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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강해(11) 2023. 10. 1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느헤미야6:1-9
인류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발전은 비판과 조롱을 극복하고, 소명을 따라 포기하지 않고 도전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인류 역사상 첫 번째 증기 기관선이, 뉴욕에서 알바니를 향해 떠났을 때, 지금 1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인데, 무려 32시간이 걸렸습니다.
첫 번 자동차를 시운전을 했을 때, 말이 끄는 수레보다도 늦었습니다.
첫 번째 전구가 실험됐을 때, 그 전구는 너무 희미하여, 가스램프로 비쳐 보아야만 했습니다.
첫 번째 비행기가 하늘로 올려 졌을 때, 그것은 공중에 불과 59초를 머물다가 곤두박질쳤습니다.
사람들은 무모한 일을 한다고, 조롱하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에 의미 있는 발전을 이루어 내었습니다.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옥스퍼드 대학의 졸업식 축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Never give up!, Never, Never, Never”(절대 포기하지 말라).
우리는 느헤미야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어떤 위협과 조롱에도 자신의 소명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숱한 어려움(도전)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예레미야는 초지일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성벽을 거의 다 완성하는 단계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성벽의 문짝만 달면 됩니다.
<평화 회담 제의>
그럼에도 외부의 적대자들의 공격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느6:1-2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우리의 원수들이 내가 성벽을 건축하여 허물어진 틈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함을 들었는데 그 때는 내가 아직 성문에 문짝을 달지 못한 때였더라/ 2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
그동안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과 같은 사람들은 연합군을 구성하여 금방이라도 쳐들어올 것처럼 가짜 뉴스를 퍼뜨리면서 협박을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유다 사람들이 성벽을 쌓는 일을 포기하지 않자 이번에는 작전을 바꾸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도자인 느헤미야를 제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느헤미야에게 사람을 보내 ‘오노’라고 하는 곳에서 평화 회담을 열자고 제의하였습니다. ‘오노’는 오늘날의 텔아비브(이스라엘의 최대 도시, 임시 수도)로 지중해 해안에 위치한 휴양도시입니다. 예루살렘에서 68km나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마리아 땅에서도 그만큼 떨어진 중립지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보통 협상을 하기 위한 장소로 평평한 곳을 선호합니다.
6.25 당시 휴전협상을 하려고 할 때, 북한에서는 자신들의 점령지역인 개성에서 하자고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휴전에 반대했지만, UN군 측에서는 빨리 휴전협상을 하고자 그들의 제안에 동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북한 측에서 UN군 협상단이 올 때 차량에 흰색 깃발을 달고 오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흰색 깃발을 달고 협상장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북한에서 그 장면을 촬영해 지금까지도 UN군이 항복하러 오는 장면으로 선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이긴 전쟁으로 선전하는 것입니다.
그 이후 UN군 측에서 새로운 협상장을 제안했는데, 그곳이 바로 널문리입니다(당시 그 지역 사람들은 널빤지로 문을 만들어 달았다고 함). 널문리에 있는 한 가게를 협상 장소로 택했는데, 중국군이 이해하기 쉽게 하려고 판문점(널빤지로 만든 문이 있는 점방)으로 표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진을 보니 그곳은 넓은 평야 가운데 한 곳입니다. 평지는 양쪽의 위협에서 벗어나 있기에 협상 장소로 안성맞춤입니다.
그런데 산발랏이 보낸 편지의 내용은 생략이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추측건대, 겉으로는 “이제까지 우리가 반대했지만, 이제 당신이 성벽을 거의 완성했으니 이제 더 이상은 반대할 필요가 없어졌소. 좋든 싫든 당신은 예루살렘 총독으로, 나는 사마리아 총독으로 함께 지내야 할 텐데, 친구처럼 좋게 지냅시다. 정상회담 한 번 합시다”하고 제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느헤미야를 외지로 불러들여 해치려는 음모였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떠나 오노까지 내려오는 길목에서 매복하였다가 기습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의 음모를 눈치챘습니다. 그래서 ‘오노’에서 만나자는 요구에 ‘Oh, No!’라고 단호하게 거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절에도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음모가 의심은 가지만, 그렇다고 명백한 증거는 없으니 합리적인 거절의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가 공식적으로 내놓은 거절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느6:3-4 “내가 곧 그들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중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하매/ 4 그들이 네 번이나 이같이 내게 사람을 보내되 나는 꼭 같이 대답하였더니.”
