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은 을사년이고 2005년은 을유년이다. 100년이란 세월의 간격이 있다. 그러나 100년전의 대한제국을 둘러싼 세계열강들의 이해관계로 큰 피해를 입었던 역사적 경험들과 2005년 현재 북핵문제를 둘러싼 대한민국의 국제적 상황은 유사한 점이 많다. 역사가 토인비는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1905년을 사람들은 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강탈당한 해로 기억하고 있다. 1905년의 초부터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기까지의 세계 강대국들의 움직임(전쟁, 외교 등)을 한번 살펴보자.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한반도에서 물러났다. 패배의 대가는 가혹했다. 랴오뚱(요동)반도를 일본에 넘기고(할양), 배상금 2억냥을 7년에 걸쳐 지불한다는 치욕적인 내용이었다. 그러자 러시아가 개입한다.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이른 바 ‘3국간섭’에 나선다. 일본은 랴오뚱반도를 중국에 되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에는 외교적 긴장상태가 계속되었다. 일본은 만주와 조선을 나눠 갖자는 ‘만선(滿鮮)교환론’을 러시아에 제시했다. 러시아는 거부했다. 동북아 질서는 정체 속 긴장상태였다.
얼마후 변화가 시작되었다. 니콜라이 2세의 러시아는 대일 강경외교노선으로 전환한다. 온건파인 세르게이 위테(Sergius Witte) 장상(재무장관)이 권력핵심에서 밀려났다. 강경파는 일본의 만선교환론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일본은 다시 ‘39도선 분할안’을 내놓았다. 러시아는 또다시 외면했다. 러시아는 일본을 경시했다. 러시아는 세계 최강의 육군국인 자신들에게 일본이 싸움을 겨뤄올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착실하게 준비했다. 그러면서 고민했다. 가쓰라 다로(桂太郞) 내각은 러시아와 대결로 갈 것인지, 유화정책을 쓸 것인지를 놓고 고민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과의 동맹안이 부각되었다. 영일동맹은 젊은 엘리트들의 생각이었다. 반면 러시아와의 만선협상파는 이토히로부미 등 원로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와 1903년 8월부터 1904년 1월에 걸친 협상이 실패하면서 러시아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1904년 초 일본은 전시참모본부인 대본영을 설치했다. 일본의 군령은 육군참모본부→대본영→연합함대로 이어진다. 그리고 러일전쟁(1904년2월8일 ~ 1905년 9월5일)의 막을 열었다. 일본은 2월 8일밤 뤄순외항에 있던 러시아함대를 기습 공격했다. 만주의 뤄순(旅順)과 펑톈(奉天)을 점령했다. 1905년1월1일 뤄순항구의 점령은 러시아가 주도했던 3국 간섭의 수모를 벗는 상징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해군의 도고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의 연합함대는 1905년5월27일, 28일 이틀간 대한해협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궤멸시켰다.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발틱함대는 8개월에 걸친 끝없는 항로에 지쳐 있었다. 발틱함대는 상트 페트스부르크를 출발, 지브러올터→아프리카 서부를 돌아 남단의 케이프 타운→싱가포로→대한해협까지 지구의 반을 돌았다. 피곤에 찌든 러시아함대는 일본함대의 먹이감이었다. 러시아 함대 38척중 19척이 침몰되고 5척은 붙잡혔다. 나머지 전투함들은 중국항구로 도주했지만 억류되고 말았다. 러시아 사령관은 독도 동남방 18마일에서 항복했다.
일본은 전선에서 승리했다. 러시아는 1905년 일부 공산주의자들의 민중봉기로 계속적인 전쟁수행이 어려웠다. 양측은 종전 쪽으로 방향 전환을 했다. 미국도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가 동북아의 균형을 무너뜨릴까 걱정했다. 연합함대의 위력은 미국을 놀라게 했다. 미국의 시어도르루즈벨트 대통령(26대:재임기간 1901년~1908년)이 중재자로 나섰다.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2차대전때의 영웅 프랭클린루즈벨트(32대 대통령)의 먼 삼촌이다. 시어도르의 제안에 대하여 먼저 일본이 평화회담에 동의했고 러시아도 중재 구상을 받아들였다.
회담장소로 일본은 유럽을 꺼렸고 러시아는 아시아를 싫어했다. 제3의 장소로 워싱턴DC가 정해졌으나 섭씨 30도가 넘는 후덥지근한 여름 날씨로 워싱턴 외교가의 여름 휴양지인 포츠머스(Portsmouth)의 연방정부 관할의 해군기지로 변경되었다. 8월 8일 양국 대표단이 도착하여 8월 9일부터 회담은 개시되었다. 회담은 1905년 8월 9일부터 1905년 9월 5일까지 열였다.
