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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의 창작 동화를 결산하다.
권 혁 준
1.
오늘은 설날 연휴의 마지막 날입니다. 장인댁에 모인 우리 동년배 남자들은 술을 마시거나, 과일을 먹으면서 조카 아이들 취직 걱정을 하다가, 판교 아파트 분양 문제, 골프장 회원권 값이 10억원까지 올랐다는 것을 화제로 시국에 대한 우려가 뜨겁습니다. 설날맞이 친선 고스톱을 치려고 준비하는 어수선한 틈을 타서 나는 살짝 빠져나왔습니다. 오늘까지 이 원고를 끝내야 하기 때문이지요. 오래 전에 읽었던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도 다시 읽어야 하고, 글의 전체적인 틀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나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봐야겠습니다.
‘린드그렌’을 다시 읽다가, ‘비읍’이의 상상력이 너무 귀엽고 예뻐서 나도 모르게 웃음도 나오고, 자기보다 못 사는 친구 ‘지혜’가 마음의 부담없이 스케이트를 타러 나올 수 있도록 거짓말을 지어내는 장면에서는 눈물도 조금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눈물과 웃음 사이로 장인댁에서 만났던 동년배 남성들이 잠깐 생각났습니다. 거기서는 나도 점잖게 시국에 대한 우려를 토로하는 대화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여기와서는 조그만 소녀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다니…. 혼자 있는 방인데도 좀 겸연쩍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요. 이 나이에 이렇게 동화를 읽으면서 살 수 있다니 말입니다.
나도 평소에 판교 아파트 분양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고, 우리 나라의 청년 실업문제를 우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아버지의 팔순에 대한 주제로 진행될 아내와의 협상 테이블에 임할 작전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야될 처지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중년의 남자가 그래도 ꡔ받은 편지함ꡕ을 읽고 눈물을 흘리며, ꡔ종이옷을 입은 사람들ꡕ을 읽고, 역사를 생각하며 사는 삶이 그래도 다행스럽지 않겠습니까.
김병익은 어떤 평론에서 문학이 더 이상 현실의 주도적 가치와 역할을 가지기 힘들다는 전망을 하면서, 현 시기의 문학이 ‘위기의 문학’이고 ‘추락의 문학’이며, 어쩌면 ‘문학의 부재’, 적어도 ‘문학의 주변화’라고 진단한 바 있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라는 행사를 하루 앞둔 시점에서 쓴 글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월드컵 경기를 앞둔 오늘에 볼 때도 그것은 여전히 유효한 진단이리라 생각됩니다. 그 정도가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완화되지는 않았겠지요. DMB를 가지고 전철에서도 TV를 보며,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는 1천만 이상의 관객이 몰려드는 영화가 몇 개씩이나 되는 이 디지털과 영상의 시대에 문학의 주변화, 소설의 위기 현상을 진단하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도 같습니다.
이런 시대 환경에 비추어볼 때 오늘의 아동문단, 특히 동화문학의 현실은 참으로 예외적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꾸준히 지속되고 있는 이런 상황은 2005년에 와서는 출간된 작품의 양이나 질로 볼 때 눈에 띄게 성장을 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지요. 이와 같은 성장의 속사정을 들여다 볼 때 일말의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인 문학에 비해 일단 잘 팔린다는 이유로 대형 출판사들이 아동문학 시장에 뛰어들었고, 그러한 자본이 아동문학의 양과 질을 밀어 올리고 있는 형국이니까요. 요즘에는 아동 도서를 출판하는 회사에서 ‘여섯 개의 주머니’(six pocket)- 부모, 친조부모, 외조부모-를 겨냥하는 영업 기법이 생겼다니, 아동문학의 호황은 당분간 지속되리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아동도서 시장이 커지니까, 출판사에서 기획한 번역 작품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고, 몫돈을 내걸고 동화를 공모하는 곳도 많아지니 성인 소설을 쓰던 작가들도 아동 문학에 참여하고 있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이러한 현상을 꼭 부정적으로 볼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외국의 우수한 번역 작품은 국내 독자의 감식안을 높이고, 동화 읽는 눈을 까다롭게 하여 국내 작가에게도 더 좋은 작품을 써야 한다는 자극제가 될 수 있고, 성인 소설로 단련된 작가의 참여도 문학성이 부족하던 동화 작가들의 수준을 단계 상승기키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또, 여러 출판사에서 실시하는 공모제는 우수한 신인을 아동문학계로 이끌어 오는 계기가 될 수 있겠지요. 이 시점에서 우리들의 과제는 이러한 움직임을 단단하고 알찬 성장의 계기로 삼는 일일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일시적인 거품으로 끝나지 않게 하여야 하며, 양적 성장이 질적 변화의 계기로 선순환하는 하는 방안을 연구해야 합니다.
2.
