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환상문학의 전통이 단테에 이르러 갑자기 끊어지자, 이에 대한 대안으로 소설 문학fiction이 생겨났다. - 사실주의적 소설 문학이 요청되고 씌어지기 까지는 여러 세기가 걸렸다. 끔찍하고 영원한 지옥을 소유하고 '지배했던'교회에 대항하여 소설 문학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했다. 단테는 고전적인 하데스를 이용해서 그 목적을 이루는 방식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 당시 유럽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던 베르길리우스 의 '아에네이스'는 시인들에게 광맥과 같은 것이었고, 그들은 그것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 용했다. 14세기에서 17세기까지 이탈리아 서사시, 기사 시가에서는 이야기 전개에서 지옥 여행을 중심적으로 그리는 것이 유행이었다. 단테의 작품들과는 달리 이런 시들 대부분은 완전히 세속적이었고, 그들이 탐구한 지옥 이미지는 기독교적 전통보다는 베르길리우스나 오비디우 스에 더 가까웠다. 그런 것들이 족히 수십편은 되었다.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꼽히는 작품으 로는, 사라센 사람들에 대항해 싸운 샤를마뉴의 용장 롤랑 이야기를 환상적으로 각색하고 거기에 지옥의 리디아 이야기를 그린 로도비코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올란도Orlando Furioso'(1532)와, 제 1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인 토르쿠아토 탓소의 '해방된 예루살렘 Jerusalem Delivered'이 있다. '해방된 예루살렘'은 천상의 전투를 다루고 있으며, 여기서 사 탄은 플루토라고 불린다. 지하세계의 모험 이야기는 이탈리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에서는 샤를마뉴의 조부인 샤를 마르텔이 지옥으로 가는 오래된 전설이 나중에 기사도 소설(로망스)로 각색되 었다. 12세기경에 씌어진 것으로 보이는 '샤를 마르텔과 그 후계자들의 역사History of Charles Martel and His Successor'에서 샤를은, 자신의 말썽쟁이 서자를 안내자인 마법사 와 함께 지옥으로 보내 루시퍼에게 가서 경의의 표시로 공물을 받아오도록 명한다. 물론 그 것은 성사되고, 샤를은 자신이 직접 지옥을 방문해 충성을 다짐받는다. 좀더 후기 작품이면 서 가장 일찍 단테를 모방한 것으로 알려진 프랑스의 '오베르뉴의 위옹Huon of Auvergne' 은, 샤를 마르텔 설화에 켈트족의 로망스 주제들을 섞은 작품이다. 여기서는 샤를이 위옹의 아이네아스와 오랑즈의 윌리엄과 동행해서 지옥의 여러 광경들을 보고 직접 벌도 받으면서 정력적으로 여행을 하다가, 샤를 마르텔의 의도에 담긴 진의를 발견한다. 루시퍼는 샤를 마 르텔의 가신이 되는 데 동의하고, 조공으로 천 마리의 황금 새들과 왕관, 반지, 휘황찬란한 가마를 바친다. 이 마법의 가마는 물론 샤를 마르텔을 곧장 지옥으로 날라다 준다. 그리고 이즈음부터는 요정 나라Fairland의 이미지가 그 동안 지옥이 담당했던 전통적인 역할을 이어받기 시작한 것이 분명하다. 13세기말에 씌어진 '오르페오 경Sir Orfeo'이라는 영국의 시는, 12세기 후반 프랑스의 여자 시인인 마리 드 프랑스가 쓴 '오르페의 시Lai d'Orphee'를 모방했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특별한 설명도 달지 않은 채 지옥이 요정 의 나라로 바뀌어 나타난다. 그리고 하프를 잘 타는 왕자 오르페오 경(플루토 왕의 아들이 자, 유노 왕의 아들)이 요정들에게 빼앗긴 아내 헤우로디스(에우뤼디케)를 찾아가는 곳도 이 괴상하고 복합적인 장소였다. 이 요정들은 사냥개로 사냥을 즐기고 송골매로 매사냥을 하며 "기이한 복장으로 춤을 추 는dauncing in queynt atire"중세 궁정 풍의 요정들이다. 그러나 이 시인은 (마리 드 프랑스 에게 경의를 표하면서도) 오비디우스와 베르길리우스에게서 소재를 찾았다. 오르페오 경이 유랑하는 음유시인을 가장하고 성의 뜰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무시무시한 '잠든 자들'의 무리를 보게 된다.
어떤 이들은 머리가 없이 걸어다니고, 어떤 이들은 팔이 없고, 어떤 이들은 온 몸이 상처투성이고, 어떤 이들은 미쳐 날뛰고, 어떤 이들은 말 위에 무장해 있고, 어떤 이들은 밥 먹다가 목 졸려 죽고, 어떤 이들은 목말라 시달리고, 어떤 이들은 불에 타 일그러져 있고, 그런 와중에 아낙네들은 해산을 하고, 어떤 이들은 죽어 있고 어떤 이들은 돌아 버렸고, 놀랍게도 그 옆에선 사람들이 누워 있다. 한창 때 잠들어 버린 모습 그대로
그리고 그들 가운데 에우뤼디케가 나무 아래 누워 있다. 오르페오 경은 아내를 되찾기 위 해 요정의 왕 앞에서 하프를 연주하고, 아내와 함께 성으로 돌아오는 해피엔딩을 맞는다. 그곳이 무시무시한 기독교적 지옥이었다면 오르페오 경은 그곳에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요정 나라는 지옥에 대한 불가피한 대안이었다. 지옥과 요정의 나라가 서로 긴밀해지기 시 작했다는 증거는 귀족의 위탁으로 만든 성무일과서Books of Hours와 임람에 실린 삽화에도 나타난다. '에어셀던의 토마스Thomas of Erceldoune'라는 로망스에서는 어떤 기사가 신비로 운 여인과 어둠 속을 사흘 간 여행하다가 천국, 연옥, 지옥, 요정 나라로 통하는 네 길을 본 다. 12세기 말엽에 프랑스어로 처음 번역된 '아에네이스'에서 시뷜레는 마녀로, 아이네이아스 는 중세 봉건 기사로, 케르베로스는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발과 긴 팔, 그리고 개 모습의 머 리를 세 개나 지닌 악마로 그려진다. '요정의 여왕The Faerie Queene'은 중세의 흥성기에 씌어진 우의적 로망스 서사시 romance-epics의 금자탑으로서, '비극적, 희극적, 역사적, 목가적'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단테와 마찬가지로 에드먼스 스펜서는 이미 전성기를 맞았던 이 문학 양식을 반추하고서 그 장르를 종합하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했다. 단테가 방언을 사용하는 데 있어 전위적인 역할 을 했다면, 스펜서의 서사시는 의도적으로 고풍스런 언어를 사용하였다. 그는 아서 왕 설화 에 영국 신화를 더함으로써 영국 서사시를 이탈리아 양식으로 쓰고자 했다. 그가 시도한 '열 두 가지 덕목을 특정 짓는 열 두권의 책XII bookes fashioning XII morall vertues'은 엘리 자베스 여왕 궁정에 있는 그의 동료 기사 시인인 필립 시드니경과 월터 랠리 경을 비롯한 상류 귀족 측을 깊이 감화시킨 로망스이기도 했다. 지옥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볼 때 거의 나삽한 시속에 나타난 가장 혁신적인 사상은 선과 악의 투쟁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했다는 것이다. 스펜서는 (당시 조류에 따라)충실하게 반 카톨릭 적인 청교도였다. 스펜서가 쓴 이 장편 우화는 클레오폴리스 출신의 글로리아나가 다스리는 요정 나라를 배 경으로 한다. 여기서 클로리아나는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대역인 셈이고, 클레오폴리스는 런던을 나타내는 것이다. 스펜서의 기사들은 아주 봉건적이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시대에 맞 춰 르네상스 시대의 궁정 신하가 되기 위해 활약했다. 적십자 기사는 그리스도를 표상 했고, 따라서 그가 무찌른 괴물들은 사탄의 표상이었다. 스펜서는 교황을 비롯한 모든 '카톨릭 적 인 것'을 포함하여 당시 영국에서 지옥의 표상으로 알려진 것들을 열정적이고도 풍부하게 다루고 있다. 제1권 '오류의 동굴'편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것은 반은 여자이고 반은 용의 모습을 한 기괴한 괴물이 죽으면서 자신의 추악한 배에서 오래된 책과 서류들(카톨릭의 가 르침)로 가득찬 독을 토해 내자, 그녀의 자식들이 제 어미의 독이 섞인 피를 핥아먹고 마침 내 배가 터져 죽는다는 이야기다. 엄격한 의미의 우화라고 할 수 는 없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아르크미아고는 경건한 은자처럼 보이지만, 곧 사악한 마법사임이 탄로 나며, 악마들의 시중을 받는 완전한 적그리스도의 표상이라는 것 역시 드러난다.
