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부터 오르고 싶은 산이 하나 있었다. 향로봉―포항에서 가장 높은(930미터) 산이어서가 아니다. 산을 오르는 주변 경치가 마냥 좋아서만도 아니다. 이 산으로 향하는 새로운 등반 코스를 밟아 보고 싶은 별거 아닌 호기심 때문이다.
향로봉 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보경사 계곡으로 오르는 코스가 있다. 여기엔 내연산의 절경들을 만끽하는 즐거움이 있다. 하지만 시명리에서부터 시작되는 막바지의 가파른 경사가 등산객을 지치게 할 뿐만 아니라, 적어도 연산폭포에 이르기까지는 행락 인파에 부대끼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또 하나, 보경사 뒤쪽에서 시작하여 문수봉 과 삼지봉을 잇는 능선길도 있다. 계곡길보다는 힘이 적게 들지만 능선의 단조로움 때문에 매력적이지는 못하다. 상옥 쑥밭에서 매봉을 거쳐 북쪽 능선을 타는 코스가 있다. 해발 600미터에서 출발하여 600~800미터 능선을 오르락내리락하기 때문에 힘도 적게 들고 능선 위에서 수많은 산자락을 조망하는 시원한 맛이 있다.
그러나 이 세 코스는 한 번씩 다녀봤기에 구미가 당기지 않고, 마음에 묻어 두었던 새로운 코스가 주말만 되면 새록새록 꿈결처럼 돋아나곤 했다. 죽장면 하옥리 돈세동에서 출발하는 최단 코스이다. 돈세동 주변의 수려한 경치 때문에 이 곳까지 간다는 것만도 근사한 일인데, 여기서 산행을 시작한다는 건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돈세동까지 가는 길이 문제다. 청하에서 샘재를 넘어 가거나 죽장에서 가사령을 넘어가야 하는데, 그 거리가 비포장 구간을 합쳐 삼사십 킬로미터나 되고, 승용차로도 한 시간 이상 걸리니 한 번 마음 내기가 쉽지 않다.
어제 서울에서 열린 한국민속학회 학술발표회에 갔다가 밤 12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내려 올 때 고속버스에서 대여섯 시간 앉아 있으면서, 내일 날이 개면 만일을 제쳐 놓고 산행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동안 발표 눈문 준비로 찌들었던 가슴을 확 풀어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하루 종일 비가 내렸던 터라 그 곳엔 계곡물이 철철 넘칠 것이며, 산들이 생명력으로 충만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또 촉촉히 젖어 있는 산길을 걸으면 특별한 맛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은 혼자 나서기로 했다. 좀 늦게 일어나 마땅한 동행자를 찾을 수 없기도 했지만 혼자 하는 산행도 그것대로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돈세동엔 어제 내린 비로 과연 요란한 계류의 소용돌이가 있었다. 바위를 내리치며 흰 포말을 일으키는 계류는 보기만 해도 세파의 먼지가 깨끗이 씻기는 듯하다. 산의 적막을 깨뜨리며 원시림 속으로 번져가는 물소리는 또 온갖 잡다한 소리에 더렵혀진 귓속을 말끔히 닦아 주는 듯하다. 물소리를 뒤로 하고 이제 산을 오른다. 산은 처음부터 가파른 오르막, 숨가쁜 비탈이다. 봄이나 여름, 가을에 산행을 하면 길옆에 핀 꽃들에 눈이 가게 마련이다. 이 꽃은 노랑제비꽃, 저 꽃은 산괘불주머니, 요 꽃은 용담…. 속으로 이름이라도 뇌어 본다. 그러면 꽃들이 다가와 뭐라고 하는 것 같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었음인가. 처음 만나는 꽃이라면 사진을 찍고 집에 와 식물도감을 펴들고서야 그 날의 산행에 마침표를 찍는다. 겨울 산행은 그런 맛이 없어도 나목 사이로 낙엽 밟는 즐거움이 있기에 경쾌하고, 나무들 사이로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는 투명함이 있기에 산뜻하다.