2005년도에 출간된 동화 작품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양적인 풍성함뿐 아니라 질적으로도눈에 띄게 성장하였고, 다루고 있는 주제도 퍽 다양해졌다. 우리 동화 문학의 문제점으로 흔히 지적당하고 있었던 것은 ‘문학성의 부족’이었다.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성급한 계몽성의 노출, 치밀하지 못한 묘사, 어색한 문체, 개연성이 의심되는 스토리 등으로 동화의 미학적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여러 작품의 공통적인 결점으로 자주 언급되고는 했었다. 이런 사정에 비추어 볼 때 지난해 출간된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일정한 정도의 문학성을 갖추고 있었으며, 진지하고 문제적인 주제로 주목을 받은 작품도 많았다. 특히 지난해 출간된 동화 작품들은 다루는 주제와 소재, 시․공간적 배경 등이 아주 다양해졌다. 2005년도에 발표된 동화를 거칠게나마 주제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작가의 어린 시절, 또는 작가의 부모 세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인간다운 삶을 그려낸 동화(『숙자 언니』, 『춘악이』, 『지붕 낮은 집』)
2) 초등학교 어린이의 친구 관계를 소재로 한 이야기(『진휘 바이러스』,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받은 편지함』『이웃집 영환이』, 『유 에프 오를 따라간 아이』ꡔ내 이마 위의 흉터ꡕ)
3) 중학생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이 겪는 심리적, 사회적 문제를 다룬 이야기(『환절기』, 『나의 그녀』, 『내 사랑 사북』)
4) 빈부 문제 혹은 사회 계층 갈등에 관한 이야기(『 빡빡머리 엄마』)
5) 분단 문제 혹은 이데올로기 문제를 다룬 이야기 (『종이옷을 입은 사람』, 『노근리 그해 여름』)
6) 옛이야기 형식의 창작 동화, 신화나 전설의 모티프를 차용하고, 판소리나 민담의 화법을 이용하여 새로 창작한 동화 ( 『물이, 길떠나는 아이』)
7) 과학 기술(생명공학)의 발전에 따른 어두운 미래를 경고하는 이야기 (『지엠오 아이』)
8) 가족간의 문제 혹은 여성 문제를 다룬 이야기 (『엄마의 마흔 번째 생일』,『세상에서 제일 좋은 우리 엄마』,『트럭 속 파란눈이』『푸른 개 장발』)
9) 전체주의 사회에서 생길 수 있는 비인간적인 문제를 환타지 기법으로 다룬 이야기( 『두로크강을 건너서』)
10) 장애아의 아픔을 그린 이야기(『벽이』)
11) 중산층 가정 환경의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밝고 건강한 소동을 다룬 이야기 ( 『다락방의 괴짜들』, 『플루토 비밀 결사대』)
12) 역사의 재구성, 혹은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역사 동화( 『무덤 속의 그림』『노근리 그해 여름』)
이상의 작품들 가운데 필자는 뛰어난 문학성과 흥미성으로 주목을 받은 작품이나, 이 시대의 중요한 현실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어 화제가 된 작품, 새로운 형식 실험으로 우리 동화문학에 활기를 불어넣은 작품 등 의미있는 성과를 이루었다고 판단되는 작품을 중심으로 그 문학적 의의와 과제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3.
변화하는 가족 관계와 엄마의 인간 선언 - 『엄마의 마흔 번째 생일』
문학 작품은 좋은 주제와 그에 알맞은 형식이 잘 어우러져야 한다는 말은 너무도 당연한 명제이다. 그래서 문학 작품을 평가할 때는 작품이 다루는 문제가 인간의 바람직한 삶을 고양하는 데 이바지하는 주제인가 하는 문제와, 그 주제를 다룰 때 작가가 구사한 문장과 작품의 구조, 문학적 장치 등이 얼마나 적절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는가 하는 점을 점검해 보게 된다. 이를 사실 동화에 적용시켜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보면, 작가가 다루는 문제가 이 시대와 사회의 현실로 볼 때 중요한 것인가. 작가가 파악하는 현실 인식은 정당한 것인가. 등장 인물은 이 시대의 전형적인 인물인가를 따지는 사회 비평의 방법이 있을 수 있고, 주제와 시점, 시공간적 배경은 잘 어울리는가, 플롯은 잘 짜였는가, 인물은 생생하게 그려져 있고, 사건을 통해 발전해 가는가, 사건은 개연성이 있고 자연스러운가 등을 따져보는 형식주의적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동화를 읽다보면 후자의 문제보다 전자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일이 더 긴요하리라는 느낌이 든다. 그만큼 이 작품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는 이전의 동화에서 보지 못했던 도발적이고, 민감한 문제여서, 독자를 고민스럽게 한다.