그는 플루토의 여신을 잠에서 깨우고, 천국을 저주하고 생명과 빛의 주이신 지고하신 하느님을 모독한다. 고르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서 코퀴토스 강을 요동하게 하고 스튁스 강도 달아나게 만드신 암흑과 죽음과 밤의 왕자.
'지복의 나라'는 요녀 아크라시아(키르케로 읽는다)가 다스리고 있다. 도덕주의자이기를 거 부한 시인 스펜서는 이런 사악한 음탕함을 좋아해서 글에 자주 등장시킨다. '자만의 저택'에 있는 루시페라 여왕은 그녀를 시중드는 대죄들이 탄, 여섯 야수가 끄는 황금 수레를 타고 지나간다. '밤'을 거느리는 마녀 두에사는 "입을 벌리고 있는 아베르누스 동굴의 심연"을 통 해 하데스로 내려간다. 하데스에는 연기와 유황불, 무시무시한 푸리아이들, 아케론 강의 모 진 물결, 플레케톤의 불바다, 그리고 현관 계단 위에 케르베로스가 지키고 서 있는 '영원한 고통의 집'이 있다. 익시온은 수레 바퀴를 돌리고, 시쉬포스는 돌을 굴리고, 탄탈로스는 나무 에 묶여 있고, 티튀오스는 독수리에게 먹이를 주고, 다나이데스는 물을 긷고, (그리스, 로마 신화의 작가가 아닌 보카치오가 지옥으로 보낸) 의술의 신인 아이스퀼라피우스가 사슬에 묶 여 있다. '절망의 동굴Cave of Despaire'은 자살을 충동질하고, 거기를 지나면 사탄을 상징하는, 불 을 내뿜는 용을 만나 싸운다. 그 다음에는 우의적인 죄들이 지키고 있는 지옥의 문 근처 지하에 '맘몬(부자)의 동굴Cave of Mammon'이 있고, 이곳에는 '부의 집'이 있다. 그 다음은 프로세르피나의 정원이다. 이 정원 안에는 의자 하나와 황금 사과들이 달려 있는 나무 옆으 로 코퀴토스 강이 흐른다. 그 의자에 않거나 그 사과들을 먹는 자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는 자명하다. 기사 기용도 그것을 미리 알아채고서 맘몬(부자)의 환대를 단호히 거부한다. 강둑 너머에는 "지독한 냄새가 나는 칙칙한 물결 속에서 저주받은 인간들"이 울부짖고 있 다. 그리고 탄탈로스도 다시 등장하고 있다. 또 예수를 십자가에 매다는 것을 허락한 보디오 빌라도는 끝없이 제 손을 씻고 있다.
중세의 쇠퇴기
고상한 우화극과 로망스들이 부각되는 것이 중세 후기의 특징이다. 그리고 그것은 민중 이 즐긴 저속한 유머의 일종이기도 했다. 물론 그 대부분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기 적극miracle play의 자옥 장면들이나 피터 브뤼겔과 그를 추종하는 플랑드르 화가들의 그림 속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라블레의 작품들 속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중세 후기에는 날짜로 치면 모두 합쳐 한 해에 석달 가량은 온갖 축제들로 가득했다고 역 사가들은 추정한다. 이 축제들 중에는 '바보제festa fatuorum'라 통칭하는 것들이 있었다. 순 절 이전시기, 스데반 성인의 날(12월 26일)에서부터 신년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헬러윈 축 일, 그리고 마을마다 서로 다른 성인들의 축일인 있었는데, 이런 특별한 날에 교회에서 스콜 라 학자들과 하급 성직자들 모두가 시끌벅적하게 거행한 것이 바로 '바보제'였다. 야단법석 을 떠는 행렬을 동원하는 이 축제는 오늘날에 비해 위계질서가 훨씬 엄격했던 중세 신분사 회의 질서를 전복하는 행위들, 말하자면 경망스러움, 술주정, 성스러운 것에 대한 노골적인 모독이 주를 이루었다. 이렇듯 평소에는 불가침으로 여기던 숭배 대상을, 이때만큼은 조롱하 는 것이 허용되었을 뿐더러 심지어는 의무적인 것처럼 여기기까지 하였다. 비록 우리는 어 렴풋하게 인식할 뿐이지만, 이때 지옥과 지옥의 거주자들은 축제에서 필수적인 부분을 차지 했던 것이다. 17세기초에 와서는 축제용 지옥 행진이 너무 소란스럽게 통속화해 종종 폭력을 일으키기 도 하였다. 그래서 1540년에 창설한 예수회 또는 성직자들이 공연한 것을 제외하고는, 유럽 전역에 종교극을 금지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축제 분위기를 통해 사회적 긴장을 완화해주 는 이런 역할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긴요한 것이었다. 사라지기는커녕, 즐거운 지옥Merry Hell은 점점 더 통속화했다. 먼저 중세 말기에는 환락과 우화를 병적으로 표출한 '죽음의 무 도Dance of Death'가 등장했다. 해골의 모습을 한 '죽음Death'이 마찬가지로 분장을 한 부하 들과 함께 등장해서, 익살맞은 행동을 하면서 그들의 반동적인 행렬에 관중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나서 할리퀸들이 등장했다. 할리퀸은 원래 게르만의 이교적인 마귀였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밤에 출몰해 난폭한 사 냥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악마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사냥꾼 헤른으로, 독일에 서는 요정의 왕으로 통했다. 적어도 13세기쯤에,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세속극인 아담 드 라 알의 '나뭇잎 놀이Le Jeu de la Feuillee'에서는 에를르캥 크로크조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고, 이탈리아에서는 아를레키노라 불리면서, 거리의 즉흥 광대들zanni중 일부가 되었다. 이들은 우스꽝스런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무례한 행동을 서슴없이 보여주는 배우들을 통해 당시 금지 당했던 '종교적'악마들을 대신했다. 할리퀸은 그밖에도 폴치넬라(또는 폴리키넬레, 페트로슈카, 펀치)가 있었다. 18세기에는 인형극에서 인기를 모은 할리퀸은, 후에 이탈리아 즉흥 가면 희극commedia dell'arte에도 나타났다. 나약한 태도에 특이한 복장을 하고 나타났 던 할리퀸은 마침내 오늘날에는 산책길이나 공원길에서 악역을 맡아 길거리 무언극까지 끼 여들게 되었다. 지옥의 모습을 패러디한 글들도 있었는데, 13세기 프랑스의 '성 피에르와 종글뢰르Saint Pierre et la Jongleur'가 대표적이었다. 종글뢰르는 악마 연기를 우스꽝스럽게 하던 거리의 광대였다. 그가 죽어서 지옥에 갔는데, 루시퍼와 여러 악마들이 사냥을 하러 나간 사이, 성 베드로와 내기를 해서 지는 바람에 지옥에 있는 모든 영혼들을 베드로에게 빼앗기고 만다. 루시퍼가 돌아와서 이 사실을 알고는 화가 치밀어 그를 지옥 밖으로 던져 버리고, 다시는 어떤 종글뢰르도 받아들이지 않기로 맹세한다. 거의 같은 시기에 나온 '지옥의 인사Salut d'Enfer'에는 마귀 테르베간의 연회장에 차려진 온갖 음식이-더 많은 이단자의 구운 고기가 나온다.-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할리퀸과 펀치처럼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도 원래는 무대용 악마였다. 그들의 모험을 기록한 책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은 대부분 어리석은 정신에 대해 적고 있고, 음란, 외 설, 폭음과, '일곱가지 대죄'까지 즐기라며 찬미하고 있다. 대부분의 코미디처럼, 이들의 유머 가 너무도 국지적이기topical 때문에 오늘날에 그 유머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요정의 여 왕The faerie Queene'만큼 극단적이지만, '요정의 여왕'이 매우 고상한 편이라면, '가르강튀 아와 팡타그뤼엘'은 의도적으로 저속하게 씌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프란체스코 회 수도사가 되었다가 다음에는 베네딕트 회로 옮겼고, 다시 의사가 되었던 프랑수아 라블레(1495-1553) 가 별다른 박해를 받지 않고, 그런 것을 다루었다는 사실은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에게는 상류층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들 덕분에 검열을 모면하고 그저 비판을 받는 것으 로 끝난 것 같다. 희극의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할 때, 라블레의 지옥은 지겹고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그의 로망스 모델은 베르길리우스나 오비디우스가 아니라, 지적인 농담 한 마디로 지옥을 풍자하 는 루키아노스였다. 루키아노스는 '메니푸스'에서 사후세계에 있는 칭송 받는 철학자들을 높 이 받드는 반면, 크세르크세스와 알렉산드로스 같은 왕들을 격하하고 있다. 라블레는 (신발 을 수선하는)알렉산드로스와 겨자를 파는 크세르크세스를 포함해서 고전적인 역사와 신화 들, 아서 왕 이야기와 로망스 문학, 그리고 교황의 계보를 망라한 여러 유명한 인물들에게 상상력을 뻗쳤다. 그러나 라블레의 이야기에서 새로운 것은 그들에게 고문 대신 매독을 벌 로 내리는 것뿐이다. 그의 지옥에는 소변보는 장면이 유난히 많다.
