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국망동으로 점철된 일생
조중응의 삶은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매국망동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그는 원래 중협(重協)이란 이름을 가졌으나, 31세 되던 1890년에 중응(重應)으로 이름을 바꿨다. 우연인지 몰라도 그는 개명과 때를 같이 하여 친일의 길에 들어섰고 끝내 제일가는 반민족적 친일분자가 된다.
그는 소론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한학을 배운 뒤, 1878년 성균관 중학동재(中學東齋)에 들어가 학업을 쌓았고, 1880년에는 전강유생(殿講儒生)으로 경서를 강독했던 유생 출신이었다.
1883년에는 서북변계 조사원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개인적으로 만주, 외몽고, 시베리아, 바이칼 호 일대를 돌아보았다. 1년 여의 북방 여행을 마친 뒤, 그는 '러시아에 대비하고 일본과 친교해야 한다'는 소위 북방남개론(北防南開論)을 주장하면서 친일적 성향을 나타내게 된다. 그러나 이일로 민씨 세력에 의해 숙청을 당하게 되고, 1885년 전라남도 보성군에 유배되어 5년여 동안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1890년 관계에 복귀한 그는 청일전쟁 전야에 의친왕 이강(李堈)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다녀오는 것을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친일행적을 드러내게 된다.
그는 1895년의 민비시해, 1907년 광무황제(고종)의 강제 퇴위에 앞장 서더니, 급기야 1910년 매국내각의 각료로서 나라를 팔아먹은 민족의 최대 반역자가 되었던 것이다. 매국의 공로로 그는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와 10만 원의 사금(賜金)을 받았으며, 일제하에서 중추원 고문 및 각종 친일단체의 수령이 되어 일제 침략의 주구로서 광란적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민비시해와 일본 망명
조중응의 매국행각은 1895년 민비시해 음모에 가담하면서부터 비롯된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조선의 정국이 혼란할 때, 일제는 이를 기회로 삼아 적극적인 침략 공세를 가해 왔다. 일제는 먼저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각축하던 청나라와 일전을 겨뤄 승리한 뒤, 다시금 친러정책을 고수하면서 일본 세력에 정면 대항하던 민비와 그 척족 세력을 일소하고자 음모를 꾸며 나갔다.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1895년 4월, 대원군을 앞세워 일본군대와 낭인들로 하여금 왕궁을 습격하게 하고 민비를 시해한 뒤 정권을 탈취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친일정객도 동원되었음은 물론이었다. 당시의 친일 내각은 일제의 사주를 받아 폐비조칙을 강행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정책을 폈는데, 법부 형사국장이었던 조중응은 그 실무 책임자의 위치에 있었다.
이와 관련한 그의 행적을 자세히 밝히기는 어렵다. 그러나 후에 이 일로 목숨을 부지하고자 일본으로 도망가야 했던 사실만을 놓고 보더라도 그가 민비시해에 깊게 관여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리고 북방남개론이라는 주장 아래 반러·친일의 입장을 견지하다가 민비 세력에 의해 숙청당한 바 있던 그였으므로 친러의 민비세력 거세에 누구보다 적극 가담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조중응은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자 목숨을 건지고자 일본으로 피신하여 이후 10여 년 동안을 일본에서 지내게 된다. 일본에 있는 동안 그는 농업학교에 강습생으로 양잠업 재배를 익히는 등 일본 농업에 관심을 보이는 한편, 40여 세에 전문학교 과정의 정치법률과를 다니기도 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위력에 압도당하고 철저한 친일분자로 양성되기에 이른다.
이 무렵 그는 스무 살 아래의 일본인 처녀 미스오카(당시 20세)와 동거를 하였는데, 타케코(竹子) 부인이라고 불리던 이 일본 여인은 후에 조중응의 정실이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조중응이 본국에 엄연히 정실 부인을 두고 있었음에도 이를 속인 채 일본 여인과 정식 결혼을 치렀다는 것이다.
1906년 조중응이 한국으로 돌아올 때 그녀를 데리고 왔는데, 어엿이 정실 최씨 부인이 있음을 안 일본 여인은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일본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여 장안에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이러한 일이 광무황제에게까지 알려지게 되고, 광무황제가 나서서 두 여인을 좌부인·우부인으로 하라고 중재함으로써 조중응은 정처를 둘씩이나 거느리는 팔자가 되었다. 조중응은 일본 여인과의 사이에서 아들(문호文鎬, 1908년생)과 딸(숙호淑鎬, 1913년생)을 두었는데, 이들은 어려서부터 일본으로 보내져 생활하였으므로 일본인과 다름없이 되었다.