무거운 문제는 잠시 미루어두고 우선, 작품의 형식적 측면에 대해 살펴보자. 이 작품이 다루는 문제 만큼이나 이 작품의 갈등은 첨예하고 등장 인물의 성격은 뚜렷하다. 이 동화의 화자는 5학년 여자 아이인 가영이지만 주인공은 가영이의 엄마다. 엄마는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을 때 딱 마흔 살이 되고, 자기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발견하여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즉, 엄마가 자기 삶의 방식을 행동으로 옮기는 시점이 시어머니의 치매 발발이라는 사건과 일치하도록 설정함으로써 갈등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가영이의 아빠는 왜 하필 지금 그림을 시작하느냐, 병이 좀 차도를 보이든가, 아니면 돌아가시고 난 후에 해도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하지만, 엄마는 지금이 아니면 그림 그릴 기회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뜻을 굽히지 않는다. 엄마가 학교에서 봉사활동까지 하고 그것이 아빠에게 알려지자 갈등은 극을 향해 치닫는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성격이 뚜렷하고 일관성이 있다. 가희, 가영, 엄마, 아빠, 고모들, 할머니 등은 모두 지금의 우리 현실에서 쉽게 발견되는 인물들이며, 각자의 인물은 우리 시대의 일정한 전형을 이룬다. 그런 인물들이 빚어내는 사건이기에 문제는 더욱 현실감이 있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또, 엄마의 가출 사건과 가영이네 반의 축구 경기를 병치시켜 전개해 나간 부분도 작가의 의도를 표현하는 데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이 자품이 다루고 있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이 작품의 주제는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시간이 있는 거고 그 시간을 다른 사람이 대신 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 때문에 힘들었지맍 나는 밥도 먹고 잠도 자고 공부도 했다. 나는 엄마 아빠의 딸이지만 나 혼자 살아가야 할 시간이 따로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다. (210쪽)
여기서 주어인 ‘나’를 ‘엄마’로 바꾸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될 것이다. ‘엄마는 나와 언니의 엄마이고, 우리 아빠의 아내이고, 우리 할머니의 며느리이지만 엄마 혼자 살아가야 할 시간이 따로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다’ 라고. 즉, 엄마이고, 아내이고, 며느리인 여성도 자기만의 시간이 있고, 그 시간을 사용하는 것은 당사자의 자유의지로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바람직한 해결책은 아빠도 언니도 가영이가 깨달은 바를 얼른 깨닫고 이해해서 엄마만의 시간, 엄마만의 인생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러나 아빠는 시어머니의 병수발은 반드시 며느리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전통적인 가부장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남자이고, 자기 몫의 시간이 있고, 삶이 있다는 엄마의 생각을 전혀 이해하지 못다.
결국, 엄마와 아빠는 별거를 하게 되고 동화는 그런 상황에서 끝이 난다. 독자의 입장에서 두 부부의 화목한 화합을 보지 못한 것은 가슴 아프지만, 이 동화의 결말을 성급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지 않은 일은 작가의 현실 인식이 냉정하고 정직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엄마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 정당한가, 엄마의 행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 아빠는 자기의 생각을 바꿔야 하는가에 대한 판단은 책을 읽는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은 따져보아야 한다.
남들이 우리 집에 대해 어떻게 말하건 나한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엄마랑 아빠랑 행복하게 살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불행하지는 않다는 말이다.
이 부분은 동화의 마지막 부분에 엄마와 아빠가 별거하는 상태에서 화자인 가영이가 하는 말이다. 가영이는 처음에는 아빠를 더 좋아하고, 엄마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기 반의 축구 경기 사건과 엄마의 전시회를 계기로 생각이 바뀌어 엄마의 생각에 적극적으로 공감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래서 앞의 발언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부분이 석연치 않다. 정말 그럴까? 요즘 아이들은 엄마랑 아빠랑 같이 살지 않아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아이들이 많은가. 아니 동화 속의 가영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가. 혹시 작가는 화자의 입을 빌어 독자에게 자기의 주장을 설득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발언은 가정의 평화 혹은 가정의 유지 같은 것보다 우선하는 가치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 자기 시간을 자유 의지대로 쓰는 삶이라고 읽힐 수도 있는데, 만일에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면 이는 전통적인 가정의 가치나 자녀에 대한 부모의 역할을 폄하하는 발언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이 작품에서 가영이네 반 아이들의 축구 경기 사건은 엄마의 자아찾기라는 사건과 교차되면서 여성에게 고착된 성역할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섹스(Sex)는 생물학적인 견지에서 본 性을, 젠더(Gender)는 사회 문화적으로 고착된 성역할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이 동화는 젠더의 문제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누가 ‘여자로 태어났으니까 여자답게 행동해’라고 말한다면 전자는 섹스를, 후자는 젠더를 뜻한다. 작가는 축구 경기라는 사건을 통해 전통적인 여성의 고정된 성역할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이 경우는 초점이 좀 다른 것 같다. 다른 반 아이들이 가영이네 반과 축구를 거부한 것은 가영이에게 여성다운 행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이견인 것이다. 남자끼리 하는 경기에 여자가 끼어들어 경기를 하기에 불편하다는 주장은 충분히 가능하지 않은가. 여자애들끼리 축구팀을 만들어 경기를 했다면 비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족의 문제는 우리 동화의 소재와 주제로 자주 이용되던 것이었지만, 엄마가 여성에게 고착된 성역할을 거부하고 한 사람으로서의 인간임을 선언한 이 작품은 독자인 어린이들에게도 새롭고도, 진지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자, 우리 아동 문학의 주제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 작품은 우리 아동문학의 주제의 범위를 확장시킨 문제작이다.
분단의 상처와 화해 『종이옷을 입은 사람』
『종이옷을 입은 사람』은 분단의 문제가 아주 오래 묵은 문제이지만 21세기가 시작된 오늘에도 여전히 우리의 상처로 남아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작품이다. ‘분단과 그로 인한 상처’라는 주제는 사실, 그렇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성인 문학계에서는 너무도 많이 다루어진 주제이고, 그래서, 결말 또한 예정된 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큰 이야기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동문학에서 이렇게 진지하고 무거운 이야기가 정면으로 다루어진 사례는 매우 드물 것이다. 이 작품의 의의는 아이들에게도 우리의 아픈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이제는 분단으로 인한 상처가 존재하는지 조차 모르고 있는 오늘의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의 상처를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그것이 얼마나 아프고 슬픈 이야기인가 하는 것을 일깨워준다는 사실에 있다.