일본대표는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외상이었다. 그는 영일동맹의 설계자이다. 그의 영일동맹안은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단초였다. 영일동맹으로 일본은 열강의 반열에 올라갔다. 영일동맹은 러시아 발틱함대를 괴롭혔다. 발틱함대가 지구의 반 바퀴를 돈 것은 일본의 동맹국 영국의 견제 때문이다. 러시아의 대표는 세르게이 위테 전 장상이다. 위테는 그 시대의 러시아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의 장상시절 러시아는 동북아에 정력적으로 진출했다. 그는 장상이었지만 사실상 총리의 역할을 했다. 러시아의 전통적인 대외 외교정책은 남하정책이다. 러시아의 숙원은 얼음이 얼지 않는 항구 즉, 不凍港을 구하는 것이다. 이를 뤄순과 대련에서 구했다. 그의 재무장관시절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완공했다. 청일전쟁 뒤의 3국간섭도 그의 작품이다. 그러나 대일 군사강경책은 반대했다. 때문에 그는 1903년 사직했다. 러일전쟁때 그는 내각에 없었다. 러시아는 전쟁에서 졌다.
미국과 러시아, 양국 대표인 고무라(당시 50세), 위테(56세), 그리고 루즈벨트(47세). 미국 동북부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에 당시 세계사를 주름 잡던 스타들이 총출동하였다. 20세기 전후 일본외교의 전략 틀을 만든 고무라, 러시아의 동북아 진출 프로젝트를 내놓은 위테, 중재외교(Mediation)의 새로운 전형을 만든 시오도르 루즈벨트.
이들의 책략과 행태는 북핵문제로 격랑을 겪고 있는 지금의 한반도를 겨냥한 3국의 외교전략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경험과 단서가 될만하다. 고무라 외교는 일본외교의 노하우로 전수돼 왔다. 일본 협상술을 알려면 노무라를 알아야 한다. 미국에서는 시오도로루즈벨트를 가장 닮은 인물로 조지 부시를 꼽고 있다. 힘의 외교, 국제분쟁의 역동적 개입, 명문가, 명문대학 출신 패기의 측면에서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테의 외교술은 지금 러시아 푸틴정부에서 의미있는 역사적 사례로 다뤄지고 있다. 포츠머스에서 일어난 일들은 100년 후의 국제정치 무대에서도 유효한 것이다.
1905년 9월 5일에 전문 15조, 추가약관 3개조의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된다. 이로서 일본은 오랜 목표를 이뤄냈다. 만주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고 세계 5대 강국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조약 2조에 의하여 일본은 염원하던 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받았다. 조선정부는 포츠머스조약에 이런 내용이 실린 것도 제대로 몰랐다. 그만큼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에 둔감했다. 그리고 조약 11조에는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고 있다. 동해가 사라지고 일본해로 국제적인 공인을 받은 것은 포츠머스 조약부터다.
이보다 먼저 러일전쟁이 끝날 무렵인 1905년 7월하순 시어도르루즈벨트 정부의 육군장관인 윌리엄 태프트(W. H. Taft)의 일본 도쿄방문이 있었다. 필리핀 총독을 역임한 바 있는 태프트는 시어도르루즈벨트 다음에 대통령(27대)을 한 동부명문 예일대 출신 첫 대통령이다. 태프트는 일본총리 가쓰라타로와 밀약을 하였다. 일본이 미국령 필리핀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대신 미국은 일본의 한국 종주권을 승인해 주는 비밀문서를 교환하였다. 이른바 태프트-가쓰라 밀약이다. 미국과 일본이 자기들만의 약속으로 제3자인 조선을 일방적으로 뭉개버린 사건. 그것은 우리사회 반미정서의 뿌리이기도 하다. 100년전의 미국과 현재의 미국의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에게서 미국은 무엇인가?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터지자 시오도르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을 외교적으로 밀어주었다. 일본을 앞세워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는 생각이었다. 이점 중국의 팽창으로 미국에 대한 세계패권 도전을 사전에 막으려고 일본을 앞세우고 있는 점과 유사하다. 그러나 러시아가 일본에 일방적으로 밀리자 그는 동북아에서 힘의 균형이 무너질 것을 염려했다. 무엇보다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궤멸(1905년 5월)시킨 일본 연합함대의 전술과 위력에 긴장했다. 당장 미국의 보호령인 필리핀이나 하와이가 걱정이었다. 미국 태평양함대의 실력으로 일본 연합함대를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시어도로는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중단을 위한 중재를 하여 포츠머스 회담을 열도록 하고 다른 한편 육군장관 태프트를 일본 도쿄에 보내 필리핀의 안전을 위한 일본과의 회담을 하게 하였다.