중세 말기의 사람들은 속담이나 민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격언이나 아이들의 놀이를 그 린 브뤼겔의 그림들은 당시의 민담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일곱가지 대죄와 지옥 장 면을 그린 그의 삽화들도 마찬가지다. 지옥에 대한 상당한 양의 자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으니, 누군가 그것을 분류해 보려고 시도했다는 사실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최초의 지옥 연구가infernologist라 불리는 레지날드 르 크는 '지옥의 심연Baratre Infernel'을 1480에 썼다. 그 책에는 그는 지금 여기서 내가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일(지옥의 역사를 개관하는 일)을 했고, 이교도에 대한 자료와 기독교의 자료를 자유롭게 인용했고, 지옥에 수용된 자들과 거 기서 벌어지는 광경들을 서술했으며, 그 자료에서 지옥을 정리하고 어떤 결론을 끌어내려고 했다. 그는 먼저 오래 된 자료들 62가지를 "도덕적인 것, 풍자적인 것, 애가적인 것, 계보학 적인 것, 신학적인 것, 역사적인 것, 철학적인 것, 신화적인 것,"으로 분류했다. 거기에서는 기독교인 작가 50명과 성경 10권과 기타 외경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가 든 예들은 '툰달'과 뚱보와 샤를의 환상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목차만으로도 실로 방대하다.
플랑드르 화가들과 미켈란젤로
얀 반 에이크(1390-1441?)는 15-16세기에 명성을 떨쳤던 플랑드르 예술학교의 초대 교장 이었다. 그의 그림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은 지옥에 대한 상투적인 이미지가 죽음의 모습, 또는 새롭게 인습을 탈피하기 시작한 시기를 아주 명확히 보여 준다. 로저 반 델 웨 이든, 디에릭 부츠, 그리고 한스 멤링은 제단 장식을 위한 지옥의 모습들을 뛰어나게, 심지 어는 아름답게까지 그렸다. 하지만 인습적 수준을 훨씬 넘어선 화가는 보쉬였다. 히에로니무스 보쉬는 지옥을 참으로 독창적으로 그린 얼마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다. 제 단 장식을 할 때 보통 3면에다가 그림을 그려 넣는 15세기 후반의 관습에 그대로 따른다면, 가운데에는 '최후의 심판'을 그리고 오른쪽 화관에 그린 지옥과 균형을 이루기 위해 왼쪽 화 판에는 천국이나 에덴 동산의 그림을 그려 넣을 테지만, 보쉬의 그림에서는 지옥이 슬그머 니 전체적인 구성을 차지하였다. 보쉬는 스헤르토헨보쉬라는 플랑드르 지방의 마을에서 살았고, 그의 이름은 거기에서 따 온 것이다.(그의 성은 반 알켄 이었다.) 그곳은 벨기에 국경과 라인 강변에서 가까운, 현재 네덜란드에 있는 마을로서, 중세가 쇠퇴하면서 새롭게 번창한 중산층 도시의 하나였다. 당시 는 여전히 대부분 사람들이 중세 교회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고, 보쉬와 그의 가족들 역시 성모 마리아를 받드는 여러 종교 집단 중 하나인 성모형제회Brotherhood of Our Lady에 속 해 있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네 삼촌 가운데 적어도 세 명, 형제 구센 등이 모두 화가였으 나, 할아버지가 그린 것으로 추측되는 마을의 프레스코 화만이 남아있을 뿐, 나머지 사람들 의 그림들은 남아 있지 않다. 1479년과 1481년 사이의 어느 해에 그는 어떤 돈 많은 여인과 결혼을 했다. 그림을 몇 번 위촉받은 때에 대한 기록 외에,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이것뿐이다. 미술사가들의 호기심과 당혹 감을 자아냈던 거의 그림들은, 지옥의 역사를 지켜본 사람들 에게는 이해하기가 좀 더 쉬울 것이다. 보쉬가 글을 읽을 줄 알았든 그렇지 못했든 간에, 그 는 그가 살던 시대 사람이었다. 그 시대의 지옥에는 우의적인 환상, 문학적 패러디, 신화와 속담에 대한 풍부한 전통이 있었고, 반교권주의, 기괴한 언동, 외설, 어릿광대짓 따위가 그 내용으로 담겨 있었다. 보쉬는 이것들을 섞어서 그림을 그렸고, 반복해서 여러 가지 변용을 시도했다. 지옥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의 관심을 끈 주제임에 틀림없다. 에덴을 그린그림 에서조차 반역천사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한편에서는 쥐, 개구리, 사슴을 대수롭지 않게 죽이는 일이 벌어진다. 그가 중앙 화판에 그린 그림 중에는 건초를 실은 마차Hay-Wain가 한 악마를 태우고 지옥을 향해 달리는 장면이 있고, 비엔나에 남아 있는 '최후의 심판' 그림 의 중앙의 화판은 연옥과 관련한 것으로 보인다. '지복의 정원Garden of Earthly Delight'은 종래의 지상낙원보다는 베누스베르크나 전설적인 코케뉴의 나라와 유사하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와 익숙하면서도 획기적인 장면들을 보게 된다. 사람들이 슬리트 강 위로 미끄러지듯 달려가고, 악마들은 강기슭에서 희생물들을 쇠꼬챙이에 꿰어 굽거나, 납작 하게 냄비에 튀긴다. '건초차Hay-Wain'의 지옥에서는 '툰달의 소'가 다리를 건너하고, '지복 의 정원'에서는 투달의 새가 죄인을 삼키고 배설한다. 단지와 납작한 냄비. 주방 기구들이 우리에게 요리사와 빵 굽는 사람들을 연상하게 해 주고, 그들은 악기들을 가지고 시끄러운 소음을 낸다. 우리는 그들이 받는 벌을 보고 일곱 가지 대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둥그 런 가마솥, 화덕, 지옥의 입을 나타내는 문들은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다. 악마와 형벌의 양 태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제까지 보았던 것보다도 더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기는 하지 만,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단테처럼 보쉬도 옛것을 취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 보쉬의 그림에는 단테의 영향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소재는 모두 다 북유럽 적인 것이었 다. ) 단테와 마찬가지로 보쉬의 혁신은 성공적이었다. 당시에 인쇄기는 발명되어 있었으나 사 진기는 없었던 탓에, 우연히 그의 그림을 보게 된 사람들만이 그의 작품을 알고 있었다. 보 쉬의 후손들에게는 운 좋게도 대단한 후원자들이 있었다.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은 1504년 에 죽을 때, 그의 그림을 세 점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는 스페인이 네덜란드를 통치하고 있 을 때였다. 베네치아의 추기경 그리마니도 보쉬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낙원'과 '지옥' 이라는 그림이었던 것 같다. 이 그림들은 현재 도제 궁에 있다. 누구보다도 보쉬의 그림을 열광적으로 수집한 사람은 스페인의 펠리페2세(1527-1598)였다. 그는 이미 다른 이들의 소 장품이 된 것까지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펠리페는 심성이 그다지 좋지 못한 사람이었 다고, 광신적인 카톨릭 신자였다. 그는 피의 메리의 남편으로서뿐 아니라, 가혹한 이단 재판 을 남용한 주범으로도 악명이 높다. 그가 얼마나 보쉬의 그림을 열광했는지는 리스본, 에스 코리알 그리고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한 수많은 보쉬의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다. 