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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강해(12) 2024. 9. 4
솔로몬의 성전 건축 시작
왕상6:1-13
열왕기서를 읽다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이 지나칠 정도로 길고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5장 성전 준비, 6장 건축 시작과 완성, 7장은 왕궁 건축과 성전 기물 제작, 8장 봉헌식). 우리는 그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열왕기서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있을 당시에 쓴 것입니다. 저자는 그들이 망한 원인이 무엇이고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지를 말합니다(신명기 사가). 그 핵심이 성전의 회복에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예언한 대로 70년 간의 포로 생활이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반드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무너진 솔로몬 성전을 다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스룹바벨 성전). 그럼으로서 여호와 신앙을 다시 회복하고,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다시 회복할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성전 건축 준비>
지난 시간 우리는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준비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두로 왕 히람이 보낸 사신을 통해 솔로몬은 성전을 짖는 일에 도움을 청합니다.
첫째,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목재를 요청합니다(6절).
둘째, 벌목꾼을 세워달라고 요청합니다(6절).
셋째, 각종 장식을 아로새길 줄 아는 장인을 보내 달라고 요청합니다.
솔로몬의 제안을 들은 히람은 그 제안에 동의하였습니다. 솔로몬의 제안은 히람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 지역에서 지혜 있고 강성한 나라를 이루고 있는 솔로몬과 좋은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맺는 것은 자신에게도 이익이 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실례로 히람은 솔로몬 왕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자신의 궁중에서 필요한 양식을 요구하였습니다(상부상조, 12절 서로 ‘약조’를 맺음).
약조가 이루어진 이후 솔로몬은 신속하게 일을 진행했습니다.
이스라엘 전국에서 ‘역군’을 삼만 명을 징집하였습니다. 그는 그들을 한 달에 만 명씩 번갈아 레바논으로 보내어, 한 달은 레바논에서 일하게 하고, 나머지 두 달은 자신의 집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이방인 중에서 짐을 운반하는 사람 칠만 명과, 산에서 채석하는 사람(‘돌을 뜨는 자’)이 팔만 명을 세워 일을 진행시켰습니다. 그 결과, 드디어 ‘크고 귀한 돌’로 성전 기초석을 놓게 되었습니다.
<성전 건축의 시작>
이때가 언젠가 하면 6:1절에 나와 있습니다.
1절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성전의 기원은 출애굽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애굽 땅에서 나온 지 480년’만에 드디어 성전 기초석을 놓은 것입니다(서기로 따지면, 솔로몬이 즉위한 해가 BC 965년경, 성전 건축을 시작했던 때가 BC 962년경).
구체적으로 계산해보면, 대략 (1) 광야 생활 40년 (2) 가나안 정복기 및 평정기 32년 (3) 사사 시대 331년 (4) 사울의 통치기 33년 (5) 다윗의 통치기 40년 (6) 솔로몬의 즉위 후 4년을 더하면 480년입니다.
저는 인간적인 한계로 인해, 하나님이 급하지 않게 느껴집니다. 좀 얼른 지으시지...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는 크든 작든 성전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보좌 삼으시고 땅을 발판으로 삼으십니다. 작은 성전에 굳이 거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배려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 성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성전을 세운 장소>
그러면 성전 기초석을 놓은 자리, 즉 성전을 세운 장소는 어디였을까요?
성경을 보면 최초 성전의 정확한 위치는 ‘아라우라(오르난)의 타작 마당’이었습니다.
대하3: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그 자리는 바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던 모리아 산이었지요. 다윗이 인구 조사 때문에 하나님께 징계를 당한 후에 그 오르난의 타작 마당을 돈을 주고 사서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을 지을 터로 준 것입니다.