1905년7월29일,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확인하고, 극동의 평화를 위해 미․일․영 3국은 실질적 동맹관계를 확보하고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적인 지배권을 인정하는 내용의 3개항의 밀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으로 미국과 조선정부가 1882년5월22일에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은 한낮 휴지조각이 되었다. 미국은 다른 어떤 열강에 앞서 일본의 한국 보호권을 인정해 준 것이다.
그리고 1905년8월12일 제2차 영일동맹 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전을 계속하고 있던 1905년2월 일본 고무라외상이 제1차 영일동맹(1902년 1월 30일) 체결 3주년 기념식에서 동맹의 갱신의사를 밝히자 영국이 동의하여 이루어 진 것이었다. 제1차 영일동맹의 유효기간은 체결일로부터 5년간이었다. 여기에 일본은 인도에서의 영국의 특수이익을 인정하고 영국은 일본이 조선에서 보호권을 승인하는 내용이 있었다.
이제 일본의 한국지배는 국제적으로 완성되었다. 미국과의 태프트=가쓰라 밀약, 제2차 영일동맹, 러일전쟁후의 포츠머스 조약으로 국제적인 장애물은 제거되었다. 러시아가 전쟁에서 패배하자 미국과 영국은 자신의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한국을 일본에 넘기는 데 동의했다. 그 후 일본은 1905년11월9일 이토(이등박문)를 특사로 파견한다. 이토는 11월 10일과 15일, 2번에 걸처 고종을 비공개로 알현하였다. 그 자리에서 이토는 일본이 제시한 보호조약안은 조금도 변경할 수 없는 최종안이라고 위협하였다. 11월17일 마침내 조선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의 전권공사 하야시와의 을사보호조약(제2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었다. 이후의 한민족은 불행한 역사를 갖게 되었다.
이상이 지금으로부터 100년전인 1905년에 우리민족의 운명을 결정지은 주변 국가들의 움직임이다. 최근 2002년 10월 북한의 농축우랴늄 핵무기개발로 북핵문제가 다시 제게된 이래 한,미,일,중,러 간에 치열한 국제정세에서 동북아 중심국가로서의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우리의 현명한 선택은 무엇인가? 국가내 질서는 사전에 rule이 정해지는 law and order이지만 국제질서는 법보다 질서가 먼저인 order and law이다. 따라서, 우리는 최선의 선택은 무엇인가와 최악의 시라리오는 무엇인가라는 하는 모든 것을 대비할 필요가 있다.
지금 동북아 정세는 불안하다. 2004년12월27일 발표된 중국의 ‘2004년 중국국방’, 이보다 앞서 발표된 일본의 ‘신방위정책 가이드라인’, 2005년1월13일 미 CIA 국가정보위원회(NIC)의 ‘프로젝트 2020’ 등의 자료 모두 현재 동북아 정세가 불안하다는 내용이다. 북한 핵무기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은 지금 답보상태다. 2005년2월10일 북한은 핵무기 보유를 공식 선언했다. 미국은 북한이 6자회담에 나오지 않으면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고 압박하고 있다. 그러면서 중국으로 하여금 북한이 6자회담에 나오도록 압력을 가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중국은 이를 계기로 청일전쟁이후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다. 북한의 6자회담 참석을 무기로 미국의 중국에 대한 압박을 견제하려 한다.
중국으로서는 미국이 북한에 친미정권을 세우고 북한에 미군이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 미국과 중국사이에 북한이라는 완충지대가 필요하다. 그리고 중국, 러시아, 우리나라는 미국이 북한을 압박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중국은 미국이 일본과 함께 자신을 잠재적 가상의 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러시아도 9.11일 테러이후 미국이 동유럽과 옛소련 국가들과 함께 러시아를 포위하고 있다는 점이 불만이다. 한국도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분쟁에 휘말릴 우려가 있으므로’ 소위 전략적 유연성에 입각한 주한 미군운용 작전계획에 반대했다. 그럼 미국은 이제 일본밖에 없다.