지옥에 대한 이런 관심은 플랑드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귀족들은 어떤 악마성을 바 란 것일까? 안트워프와 브뤼셀을 그거지로 일했던 일군의 화가들은 그들이 얻고자 했던 것 이 그것이었다는데 동의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그림을 그렸고, 그들 중에는 얀 만딘, 피 터 후이스, 피터 브뤼겔(1525-15:69)과 그의 두 아들 얀 과 피터가 있었다. ( 피터는 지옥 풍 경화를 상당히 많이 제작했기 때문에 '지옥Hell'이란 별명을 얻었다. ) 그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은 피터 브뤼겔(아버지)이었다. 그는 일곱 가지 대죄에 유머를 가미했고, '반역천사들의 타락 Fall of the Rebel Angels'(1562)에 부산스런 활기를 불어넣었 다. 그가 그린 것들 중 가장 기괴한 그림은 지옥에 대한 것이 아니라, 최후 심판일을 그린 '죽음의 승리The Triumph of Dearth' 다. 여기에는 여윈 말 위에 탄 죽음의 신이 해골을 가 득 실은 마차를 끌고 가는 장면이 있으며, 행진하는 해골 대열은 곡과 마곡의 병력을 나타 낸다. 그러나 훨씬 독창적인 그림 ' 악녀 그리에트 Dull Griet(1534)' 이다. 브뤼겔의 유명한 작품들에는 민간 속담이나 격언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지옥 입구까지 가서 제물을 약탈하고 도 아무 탈없이 돌아올 만큼 대담무쌍한 한 아낙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여자를 혐오하는 내용의 잠언을 해학적으로 묘사한다. 악녀 그리에트('사나온 그레텔'이란 뜻)는 갑옷을 입고 큰 숟가락을 휘두르며 노획물을 담은 시장 바귀니와 자루를 들고 있다, 그녀는 주위에서 벌 어지는 악마들의 행동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브뤼겔의 아들들은 아버지에 비해 독창성이 떨어지고, 더 기회주의적이다. 얀 브뤼겔의 ' 오르페우스'는 르네상스의 나체화, 보쉬의 그로테스크한 화법, 아버지의 유머를 비롯해서 온 갖 종류의 유파들에서 빌려온 여러 요소들을 버무려 놓았다. 그것은 어떤 용도로도 쓰일 수 있는 다목적 지옥 풍경화다. 지옥을 그리는 데 일생을 바친 보쉬나 판매에 관심을 기울였던 브뤼겔 일가와는 달리. 미 켈란젤로(1475-1564)는 지옥을 한 번 밖에 그리지 않았다. 그가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 벽 에 그린 '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 ' 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들 중 하나다. 비록 그림적 지배요소는 아니지만, 그의 지옥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라는 찬란한 시대에 가장 반짝이는 보석이었다. 그의 긴 생애동안 그는 언제나 자신을 화가라기보다 조각가로 여겼지만, 사실상 양쪽 모두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로마 성 베드로 성당의 돔을 설계하기도 했다. 그가 긴 생애 중 쌓은 온갖 업적을 여기에 전부 기록할 수는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 그가 비록 기독 교인이었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영적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지만, 젊었을 때에 는 로렌초 디 메디치의 정원에서 배운 플라톤 사상에 심취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아두는 것도 유용할 것이다. 시스티나 성당의 '최후의 심판'을 포함하여 그의 모든 작품에는 확실히 고전적인 그리스 정신이 담겨 있다. 미켈란젤로는 1508년부터 1512년까지 작업하여 시스티나 성당의 둥근 천장을 완성했다. 이 기나긴 작업은 오랫동안 발판에 누워 얼굴을 천장으로 향한 채 불편한 자세로 일해야만 하는 몹시 고된 일이었다. 그는 1534년 교황 클리멘스 7 세가 자신을 다시 불러 들였을 때 그다지 즐거워하지 않았다. 당시 시스티나 성당의 제단 위쪽 가장자리 벽에는 페루지노의 프레스코 화가 그려져 있었다. 교황은 최후의 심판 그림을 원했고, 미켈란젤로에게 그것을 그리도록 명했다. 그 당시 미켈란젤로의 나이가 거의 60에 가까웠지만, 거절할 방법이 없었 다. 교황 클리멘스는 얼마 후 죽었으나, 그 뒤를 이은 교황 바오로 3세 역시, 최후의 심판 그림에 대해서는 완강하였다. 그 웅장한 프레스코 화를 완성하는 데는 7년이라는 시간이 걸 렸다. 지오토는 스크로베니 예배당 벽화에서 자신을 구원받은 자들 편에서 그렸지만, 미켈란 젤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지치고 생기 없이 처진 자신의 모습을 성 바돌로매의 벗 겨진 살가죽 안에다가 풍자적으로 그려 넣었다. 중세의 관습대로라면 그것은 순교의 표시였 다. 그림을 완성한 다음에도 그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교황이 미켈란젤로의 조수 중 한 사 람인 비아지오 다 체지나의 비평을 듣고 미켈란젤로에게 나체를 거부한 남자들의 성기를 가 려야 한다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는 교황을 명령을 거부했다. 그리고 화가 난 미켈란젤로 는 오히려 지옥에 머무는 미노스의 얼굴에 비아지오의 그다지 잘나지 못한 얼굴을 그려 넣 었다. 비아지오가 항의하자, 바오로 3세는 비아지오에게 이렇게 답했다. '화가가 그대를 연옥 으로 보냈다면, 나는 그대가 거기서 벗어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오. 그러나 나는 지 옥에 대해서는 아무 힘도 없소. " 후에 그의 뒤를 이은 교황 바오로 4세는 다른 화가 다니 엘라 다 볼테라에게 전임 교황이 하고자 했던 일( 남자의 생식기를 가리는 일)을 시켰다. ( 원래의 그림을 복원하기 위해 ) 1990년대에 대대적인 지우기 작업이 있었지만, 겹쳐 그려진 사타구니 천가리개와 마름모꼴 무늬들은 지워지지 않았다. 바티칸 당국은 시간을 아무리 많 이 들여도 그 부분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미켈란젤로는 초자연성을 나타내는 데 흔히 쓰는 후광과 날개 같은 치장을 그리지 않았 다. 그림에 들어 있는 유일한 날개는 하데스의 뱃사공 카론의 배 내지는 그 밑에 있는 어떤 피조물에 붙어 있는 것으로서, 다소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낸다. 악마들에게는 당나귀의 귀, 또는 작은 뿔이 달려 있고, 미노스에게는 뱀 꼬리가 붙어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면 서도 악마와 천사들은 사람의 모습에 가깝고 성구별이 분명하다. 전형적인 짐승 형상의 한 악마가 그림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 다름 아닌 준엄한 예수 -을 공격한다. 그 사람의 얼굴 은 자신이 정말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 다. 천국의 네 강들은 그림 전체를 꿰뚫고 소용돌이친다. 그리고 왼쪽 (우리가 볼 때는 오른 쪽 ) 에서는 바람의 강물들이 스튁스 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그 너머로 불타는 플레게톤 강 이 흐른다. 지옥 자체는 그림 속에 나타나 있지 않다. 이 그림은 변경을 그린 것이다. 연옥 Purgatory을 나타내는 가운데 하단 부에는 죄인을 굽는 가마솥 같은 거이 있는데, 소수의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 보인다.
