편지가 발견되었다.
세 번째 편지는 5년 전 문을 닫은 빵집 출입문 앞에 놓여 있었다.
사라진 편지들이 은솔시 곳곳에서 한 통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시각 은솔성당.
김맑음 프란치스코 신부는 고해소 앞에 떨어진 봉투 한 장을 발견했다.
누렇게 변한 봉투에는 붉은 밀랍 도장이 찍혀 있었다.
앞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2006년의 정희숙이
2026년의 정희숙에게
신부님은 봉투를 집어 들었지만 열어보지는 않았다.
그때 성당 안으로 오미자 안나 사목회장이 들어왔다.
“신부님, 그게 무엇입니까?”
“누군가 고해소 앞에 편지를 놓고 갔습니다.”
“신부님께 온 편지인가요?”
“아닙니다.”
오미자가 봉투를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내용을 확인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다른 분의 편지를 함부로 열어볼 수는 없습니다.”
“사건의 단서일 수도 있잖아요.”
“그래도 수신인이나 경찰이 확인해야 합니다.”
오미자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신부님께서는 추리를 좋아하시면서 이런 때는 너무 원칙적이세요.”
“추리를 좋아하는 것과 다른 분의 편지를 읽는 것은 관계가 없습니다.”
그때 최병철 베드로 사무장이 휴대전화를 들고 달려왔다.
“신부님, 은솔우체국에서 오래된 편지 백 통이 사라졌답니다.”
오미자는 고해소 앞의 봉투를 가리켰다.
“그중 하나가 여기까지 왔나 봐요.”
김맑음 신부가 봉투를 자세히 살폈다.
“이 편지의 수신인인 정희숙 자매님은 우리 본당 교우입니다.”
“어디에 계십니까?”
“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십니다.”
최병철이 말했다.
“편지를 우체국에 돌려줘야겠습니다.”
김맑음 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경찰에 연락하겠습니다.”
잠시 후 이도현과 한서윤이 은솔성당에 도착했다.
사람들 앞에서 이도현은 김맑음 신부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신부님, 편지를 발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고해소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도현은 장갑을 끼고 봉투를 확인했다.
“신부님, 이번에는 편지를 발견하셔도 열어보시면 안 됩니다.”
“이 형사님, 다른 분의 편지를 읽을 생각은 없습니다.”
“금고 손잡이를 먼저 집어 드셨던 일이 있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일은 이미 충분히 반성했습니다.”
한서윤이 두 사람의 대화를 수첩에 적었다.
이도현이 물었다.
“한 기자님, 무엇을 적고 계십니까?”
“‘지난 사건 이후 증거를 만지지 않는 법을 배운 탐정 신부.’”
김맑음 신부가 말했다.
“기자님, 저는 탐정이 아닙니다.”
“그 말씀도 함께 적겠습니다.”
오미자가 작은 목소리로 한서윤에게 말했다.
“제보자는 저라고 써주세요.”
“안나 회장님.”
김맑음 신부가 부르자 오미자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한서윤은 고해소 옆의 작은 탁자를 살피다가 그 아래에 봉투 하나가 더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첫 번째 봉투와 달리 비교적 깨끗한 흰색 봉투였다.
“여기 편지가 한 통 더 있어요.”
이도현이 봉투를 확인했다.
붉은 밀랍 도장도 없었고, 은솔우체국의 보관번호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런데 수신인을 본 한서윤의 표정이 달라졌다.
“이 편지의 수신인이 신부님이에요.”
김맑음 신부가 봉투를 받아 들었다.
겉면에는 분명히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스무 살의 김맑음에게.
늘 차분하던 신부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20년 전이면 신부님께서 스무 살이었을 때네요.”
한서윤이 말했다.
“하지만 저는 당시 은솔시에 살지 않았습니다.”
“그럼 왜 은솔우체국의 편지들과 함께 발견됐을까요?”
이도현이 봉투를 살폈다.
“이 편지에는 보관번호가 없습니다. 사라진 백 통에 포함된 편지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김맑음 신부는 봉투의 글씨를 바라보았다.
낯익은 필체였다.
단정하면서도 마지막 획이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 글씨.
신부님은 그 글씨를 오래전 수없이 보았다. 성적표와 가정통신문, 학생들에게 나눠준 학습자료에 적혀 있던 글씨였다.
“이 글씨를 알고 계십니까?”
이도현이 물었다.
김맑음 신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의 글씨입니다.”
편지는 김맑음 신부 앞으로 온 것이었다.
하지만 발신인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경찰은 신부님의 동의를 받은 뒤 봉투를 개봉하기로 했다.
이도현이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편지 대신 작은 메모 한 장만 들어 있었다.
‘시계가 멈춘 곳에서 나머지를 찾을 수 있다.’
오미자가 말했다.