느헤미야는 “내가 지금 큰 역사를 진행하고 있는 중인데 그것을 중단하고 어떻게 너희에게로 가겠느냐”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진심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분명한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을 성벽과 성문을 완성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오노까지 가려면 그 거리가 만만치 않습니다. 예루살렘에서 68km나 떨어져 있기에 오고 가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설사 산발랏의 의도가 선하다 하더라도, 성벽 공사가 지체될 것은 분명합니다. 집중력이 상실되고 산만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산만함의 유혹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도 언제나 똑같이 다가옵니다.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집중하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오노’에서 만나자고 끈질기게 초대합니다.
“잠시 좀 쉬어. 신앙생활도 정도껏 해야지 그렇게 몰입하면 안 돼. 젊어서 열심히 돈 벌고, 나이 들어 한가할 때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돼. 너 아니래도 일할 사람 많아! 오늘만 날이냐? 한 주일 교회 빠진다고 어디가 덧나겠어?”
이런 것들이 모두 우리를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산만함의 유혹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 공사를 완공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일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오직 성벽을 완공하는데만 집중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네 번씩이나 사람을 보내서 똑같은 것을 거듭 요구해왔습니다.
우리 속담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도 있지만, 처음에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가도 거듭해서 압력을 받게 되면 점점 그 의지가 약해지는 법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때마다 똑같은 말로 대답했습니다. 그의 삶에 있어서 우선순위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미국인 선교사님이 중국에 들어가서 정말 대단한 능력을 보이면서 선교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을 눈여겨보던 한 기업에서 그 선교사님을 좋은 조건을 내걸고 채용하려고 했습니다. 물론 그 선교사님은 ‘나는 하나님께서 여기 중국에 선교사로 보내셔서 온 사람이라’고 하면서 거절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기업은 계속해서 더 많은 고액의 연봉을 제시하면서 끈질기게 구애했습니다. 그러자 마지막에 이 선교사님이 그들의 제의를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연봉의 액수가 적다는 뜻이 아니고요, 당신들이 제의하는 그 일이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는 일보다 너무나 적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십니까? 실상은 거액의 연봉이라는 달콤한 유혹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도중에 덮어버리는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있는지 말입니다.
의정부중앙교회에서 들은 이야기.
<봉하지 않은 편지>
산발랏과 게셈은 자신들의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없게 되자, 이번에는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느6:5-7 “산발랏이 다섯 번째는 그 종자의 손에 봉하지 않은 편지를 들려 내게 보냈는데/ 6 그 글에 이르기를 이방 중에도 소문이 있고 가스무도 말하기를 너와 유다 사람들이 모반하려 하여 성벽을 건축한다 하나니 네가 그 말과 같이 왕이 되려 하는도다/ 7 또 네가 선지자를 세워 예루살렘에서 너를 들어 선전하기를 유다에 왕이 있다 하게 하였으니 지금 이 말이 왕에게 들릴지라 그런즉 너는 이제 오라 함께 의논하자 하였기로.”
이번에는 ‘봉하지 않은 편지’를 보냅니다. 고대 세계의 풍습상, 공식적인 편지는 파피루스나 양가죽 같은 곳에 내용을 기록한 다음, 그것을 끈으로 묶고 점토로 봉하여 날인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편지 내용이 노출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산발랏은 이 같은 일반적인 풍습에 어긋나게 봉하지 않은 편지를 느헤미야에게 보낸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까닭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편지의 내용을 알게 하려는 수작이었습니다. 일부러 읽게 하고 소문을 퍼뜨리려는 목적입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첫째, ‘너와 유다 사람들이 모반하려 하여 성벽을 건축한다’는 것입니다.
이방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가스무(게셈의 아라비아식 이름)도 그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거짓 소문입니다.
이 모함은 어제 오늘에 이용된 내용이 아닙니다. 오래전부터 그들은 이러한 말로 유다인들이 성벽을 쌓는 것을 방해하여 왔습니다. 실제로 아닥사스다 왕도 이 말을 듣고, 성벽 쌓는 일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변화시켜, 허락을 받아 성벽을 쌓으러 온 것입니다.
둘째, ‘느헤미야가 왕이 되려고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서 당신을 왕으로 떠받들고서 '유다에 왕이 있다‘고 선포하게 할 예언자들까지 이미 임명하였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느헤미야와 아닥사스다 왕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음모입니다.
산발랏의 음모는 느헤미야에게 아주 치명적입니다. 만일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를 의심한다면 군대를 보내어 성벽 공사를 당장 중단시키고 느헤미야를 소환해 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소문은 곧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게까지 보고될 것이니 지금 만나서 함께 의논하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어떤 소문을 들으면 금방 기정사실화 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그런 버릇이 있습니다(‘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봉하지 않은 편지’를 읽은 사람들은 금방 소문을 퍼뜨릴 것입니다.
그러면 당사자로서는 참으로 난감해집니다. 해명할 길이 없습니다.
