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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물로 여김은
본문 / 빌3:1~9
오늘 본문을 보시면 ‘끝으로’라는 말로 3장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끝으로’라는 우리말은 말 그대로 마지막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뒤를 보면 상당한 내용이 더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끝으로라는 말을 헬라어 원어 성경을 보면 ‘토 로이폰’으로 되어 있는데 ‘남은 점에 관하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끝으로’라는 말은 이 서신을 결론 짓는 마지막 말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앞의 1,2장의 내용을 끝내고 다시 두 번째 큰 주제로 다른 신앙의 문제를 언급하겠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1,2장에서의 큰 주제는 빌립보 교회 안에서도 문제가 있었는데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는 분열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서로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가 되어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갈 때 분열의 문제가 해결 된다고 권면해 주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비우고 낮추시므로 우리를 구원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가 받아 누리고 있는 이 구원을 실제 삶 속에서도 이루어 가야 한다했습니다. 그러면서 실제로 이렇게 살아 온 두 사람,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예로 들어 소개했습니다.
이렇게 분열의 문제를 다루고 ‘끝으로’라는 말은 이제 두 번째 문제로 잘못된 율법주의를 조심하라는 내용을 기록하겠다는 뜻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의 신앙을 잘못 보고 잘못 배워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올바른 믿음에 대하여 권면해 주는 말씀이 3장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2절을 보시면 삼가 조심해야 할 세 종류의 율법주의자들을 언급합니다. 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개들, 행악자, 몸을 상해하는 자들(몸에 할례의 표시가 있어야 구원 받는다고 하는 자)의 가장 큰 특징 세 가지가 곧바로 3절에서 언급합니다.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여기서 말하는 봉사(services)는 예배를 말합니다. 3절 말씀은 다시 반대로 이야기해보면 자기를 위해 예배드리고 자기 자랑을 하고 오직 눈에 보이는 물질로 자기 배만 채우고 물질적인 안위와 쾌락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인데 이들이 개들이고, 행악자이고, 할례 받았다고 자랑하는 사람들로 율법을 신봉하는 율법주의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개들이라고 표현했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에게 가장 혐오스러운 동물을 꼽으라면 돼지 다음이 개였습니다. 벧후 2:20절에 가보시면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예수님께서도 당시 이런 속담을 사용하셔서 마7:13절에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는 말씀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마치 한 식구처럼 키우는 반려견이 대중화 되어서 그렇지 불과 3,40 전 시골에서 풀어 놓아 키우는 개들을 보면 개들의 속성이 어떤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버려진 음식이나 쓰레기 더미의 음식은 물론 사람의 배설물도 먹었습니다. 특히 집에서 키우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개는 몰골도 흉하고 사람에게 으르렁 거리며 대들기까지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개들을 삼가라고 한 것은 오직 자기 육체를 위해,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다는 게 문제입니다. 특히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나 율법을 목숨처럼 지키는 유대주의자들에게 나온 행동들인데 문제는 아직 어린 아이와 같은 성도들이 이들의 신앙을 잘못 보고 배워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살까 걱정이 된 것입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할례를 받아야만 하나님의 자녀고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기들이 최고의 사람이고 자기들처럼 율법을 잘 지켜야 구원 받고, 뛰어난 출신과 가문을 자랑했습니다. 형식주의에 얽매이고 보이는 결과를 중요시하며 세상에서 성공하여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최고의 신앙과 자랑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예수 믿기 전, 과거에 자기가 그렇게 살았다는 걸 5,6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 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이렇게 사도 바울은 구원 받을 만한 외적인 좋은 조건들로 말하면 그 어떤 율법주의자들보다도 뒤지지 않다며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자랑 거리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예 태어날 때부터 태생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 네 가지를 먼저 예를 듭니다. 태어나서 8일 만에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합니다.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말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백성들이기 때문에 자부심과 자랑이 대단했습니다. 두 번째 자랑거리로는 이스라엘의 족속이고 세 번째로는 베냐민의 지파라고 자랑합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갈라질 때 북이스라엘은 망해 없어졌지만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만은 함께 이스라엘을 지켜낸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이라는 겁니다. 네 번째로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라는 것도 정통 유대인으로 율법을 지켜온 출신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가 살면서 후천적으로 얻어낸 것 세 가지 자랑 거리도 있었다고 말합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고,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할 정도였고, 율법을 잘 지킨 것으로 말하면 흠이 없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랑합니다.
