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아름다운 죽음을 위해 : "나누고 간다" 보험금 미리 받아 이웃 도와
게재일 : 2004년 12월 08일 [5면]
『관촌수필』을 쓴 소설가 이문구씨는 지난해 2월 말 고향 충남 보령의 관촌 소나무 숲에 한 줌의 재로 돌아갔다. 당시 62세였다.
위암을 앓던 그는 숨지기 보름 전 의료진한테서 "가망이 없다"는 통보를 받고 자신의 운명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그동안 치료해줘 고맙다. 마무리할 게 있다"며 의료진의 허락을 받아 이틀간 집으로 갔다. 그동안 집필하던 동시집과 산문집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계약금 조로 인세 100만원을 받아놓은 상태였다.
"아빠가 혼수 상태에 빠지면 이틀 뒤 인공호흡기를 떼야 한다. 절대 내 이름을 붙여 문학상을 만들지 말라. 다 부질없는 짓이다. 다른 사람 말에 현혹돼 묘지를 만들지도 말라."
그는 아들 산복(28)씨에게 이렇게 당부하고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씨가 자신의 일기에서 '생사는 어차피 재천(在天)이여-'라고 노래했듯이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품위 있는 죽음=경남 산청군에 있는 대안학교인 간디학교의 설립자 양영모 이사장. 그는 2001년 7월 콧속에 암세포가 퍼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수술하면 나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양 이사장은 "병은 자연스러운 현상인데…"라며 수술을 거부하고 요양을 택했다.
병세가 나빠진 지난해 2월, 가족 10여명이 모였다. 칠순 축하 자리였다. 어려운 형편 때문에 초등학생 시절 보따리 장사를 하던 일, 고려대 법대에 다니면서도 사법고시 준비를 하지 못한 일 등을 차례로 회고했다. 그는 자녀들에게 틈틈이 "자기 물건을 잘 관리해 근검 절약해라""부조나 화환을 받지 말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유언했다.
운명하기 한 달 전에는 가족회의를 열어 화장한 뒤 교정에 심어진 나무의 거름이 되는 '수목장'을 하기로 결정했다. 부인과 3남1녀도 나무 한 그루씩을 심어 가족 숲을 만들기로 했다.
지난해 9월 4일,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에 둘러싸여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가족들이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시신은 장례식 없이 세 시간 만에 경북대 의대에 해부용으로 보내졌다. 그의 죽음은 본인이 원했던 대로 한 달 뒤에나 세상에 알려졌다.
나누고 간다=2001년 11월 담낭암으로 숨진 우정례(당시 47·여)씨는 항암 치료를 포기하고 호스피스 시설에서 진통제만 맞으며 죽음을 맞이했다. 우씨는 보험사에서 미리 받은 종신보험료 5000만원 중 500만원을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했다. 같은 병실의 20대 백혈병 환자의 두 살배기 아이에게 예쁜 옷을 선물했다. 조카 네 명에게 옷 한 벌씩을 사주고 용돈도 줬다. 핸드백은 후배에게, 목걸이는 동생에게 주는 등 아끼는 물건들을 나눠줬다. 동생 정옥(48)씨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언니의 표정이 너무나 편안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건설회사를 다니다 5년 전 퇴직한 김병호(61)씨도 최근 노후대책으로 마련한 시가 4800만원짜리 목동 주상복합상가 분양권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하기로 약정했다.
윤정은 전 이화여대 교수는 4년 전인 2000년 자궁암 진단을 받았다. 당시 72세였던 윤 교수는 살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출소자 일자리 알선과 기술교육 지원에 더 열의를 보였다. 출소자 자립시설 기금 마련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고 올해 3월 은평구에 3층짜리 건물을 매입해 '마지막 소원'을 이룬 뒤 지난 10월 세상을 떴다. 시신은 고인의 뜻에 따라 연세대 의대에 기증됐고 유족들은 조의금 전액(2600만원)을 출소자 자립시설에 기부했다.
죽음을 알면 삶에 충실해져=지난 10월 14일 강원도 춘천시 한림대의 한 강의실. "자살하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죽음은 밝아야 하고 준비교육을 철저히 받아야 한다는 점은 알지만 그 사실만으로 자살을 막을 수 있을까요."(김희준·유전공학 3년)
'죽음의 철학적 접근'과목을 듣는 학생들이 오진탁(45·철학)교수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김군은 "죽음을 공개 토론하다 보니 '죽음=끝'이라는 생각이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낙태수술이나 말기 암 환자의 모습 등을 담은 시청각 자료를 보여주고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죽음에 대해 써보게 한다"며 "이렇게 죽음을 터놓고 얘기하면서 학생들이 삶에 더 충실한 태도를 갖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간호학과 김수지 교수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회한이 남지 않으며 주변 정리를 잘하고 생을 마감하는 게 아름다운 죽음"이라면서 "이를 위해 살아있을 때 준비해야 하며 호스피스 확충 등 제도적 뒷받침도 뒤따라야 한다"고 지적했다.
첫댓글 많은 분들이 자신의 죽음을 여법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저 또한 그렇게 저의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시신기증을 하고 싶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