이 작품은 그 진지한 문제의식 만큼이나 소설적 장치를 효과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미학적 완결성을 높인, 참 좋은 동화이다. 이 작품은 처름부터 끝까지 독자의 흥미와 관심을 유지시켜면서 전개되는데, 작가는 작품의 앞부분에는 여러 가지 문제로 독자의 궁금증을 유발해놓고, 뒷부분에 가서 한꺼번에 문제가 해결되는 서스펜스의 기법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솔이네 가정은 아주 화목한 가정이었는데 어느 날 할머니가 가출함으로써 위기를 맞는다. 도대체 할머니는 어디로 가셨는가, 왜 가출하셨는가, 그리고 아버지는 왜 그렇게 할머니에게 화를 내었는가, 할머니가 들려준 맹강녀 이야기는 무슨 뜻이고, 할머니는 왜 그렇게 하얀 종이옷을 지었는가. 독자는 수많은 궁금증을 안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독서를 계속한다. 그리고 동화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이 궁금증은 한꺼번에 해결된다. 아버지의 출생에 얽힌 비밀을 알게되고, 맹강녀 전설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되면서, 우리 민족이 지닌 비극과 상처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작가가 성공적으로 구사한 또 하나의 소설적 장치는 액자식 구성으로, 만리장성에 얽힌 슬픈 전설이 액자 안의 이야기를 이루고, 할머니와 아버지가 겪는 현실의 사건이 액자를 이루면서 전개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 작품은 만리장성을 쌓을 때에 희생되었던 만인량과 맹강녀의 이야기가 주인공 솔이의 아빠와 할머니의 이야기와 겹쳐지고, 교차되면서 전개된다. 그래서 서로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진 두 이야기가 사실은 하나의 이야기로 읽힐 수 있으며, 분단과 이데올로기 때문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의 아픔이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독자는 더 크게 느끼게 된다. 만리장성으로 붙잡혀 간 남편을 위해 두꺼운 겨울 옷을 지어 전쟁터로 향하는 맹강녀나, 해마다 밤을 새워 하얀 종이옷을 짓고, 그 옷을 들고 죽은이의 무덤으로 들고 가는 할머니의 한이 사실은 동일한 것이다. 오늘 이 땅에서 일어난 분단의 아픔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한의(寒衣) 전설’을 차용하여 액자 이야기로 구성한 작가의 솜씨를 볼 때, 우리는 한 편의 동화를 쓰는 과정에서 작가의 문제의식이나 주제 의식 뿐 아니라 소설적 장치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분단의 상처가 얼마나 큰지 실감하지 못하는 오늘의 어린 독자들은 만인량과 맹강녀의 전설과 하얀 종이옷으로 인하여 그 때의 슬픔과 아픔을 오늘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소녀의 자아 찾기와 성장의 아름다움 -『받은 편지함』
한가한 어느 날 나는 도서관의 서가에서 이 책을 골라내어 구석 자리의 소파로 가서 앉았다. 천천히 표지를 넘기며 그냥 몇 페이지만 읽어볼 작정으로 책장을 들추고 있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책을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눈물은 왜 또 자꾸 흘러나오는지…. 나는 옆에 앉아있던 여고생 몰래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내고 콧물을 훔쳐가며 책을 다 읽고 나서는 몇 분 동안은 가만히 앉아 있어야 했다.
좋은 작품은 인물의 성격이나 주제, 배경, 문체, 사건의 진행 과정이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이 중 어느 하나를 삭제하거나 변경하였을 때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는데, 이 작품은 이 모든 요소가 잘 어우러져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고 있다. 이제 책을 읽은 날도 어느 만큼 흘러갔으니 이 작품이 가진 흡인력의 비밀에 대해 차근차근 따져보고 싶어진다.
우선 이 작품의 미덕은 이야기 자체가 억지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우리 옆집이나 우리 동네의 어떤 아이가 겪을 것 같은 이야기이며, 내가 주변에서 실제 들어본 것 같은 느낌이 들만큼 자연스럽다. 특히 줄거리를 이루는 세부적인 화소들이 충분히 개연성을 가질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어서 독자를 쉽게 책에 빠지게 만든다. 예컨대, 종이로 만든 자판을 가지고 컴퓨터 연습을 하던 순남이에게 동생 순영이가 버려진 자판기를 들고 오는 장면이나, 유치원에서 우체국으로 견학갔던 순영이가 그곳에 아무나 써도 되는 컴퓨터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순남이에게 알려주어, 작가 선생님과 자유롭게 메일을 쓰게 된다는 장면 등은 서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도 작품의 기둥 줄거리를 형성하는 발단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먼저 벌어진 한 가지 사건은 새로운 사건 발발의 계기로 작용하도록 구성되어 있어 독자의 궁금증을 유발한다. 순남이가 혜민이라는 친구의 이름으로 작가에세 메일을 보내는 사건이 바로 그런 것들인데, 이 장면을 읽는 독자는 이 행동이 언제 발각될까, 만일 그것이 밝혀진다면 사건이 어떻게 진행될까 하는 궁금증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작가가 소설적 장치를 세심하게 고려하고 있음은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도 발견된다. 동화가 처음 시작될 때 작품 속의 작가가 순남이에게 보낸 메일의 제목은 ‘귀여운 독재자 친구에게’로 되어 있다. 이것은 순남이가 메일을 보낼 때, ‘독자’를 ‘독재자’라고 잘못 썼기 때문에 작가가 이 말을 재미있게 되돌려준 것이다. 그런데, 이 ‘독재자’라는 어휘는 이 작품의 결말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동화의 결말에 작가 이혜숙이 순남이가 다니는 학교의 도서관에 자기가 지은 책을 기증하는데 이때는 ‘내 소중한 독재자 친구에게’라고 서명이 되어 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이상한 서명이지만 이것은 순남이와 그 작가만이 아는 비밀 암호 같은 역할을 하게 됨으로써 순남이와 작가의 정서적 유대감이 크게 강화되는 것이다.