그런데 그게 예수 믿고 보니 아무 쓸데없는 배설물보다도 못한 것이었다는 신앙의 간증을 해 줍니다.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잘 산다는 것은 외적인 조건인 종교의식, 출신, 학벌, 명예, 재산, 건강, 기타 자랑할 만할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로 믿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세상적인 것, 외적인 것을 얻어 내기 위해서 예수 믿지 말고 또 그런 조건들을 다 갖춘 사람이라고 예수 잘 믿고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아님을 자신이 경험한 것을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성공했다고 하는 외부적인 조건이나 육체적인 조건들이 예수를 바로 믿는 데는 방해가 된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는 이런 외부적인 조건들이 배설물처럼 여겨졌다는 자신의 신앙을 간증형식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으로 말하면 뼈대 있는 집안의 출신에서 서울대를 나왔고, 좋은 직장에서 돈과 명예를 가지고 남부러울 것 없이 잘 살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추었다는 말입니다. 요즘 버전으로 표현하면 사도 바울은 금수저 출신입니다. 여러분! 요즘에 금 수저 흙 수저 출신이야기 나돌아 다닙니다. 아니 어쩌면 사실일겁니다. 좋은 가문과 배경에서 태어나서 많이 배우고, 권력과 배경이 좋고, 좋은 직장에서 돈 많이 버는 부모 밑에서 자라는 자식은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부모 때문에 잘 된다는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 잘 만나면 아무리 나라 경제가 어렵고 살기 힘들다 해도 아무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실제로 서울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상대로 조사를 해 보았더니 부모님 연봉이 많고 재산이 있는 자녀들이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녀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님들이 학원 보내며 공부 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위 말하는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평범한 자녀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우니까 유치원 때부터 수 백 만원하는 학원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공부도 있는 자녀들이 더 잘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직장도 알아서 잘 찾아 들어갑니다. 그런데 없는 자녀들은 그나마 어렵게 들어간 학교 등록금 마련하느라 알바 해야지 공부할 시간도 모자랍니다. 그러니 성적도 좋을 리 없습니다. 직장도 찾아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3,40년 전만 해도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말이 많이 나돌았습니다. 모두가 개천에서 살았으니 그럴만하지만 지금은 실제로 4대강도 다 뒤집어엎어 놓아서 생태계만 있으니 개천에서 용이 날 리가 없다는 겁니다. 오죽했으면 흙수저라고 불리는 청년들이 자기들을 3포(연애, 결혼, 출산), 5포(직장, 집), 7포(인간관계, 희망)세대라고 하며 모든 것을 포기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가난이 되 물림이 되다보니 지금은 있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가 결혼도 잘한다고 합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대부분 결혼할 때 월세나 전세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신혼부부들을 조사 해 보면 처음부터 집을 사서 결혼한 세대가 더 많아 졌다는 조사도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흙수저로 태어난 자녀들이 하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이생망! 이번 생애는 망했어! 금수저 물고 좋은 학교 좋은 직장에서 돈 많이 벌고 편하게 살려고 하는데 우리 부모님이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게 살지 못한다고 푸념석인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이렇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얻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잃은 것이 있게 하고 잃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얻게 하는 원리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외적인 좋은 조건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나 영생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반대로 이런 조건이 없이 힘들게 살면 상대적으로 예수님에게 한 발 더 나아가는 기회와 수단이 된다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소위 말하는 금수저로 태어나 세상의 외적인 조건들을 최고의 가치로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예수님의 가치를 알고 나니 세상의 가치가 예수님을 믿는 데는 얼마나 방해 요소가 되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를 알고 보니 이런 세상의 금수저 같은 조건들이 배설물처럼 여겨졌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7,8절 말씀을 다함께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왜, 이런 고백이 나왔을까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얻어서 누린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얻지 못하면 다 잃은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다 잃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얻었다면 모든 걸 얻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만지고 보고 가지고 누리는 것들은 잠시 잠깐의 것이지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부르시면 이 모든 것은 다 내려놓고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걸 깨닫는 데는 아무 대가도 치루지 않고 하루아침에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고 나서부터 오히려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 이 서신을 기록한 곳도 자유가 없는 아무것도 누릴 수 없는 감옥 안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길을 걷고 또 걸으면서 아픔과 눈물이 주님을 찾게 했고 주님을 알아가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 땅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소위 말하는 금수저로 사는 환경에서 예수님을 찾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어려움과 아픔, 특히 흙수저의 환경에 있다는 것으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이련 어려움과 고통들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수단이 됨을 깨닫고 신앙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자신이 경험한 신앙을 권면해 주는데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나니까 세상의 좋은 조건들이 소위 말하는 출신, 명예, 학벌, 돈, 건강이 오히려 예수님을 믿고 아는데 방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이 땅에 살면서 무엇이 최고의 가치, 영원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면 이런 것들은 배설물로 여겨지고 예수님의 가치를 알면 모든 것을 올인 할 수 있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해 주신 밭을 갈다가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모아서 밭을 사는 것처럼 여러분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가치와 보화를 발견했다면 지금 현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답이 나오는 겁니다.
신앙은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에 세상의 가치는 무엇이었나요? 과자, 물총이나 인형 등의 장난감, 딱지, 구술, 자전거 등이 아니었어나요? 그래서 어릴 때 제일 부러웠던 것은 빵이나 사탕, 과자를 파는 먹는장사를 하는 집에 사는 친구들이었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 보니 이런 것들은 아무 쓸데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먹고, 장난감처럼 잠시 가지고 노는 것이 인생의 최고의 가치가 아님을 어른이 되고 보니 알기 때문입니다. 장난감, 물총, 딱지, 구술, 인형 등은 어른이 되면 오히려 거리끼어 해가되는 물건으로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갈 때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이 무엇일까요? 부귀와 영화, 권세와 쾌락 등의 육체적인 것들이라고 사도 바울이 권면해 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을 때 이런 것들이 배설물로 여겨졌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포기하고 버리면서 예수님에게 한 발작 더 다가가기를 바랍니다. 이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 고난과 아픔이라는 사실도 잊지 마시고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들을 신앙으로 잘 견디고 버텨가며 그리스도를 얻어 종국에는 모든 것을 갖고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