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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12) 2024. 9. 1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3:1-10
오늘은 9월의 첫날입니다. 9월 한 달도 주님도 동행하면서 은혜의 한 달을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사와 표적>
행 2장에서 우리는 초대 교회의 여러 가지 특징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모이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기도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놀랍니다.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기사(wonders)는 사람의 상식을 뛰어넘는 놀라운 일을 뜻하는 말인데, 특히 ‘예수님의 이름이 가져오는 놀라운 일들’을 말하고, 표적(signs)은 어떤 무언가를 드러내는 증거들로,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이 가져오는 혁명적인 변화들’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베드로와 요한>
행 3장에는 바로 ‘기사와 표적’이 나타난 한 가지 예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나면서 걷지 못하던 장애인이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1절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여기서 ‘제 구 시’란 우리 식으로 하면 오후 3시입니다(성경의 시간에서 6을 더하면 됨).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즉 3시와 6시와 9시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먼 곳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였지만, 예루살렘 성전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은 성전에 와서 드리곤 했습니다. 성전에서 기도를 드리면, 기도의 효과가 더 크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경건한 유대인의 습관대로, 오후 3시에 맞추어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을 찾았습니다.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걸인>
그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2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예루살렘 성전에는 10개의 문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미문’은, 청동과 보석으로 꾸민 ‘아름다운 문’이었습니다. 미문은 성전 안에 있는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문입니다. 즉 사람이 가장 많이 왕래하는 곳입니다. 이 미문 앞에 자리를 잡고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미문 앞까지 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매일 ‘아름다운 문’으로 출근하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가 그의 일터였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해서 번 돈조차 누군가에게 착취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성전과 회당에는 언제나 구걸하기 위하여 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러 갈 때에 사람들의 마음은 측은한 사람들에게 더욱 동정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오늘 교회에 오실 때 다른 때보다 더 착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오셨을 것입니다.
그는 미문을 통해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3~5절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살펴본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 사람을 처음 보았을까요?
베드로와 요한이 처음으로 기도하러 간 것은 아닙니다. 그리 긴 기간은 아니었겠지만, 성령 받은 이후 꾸준히 기도하러 갔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날마다’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사람입니다. 아마 처음 본 것은 아닐 겁니다. 분명히 매일 봤을 겁니다. 기도하러 갈 때마다 그 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그를 주목하여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순간 그를 ‘주목하여’ 보았을까요?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통해 특별한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시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요한)의 마음에 성령께서 감동을 주신 겁니다. ‘저 사람이 주목해 보라. 더 이상 저런 삶을 살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워주라’고 하는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주목하여’ 보고 “우리를 보라”하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지 않고, 고개 푹 숙이고 손만 내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구걸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그렇지 않습니까? 얼굴을 빤히 들고 쳐다보면서 구걸하지는 않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갑자기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를 보라”하니, 이 사람은 ‘뭔가 생색낼만한 굉장히 큰 것을 주려나 보다’ 하는 생각으로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눈을 쳐다보면서 말했습니다.
6절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사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 원한 것은 ‘은과 금’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에게 은과 금은 없다’고 선언합니다. 걸인은 아마도 크게 실망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을 부른다는 건 뭔가 많은 돈을 줄 것 같은 기대를 가져왔을 테니까요.
그러나 베드로는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그냥 이름이 아닙니다. 누가가 누가복음에서 이미 증언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은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눅9:1)였습니다. 제자들은 그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복음을 증거했습니다(눅9:6). 베드로는 그 이름의 능력과 권위를 선포하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합니다.
아마도 이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이 하는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도 처음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자신의 생애에 자신이 두 발로 일어선다는 것을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니 ‘멍’하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그의 오른손을 잡았습니다. 그러더니 힘껏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7~8절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이 사람은 얼떨결에 베드로의 손을 잡고 따라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발과 발목에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누가가 의사였기 때문에 쓸 수 있는 표현). 단순히 일어선 것이 아닙니다. 걷고 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놀라운 ‘기사와 표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평생 처음으로 걷게 된 이 사람이 가장 먼저 간 곳이 어디입니까?
예, ‘성전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얼마나 사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조용히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껑충껑충 뛰면서 소리를 질러가면서 그렇게 춤추면서 찬양했을 것입니다.
<심히 놀라는 사람들>
그 일을 목격한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9~10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사람인 것을 다 알아보았습니다. 그들도 눈앞에서 펼쳐진 현상이 놀랍기만 했습니다. 단 한 사람도 그가 주의 일어서서 주의 성전에 들어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랐습니다.”
<예수의 이름이 가져온 기사와 표적>
이것이 초대 교회에 일어난 첫 번째 기적 사건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가져온 놀라운 ‘기사와 표적’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통하여 이 ‘기사와 표적’을 일으키신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는 ‘기사’이고, 두 번째는 ‘표적’입니다.
첫째, ‘기사’입니다. ‘예수의 이름에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즉 예수가 그들이 기다리던 ‘그리스도’이신 것을 나타내시려고 ‘기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베드로와 요한이 이 사람을 처음 본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또 이 사람만 구걸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이 사람을 ‘주목하여’ 보게 하셨습니다.
성령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사역입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를 선포하였더니 그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이가 일어났습니다(성령의 사역).
‘기사’를 통해 예수가 곧 ‘그리스도’이신 것을 드러내려 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권위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도 쫓아내시고, 병마도 물리치는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표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져다줄 혁명적 변화의 사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왜 사람들은 이 걸인을 성전 밖 미문에 가져다 놓았을까요? 미문은 통행량이 많기는 해도 금방 지나가면 그만인 출입문입니다. 성전 마당과 같이 모든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데려다주었더라면, 더 구걸하기가 편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이스라엘의 율법상 장애인은 성전 안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율법에 따르면, 장애인은 불완전한 자로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는 존재였습니다. 율법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걸인은 늘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에 가장 가까이 있지만, 결코 그 문을 넘어가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애인들을 죄인으로 취급하곤 했습니다.
부모의 죄이거나 본인의 죄로 인해서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당시의 장애인들은 그런 사회적인 편견에 의해서 스스로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요9:1~3(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시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그러니까 이 걸인은 단 한 번도 성전에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보고 싶은 곳이 어디였을까요?
예, 성전 안에 한 번 들어가 보는 것이었습니다.
남들처럼 단 한 번이라도 성전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양해 보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시대에는 그 자유함이 막혀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걸인을 치유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가져올 혁명적인 변화를 예고하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불완전하고 자격 없는 자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모든 막힌 담이 무너졌습니다.
엡2:12~19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전까진 불완전한 자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던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첫 번째 기적 –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 – 예수님의 사역이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 걸인에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주어지자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 성전으로 들어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그의 불완전함이 완전히 해소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 주변을 맴도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성소로 스스로 걸어갑니다.
희망이 없던 인생이, 오로지 은과 금으로 연명하는 인생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인생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불완전하고 목적 없고 방황하는 삶을 완전하게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복한 삶으로 바꿉니다.
이것이 복음의 ‘표적’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치유의 능력이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치유함도 받으시고, 죄와 사망에 나를 건지신 ‘구원의 은혜’도 마음껏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