지옥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환상문학의 전통이 단테에 이르러 갑자기 끊어지자, 이에 대한 대안으로 소설 문학fiction이 생겨났다. - 사실주의적 소설 문학이 요청되고 씌어지기 까지는 여러 세기가 걸렸다. 끔찍하고 영원한 지옥을 소유하고 '지배했던'교회에 대항하여 소설 문학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했다. 단테는 고전적인 하데스를 이용해서 그 목적을 이루는 방식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 당시 유럽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던 베르길리우스 의 '아에네이스'는 시인들에게 광맥과 같은 것이었고, 그들은 그것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 용했다. 14세기에서 17세기까지 이탈리아 서사시, 기사 시가에서는 이야기 전개에서 지옥 여행을 중심적으로 그리는 것이 유행이었다. 단테의 작품들과는 달리 이런 시들 대부분은 완전히 세속적이었고, 그들이 탐구한 지옥 이미지는 기독교적 전통보다는 베르길리우스나 오비디우 스에 더 가까웠다. 그런 것들이 족히 수십편은 되었다.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꼽히는 작품으 로는, 사라센 사람들에 대항해 싸운 샤를마뉴의 용장 롤랑 이야기를 환상적으로 각색하고 거기에 지옥의 리디아 이야기를 그린 로도비코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올란도Orlando Furioso'(1532)와, 제 1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인 토르쿠아토 탓소의 '해방된 예루살렘 Jerusalem Delivered'이 있다. '해방된 예루살렘'은 천상의 전투를 다루고 있으며, 여기서 사 탄은 플루토라고 불린다. 지하세계의 모험 이야기는 이탈리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에서는 샤를마뉴의 조부인 샤를 마르텔이 지옥으로 가는 오래된 전설이 나중에 기사도 소설(로망스)로 각색되 었다. 12세기경에 씌어진 것으로 보이는 '샤를 마르텔과 그 후계자들의 역사History of Charles Martel and His Successor'에서 샤를은, 자신의 말썽쟁이 서자를 안내자인 마법사 와 함께 지옥으로 보내 루시퍼에게 가서 경의의 표시로 공물을 받아오도록 명한다. 물론 그 것은 성사되고, 샤를은 자신이 직접 지옥을 방문해 충성을 다짐받는다. 좀더 후기 작품이면 서 가장 일찍 단테를 모방한 것으로 알려진 프랑스의 '오베르뉴의 위옹Huon of Auvergne' 은, 샤를 마르텔 설화에 켈트족의 로망스 주제들을 섞은 작품이다. 여기서는 샤를이 위옹의 아이네아스와 오랑즈의 윌리엄과 동행해서 지옥의 여러 광경들을 보고 직접 벌도 받으면서 정력적으로 여행을 하다가, 샤를 마르텔의 의도에 담긴 진의를 발견한다. 루시퍼는 샤를 마 르텔의 가신이 되는 데 동의하고, 조공으로 천 마리의 황금 새들과 왕관, 반지, 휘황찬란한 가마를 바친다. 이 마법의 가마는 물론 샤를 마르텔을 곧장 지옥으로 날라다 준다. 그리고 이즈음부터는 요정 나라Fairland의 이미지가 그 동안 지옥이 담당했던 전통적인 역할을 이어받기 시작한 것이 분명하다. 13세기말에 씌어진 '오르페오 경Sir Orfeo'이라는 영국의 시는, 12세기 후반 프랑스의 여자 시인인 마리 드 프랑스가 쓴 '오르페의 시Lai d'Orphee'를 모방했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특별한 설명도 달지 않은 채 지옥이 요정 의 나라로 바뀌어 나타난다. 그리고 하프를 잘 타는 왕자 오르페오 경(플루토 왕의 아들이 자, 유노 왕의 아들)이 요정들에게 빼앗긴 아내 헤우로디스(에우뤼디케)를 찾아가는 곳도 이 괴상하고 복합적인 장소였다. 이 요정들은 사냥개로 사냥을 즐기고 송골매로 매사냥을 하며 "기이한 복장으로 춤을 추 는dauncing in queynt atire"중세 궁정 풍의 요정들이다. 그러나 이 시인은 (마리 드 프랑스 에게 경의를 표하면서도) 오비디우스와 베르길리우스에게서 소재를 찾았다. 오르페오 경이 유랑하는 음유시인을 가장하고 성의 뜰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무시무시한 '잠든 자들'의 무리를 보게 된다.
어떤 이들은 머리가 없이 걸어다니고, 어떤 이들은 팔이 없고, 어떤 이들은 온 몸이 상처투성이고, 어떤 이들은 미쳐 날뛰고, 어떤 이들은 말 위에 무장해 있고, 어떤 이들은 밥 먹다가 목 졸려 죽고, 어떤 이들은 목말라 시달리고, 어떤 이들은 불에 타 일그러져 있고, 그런 와중에 아낙네들은 해산을 하고, 어떤 이들은 죽어 있고 어떤 이들은 돌아 버렸고, 놀랍게도 그 옆에선 사람들이 누워 있다. 한창 때 잠들어 버린 모습 그대로
그리고 그들 가운데 에우뤼디케가 나무 아래 누워 있다. 오르페오 경은 아내를 되찾기 위 해 요정의 왕 앞에서 하프를 연주하고, 아내와 함께 성으로 돌아오는 해피엔딩을 맞는다. 그곳이 무시무시한 기독교적 지옥이었다면 오르페오 경은 그곳에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요정 나라는 지옥에 대한 불가피한 대안이었다. 지옥과 요정의 나라가 서로 긴밀해지기 시 작했다는 증거는 귀족의 위탁으로 만든 성무일과서Books of Hours와 임람에 실린 삽화에도 나타난다. '에어셀던의 토마스Thomas of Erceldoune'라는 로망스에서는 어떤 기사가 신비로 운 여인과 어둠 속을 사흘 간 여행하다가 천국, 연옥, 지옥, 요정 나라로 통하는 네 길을 본 다. 12세기 말엽에 프랑스어로 처음 번역된 '아에네이스'에서 시뷜레는 마녀로, 아이네이아스 는 중세 봉건 기사로, 케르베로스는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발과 긴 팔, 그리고 개 모습의 머 리를 세 개나 지닌 악마로 그려진다. '요정의 여왕The Faerie Queene'은 중세의 흥성기에 씌어진 우의적 로망스 서사시 romance-epics의 금자탑으로서, '비극적, 희극적, 역사적, 목가적'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단테와 마찬가지로 에드먼스 스펜서는 이미 전성기를 맞았던 이 문학 양식을 반추하고서 그 장르를 종합하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했다. 단테가 방언을 사용하는 데 있어 전위적인 역할 을 했다면, 스펜서의 서사시는 의도적으로 고풍스런 언어를 사용하였다. 그는 아서 왕 설화 에 영국 신화를 더함으로써 영국 서사시를 이탈리아 양식으로 쓰고자 했다. 그가 시도한 '열 두 가지 덕목을 특정 짓는 열 두권의 책XII bookes fashioning XII morall vertues'은 엘리 자베스 여왕 궁정에 있는 그의 동료 기사 시인인 필립 시드니경과 월터 랠리 경을 비롯한 상류 귀족 측을 깊이 감화시킨 로망스이기도 했다. 지옥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볼 때 거의 나삽한 시속에 나타난 가장 혁신적인 사상은 선과 악의 투쟁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했다는 것이다. 스펜서는 (당시 조류에 따라)충실하게 반 카톨릭 적인 청교도였다. 스펜서가 쓴 이 장편 우화는 클레오폴리스 출신의 글로리아나가 다스리는 요정 나라를 배 경으로 한다. 여기서 클로리아나는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대역인 셈이고, 클레오폴리스는 런던을 나타내는 것이다. 스펜서의 기사들은 아주 봉건적이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시대에 맞 춰 르네상스 시대의 궁정 신하가 되기 위해 활약했다. 적십자 기사는 그리스도를 표상 했고, 따라서 그가 무찌른 괴물들은 사탄의 표상이었다. 스펜서는 교황을 비롯한 모든 '카톨릭 적 인 것'을 포함하여 당시 영국에서 지옥의 표상으로 알려진 것들을 열정적이고도 풍부하게 다루고 있다. 제1권 '오류의 동굴'편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것은 반은 여자이고 반은 용의 모습을 한 기괴한 괴물이 죽으면서 자신의 추악한 배에서 오래된 책과 서류들(카톨릭의 가 르침)로 가득찬 독을 토해 내자, 그녀의 자식들이 제 어미의 독이 섞인 피를 핥아먹고 마침 내 배가 터져 죽는다는 이야기다. 엄격한 의미의 우화라고 할 수 는 없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아르크미아고는 경건한 은자처럼 보이지만, 곧 사악한 마법사임이 탄로 나며, 악마들의 시중을 받는 완전한 적그리스도의 표상이라는 것 역시 드러난다.
