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그린나래 / 글 정영인
한여름 밤, 앞마당에다 편 멍석 옆에는 매캐한 모깃불 연기가
홑이불을 감싼다.
멍석에 벌렁 누우면 미리내1)가 내 입 가까이에 있다.
엄마는
“얘야, 은하수가 입 위에 오면 이밥2)을 먹는단다.”
그렇게 미리내의 전설이 흐르는 밤이다. 시나브로3)
모깃불은 사위어 가고 마루4)에는 달덩이 같은 보름달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초가지붕 위에는 소담스런5)
박꽃이 피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바지런히 꼰 새끼를 타래6)로 만들고,
눈썰미7)좋은 엄마는 메꾸리8)를 만든다.
후텁지근한 마파람9)이 불어온다.
마당 언저리10)에는 메꽃과 달맞이꽃이 피고,
온갖 벌레들이 한여름 밤 음악회를 연다.
혹 가다 땅강아지가 부나비11)처럼 모깃불로 제 몸을 던진다.
새벽녘에는 개밥바라기별12)이 서녘13)에 뜬다.
이젠 는개14)같은 찬이슬이 내리고,
가끔 달보고 놀란 하릅강아지15)가
엄마 품을 더듬으며 끙끙거린다.
너울가지16)가 부족한 나는 늘상 벗들과 너나들이17)를
잘 하지 못했다. 그러니 외톨인 경우가 많았고,
가끔 동네 형들과 또래에 사이에서 왕따18)를 당하기도 했다.
혹 가다 깍두기19)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하기 좋은 말로 휘뚜루마뚜루20)처럼 써 먹었다.
시쳇말21)로 있으나마나한 존재라 할까.
게염부리지는22)않았건만 겉돌았다.
그러나 애오라지23)누가 곁부축24)해주면
씨밀레25)를 만들 수 있었건만,
오지랖26)이 넓지 못하여 그저 주변에서 뱅뱅 돌았다.
사실 미쁜27)벗은 다른 동네에 있었다.
가끔 한 마장28)되는 동네에 가서 늡늡한29)친구와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 친구의 별명은 ‘염소’였으니
그에 걸맞게 이든한30)녀석이었다.
도회지로 진학 못한 것을 늘 아쉬워했다.
그나 동네 친구들과 바닷가에 갔다가 갯고랑31)에 빠져
일찌감치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그는 늘 솔잎대강이32)이었다.
도담도담33)하게 자라던 코흘리개 시절의
친구들 소식은 알 길이 감감하다.34)
추억은 가뭇없이35)사라져만 가고 마음은 서리담아진다.36)
도래샘37)을 마시고, 두메꽃38)꺾으며 천렵(川獵)39)하여
국 끓여 먹던 든솔40)같은 친구들은 추억의 가람41)에서
아라42)에서 너겁43)이 되어 너울거린다.44)
가을이면 소담스런 감이 익고, 아람45)벌린 밤바위!
그곳이 내 고향이고, 친구 동네는 숲말46)이었다.
함지박47)같은 돌산과 밤나무가 많아
'밤바위’라고 불린 내 고향! 이름만 들어도
그리움이 옹달샘처럼 솟아난다.
우리 집 뒤란48)에는 가끔 해거리49)를 하며
감또개50)를 줍게 하던 대접감,
뾰족감나무가 몇 그루 담을 기대서고 있었다.
새녘51)의 햇귀52)에 장독대에다 정화수(井華水) 한 그릇
떠 놓고 가족들의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빌던 우리 어머니,
높새바람53)이 불면 찬 새벽에 군불54)를 지피시던 아버지.
새암55)에서 물지게로 먹을 물을 져 나르던 형들!
이런저런 생각들이 맘 언저리에서 감친다.56)
갑자기 소낙비가 내린다.
마당에 벌여 놓은 농사 것들을 비설거지57) 하느라고
온 식구가 바쁘다. 부지깽이58)도 일을 시켜 먹을 정도로
그렇게 눈코 뜰 새 없는 바쁜 철이다.
어머니는 처음으로 딴 호박과 캔 감자로
부침개를 부친 것으로 천신(薦新)59)을 하고
고수레60)까지 하고서 우리에게 나누어 준다.