“시계가 멈춘 곳이라면 은솔우체국 시계탑 아닐까요?”
은솔우체국 옥상에는 오래된 시계탑이 있었다.
몇 달 전 기계 장치가 고장 나 지금은 오후 네 시 십 분에 멈춰 있었다.
한서윤은 곧바로 카메라를 들었다.
“우체국으로 가봐야겠어요.”
이도현이 말했다.
“한 기자님은 경찰보다 먼저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저는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씀하시고 통제선 바로 앞에 계셨습니다.”
“앞이지, 안은 아니었잖아요.”
이도현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은솔우체국 시계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이도현과 경찰관이 먼저 올라갔다. 김맑음 신부와 한서윤은 허락을 받은 뒤 그들을 따라갔다.
시계 장치 아래에서 낡은 나무상자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상자 안에는 편지가 없었다.
대신 오래된 학생증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은솔고등학교 3학년 2반
정태호
흑백사진 속에는 교복을 입은 젊은 남학생이 있었다.
김맑음 신부는 학생증을 보고 놀랐다.
“정태호 선생님입니다.”
“신부님의 담임선생님께서 은솔고등학교를 졸업하셨습니까?”
한서윤이 물었다.
“저도 몰랐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자신의 고향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으셨습니다.”
학생증 뒷면에는 주소가 적혀 있었다.
은솔시 성당길 28
은솔성당에서 두 골목 떨어진 곳이었다.
학생증 아래에는 은솔우체국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있었다.
백 명의 이름 끝에 연필로 한 사람의 이름이 따로 적혀 있었다.
101. 김맑음―별도 보관
“백한 번째 편지가 실제로 있었군요.”
이도현이 말했다.
경찰은 사라진 편지들이 발견된 장소를 지도에 표시했다.
생선 가게에서 발견된 편지의 주인은 20년 전 그 가게에서 일했던 사람이었다.
학교 운동장의 편지는 당시 은솔초등학교 교사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폐업한 빵집 앞의 편지는 그곳에서 첫 직장생활을 했던 여성이 쓴 편지였다.
고해소 앞에 놓인 편지의 주인 정희숙은 오랫동안 은솔성당에서 봉사한 교우였다.
“편지는 아무 곳에나 놓인 것이 아닙니다.”
김맑음 신부가 말했다.
“편지를 쓴 사람이 가장 오래 기억하는 장소에 배달되고 있습니다.”
“누군가 편지 내용을 알고 있다는 뜻일까요?”
한서윤이 물었다.
“봉투 겉면에 주소 대신 각자가 20년 뒤 받고 싶은 장소를 적게 했답니다.”
우체국장 윤대식이 옛 행사 안내문을 가져왔다.
당시 참가자들은 현재 주소가 아닌 ‘미래에 꼭 다시 가보고 싶은 장소’를 적었다.
시장, 학교, 빵집, 은솔성당.
편지가 발견된 장소와 모두 일치했다.
이도현이 물었다.
“20년 전 이 편지들을 직접 접수한 직원이 누구입니까?”
윤대식은 옛 근무 기록을 확인했다.
“고대식 집배원입니다. 지난달에 정년퇴직하셨습니다.”
“오늘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침부터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고대식은 은솔시에서 35년 동안 집배원으로 일했다.
골목길과 집집마다 사는 사람들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우체국 CCTV에는 전날 밤 고대식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퇴직 전에 반납해야 할 보조 열쇠를 아직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나무상자를 손수레에 싣고 우체국을 빠져나갔다.
오미자가 말했다.
“결국 집배원 아저씨가 편지를 훔친 거네요.”
김맑음 신부가 고개를 저었다.
“편지를 가져간 것은 맞지만, 훔치려는 목적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왜 몰래 가져갔을까요?”
“원래 약속대로 직접 배달하려 했을 겁니다.”
우체국은 창립기념 행사를 위해 편지를 한꺼번에 돌려줄 계획이었다. 하지만 일부 편지 작성자는 은솔시를 떠났고, 어떤 사람은 연락처가 바뀌었다.
고대식은 20년 전 편지를 받을 장소까지 직접 찾아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퇴직한 뒤에도 그 약속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허락 없이 가져간 것은 잘못입니다.”
이도현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좋은 뜻이라고 해서 절차를 무시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김맑음 신부가 대답했다.
경찰은 고대식이 사용하던 옛 배달 경로를 따라갔다.
그는 산동네의 폐쇄된 작은 우편취급소에서 발견되었다.
고대식의 옆에는 편지가 가득 든 우편 가방이 놓여 있었다.
이도현이 다가가 말했다.
“고대식 선생님, 우체국에서 가져온 편지들을 확인하겠습니다.”
고대식은 놀라지 않았다.
“올 줄 알았습니다.”
“왜 편지를 가져가셨습니까?”
“약속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는 20년 전 주민들에게 말했다.