그는 플루토의 여신을 잠에서 깨우고, 천국을 저주하고 생명과 빛의 주이신 지고하신 하느님을 모독한다. 고르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서 코퀴토스 강을 요동하게 하고 스튁스 강도 달아나게 만드신 암흑과 죽음과 밤의 왕자.
'지복의 나라'는 요녀 아크라시아(키르케로 읽는다)가 다스리고 있다. 도덕주의자이기를 거 부한 시인 스펜서는 이런 사악한 음탕함을 좋아해서 글에 자주 등장시킨다. '자만의 저택'에 있는 루시페라 여왕은 그녀를 시중드는 대죄들이 탄, 여섯 야수가 끄는 황금 수레를 타고 지나간다. '밤'을 거느리는 마녀 두에사는 "입을 벌리고 있는 아베르누스 동굴의 심연"을 통 해 하데스로 내려간다. 하데스에는 연기와 유황불, 무시무시한 푸리아이들, 아케론 강의 모 진 물결, 플레케톤의 불바다, 그리고 현관 계단 위에 케르베로스가 지키고 서 있는 '영원한 고통의 집'이 있다. 익시온은 수레 바퀴를 돌리고, 시쉬포스는 돌을 굴리고, 탄탈로스는 나무 에 묶여 있고, 티튀오스는 독수리에게 먹이를 주고, 다나이데스는 물을 긷고, (그리스, 로마 신화의 작가가 아닌 보카치오가 지옥으로 보낸) 의술의 신인 아이스퀼라피우스가 사슬에 묶 여 있다. '절망의 동굴Cave of Despaire'은 자살을 충동질하고, 거기를 지나면 사탄을 상징하는, 불 을 내뿜는 용을 만나 싸운다. 그 다음에는 우의적인 죄들이 지키고 있는 지옥의 문 근처 지하에 '맘몬(부자)의 동굴Cave of Mammon'이 있고, 이곳에는 '부의 집'이 있다. 그 다음은 프로세르피나의 정원이다. 이 정원 안에는 의자 하나와 황금 사과들이 달려 있는 나무 옆으 로 코퀴토스 강이 흐른다. 그 의자에 않거나 그 사과들을 먹는 자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는 자명하다. 기사 기용도 그것을 미리 알아채고서 맘몬(부자)의 환대를 단호히 거부한다. 강둑 너머에는 "지독한 냄새가 나는 칙칙한 물결 속에서 저주받은 인간들"이 울부짖고 있 다. 그리고 탄탈로스도 다시 등장하고 있다. 또 예수를 십자가에 매다는 것을 허락한 보디오 빌라도는 끝없이 제 손을 씻고 있다.
중세의 쇠퇴기
고상한 우화극과 로망스들이 부각되는 것이 중세 후기의 특징이다. 그리고 그것은 민중 이 즐긴 저속한 유머의 일종이기도 했다. 물론 그 대부분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기 적극miracle play의 자옥 장면들이나 피터 브뤼겔과 그를 추종하는 플랑드르 화가들의 그림 속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라블레의 작품들 속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중세 후기에는 날짜로 치면 모두 합쳐 한 해에 석달 가량은 온갖 축제들로 가득했다고 역 사가들은 추정한다. 이 축제들 중에는 '바보제festa fatuorum'라 통칭하는 것들이 있었다. 순 절 이전시기, 스데반 성인의 날(12월 26일)에서부터 신년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헬러윈 축 일, 그리고 마을마다 서로 다른 성인들의 축일인 있었는데, 이런 특별한 날에 교회에서 스콜 라 학자들과 하급 성직자들 모두가 시끌벅적하게 거행한 것이 바로 '바보제'였다. 야단법석 을 떠는 행렬을 동원하는 이 축제는 오늘날에 비해 위계질서가 훨씬 엄격했던 중세 신분사 회의 질서를 전복하는 행위들, 말하자면 경망스러움, 술주정, 성스러운 것에 대한 노골적인 모독이 주를 이루었다. 이렇듯 평소에는 불가침으로 여기던 숭배 대상을, 이때만큼은 조롱하 는 것이 허용되었을 뿐더러 심지어는 의무적인 것처럼 여기기까지 하였다. 비록 우리는 어 렴풋하게 인식할 뿐이지만, 이때 지옥과 지옥의 거주자들은 축제에서 필수적인 부분을 차지 했던 것이다. 17세기초에 와서는 축제용 지옥 행진이 너무 소란스럽게 통속화해 종종 폭력을 일으키기 도 하였다. 그래서 1540년에 창설한 예수회 또는 성직자들이 공연한 것을 제외하고는, 유럽 전역에 종교극을 금지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축제 분위기를 통해 사회적 긴장을 완화해주 는 이런 역할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긴요한 것이었다. 사라지기는커녕, 즐거운 지옥Merry Hell은 점점 더 통속화했다. 먼저 중세 말기에는 환락과 우화를 병적으로 표출한 '죽음의 무 도Dance of Death'가 등장했다. 해골의 모습을 한 '죽음Death'이 마찬가지로 분장을 한 부하 들과 함께 등장해서, 익살맞은 행동을 하면서 그들의 반동적인 행렬에 관중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나서 할리퀸들이 등장했다. 할리퀸은 원래 게르만의 이교적인 마귀였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밤에 출몰해 난폭한 사 냥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악마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사냥꾼 헤른으로, 독일에 서는 요정의 왕으로 통했다. 적어도 13세기쯤에,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세속극인 아담 드 라 알의 '나뭇잎 놀이Le Jeu de la Feuillee'에서는 에를르캥 크로크조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고, 이탈리아에서는 아를레키노라 불리면서, 거리의 즉흥 광대들zanni중 일부가 되었다. 이들은 우스꽝스런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무례한 행동을 서슴없이 보여주는 배우들을 통해 당시 금지 당했던 '종교적'악마들을 대신했다. 할리퀸은 그밖에도 폴치넬라(또는 폴리키넬레, 페트로슈카, 펀치)가 있었다. 18세기에는 인형극에서 인기를 모은 할리퀸은, 후에 이탈리아 즉흥 가면 희극commedia dell'arte에도 나타났다. 나약한 태도에 특이한 복장을 하고 나타났 던 할리퀸은 마침내 오늘날에는 산책길이나 공원길에서 악역을 맡아 길거리 무언극까지 끼 여들게 되었다. 지옥의 모습을 패러디한 글들도 있었는데, 13세기 프랑스의 '성 피에르와 종글뢰르Saint Pierre et la Jongleur'가 대표적이었다. 종글뢰르는 악마 연기를 우스꽝스럽게 하던 거리의 광대였다. 그가 죽어서 지옥에 갔는데, 루시퍼와 여러 악마들이 사냥을 하러 나간 사이, 성 베드로와 내기를 해서 지는 바람에 지옥에 있는 모든 영혼들을 베드로에게 빼앗기고 만다. 루시퍼가 돌아와서 이 사실을 알고는 화가 치밀어 그를 지옥 밖으로 던져 버리고, 다시는 어떤 종글뢰르도 받아들이지 않기로 맹세한다. 거의 같은 시기에 나온 '지옥의 인사Salut d'Enfer'에는 마귀 테르베간의 연회장에 차려진 온갖 음식이-더 많은 이단자의 구운 고기가 나온다.-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할리퀸과 펀치처럼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도 원래는 무대용 악마였다. 그들의 모험을 기록한 책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은 대부분 어리석은 정신에 대해 적고 있고, 음란, 외 설, 폭음과, '일곱가지 대죄'까지 즐기라며 찬미하고 있다. 대부분의 코미디처럼, 이들의 유머 가 너무도 국지적이기topical 때문에 오늘날에 그 유머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요정의 여 왕The faerie Queene'만큼 극단적이지만, '요정의 여왕'이 매우 고상한 편이라면, '가르강튀 아와 팡타그뤼엘'은 의도적으로 저속하게 씌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프란체스코 회 수도사가 되었다가 다음에는 베네딕트 회로 옮겼고, 다시 의사가 되었던 프랑수아 라블레(1495-1553) 가 별다른 박해를 받지 않고, 그런 것을 다루었다는 사실은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에게는 상류층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들 덕분에 검열을 모면하고 그저 비판을 받는 것으 로 끝난 것 같다. 희극의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할 때, 라블레의 지옥은 지겹고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그의 로망스 모델은 베르길리우스나 오비디우스가 아니라, 지적인 농담 한 마디로 지옥을 풍자하 는 루키아노스였다. 루키아노스는 '메니푸스'에서 사후세계에 있는 칭송 받는 철학자들을 높 이 받드는 반면, 크세르크세스와 알렉산드로스 같은 왕들을 격하하고 있다. 라블레는 (신발 을 수선하는)알렉산드로스와 겨자를 파는 크세르크세스를 포함해서 고전적인 역사와 신화 들, 아서 왕 이야기와 로망스 문학, 그리고 교황의 계보를 망라한 여러 유명한 인물들에게 상상력을 뻗쳤다. 그러나 라블레의 이야기에서 새로운 것은 그들에게 고문 대신 매독을 벌 로 내리는 것뿐이다. 그의 지옥에는 소변보는 장면이 유난히 많다.