눈가늠61)으로 노느매기62)했던 어머니는 간사위63)가
늡늡한64)분이셨다.
똥끝이 미어지게 가난했던 우리 집을 일으켜 세웠던
늡늡했던 어머니는 병을 낫우지65)못하고
아주아주 일찌감치 서둘러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나들이를 떠나버리셨다.
짙은 노을이 서녘을 물들일 때 누나와 나만 임종(臨終)을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첫 맞선 때, 어머니가 아버지를
퇴짜를 놓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체수66)가 작고
오종종하게67)생겨서란다. 3년 후 다시 중매가 들어와 선을 보니
그 아버지란다. 그래서 천생연분이려니 하고 가시버시68)가 됐다.
그린나래69)같은 그리움의 너울은 마루로, 아라로,
가람으로 흘러가리라. 손이 크고 횟배70)가 있어 담배를 피우시고,
개장국71)을 잘 끓이셨다는 어머니,
살아계셨으면 하마72)온73)에 가까웠으리라.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인지 나도 횟배 때문에 무척이나 고생을 했다.
담배도 피워보고, 휘발유도 마셔보고, 심지어는 똥물까지도….
휘발유를 먹었을 때는 미주알74)이 헐어서 고생깨나 했다.
그때는 내남없이75)어려운 시절이었다.
지금도 흑백 사진을 보면 갈걍갈걍하시다.76)
그래서 그런지 우리 육남매는 어머니 앞에선
꼼짝도 못했다고 한다. 지금은 같은 산자락에 아버지와 어머니,
큰형과 셋째형이 오순도순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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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리내 : 은하수(銀河水)
2) 이팝 : 쌀밥
3) 시나브로 :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4) 마루 : 하늘
5) 소담하다 : 생김새가 탐스럽다.
6) 타래 : 실이나 노끈 등을 사려 뭉친 것
7) 눈썰미 : 한 번 본 것이라도 곧 그대로 흉내를 잘 내는 재주
8) 메꾸리 : ‘멱둥구미’의 방언, 짚으로 둥글고 울이 깊게 결어서
곡식 따위를 담는 그릇 (준) 둥그미
9) 마파람 ;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남풍
10) 언저리 : 부근, 둘레
11) 부나방 : 불나방
12) 개밥바라기별 : 금성(金星), 샛별
13) 서녘 : 서쪽 하늘
14) 는개 ; 안개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
15) 하릅강아지 : 나이가 한 살 된 강아지.
16) 너울가지 : 남과 사귀는 재주나 솜씨
17) 너나들이 : 서로 너니 나니 하고 부르며 허물없이 말을 건넴.
또는 그런 사이.
18) 왕따 : 집단 따돌림
19) 깍두기 : 이 편도 되고 저 편도 될 수 있는 존재
20) 휘뚜루마뚜루 : 이것 저젓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마구 해치우는 모양
21) 시쳇말 : 그 시대에 유행하는 말.
22) 게염부리다 : 부러운 마음으로 탐내는 욕심
23) 애오라지 : 마음이 부족하나마, 그저 그런 대로 넉넉히,
넉넉하지 못하지만 좀, ‘겨우, 오로지’를 강조하는 말
24) 곁부축 : 1. 겨드랑이를 붙들어 걸음을 돕는 것,
2. 곁에서 일, 말을 도와주는 것
25) 씨밀레 : 영원한 친구
26) 오지랖 : 웃옷이나 윗도리에 입는 겉옷의 앞자락.
27) 미쁘다 : 진실하다
28) 마장 : 십리가 못되는 거리를 이를 때 “리” 대신 쓰는 말
29) 늡늡하다 : 속이 너그럽고 활달하다
30) 이든 : 착한, 어진
31) 갯고랑 : 갯가의 고랑.
32) 솔잎대강이 : 짧게 깎아 빳빳하게 일어선 머리
33) 도담도담 : 어린아이가 탈 없이 잘 놀며 자라는 모양.
34) 감감하다 : 1 멀어서 아득한 모양.
2 어떤 사실을 전혀 모르거나 잊은 모양.
‘깜깜 ’보다 여린 느낌을 준다 .
3 소식이나 연락이 전혀 없는 모양.