“스무 해가 지나면 제가 직접 여러분이 원하는 곳으로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편지를 우체국 강당에 모아 한꺼번에 나눠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하면 그냥 기념품을 돌려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우체국장에게 먼저 말씀하셨어야 합니다.”
“행사 일정 때문에 안 된다고 할 것이 뻔했습니다.”
이도현은 차분하게 말했다.
“선생님의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편지를 허락 없이 가져가면 분실이나 훼손 사고가 생길 수 있습니다.”
고대식이 고개를 숙였다.
“제 생각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우편 가방 안에는 아직 배달하지 않은 편지 아흔세 통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이미 발견된 일곱 통까지 합치면 정확히 백 통이었다.
그런데 김맑음 신부 앞으로 온 편지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제 편지는 어디에서 발견하셨습니까?”
김맑음 신부가 물었다.
고대식은 잠시 신부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태호 선생님께서 따로 맡기신 편지입니다.”
정태호는 은솔시 출신이었다.
교사가 되어 다른 도시로 떠난 뒤 김맑음과 이도현의 고등학교 담임을 맡았다.
2006년 고향을 방문한 그는 은솔우체국의 미래 편지 행사에 참여했다.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 대신 제자 김맑음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겼다.
“선생님께서는 스무 해 뒤 김맑음 학생에게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고대식이 말했다.
“왜 우편으로 보내지 않으셨을까요?”
“당시에는 전하고 싶지만 직접 보내기는 어려운 말이라고 하셨습니다.”
정태호는 몇 해 전 교직에서 은퇴한 뒤 은솔시 외곽의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었다.
건강은 나쁘지 않았지만 다리가 불편해 외출이 어려웠다.
“제가 선생님의 편지를 성당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고대식은 편지만 놓고 오면 김맑음 신부가 알아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편지 속에는 장소를 알리는 메모만 있었고, 정작 본문은 정태호가 보관하고 있었다.
“선생님께서 직접 만나 전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김맑음 신부와 이도현은 정태호를 찾아갔다.
정태호는 두 사람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함께 있었기에 이도현은 담임교사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선생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현이는 형사가 됐고, 맑음이는 정말 신부가 되었구나.”
김맑음 신부가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그동안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각자 해야 할 일을 하며 살았으면 된 거지.”
정태호는 서랍에서 편지 한 통을 꺼냈다.
봉투에는 오래전과 같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스무 살의 김맑음에게.
“신부님께서는 이미 마흔 살이 되셨습니다.”
이도현이 말했다.
정태호가 웃었다.
“스무 살에 전하고 싶었던 편지가 스무 해나 늦었구나.”
김맑음 신부는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편지를 펼쳤다.
편지에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김맑음과 나눈 대화가 적혀 있었다.
당시 김맑음은 사제가 되고 싶다는 뜻을 담임교사에게 밝혔다.
정태호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너무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그 어려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겠니?’
선생님에게는 걱정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어린 제자에게는 자신의 선택을 믿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렸다.
정태호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맑음아.
선생님은 네가 실패할까 걱정한다는 이유로 네가 가진 용기부터 의심했다.
너를 보호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네 마음을 아프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스무 살의 네가 이 편지를 받는다면 말해주고 싶다.
네가 선택한 길을 성실히 걸어가거라.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제가 되려고 애쓰기보다, 힘든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제가 되면 좋겠다.
혹시 다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것은 실패가 아니다.
진심으로 선택하고 책임 있게 살아간다면 선생님은 너를 응원할 것이다.
김맑음 신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선생님께서 그 말씀을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나는 오래 기억했지. 너무 차갑게 말한 것 같아서 마음에 남았다.”
“저는 선생님 말씀 덕분에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정태호가 신부님의 손을 잡았다.
“그래도 미안했다.”
“선생님, 괜찮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정태호는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네가 걸어온 이야기를 들려다오.
김맑음 신부가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 천천히 들려드리겠습니다.”
요양원을 나왔을 때는 해가 기울고 있었다.
한서윤과 다른 사람들은 먼저 돌아가고, 주차장에는 김맑음 신부와 이도현만 남았다.
둘만 남자 이도현이 편안한 말투로 물었다.
“맑음아, 정말 네가 쓴 편지가 아니었구나.”
“도현아, 내가 내 이름을 저렇게 반듯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으냐?”
“하긴 네 글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알아보기 힘들었지.”
“네 글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형사가 된 뒤로 보고서를 많이 써서 좋아졌다.”
“컴퓨터로 작성하지 않니?”
이도현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김맑음 신부가 웃었다.
“그런데 도현아.”
“왜?”
“선생님 학생증은 네가 보관해 드리는 게 좋겠다.”
“왜 내가?”
“학창 시절에 선생님께 가장 많이 불려 갔던 학생이 너였으니까.”