중세 말기의 사람들은 속담이나 민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격언이나 아이들의 놀이를 그 린 브뤼겔의 그림들은 당시의 민담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일곱가지 대죄와 지옥 장 면을 그린 그의 삽화들도 마찬가지다. 지옥에 대한 상당한 양의 자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으니, 누군가 그것을 분류해 보려고 시도했다는 사실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최초의 지옥 연구가infernologist라 불리는 레지날드 르 크는 '지옥의 심연Baratre Infernel'을 1480에 썼다. 그 책에는 그는 지금 여기서 내가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일(지옥의 역사를 개관하는 일)을 했고, 이교도에 대한 자료와 기독교의 자료를 자유롭게 인용했고, 지옥에 수용된 자들과 거 기서 벌어지는 광경들을 서술했으며, 그 자료에서 지옥을 정리하고 어떤 결론을 끌어내려고 했다. 그는 먼저 오래 된 자료들 62가지를 "도덕적인 것, 풍자적인 것, 애가적인 것, 계보학 적인 것, 신학적인 것, 역사적인 것, 철학적인 것, 신화적인 것,"으로 분류했다. 거기에서는 기독교인 작가 50명과 성경 10권과 기타 외경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가 든 예들은 '툰달'과 뚱보와 샤를의 환상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목차만으로도 실로 방대하다.
플랑드르 화가들과 미켈란젤로
얀 반 에이크(1390-1441?)는 15-16세기에 명성을 떨쳤던 플랑드르 예술학교의 초대 교장 이었다. 그의 그림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은 지옥에 대한 상투적인 이미지가 죽음의 모습, 또는 새롭게 인습을 탈피하기 시작한 시기를 아주 명확히 보여 준다. 로저 반 델 웨 이든, 디에릭 부츠, 그리고 한스 멤링은 제단 장식을 위한 지옥의 모습들을 뛰어나게, 심지 어는 아름답게까지 그렸다. 하지만 인습적 수준을 훨씬 넘어선 화가는 보쉬였다. 히에로니무스 보쉬는 지옥을 참으로 독창적으로 그린 얼마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다. 제 단 장식을 할 때 보통 3면에다가 그림을 그려 넣는 15세기 후반의 관습에 그대로 따른다면, 가운데에는 '최후의 심판'을 그리고 오른쪽 화관에 그린 지옥과 균형을 이루기 위해 왼쪽 화 판에는 천국이나 에덴 동산의 그림을 그려 넣을 테지만, 보쉬의 그림에서는 지옥이 슬그머 니 전체적인 구성을 차지하였다. 보쉬는 스헤르토헨보쉬라는 플랑드르 지방의 마을에서 살았고, 그의 이름은 거기에서 따 온 것이다.(그의 성은 반 알켄 이었다.) 그곳은 벨기에 국경과 라인 강변에서 가까운, 현재 네덜란드에 있는 마을로서, 중세가 쇠퇴하면서 새롭게 번창한 중산층 도시의 하나였다. 당시 는 여전히 대부분 사람들이 중세 교회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고, 보쉬와 그의 가족들 역시 성모 마리아를 받드는 여러 종교 집단 중 하나인 성모형제회Brotherhood of Our Lady에 속 해 있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네 삼촌 가운데 적어도 세 명, 형제 구센 등이 모두 화가였으 나, 할아버지가 그린 것으로 추측되는 마을의 프레스코 화만이 남아있을 뿐, 나머지 사람들 의 그림들은 남아 있지 않다. 1479년과 1481년 사이의 어느 해에 그는 어떤 돈 많은 여인과 결혼을 했다. 그림을 몇 번 위촉받은 때에 대한 기록 외에,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이것뿐이다. 미술사가들의 호기심과 당혹 감을 자아냈던 거의 그림들은, 지옥의 역사를 지켜본 사람들 에게는 이해하기가 좀 더 쉬울 것이다. 보쉬가 글을 읽을 줄 알았든 그렇지 못했든 간에, 그 는 그가 살던 시대 사람이었다. 그 시대의 지옥에는 우의적인 환상, 문학적 패러디, 신화와 속담에 대한 풍부한 전통이 있었고, 반교권주의, 기괴한 언동, 외설, 어릿광대짓 따위가 그 내용으로 담겨 있었다. 보쉬는 이것들을 섞어서 그림을 그렸고, 반복해서 여러 가지 변용을 시도했다. 지옥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의 관심을 끈 주제임에 틀림없다. 에덴을 그린그림 에서조차 반역천사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한편에서는 쥐, 개구리, 사슴을 대수롭지 않게 죽이는 일이 벌어진다. 그가 중앙 화판에 그린 그림 중에는 건초를 실은 마차Hay-Wain가 한 악마를 태우고 지옥을 향해 달리는 장면이 있고, 비엔나에 남아 있는 '최후의 심판' 그림 의 중앙의 화판은 연옥과 관련한 것으로 보인다. '지복의 정원Garden of Earthly Delight'은 종래의 지상낙원보다는 베누스베르크나 전설적인 코케뉴의 나라와 유사하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와 익숙하면서도 획기적인 장면들을 보게 된다. 사람들이 슬리트 강 위로 미끄러지듯 달려가고, 악마들은 강기슭에서 희생물들을 쇠꼬챙이에 꿰어 굽거나, 납작 하게 냄비에 튀긴다. '건초차Hay-Wain'의 지옥에서는 '툰달의 소'가 다리를 건너하고, '지복 의 정원'에서는 투달의 새가 죄인을 삼키고 배설한다. 단지와 납작한 냄비. 주방 기구들이 우리에게 요리사와 빵 굽는 사람들을 연상하게 해 주고, 그들은 악기들을 가지고 시끄러운 소음을 낸다. 우리는 그들이 받는 벌을 보고 일곱 가지 대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둥그 런 가마솥, 화덕, 지옥의 입을 나타내는 문들은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다. 악마와 형벌의 양 태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제까지 보았던 것보다도 더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기는 하지 만,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단테처럼 보쉬도 옛것을 취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 보쉬의 그림에는 단테의 영향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소재는 모두 다 북유럽 적인 것이었 다. ) 단테와 마찬가지로 보쉬의 혁신은 성공적이었다. 당시에 인쇄기는 발명되어 있었으나 사 진기는 없었던 탓에, 우연히 그의 그림을 보게 된 사람들만이 그의 작품을 알고 있었다. 보 쉬의 후손들에게는 운 좋게도 대단한 후원자들이 있었다.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은 1504년 에 죽을 때, 그의 그림을 세 점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는 스페인이 네덜란드를 통치하고 있 을 때였다. 베네치아의 추기경 그리마니도 보쉬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낙원'과 '지옥' 이라는 그림이었던 것 같다. 이 그림들은 현재 도제 궁에 있다. 누구보다도 보쉬의 그림을 열광적으로 수집한 사람은 스페인의 펠리페2세(1527-1598)였다. 그는 이미 다른 이들의 소 장품이 된 것까지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펠리페는 심성이 그다지 좋지 못한 사람이었 다고, 광신적인 카톨릭 신자였다. 그는 피의 메리의 남편으로서뿐 아니라, 가혹한 이단 재판 을 남용한 주범으로도 악명이 높다. 그가 얼마나 보쉬의 그림을 열광했는지는 리스본, 에스 코리알 그리고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한 수많은 보쉬의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다. 