광무황제 퇴위를 강요한 7적
'을사조약'의 강요로 한국이 반식민지로 전락됨과 동시에 조중응은 1906년 7월 일제를 등에 업고 돌아왔다. 그는 일본에서 익힌 농업지식과 관련하여 잠시 통감부 촉탁 농사조사원으로 있다가, 1907년에 일약 이완용 내각의 법부대신에 기용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것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토는 완전 식민지화의 작업으로 이완용 내각에 일본 망명자 또는 유학생 출신의 친일분자를 대거 기용케 함으로써, 망국의 상황을 재촉해 갔던 것이다. 이 무렵 관리 채용의 기준은 오로지 친일성에 의해 정해졌고, 이로써 전통적 관료제도에도 일대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틈을 타서 조중응은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더러운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던 중 1907년 6월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일제의 사주를 받고 광무황제의 강제퇴위를 주동하는 7적이 된다. 일제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트집 잡아 광무황제의 퇴위를 획책하였는데, 그 일을 이완용의 내각에게 떠맡겨 버렸다. 당시 내각에는 이완용을 비롯하여 조중응, 고영희(高永喜), 송병준, 이병무(李秉武), 이재곤(李載崑), 임영준(任善準) 등이 있었다.
이들 7적은 이토가 주도한 이 음모의 주구가 되어 광무황제로 하여금 퇴위하도록 종용하는 등 망동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은 광무황제에게 "동경에 가서 사죄를 하든지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지(長谷川好道) 앞에 나아가 죄를 빌라"는 등 망측한 만행을 부렸다. 결국 이들의 압력에 굴복한 광무황제는 강제퇴위를 당하는 비극을 맞이한다.
이어 이들은 어린 융희황제(순종)를 앞세워 정미조약을 일본측 원안대로 한 자의 수정도 없이 가결시킴으로써, 그나마 실날 같던 대한제국의 숨통을 잘라 버렸다. 1910년에 경술국치를 당했다고 하나, 그것은 형식적일 뿐 대한제국의 멸망은 사실상 '정미조약'에 의해 결정난 것이었다.
조중응의 매국 행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술 더떠 1907년 10월에는 궁중특별경위사무의 감독직을 맡아 궁궐 경호의 책임자가 되어 퇴위당한 광무황제와 어린 융희황제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등 온갖 자행을 저질렀다. 그 대가로 조중은은 1907년 10월에 일본의 1등훈장 대욱장(大旭章)을 받기도 했다.
1909년에는 친일지 {법정신문}을 발간하여 일제침략을 정당화하는 여론을 조성하는 한편, 침략의 원흉 이토가 안중근 의사에게 만주 하얼빈에서 처단당하자 내각 사죄단의 대표 자격으로 일본에 건너가 이토의 영정 앞에 머리를 숙이는 등 반민족적인 망동에 앞장 섰다. 그리고 1909년 12월에는 이완용과 결탁하여 친일단체 '국민연설회'의 발기를 주도하였고 나라를 팔아먹는 일에 일진회와 경쟁을 벌이는 등 차마 웃지 못할 매국행각을 벌였다.
지칠 줄 모르는 친일행각
그는 대한제국의 멸망과 함께 일제로부터 훈1등 자작과 10만 원의 사금을 받았다. 당시 일제는 매국의 '공훈'에 따라 소위 사금의 액수를 정하였는데, 10만 원이란 돈은 소위 귀족들 중에서는 이완용(15만 원)과 민영찬(민비의 오빠, 12만 원) 다음으로 많은 것이었다. 10만 원을 받은 자들로는 조중응 외에 송병준, 박제순, 이지용 등과 같은 제1의 매국노가 있었다. 을사오적의 권중현, 이근택, 윤덕영 등이 5만 원을, 일반 남작들이 2만 5000원을 받았던 것을 보더라도 그의 매국 행각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세간에서 '무사분주'(無事奔走)라는 별명을 붙일 만큼 그는 안 끼는 친일단체가 없을 정도로 광적인 친일배였다. 그런 점에서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정력가였다. 그는 망국 직후인 1910년 10월 중추원 고문이 되었고, 1911년에는 일본적십자 조선본부 평의원을 지내는 한편, 1913년에는 송병준, 박영효, 박기양 등과 '조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1916년에는 일본인 유력자와 한국인 갑부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만든 대정친목회 및 한성부민회의 회장을 맡으면서 일제 식민지 통치 기반의 구축에 누구보다 열을 올렸다.
또한 그는 일제의 어용 유학기관인 경학원의 설립도 동분서주하면서 선전하고 다녔다. 일제는 한국 전통 유교의 정신을 차단하는 대신 일본식 유교로의 전환을 시도하여 민족정신을 말살하고자 했는데, 경학원은 그 중심적 기관이었다. 다시 말하면 일제는 한국의 전통 문화와 자주성을 말살하고, 식민지 통치에 적합한 일본식 문화를 부식하기 위한 일환으로 경학원을 세웠던 것이다. 여기에는 김윤식, 박제순 등이 참여하였는데 조중응 또한 빠질 리가 없었다. 이러한 그의 면모는 {매일신보}의 사설 [공자교의 부활(1)](1913. 2. 1)을 통해 확인된다.