주인공 순남이의 성격이 일관성 있게 그려질 뿐 아니라 이야기 전체를 통해서 성숙해진다는 점도 칭찬할 만하다. 순남이가 처음에 동화 작가에게 메일을 보낼 때에 ‘순남’이라는 자기의 본명을 숨기고 ‘혜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장면에서 순남이가 부끄러워하는 것은 자신의 이름뿐 아니라 처지이기도 했을 것이며, 혜민이라는 이름을 생각해 낸 이유 또한 이름 자체의 세련성뿐 아니라 실제의 혜민이의 능력과 외모, 가정 환경을 선망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화가 시작될 때는 이렇게 소극적이고, 자신감 없어하던 순남이가,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하며,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던 순남이가 자신의 정직성과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긍정적으로 변화 성숙해가는 과정은 어린 독자의 마음을 뿌듯하게 한다. 그러고 보면, 순남이가 혜민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다가 자신의 이름을 밝혀가게 되는 과정(동화에서는 그럴 것이라는 암시에 그치기는 하지만)은 이 동화의 주제가 순남이의 자아 찾기와 성숙의 과정을 표현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이 성장 소설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 작품에서 가난한 소녀 자매와 그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그리고 있는데도 책을 읽는 독자의 마음은 따듯한 온도를 유지하게 되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주인공 주변의 사람들이 다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기 때문인 것 같다. 순남이네를 도와주는 고모도 참 인정이 많고, 집주인도 좋은 사람들이다. 심지어 순남이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하는 친구조차 아주 인간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래도 이 작품에서 순남이에게 가장 좋은 사람은 이혜숙이라는 작가와 친구 혜민이이다. 텔레비젼의 드라마나 대중소설의 경우 이렇게 가난한 소녀의 상대가 되는 인물은 부자이고, 이기적이며, 거만한 인물인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에서 순남이의 상대가 되는 혜민이는 부자이면서도 인정많고, 사려깊으며, 진심으로 순남이를 좋아하는 인물이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데도 이야기가 감상적인 이야기나 미담가화로 떨어지지 않은 이유는 현실을 보는 작가의 시선이 정직하고, 인물과의 거리를 적절하게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치원생인 순영이가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이나, 가난 때문에 동무들의 놀림을 받는 장면,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는 주인집 앞에 쪼그려 앉아있는 장면, 그 때문에 순남이가 가슴아파하는 장면들은 작가가 우리가 사는 현실을 얼마나 정직하게 관찰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며, 한편으로는 작가가 이 세상을 따듯하며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인물에게 너무 매몰되어 있지 않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빈곤한 아이를 주인공으로 한 동화의 경우 대개는 주인공에게 적대적인 인물이 등장하기 마련이고 그 인물과의 갈등이 기둥 줄거리를 이루거나, 그렇지 않을 때는 가난의 원인을 사회 제도나 현실의 모순으로 설정하게 되는데,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에게 적대적인 인물도 등장하지 않고, 사회의 현실을 고발하려는 의도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순남이는 누구를 미워할 필요도 없고, 사회를 원망하지도 않는다.
바로 이러한 부분이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리얼리즘 동화와 이 작품이 변별될 수 있는 지점이다. 그동안 보아왔던 리얼리즘 동화들은 우리의 암울한 현실을 살아내는 어린 주인공의 고통을 주로 그려내어 독자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몽실언니』가 그렇고, 『문제아』가 그렇고,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그렇다. 물론 이 작품들은 우리의 어두운 역사와 현실 속에서 마땅히 탄생되었어야 할 훌륭한 작품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 아동문학계가 『받은 편지함』을 갖게 된 기쁨과 의미 또한 작은 것은 아니리라.
과거는 ‘잃어버린 낙원’인가 - 『춘악이』/『숙자 언니』
『춘악이』와 『숙자 언니』는 대상 독자층의 나이가 좀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두 작품은 시대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이 비슷하다. 춘악이는 1940년대의 커다란 섬을, 숙자 언니는 1970년대의 깊은 산골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런 시․공간적 배경은 현대의 도시에 사는 어린이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시공간이며, 그들의 조부모 세대나 부모 세대가 살아온 시공간이어서 이 두 이야기는 독자인 어린이들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부모나 조부모의 삶과 그 시대의 정서와 가치 등을 전해준다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두 작품이 모두 사람 이름을 작품의 제목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제목으로만 보아도 두 이야기는 인물 중심의 서사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인물 중심 의 동화에서는 인물의 성격과 행적, 이 인물이 맺고 있는 인간 관계 등이 주요 사건을 이루며 그런 것들을 통해 주제가 드러난다.