비 온 뒤에는 추워지는 게 겨울 날씨인데, 요즈음은 비가 온 뒤에도 춥지 않다. 그래서일까. 겨울산답지 않게 바위에 낀 이끼가 파란 자태를 뽐내고 있다. 긴 가을가뭄을 뚫고 요 며칠 간 내린 잦은 비로 습기를 한껏 머금고 초록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 산 속 온갖 생물들이 저마다 옷을 던지고 차가운 눈보라와 매서운 북서풍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 녀석들은 내일 당장 영하 10도의 강추위를 보일망정, 주가가 곤두박칠치고 환율이 치솟을망정 동심의 세계에 몰입하고 있다. 단단한 바위에 뿌리박고 웅장한 산의 정기를 마시며 이 겨울에도 습기만 있으면 저렇게 진초록으로 생동감을 발산하는 이끼의 모습이 폐부 깊숙이 박혀 있는 순수를 자극한다. 손으로 쓰다듬어 보기도 하고, 각도를 달리하면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도 한다. 이 겨울에 이끼의 참모습을 보고 감동했다는 것만으로도 오늘 혼자서 산에 온 의미는 충분하다.
얼마를 또 오르자니 참나무에 붙어서 연노랑 꽃을 소담스럽게 피운 겨우살이가 머리 위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엄동에 꽃을 피운 것이 신기하기도 하지만 어떤 책에서 읽어 본 ‘겨우살이의 생활’이 생각나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 나무는 얹혀 사는 나무―주인집인 셈이다―의 잎이 다 떨어져 가지가 드러나는 겨울에만 온전하게 모습을 나타낸다. 겨울이나 이른 봄에 꽃이 피고 열매는 가을에 익는데, 새들이 이 열매를 좋아하여 즐겨 먹지만 소화가 되지 않고 배설물과 함께 그대로 나온다. 요행히 배설물이 활엽수 나뭇가지에 묻으면 열매는 특유의 접착력으로 달라붙어서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봄에 싹이 튼다. 종자가 새를 통해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옯겨 다니는 기구한 생애를 가진 희한한 나무다. 땅에 떨어지지 않고―떨어지면 끝장이다―새의 먹이가 되어 다른 나무에 옮겨 붙는 열매가 몇 퍼센트나 되는지 모르지만, 그런 불투명한 조건에서도 멸종되지 않고 곳곳에서 종을 이어가는 걸 보면 그 생명력에 감탄할 뿐이다.
이제 저 앞에 정상이 보인다. 향로봉 정상은 특별히 뾰족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이 있다. 옆의 다른 봉우리들에 비해 그리 높이가 높지 않으면서 자신의 존재를 살짝 드러낼 뿐이다. 마음씨 넉넉한 맏형의 이미지를 가졌다고나 할까. 하지만 여기서 관망하는 사방의 파노라마는 압권이다. 오로지 여기에 오르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벅찬 감격이 있다. 동쪽으로 천령산 너머 눈부신 푸르름으로 출렁이는 비취빛의 바다, 서쪽으로 장엄한 무게로 내려앉은 주왕산이 있다. 남쪽으론 매봉, 괘령, 비학산 같은 고봉준령들이 비스듬히 누운 겨울 태양의 역광 때문에 생긴 청색의 산그림자를 겹겹이 접는다.
지금 정상에서 오래도록 서 있는 건 발 아래 펼쳐지는 장관 때문만은 아니다. 어제까지 짜증들을 땀으로 내보낸 뒤, 가슴 속으로 충전되는 새 삶에 대한 의지를 오래도록 느끼고 싶어서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여기에 머무를 수는 없다.
향로봉으로 오르는 이 코스는 다른 세 코스에 비해 거리가 짧아 시간은 훨씬 적게 걸린다. 하지만 숨가쁜 오르막이 있으면 가파른 내리막이 있는 법. 올라올 때와는 달리 하산길은 여유 부릴 틈이 없다. 계곡의 물소리가 산 속에 가득함을 느낄 때쯤 산행을 함께 했던 나무지팡이를 놓는다.
혼자 한 등산이었지만 만족스런 산행이었다. 메아리처럼 멀어져 가는 산 아래 계곡의 물소리를 등 뒤에 두고 샘재를 넘으니, 향로봉은 벌써 저 만큼 물러나 있고, 나는 어느 새 전쟁터와도 같은 4차선 도로의 자동차 물결 속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