금일 조선인에게 적당한 정신교육은 2개의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내지(일본)의 무사도(武士道)요, 하나는 조선 전래의 유교이다. 우선 조선인의 일용 상행하는 유교를 부활케 함이 윤리와 도덕을 회복하는 첩경이 될지나 이를 이끌 만한 선각자가 없어 늘 개탄하던 바였는데, 위로는 사내(寺內) 총독의 의지를 좇아 시정방침으로 인민에게 전달되고, 밑으로는 일반 민중의 모범이 될만한 조중응(趙重應) 자작이 근일 공자교에서 정한 바 구계구행(九戒九行)의 성훈(聖訓)을 일반 인사에게 광포하여 조선인의 타락한 도덕을 회복 발휘코져.
과거 전강유생의 경력을 지닌 그는 스스로 전통 유학의 뿌리를 부정하고, 일본식 유학의 선전에 적극 가담하면서 전통문화 말살을 획책하는 일제 식민지 정책의 선전자가 되었던 것이다.
1910년대부터 '아세아연대주의'를 부르짖으며 일제의 대륙침략 선동
이처럼 그는 친일의 길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그에게서는 터럭만치도 민족의 양심을 찾을 수 없는, 영원한 친일파였다. 그는 매국으로도 모자라 말년에 이르러서는 일제의 대륙 침략 논리를 비호하는 등 극단의 친일행적을 남겼다.
그가 {매일신보}에 기고한 [동양인일치상보지필요](東洋人一致相保之必要, 1916. 9. 19∼20)라는 논설에서 나타난 아세아연대주의의 논조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먼저 "동양의 일부분인 일본이 그 문명 발달한 독력(獨力)으로도 능히 동양 전체의 우리들의 체면과 평화를 유지케" 한다면서 일본을 치켜세우며 굴종적 노예 자세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일본은 "50여 년 전부터 수천 년 전래하던 구식을 일변하고 개국진취의 유신대업을 이룸으로써 오늘날 서양제국과 견주어 손색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동양제국은 서양제국의 침략에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 동양을 지키지 못할 뻔 했는데, 부강하고 문명된 일본의 힘에 의해 동양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전 동양 각국인은 "일본인과 같이 문명발달에 진취"해야 할 것이라고 힘주어 강조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침략을 옹호하였다.
그는 또 이러한 주장이 "서양에 대한 적개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상호의 세력을 평균케 하여 세계의 평화를 완전 영구하게 하자는 데 있으며, 나아가 인종적 구별 없이 천지를 부모로 한 인류된 오인(吾人)의 행복을 영구 향유코저 함"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늘어 놓았던 것이다.
그가 일본인이라면 몰라도, 또 일제가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는 1930년대라면 몰라도 1910년대에 벌써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침략을 선전하던 그의 친일행각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쯤되면 친일파 정도가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론자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그는 우리 나라를 팔아먹는 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동양 전체를 일본에 복속시키려 한 일본 침략주의의 선동가였던 것이다.
그는 1919년 8월 25일 60세를 일기로 반역의 삶을 마치게 된다. 이 때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제1급 친일파에 대한 예우로서 [조중응자흉거](1919. 8. 26)라는 제하의 사설을 통해 조의를 표하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조문 형식의 이 글에서조차 "매국적이라는 것 외에도 기타 악독과 냉조(冷嘲)의 중심인물이 됨으로써 조중응이란 석자는 경박한(輕薄漢)의 수괴로 보았던 것이 사실이다"라고 조중응을 평하고 있는 점이다.
한마디로 그의 삶은 민족과 국가를 버린 채 매국을 위해 살다간 반역의 길이었으며,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도덕과 인륜을 저버리고 '무사분주'했던 경박한의 행로였다.
■ 장석흥(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 참고문헌
{每日申報}
{朝鮮貴族列傳}
{朝鮮紳士大同譜}
{大韓帝國官憲履歷書}
첫댓글 무덤을 파서 엎고 용변을 부어라
1885년 민비시해사건 가담. <-- 민비가 아니라 명성황후가 맞는 표현입니다. 민비는 일제가 명성황후를 천하게(?) 부른 말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근데 이글을 보니까 상당히 오래전에 쓰여진거 같습니다,명성황후란명칭으로 부르기 이전 같습니다!
그리고 어린융희황제라니 말도안됩니다 융희황제즉위 때 나이 서른넷
"강우규"의사님은 60세에 독립운동하다 돌아가셨는데,이새끼도60에 디졌네..."부관참시"
부관참시는 당연 그 후손들 모두 처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