이 작품들은 인물 중심의 서사라는 점 이외에도 공교롭게 주인공의 성격과 삶도 서로 많이 닮아 있다. 두 주인공 ‘춘악이’와 ‘숙자 언니’는 지금은 찾기 어려운 원초적 생명력을 지닌 매력 있는 인물들이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당찬 소녀 춘악이는 ‘학골에서 제일로 야물’은 소녀로, ‘숙자 언니’는 ‘차돌맹이 맹키로 단단’한 소녀로 묘사된다. 그리고 두 인물은 모두 의협심이 강하고 인정이 많고 순수한 인간미를 간직하고 있으며, 눈물과 웃음이 많은 감수성 풍부한 인물이고, 세상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가는 생명력 강한 인물이다. 이들은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체험으로 옳고 그름을 터득하며,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 사람의 도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터득하고, 그 도리대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들의 모습은 눈이 보이는 듯하며, 말씨는 귀에 들리듯이 쟁쟁하다. 이는 작가의 탁월한 묘사력으로 살아난다.
과거 회고조의 이야기가 지난 날을 감상적으로 회상하여 과거로 퇴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두 작품은 감상적인 과거의 회고로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등장인물들이 인간미 넘치는 생생한 인물로 형상화되었다는 점에 힘입은 것 같다. 이 두 인물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인물들이기는 하지만 그저 착하고 수동적인 인물이 아니다. 이들은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어른에게도 마구 대들기도 하여 버릇없다는 말도 듣지만 인간의 도리에 맞다고 생각하면 남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온몸으로 그것을 살아가는 자존심이 강한 아이들이다.
이 작품들은 사실동화이기는 하지만 리얼리즘의 정신이나 기법을 사용한 리얼리즘 동화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이 동화가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일정부분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그리고는 있지만 이 작품들이 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사회 현실의 어두운 면을 고발하거나, 사회 제도적 모순을 드러내고자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들은 지금은 잃어버린 원초적 세계와 훼손되기 이전의 인간적 가치를 그려낸다.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부모 세대가 간직했던 아름다운 자연과 순수한 인간성인 것이다.
역사의 새로운 해석과 재구성 -『노근리 그해 여름』/『무덤 속의 그림』
2005년도에 출간된 동화 가운데는 그동안 보기 드물었던 역사동화도 두 편 들어있어서 우리 아동문학계를 풍성하게 하는 데 일조를 하였다.
역사 동화는, 후세의 작가들이 과거의 역사적 사건에 허구적 상상력을 부여해 꾸며낸, 어린이를 독자로 하는 서사문학이다. 역사동화의 독자는 다른 동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야기의 흥미와 감동을 기대하며, 한편으로는 그 작품을 통해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식과 통찰을 얻기를 바란다. 이것이 독자가 역사동화를 대하는 이중성이다. 이는 역사동화가 경험적 서사와 허구적 서사가 융합되어 있는 양식이며, 극적인 긴장감과 더불어 사실을 재현한다는 이중적 요구를 만족시켜야 하는 장르임을 드러낸다.
이와 같은 역사 동화는 새로운 역사 해석을 목표로 하거나, 지난날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재현시켜려는 의도를 지닌 작품, 즉 역사적 가치를 중시하는 작품이 있고, 현대적 과제를 추구하는 방편으로만 ‘역사’의 옷을 빌릴 뿐 ‘역사’ 묘사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작품이 있다.
ꡔ노근리 그해 여름ꡕ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역할과 실제 행동에 대해 일방적으로 미화되었던 시각을 교정하여 독자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게 한 점에서 새로운 역사 해석을 목표로 한, 역사적 가치를 중시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오랜 시간 꼼꼼하게 자료를 조사하여 묻혀졌던 사건을 드러냈다는 점이나, 우리에게 비극적이었던 현대사의 한 부분을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볼 수 있도록 형상화했다는 점에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런데, 필자는 이 작품에서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방식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이 작품이 역사적 사건을 일련의 맥락에서 파악하지 않고, 파편적으로 파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어떤 역사적 사건에 작가의 관점에서 새로운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역사적 해석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를 제시할 필요가 있는데, 여기서 그 자료가 될 수 있는 것은 노근리 학살 사건이 일어나게 된 전후 맥락이나 사건의 원인, 그 사건이 우리나라의 역사 전개에 미친 영향 같은 것 등이다.
한편, ꡔ노근리 그해 여름ꡕ은 소설적 형상화 과정이나 문장 표현 등에서 미숙한 점이 눈에 뜨인다.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심리묘사가 섬세하지 못하다거나, 풍경이나 인물의 행동 묘사가 생생하게 살아있지 못한 점 등이 그러하다. 반면에 너무 끔찍한 장면을 여과 없이 묘사한 부분- 초등학생인 주인공의 친구(소녀)가 폭탄 파편에 맞아 눈동자가 덜렁거리는데 주인공에게 그것을 떼어달라고 말하는 부분, 터널 속에 있던 시체와 핏물에 관한 지나치게 노골적인 묘사 등-은 오히려 묘사의 과잉이라 할 만하다. 동화를 읽는 독자가 어린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선택과 배제의 배려가 필요하지 않을까.