35) 가뭇없다 : 보이던 것이 전연 보이지 않아 찾을 곳이 감감하다
36) 서리담다 : 사리가 내린 이른 아침
37) 도래샘 : 빙 돌아서 흐르는 샘물
38) 두메꽃 : 깊은 산골에 피어 있는 꽃
39) 천렵(川獵) : 냇물에서 고기잡이하는 일.
40) 든솔 : 든든하고 굳센 소나무
41) 가람 : 강
42) 아라 ; 바다
43) 너겁 : 괴어 있는 물에 함께 몰려서 떠 있는 지푸라기, 티끌 따위
44) 너울거린다 : 1 물결이나 늘어진 천, 나뭇잎 따위가 부드럽고
느릿하게 자꾸 굽이져 움직이다. 또는 그렇게 되게 하다.
45) 아람 : 탐스러운 가을 햇살을 받아서 저절로 충분히 익어 벌어진 그 과실
46) 숲말 : 임동(林洞)
47) 함지박 : 1 통나무의 속을 파서 큰 바가지같이 만든 그릇. 전이 없다.
48) 뒤란 : 1. 집 뒤 울타리의 안. 2. ‘뒤뜰’의 방언(평안).
49) 해거리 : 1.한 해를 걸러서 열매가 많이 열림. 또는 그런 현상.
한 해에 열매가 많이 열리면 나무가 약해져서
그다음 해에는 열매가 거의 열리지 않는다
50) 감또개 : 꽃과 함께 떨어진 어린 감.
51) 새녘 : 동쪽, 동편
52) 햇귀 : 해가 떠오르기 전에 나타나는 노을 같은 분위기
53) 높새바람 : 북동풍
54) 군불 : 음식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을 덥게 하기 위하여 때는 불
55) 새암 : 샘
56) 감치다 : 잊혀지지 않고 마음에서 감돌다.
57) 비설거지 : 비가 오려고 하거나 올 때,
비에 맞으면 안 되는 물건을 치우거나 덮는 일.
58) 부지깽이 : 아궁이 따위에 불을 땔 때에, 불을 헤치거나 끌어내거나
거두어 넣거나 하는 데 쓰는 가느스름한 막대기.
59) 천신(薦新) : 1.그 해에 새로 난 과일이나 농산물을 신에게 먼저 올리는 일.
2. 민속에서, 봄과 가을 에 신을 위하여 하는 굿.
60) 고수레 : 산이나 들에서 음식을 먹을 때 일부를 떼어 던져서
귀신에게 먼저 바치는 것으로 여기는 민속.
61) 눈가늠 : 눈대중으로 목표를 정하는 일
62) 노느매기 : 물건을 여러 몫으로 나누는 일
63) 간사위 : 남의 사정을 이해하는 심정이
64) 늡늡하다 : 속이 너그럽고 활달하다
65) 낫우다 : 병을 낫게 하다
66) 체수 : 몸의 크기
67) 오종종하다 : 1 잘고 둥근 물건들이 한데 빽빽하게 모여 있다.
2 얼굴이 작고 옹졸스럽다.
68) 가시버시 ; 남편과 아내, 부부
69) 그린나래 : 그린 듯이 아름다운 날개
70) 횟배 : 회충으로 인한 배앓이. 거위배
71) 개장국 : 보신탕
72) 하마 : 1 이미. 벌써. 2 이제 곧. 머지않아. 3 ‘하마터면’의 옛말
73) 온 : 100
74) 미주알 : 항문을 이루는 창자의 끝 부분.
75) 내남없이 : 나와 다른 사람이나 모두 마찬가지로.
76) 갈걍갈걍하다 : 얼굴은 파리하나 굳센 기상이 있어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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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평면이 입체가 된 느낌입니다.
아름다운 음악이 배경을 잡으니
한여름밤의 풍경이 잡히는가 봅니다.
음악은 만국의 언어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솔치씨, 뜨거운 여름에 건강하시고.
고맙습니다.
이렇게 마음대로 옮겨서
혹시 작가의 의도에 누가 되지 않을까 우려중이었는데...
좋게 마음을 써주니 정말로 고맙습니다.
징검다리님! 더욱건강하시길...
알립니다. 각주 73번)의 '즈문'은 100이 아니라 1000입니다. 그러니, '즈문'이 아니라 '온''으로해야 맞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