지옥에 대한 이런 관심은 플랑드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귀족들은 어떤 악마성을 바 란 것일까? 안트워프와 브뤼셀을 그거지로 일했던 일군의 화가들은 그들이 얻고자 했던 것 이 그것이었다는데 동의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그림을 그렸고, 그들 중에는 얀 만딘, 피 터 후이스, 피터 브뤼겔(1525-15:69)과 그의 두 아들 얀 과 피터가 있었다. ( 피터는 지옥 풍 경화를 상당히 많이 제작했기 때문에 '지옥Hell'이란 별명을 얻었다. ) 그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은 피터 브뤼겔(아버지)이었다. 그는 일곱 가지 대죄에 유머를 가미했고, '반역천사들의 타락 Fall of the Rebel Angels'(1562)에 부산스런 활기를 불어넣었 다. 그가 그린 것들 중 가장 기괴한 그림은 지옥에 대한 것이 아니라, 최후 심판일을 그린 '죽음의 승리The Triumph of Dearth' 다. 여기에는 여윈 말 위에 탄 죽음의 신이 해골을 가 득 실은 마차를 끌고 가는 장면이 있으며, 행진하는 해골 대열은 곡과 마곡의 병력을 나타 낸다. 그러나 훨씬 독창적인 그림 ' 악녀 그리에트 Dull Griet(1534)' 이다. 브뤼겔의 유명한 작품들에는 민간 속담이나 격언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지옥 입구까지 가서 제물을 약탈하고 도 아무 탈없이 돌아올 만큼 대담무쌍한 한 아낙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여자를 혐오하는 내용의 잠언을 해학적으로 묘사한다. 악녀 그리에트('사나온 그레텔'이란 뜻)는 갑옷을 입고 큰 숟가락을 휘두르며 노획물을 담은 시장 바귀니와 자루를 들고 있다, 그녀는 주위에서 벌 어지는 악마들의 행동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브뤼겔의 아들들은 아버지에 비해 독창성이 떨어지고, 더 기회주의적이다. 얀 브뤼겔의 ' 오르페우스'는 르네상스의 나체화, 보쉬의 그로테스크한 화법, 아버지의 유머를 비롯해서 온 갖 종류의 유파들에서 빌려온 여러 요소들을 버무려 놓았다. 그것은 어떤 용도로도 쓰일 수 있는 다목적 지옥 풍경화다. 지옥을 그리는 데 일생을 바친 보쉬나 판매에 관심을 기울였던 브뤼겔 일가와는 달리. 미 켈란젤로(1475-1564)는 지옥을 한 번 밖에 그리지 않았다. 그가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 벽 에 그린 '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 ' 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들 중 하나다. 비록 그림적 지배요소는 아니지만, 그의 지옥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라는 찬란한 시대에 가장 반짝이는 보석이었다. 그의 긴 생애동안 그는 언제나 자신을 화가라기보다 조각가로 여겼지만, 사실상 양쪽 모두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로마 성 베드로 성당의 돔을 설계하기도 했다. 그가 긴 생애 중 쌓은 온갖 업적을 여기에 전부 기록할 수는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 그가 비록 기독 교인이었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영적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지만, 젊었을 때에 는 로렌초 디 메디치의 정원에서 배운 플라톤 사상에 심취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아두는 것도 유용할 것이다. 시스티나 성당의 '최후의 심판'을 포함하여 그의 모든 작품에는 확실히 고전적인 그리스 정신이 담겨 있다. 미켈란젤로는 1508년부터 1512년까지 작업하여 시스티나 성당의 둥근 천장을 완성했다. 이 기나긴 작업은 오랫동안 발판에 누워 얼굴을 천장으로 향한 채 불편한 자세로 일해야만 하는 몹시 고된 일이었다. 그는 1534년 교황 클리멘스 7 세가 자신을 다시 불러 들였을 때 그다지 즐거워하지 않았다. 당시 시스티나 성당의 제단 위쪽 가장자리 벽에는 페루지노의 프레스코 화가 그려져 있었다. 교황은 최후의 심판 그림을 원했고, 미켈란젤로에게 그것을 그리도록 명했다. 그 당시 미켈란젤로의 나이가 거의 60에 가까웠지만, 거절할 방법이 없었 다. 교황 클리멘스는 얼마 후 죽었으나, 그 뒤를 이은 교황 바오로 3세 역시, 최후의 심판 그림에 대해서는 완강하였다. 그 웅장한 프레스코 화를 완성하는 데는 7년이라는 시간이 걸 렸다. 지오토는 스크로베니 예배당 벽화에서 자신을 구원받은 자들 편에서 그렸지만, 미켈란 젤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지치고 생기 없이 처진 자신의 모습을 성 바돌로매의 벗 겨진 살가죽 안에다가 풍자적으로 그려 넣었다. 중세의 관습대로라면 그것은 순교의 표시였 다. 그림을 완성한 다음에도 그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교황이 미켈란젤로의 조수 중 한 사 람인 비아지오 다 체지나의 비평을 듣고 미켈란젤로에게 나체를 거부한 남자들의 성기를 가 려야 한다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는 교황을 명령을 거부했다. 그리고 화가 난 미켈란젤로 는 오히려 지옥에 머무는 미노스의 얼굴에 비아지오의 그다지 잘나지 못한 얼굴을 그려 넣 었다. 비아지오가 항의하자, 바오로 3세는 비아지오에게 이렇게 답했다. '화가가 그대를 연옥 으로 보냈다면, 나는 그대가 거기서 벗어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오. 그러나 나는 지 옥에 대해서는 아무 힘도 없소. " 후에 그의 뒤를 이은 교황 바오로 4세는 다른 화가 다니 엘라 다 볼테라에게 전임 교황이 하고자 했던 일( 남자의 생식기를 가리는 일)을 시켰다. ( 원래의 그림을 복원하기 위해 ) 1990년대에 대대적인 지우기 작업이 있었지만, 겹쳐 그려진 사타구니 천가리개와 마름모꼴 무늬들은 지워지지 않았다. 바티칸 당국은 시간을 아무리 많 이 들여도 그 부분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미켈란젤로는 초자연성을 나타내는 데 흔히 쓰는 후광과 날개 같은 치장을 그리지 않았 다. 그림에 들어 있는 유일한 날개는 하데스의 뱃사공 카론의 배 내지는 그 밑에 있는 어떤 피조물에 붙어 있는 것으로서, 다소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낸다. 악마들에게는 당나귀의 귀, 또는 작은 뿔이 달려 있고, 미노스에게는 뱀 꼬리가 붙어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면 서도 악마와 천사들은 사람의 모습에 가깝고 성구별이 분명하다. 전형적인 짐승 형상의 한 악마가 그림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 다름 아닌 준엄한 예수 -을 공격한다. 그 사람의 얼굴 은 자신이 정말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 다. 천국의 네 강들은 그림 전체를 꿰뚫고 소용돌이친다. 그리고 왼쪽 (우리가 볼 때는 오른 쪽 ) 에서는 바람의 강물들이 스튁스 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그 너머로 불타는 플레게톤 강 이 흐른다. 지옥 자체는 그림 속에 나타나 있지 않다. 이 그림은 변경을 그린 것이다. 연옥 Purgatory을 나타내는 가운데 하단 부에는 죄인을 굽는 가마솥 같은 거이 있는데, 소수의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