『무덤 속의 그림』은 본격적인 역사 해석을 목표로 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고구려의 역사를 재현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를 중시하는 역사동화 쪽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아주 오래 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였기 때문에 경험적 서사보다는 허구적 서사가 우세할 수밖에 없음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던 초기 고구려의 문화와 풍습을 상당히 자세하게 재구해 내었다. 특히 순장 제도, 신선 사상, 사신도의 의미와 유래 같은 것을 꼼꼼히 공부하여 생생하게 묘사해 내었다는 점은 칭찬할 만하다.
『무덤 속의 그림』은 등장 인물들이 그런대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으고, 흥미있는 사건이 연속되어 독자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지속시키고 있으며, 이야기 전개도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 작품의 전체적인 서사 구조를 살펴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 시대의 영웅 소설이나 옛이야기에서 많이 보았던 이야기의 형태와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야기는 ‘영웅 신화의 이야기 구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이야기 구조는 ‘악인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은 영웅(선인) - 유일하게 살아난 후손 - 구원자에 의해 숨어서 자라나는 후손 - 피를 부르는 복수를 막고자 애쓰는 구원자 - 서서히 드러나는 출생의 비밀- 원수와의 운명적 만남 - 복수의 기회가 오지만 성숙한 인격으로 용서하고 화해를 함.’등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일정한 공식(틀)을 이용하여 서사를 펼쳐나갔기 때문에 서사 구조가 탄탄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공식을 활용한 작품이 독자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공식을 너무 단순하게 적용하면 뻔한 스토리라는 느낌을 줄 수 있다. 특히 이 작품은 선인과 악인이 뚜렷하게 대비되어 그려지고 있어서, 그 또한 옛이야기와 많이 닮았다는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또 한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은 무연이 무사의 꿈을 접고, 화공의 길을 가게 되는 과정이다. 화공 시험에 합격하고도 무연은 한동안 무사의 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꾸준히 무술을 연마하는 과정을 보면 무사와 관련된 무슨 이야기가 이어질 것 같은데 아무 설명없이 사라지고 만다.
신화적 상상력과 탐색담의 변주 - ꡔ물이, 길떠나는 아이ꡕ
2005년도 우리 아동문학의 꽃밭에 피어있던 다양한 빛깔과 향기의 꽃 가운데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독특한 모양과 빛깔을 지닌 꽃 한 송이가 우리의 시선을 끌고 있는데, 그것은 임정자의 ꡔ물이, 길 떠나는 아이ꡕ이다. 이 작품은 신화적 상상력을 바탕에 깔고, 전설, 민담의 화소를 활용한 흥미있고, 독창적인 창작 옛이야기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실험적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길 떠나는 아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이 작품은 탐색담의 원형(home- away-home의 구조 : 무엇인가를 찾아 길을 떠나 장애와 역경을 만나지만 자신의 지혜와 용기, 구원자의 도움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이야기의 패턴)을 활용한 이야기의 구조를 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형식의 창작 옛이야기는 기존의 전설이나 민담의 화소를 이것저것 차용하여 엮어낸 것뿐이라는 비판을 받을 위험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전체적인 틀에서 탐색담의 원형에 기대고 있지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건 자체가 독창적인 것이 많아 낯익으면서도 새로운 이야기가 되었다.
하늘나라의 옷 짓는 선녀가 아기 옷을 지을 때에 실수로 솔기 터진 옷을 지어 그 틈으로 세상 독이 스며든다는 이야기나, 딸이라고 섭섭해 하는 어머니의 말이 독이 되어 영혼의 한 조각이 빠져나가 구렁이가 되고, 평생을 떠돌이로 살아가야 하며, 어미가 지은 업을 자식이 스스로 극복해 내야 된다는 설정은 옛이야기의 맛이나 분위기가 물씬 묻어나면서도 충분히 설득력 있는 새로운 이야기로 읽힌다. 어머니의 말실수가 독이 되어 평생 동안 자식이 안고 살아야 할 업이 된다는 이야기는 현대의 부모들도 자신을 경계하는 메시지로 삼을 만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가 자식이나 타인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말이야말로 어떤 독보다 깊고 예리한 상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앞의 예에서 보듯이 이 작품의 화소 하나하나는 단순히 흥미있는 이야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깊은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영혼의 한 조각이 구렁이가 된다는 이야기는 마음에 상처를 지닌 어린이의 자아의 분열을 상징하는 것이며 길을 떠나 고난을 극복하며 분열된 자아를 치유해가는 과정은 어린이가 성장을 하면서 세상과 부딪치며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과 일치한다. 그래서 물이의 고난스런 행로는 성장 이야기의 의미를 갖는다. 어린이의 특성은 성장 변화하는 존재로 특징지어지기 때문에 어린이들은 이와 같은 성장 이야기를 각별히 좋아한다.
그런데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서 어쩐지 부자연스러운 곳이 간혹 눈에 뜨이기도 하는데,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부분이다. 물이가 집을 떠나 방랑을 하다가 ‘글 가르치는 집’에 이르렀을 때 물이는 글을 배우기 위해 어머니가 주신 금가락지를 주인에게 준다. 그런데도 주인은 글은 잘 안 가르치고 구박만 한다. 물이는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도 계속 눈치만 보며, ‘너’와 ‘나’라는 쉬운 글자도 못배워 그 집에서 쫓겨나게 되는 것이다. 물이는 그 과정에서 ‘재주많은 아이’를 만나게 되고 새로운 사건이 펼쳐지게 되므로, 주인에게 쫓겨나게 되는 일은 다른 인물을 만나고, 다른 사건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렇다 해도 이렇게 자연스럽지 않은 이야기가 섞여 있게 되면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지게 된다.