느헤미야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악의에 찬 소문과 비방’을 들었을 때가 있으신가요?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나요?
당장 코에서 콧김을 씩씩 뿜어대면서 ‘오늘 너 죽고 나 죽자’하고 팔 걷어붙이고 쫓아가지 않으십니까?
물론, 그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죠. 우선 해명해야죠. 최선을 다해 해명해야죠.
그런데 문제는 소문이 퍼지는 것만큼 해명은 퍼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럴 때 참 답답하시지요.
(방송, 신문의 오보 – 언론 중재 위원회 제소 – 그러나 정정보도는 작게. 사람들은 알지 못함)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오늘 느헤미야의 반응을 통해 지혜를 얻으시고 또 위로받으시기 바랍니다.
자~, 느헤미야는 이러한 협박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느6:8-9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말한 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 지어낸 것이라 하였나니/ 9 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하였노라.”
느헤미야도 최선을 다해 해명하였습니다. 사람을 그에게 보내어 “네가 말한 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요 네 마음에 지어낸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하였습니다.
문제는 그 해명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헤미야도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해명에도 불구하고 소문은 계속 퍼져나갈 것입니다.
당연히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이것이 산발랏이 노리는 것입니다. 9절a “이는 그들이 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그들의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이 겁을 먹고 성벽 쌓는 일을 그만두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결정적인 순간 느헤미야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저는 여기서 두 가지 면에 주목하였습니다.
첫째, 느헤미야는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사방이 막혀 있어도 하늘은 열려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현대어 성경은 “하나님, 바로 이럴 때에 나를 붙들어 주소서!”입니다.
기도의 힘을 믿고 있었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가보면 금문교(Golden Gate Bridge)라는 아주 유명한 다리가 있습니다. 이 다리는 1937년에 완공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suspension bridge)였습니다. 그런데 이 다리를 건설하던 초창기에 23명의 인부가 일하다가 밑으로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인부들이 자꾸 사고를 당하게 되자, 공사 또한 잘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일꾼들이 다리에 올라서는 것을 두려워하는데 어떻게 일이 잘 진행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공사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대형 안전 그물망을 만들어서 인부들이 일하는 다리 밑에 달아놓은 것입니다. 물론 그 그물제작에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공사가 끝날 때까지 10명의 인부가 더 떨어졌지만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공사 기간을 크게 앞당겨서 다리를 완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인부들이 추락 사고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지 않고 열심히 일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는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밑바닥에 하나님의 거대한 안전 그물망을 까는 것입니다.
출17장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면 승리, 아론과 훌의 보조. 여호수아가 칼을 들고 싸우지만 승리의 궁극적인 원인은 기도에 있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떤 이는 기도의 능력을 부인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왜 바쁜 중에도 기도하셨습니까? 왜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까.
얘수님이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기도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둘째,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유다 백성들도 지쳐 있습니다. 그런데 왜 느헤미야는 먼저 내 손을 힘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겠습니까? 그 이유는 느헤미야가 이 일로 인해서 힘을 잃어버리면 결국 유다 백성들도 힘을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동물의 왕궁에서 본 내용입니다. 무리에서 나온 어미 사자와 새끼 사자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며칠을 먹지 못해서 이제 고기를 먹지 못하는 죽을 위기에 있었습니다. 이때 어미 사자가 작은 흑돼지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여러분 이때 어머 사자는 새끼를 먼저 먹이겠습니까? 자신이 먹겠습니까? 저는 당연히 새끼를 먹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미는 새끼를 먹이지 않고 자신이 먹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어미 사자가 힘을 잃어서 사냥하지 못하면 어머 사자만 아니라 새끼 사자도 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미 사자는 그 고기를 먹고 다시 힘을 내어서 더 큰 사냥감을 잡아서 새끼와 배불리 먹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해설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이 생존을 위한 자연의 섭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연을 섭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여러분! 왜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까? 단순히 그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지도자가 힘을 잃어버리면 모든 사람이 힘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라며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탄은 오늘도 열심히 일하는 사역자나 지도자들,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의 사기를 꺾고 약화시키기 위해 험담과 비방을 사용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다가 누군가의 지어낸 근거 없는 모함, 악의 찬 소문이나 험담 때문에 속상하고 기분 망치고 주저앉아 계시지는 않습니까? 이제는 생각을 바꿉시다. 진실한 삶이기에 반대자들의 모함이 있습니다. 그럴수록 보란 듯이 더욱 힘을 내어 소명에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담대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단기적으로 어떤 불이익이 발생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결백을 입증해 주실 것을 믿고, 담대하게 맡겨진 일에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마10:26)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오늘도 우리 하나님은 그 위대하고 강한 편 팔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켜 주신다는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완수해 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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