현재 세계의 경찰국가 미국의 가장 큰 후원자는 영국이다.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의 영국’으로 만들어 태평양과 동북아 지역에서 일본의 군사력을 활용하려 할 것이다. 실제로 미일동맹의 강화와 자위대의 활동방향을 동북아 바깥으로 확대하고 있다. 미국은 일본의 유엔 안보리이사국 진출을 지원하고 있다. 일본은 1946년11월3일 제정된 전쟁포기를 규정한 평화헌법 제9조를 개정하고 자위대를 ‘일본군’으로 개편할 계획이다. 미국이 중국과 북한을 목표로 추진하는 미사일 방어체제(MD)에도 일본은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과는 동해에서 독도문제로, 중국과는 동중국해에서 센카쿠열도(釣魚島)로, 러시아와는 남쿠릴열도 4개섬(북방영토)으로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 여기에 역사교과서 왜곡문제로 한국과 중국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
그럼 일본이 왜 이렇게 나오는 것일까? 현재 일본 정치의 주역들은 전쟁 책임에서 자유로운 전후세대들이다. 이들은 지난 10년 동안 장기침체로 일본의 장래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다. 경제활동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일본 경제는 쇠퇴할 것이다. 지난해 일본인구는 0.01% 줄었다. 2010년에 가면 급속도로 감소할 전망이다. 이에 반해 중국 인구는 앞으로 계속 증가해 14억명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전망이다. GDP에서 세계 6위인 중국경제는 매년 6%이상의 성장을 20년이상 지속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 하나는 미국의 지원이다. 미국은 세계 제2위의 군사비를 지출(일본의 군사비는 한국, 북한, 중국의 군사비의 합과 비슷하다)하고 있는 일본을 이용하여 영국과 함께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안보역활을 강조하고 있다. 동북아 안보뿐만 아니라 다른 분쟁지역에서의 일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강한 신뢰를 보내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주변국들과 영토분쟁을 들고 나와 자극하는 것으로 보인다. 부시-고이즈미의 강경 보수세력들이 아시아의 평화를 해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한편, 미국은 중국은 클린턴정부 시절의 ‘전략적 동반자’에서 부시정부에 와서는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하고 있다. 냉전시절 중국은 소련의 팽창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수행했다. 지금은 세계의 패권을 놓고 미국과 경쟁하려 하고 있다. 작년의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기억하라! 미국과 일본은 안보협의회에서 타이완과 조어도로 중국을 자극하고 대중포위망에 한국을 포함시키려 하고 있다. 중국은 북핵문제로 6자회담을 먼저 제안하고 반격에 나섰다. 미국은 포위망 구축에 러시아와 인도를 끌어드리려 한다. 미국은 인도를 키워 중국을 견제하길 원한다. 지난 3월과 4월 미국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가 번갈아 인도를 방문했다.
이처럼 한반도와 북한을 둘러싼 동북아 정세는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 북한은 6자회담에 복귀할 명분을 달라며 영변 원자로 가동 중단, ‘6월 핵실험설’, 단거리 미사일 동해 발사 등 벼랑끝 외교전술을 계속 구사하고 있다. 6자회담이 중지 된지가 1년이 넘어서고 있어 미국도 모종의 액션을 금년 6~7월 경에 취할 것이다. 결국 북핵문제는 미국이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그러나 미국도 북한 내부문제에 대한 정보의 부재로 선택에 어려움이 있다.
한편, 한일간의 군사동맹은 양국간의 국민정서상 불가능하고 한반도 안정유지에 필수적인 한미동맹도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노무현정부의 ‘협력적 자주국방론’과 ‘동북아 균형자론’은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 미국은 우리를 추종자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과연 균형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얼마 전 미국은 주한미군 병력 감축과 한국에 배치된 미군 전투장비의 규모축소 및 이전을 발표했다. 실제로 작년부터 해외주둔 미군 재배치계획(GPR:Global Posture Realignment)에 따라 2008년까지 12,500명을 단계적으로 축소하고 있다. 미군의 재배치와 철수가 다른 한편으로 궁극적으로 북한을 군사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미국의 포석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 1994년 북핵사태때 미국은 북한 영변을 폭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전쟁코스트, 특히 그 중에서도 휴전선 인근에 있는 주한미군에 대한 피해가 포기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극단적으로 북한이 핵무기를 완성하였을 때 미국은 주한미군의 안전을 고려하여 전면 철수시킬 수 있다. 대중국의 견제는 주일미군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국이 지향해야 할 목표는 무엇인가? 이는 북핵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한미 안보협력 강화, 중국 및 일본 등 주변국들과 평화 협력 관계유지 등이다. 국제정치는 기본적으로 Zero-Sum Game이지만 현재는 조선시대의 광해군식 외교가 필요하다. 즉, Positive-Sum Game이 가능하다. 4대강국을 이용하고 지렛대로 활용하여 우리가 원치 않는 분쟁에 말려들지 않도록 하는 전략적 지혜가 요구된다. 2005년의 대한민국은 1905년의 대한제국과 달라야 한다. 국가의 기본적인 임무는 대외적으로 자국민을 보호하고 대내적으로 국민들이 편안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끝〉
2005. 5. 9
배 문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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