한편 이 작품은 판소리나 옛이야기, 또는 민요(잡가)에서 많이 들어본 운율있는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데, 이는 이 작품의 분위기나 주제와 잘 어울린다.
빗발이 굵어지더니 순식간에 작달비 되어 쏟아졌다. 바람은 점점 거세지고, 우르릉 쾅, 천둥치고, 번개마저 수시로 번쩍거렸다. 대낮인데도 주위는 저물녘만큼이나 어둡고, 굵은 빗발이 세찬 바람 타고 휘몰아치니, 눈을 바로 뜨기는커녕 한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연못물은 찰랑찰랑, 수초는 푸릇푸릇 우거지고, 수양버들은 축축 늘어진 가지를 물에 담그고 바람에 한들한들, 팔뚝만한 잉어는 물 속을 한가롭게 헤엄치고 있었다. (86쪽)
부분적으로 이렇게 빛나는 문장이 문학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가 하면, 문어체나 번역투의 문장이 섞여 있어 불협화음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게 말이다. 내 판단에 의하면, 나는 아무 걱정 없지.”(51)
“음, 내 판단에 의하면 말이다. 너는 숫기가 없고 능력도 부족하니까, 나랑 길동무하면 좋을 것 같다.”
‘재주많은 아이’가 유독 ‘내 판단에 의하면’이라는 서양말의 번역투를 자주 쓴다. 거슬리는 문장에는 “어린애 같은 소리 좀 그만 해. 허허벌판에서 벼락 맞을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 줄 알아?” 같은 것도 있다. 이와 같은 문어체의 말투는 다른 작품에서 쓰였다면 그렇게 지적 받을 만한 말은 아니지만 옛이야기 형식을 빌어쓰는 이 작품에서는 영 귀에 거슬린다. 필자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판소리나 옛이야기의 말투로 서술되었더라면 주제나 형식과 잘 어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4.
2005년도에 발표된 동화에 대한 소감을 쓴 이 글에는, 필자가 이미 다른 글에서 자세히 언급했기 때문에 제외된 작품도 있고, 꼭 다루고 싶었는데 지면과 시간 관계상 언급하지 못한 작품도 있다. 다른 글에서 논의한 작품들은 『두로크강을 건너서』(김서정), 『트럭 속 파란눈이』(황선미) ,『유 에프 오를 따라간 아이』『플루토 비밀 결사대』 등이다.
언급하지 못해 아쉬운 작품 가운데 제일 먼저 생각나는 동화는 유은실의 작품들이다. ꡔ나의 린드그렌 선생님ꡕ과 ꡔ-에서 온 마고할미ꡕ 등 유은실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감수성과 상상력이 풍부하다. 필자는 특히 ꡔ-린드그렌ꡕ을 읽으면서, ꡔ빨강머리 앤ꡕ을 떠올렸는데, 작가 유은실은 아마 빨강 머리를 한 앤처럼 상상력과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 아닐까 하고 짐작을 해본다. 지난해 발표된 작품 가운데에는 공교롭게도 작가와 편지를 주고 받는 소녀가 줃인공인 이야기가 두 편 들어있다. (ꡔ받은 편지함ꡕ과 ꡔ나의 린드그렌 선생님ꡕ) 이 작품들의 공통점과 특징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는데 지면 관계상 다른 글로 미루고자 한다.
또, 이야기하지 못해 아쉬운 작품들은 중학생을 주인공으로 한 청소년소설들이다. (『환절기』, 『나의 그녀』, 『내 사랑 사북』) 이 작품들은 중학생들이 겪는 심리적, 사회적 문제를 세련된 문장으로 형상화한 좋은 작품이다. 청소년들이 읽을 만한 작품이 많이 부족한 우리 아동문학의 현실에서 이런 작품이 세 편(ꡔ숙자 언니ꡕ까지를 포함시키면 네 편)이나 발표되었다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밖에도, 생명공학의 발전에 따른 어두운 미래를 경고한 『지엠오 아이』, 빈부 문제를 다룬 ꡔ빡빡머리 엄마ꡕ, 장애아의 아픔을 그린 『벽이ꡕ등과 같은 작품도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한 작품이다.
한편, 그동안 다루어지지 않았던 중산층 가정의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소동을 밝고 건강하게 그려낸 작품들(『다락방의 괴짜들』, 『플루토 비밀 결사대』)이 출현한 점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런 경향은 고정관념으로 볼 때는 좋은 엄마라는 평을 받지 못할 것 같은 여러 유형의 ‘엄마들’을 건강하고 긍정적으로 그려내어 독자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 준 ꡔ세상에서 제일 좋은 우리 엄마ꡕ와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제 한국의 동화 문학계는 어느 정도 작가층이 두터워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성인 소설을 쓰던 작가들의 참여와 작가 학교 출신의 신인 작가, 공모전을 통해 등단한 젊은 작가들의 가세가 큰 몫을 하고 있다. 이들 신인 가운데, 특히 유은실과 최나미의 성장이 주목할 만하며, 그동안 좋은 작품을 발표해 왔던 황선미, 남찬숙과 같은 중견 작가들도 꾸준한 활동이 예상되므로 우리 동화문학계의 앞날은 더 풍성해질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