“네가 지각할 때마다 기다려주느라 같이 불려 간 거잖아.”
“나는 지각한 기억이 별로 없다.”
“한 달에 세 번씩 했어.”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거다.”
“선생님께 다시 여쭤볼까?”
“굳이 오래된 기억까지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학창 시절 이야기로 웃었다.
우체국으로 돌아온 편지 백 통은 원래 주인들에게 안전하게 전달되었다.
우체국은 행사를 하루 미루고, 편지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은 채 각 수신자가 선택한 장소에서 돌려주기로 했다.
고대식도 우체국 직원들과 함께 배달에 참여했다.
이번에는 허락을 받고 정식으로 나섰다.
정희숙 자매의 편지는 김맑음 신부가 고대식과 함께 요양병원으로 가져갔다.
정희숙은 20년 전 자신이 쓴 봉투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그때는 스무 해가 아주 멀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왔네요.”
“편지를 읽어드릴까요?”
김맑음 신부가 물었다.
정희숙은 봉투를 가슴에 품었다.
“아니요, 신부님. 이것은 혼자 천천히 읽어볼게요.”
“그러십시오.”
“대신 다 읽고 나면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언제든 듣겠습니다.”
주일 미사 강론에서 김맑음 신부는 약속에 관해 이야기했다.
“약속은 좋은 마음만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뜻을 존중하고, 옳은 방법을 선택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고대식은 성당 뒤편에 앉아 조용히 말씀을 들었다.
“때로는 너무 늦게 도착한 말도 있습니다. 사과와 감사, 사랑과 용서의 말입니다. 그러나 늦었다고 해서 영영 전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태호가 쓴 편지는 스무 해나 늦게 도착했다.
하지만 그 편지는 한 제자에게 자신이 선택한 길을 다시 돌아보게 했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스승과 제자를 다시 이어주었다.
미사가 끝난 뒤 박복례는 사제관 식탁에 따뜻한 칼국수를 차렸다.
이도현과 한서윤도 함께 자리했다.
복례가 김맑음 신부에게 물었다.
“신부님, 선생님께서 편지에 무엇이라고 쓰셨어요?”
“힘든 사람의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제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말씀이네요.”
한서윤이 수첩을 꺼냈다.
“기사에 인용해도 될까요?”
김맑음 신부가 고개를 저었다.
“그 편지는 저와 선생님 사이의 편지입니다.”
한서윤은 곧바로 수첩을 덮었다.
“알겠습니다.”
이도현이 말했다.
“한 기자님께서 이렇게 빨리 포기하시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
“저도 읽으면 안 되는 편지는 구별합니다.”
오미자가 부엌에서 나오며 말했다.
“저는 신부님께서 학교에서 지각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김맑음 신부가 이도현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함께 있었기에 이도현은 공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신부님께서 가끔 아침 시간을 넉넉하게 사용하셨습니다.”
“도현 씨, 표현이 조금 이상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사실을 부드럽게 말씀드린 겁니다.”
복례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아침에 알람을 세 개나 맞추시잖아요.”
“어머니, 칼국수가 불겠습니다.”
“신부님 이야기를 하니까 갑자기 국수 걱정을 하시네요.”
식탁 주위에 웃음이 퍼졌다.
사라진 백 통의 편지는 모두 주인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백한 번째 편지는, 사실 오래전부터 도착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회 예고
제12화 ― 「두 명의 신부와 사라진 반지」
은솔성당에서 젊은 연인의 혼인미사가 열리는 날.
신부 대기실에서 결혼반지가 감쪽같이 사라진다.
오미자가 성당 복도를 달리며 소리친다.
“신부님! 신부가 사라졌어요!”
김맑음 신부가 놀라 묻는다.
“어느 신부님이 사라지셨다는 말씀입니까?”
“결혼하는 신부 말이에요!”
“그분은 신부님이 아니라 신부입니다.”
“지금 그게 중요해요?”
반지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네 명.
신랑의 어린 조카.
사진사.
웨딩드레스 수선사.
그리고 혼인미사를 집전할 김맑음 신부.
사람들 앞에서 이도현 형사가 정중하게 말한다.
“신부님도 확인을 위해 잠시 여쭤보겠습니다.”
“이 형사님, 설마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신부님 주머니에서 반지 상자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상자 안에는 반지가 아닌 작은 단추 하나만 들어 있다.
혼인미사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40분.
웨딩드레스 자락에 묻은 은빛 가루.
제대 아래에서 발견된 장난감 자동차.
그리고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한 신랑의 편지.
둘만 남은 순간 이도현이 묻는다.
“맑음아, 정말 반지 상자를 네가 넣은 것이 아니냐?”
김맑음 신부가 빈 상자를 바라본다.
“도현아, 내가 찾아야 할 것은 반지가 아니라 반지를 숨긴 사람의 마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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