[아라우라(오르난)의 타작마당](삼하 24:16-25, 대상 21:15-27) 다윗은 말년에 자신이 통치하는 전 지역의 인구 조사를 실시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과 위엄을 과시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 즉 20세 이상의 군인으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의 수를 세었다는 겁니다. 그 수가 무려 80만 명이었습니다. 그중에서 자신의 친족 유다 지파만 50만 명이었습니다. 아마도 다윗의 마음은 흡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갓 선지자를 보내 그를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왕국’을 다윗을 통해 이루어가고 싶었는데 다윗은 ‘자기 왕국’을 건설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은 다윗의 교만한 마음을 책망하시면서, 세 가지 벌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십니다(7년간의 기근, 석 달 동안 쫓겨나는 벌, 3일 동안 이스라엘 전역에서 전염병이 휩쓰는 벌). 다윗은 ‘사람의 손보다는 긍휼이 크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에 전염병을 내리셨는데 이로 인해 죽은 사람이 7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크신 하나님은 사흘이 되기 전에, 재앙을 내리던 천사에게 “네 손을 거두라”고 명하셨습니다. 긍휼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사흘 내내 전염병을 돌게 했다면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입니다. 그때 재앙을 내리던 천사가 서 있는 곳이 여부스 족속인 ‘아라우나(오르난)의 타작마당’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갓 선지자를 보내 그곳에 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라고 명합니다. 다윗은 아라우나에게 자초지종을 말하자, 아라우나는 기꺼이 자신의 땅과 제물로 쓸 소와 땔감으로 쓸 나무와 멍에도 무상으로 드리겠다고 합니다.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한다’며 축복의 말도 전합니다. 아라우나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도 역시 자신의 모든 재물이 하나님을 위해 드려지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자신의 동족인 여부스 사람들도 전염병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타작마당에 제단을 쌓음으로 모든 백성에게 임한 재앙이 끝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모든 것을 무상으로 드리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 왕은 정당한 대가(은 50세엘)를 지불하고 그 땅을 정식으로 매입합니다. 그러므로 성전 터는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셨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은 먼 옛날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던 모리아 산을 자신을 예배할 장소로 지정해 두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바로 이 자리에 이슬람에서 황금 돔인 모스크 사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슬람 전승(傳承)에 의하면 바로 그 자리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승천한 자리라고 여겼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제 3성전 건축과 관련해서 모든 기물과 재료가 준비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언제라도 명령만 떨어지면 공수해서 바로 지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다른 곳에 지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유대인들에게 그곳만이 하나님이 정하신 장소이기에, 다른 곳에 짖지 않고 있습니다. 만일 이 황금 돔 사원을 무너뜨리고 제 3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제3차 세계대전을 촉발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
<성전의 규모와 설계>
그러면 성전의 규모와 구체적 형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2~10절 “솔로몬왕이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한 성전은 길이가 육십 규빗이요 너비가 이십 규빗이요 높이가 삼십 규빗이며/ 3 성전의 성소 앞 주랑의 길이는 성전의 너비와 같이 이십 규빗이요 그 너비는 성전 앞에서부터 십 규빗이며/ 4 성전을 위하여 창틀 있는 붙박이 창문을 내고/ 5 또 성전의 벽 곧 성소와 지성소의 벽에 연접하여 돌아가며 다락들을 건축하되 다락마다 돌아가며 골방들을 만들었으니/ 6 하층 다락의 너비는 다섯 규빗이요 중층 다락의 너비는 여섯 규빗이요 셋째 층 다락의 너비는 일곱 규빗이라 성전의 벽 바깥으로 돌아가며 턱을 내어 골방 들보들로 성전의 벽에 박히지 아니하게 하였으며/ 7 이 성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그 뜨는 곳에서 다듬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성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 8 중층 골방의 문은 성전 오른쪽에 있는데 나사 모양 층계로 말미암아 하층에서 중층에 오르고 중층에서 셋째 층에 오르게 하였더라/ 9 성전의 건축을 마치니라 그 성전은 백향목 서까래와 널판으로 덮었고/ 10 또 온 성전으로 돌아가며 높이가 다섯 규빗 되는 다락방을 건축하되 백향목 들보로 성전에 연접하게 하였더라.”
성전의 규모는 2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한 규빗(cubit)은 팔꿈치에서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입니다. 한 규빗을 46cm라고 보았을 때 성전은 길이가 60규빗(28m), 너비가 20규빗(9m), 그리고 높이가 30규빗(14m)입니다.
바깥벽에 잇대어서 많은 '골방들'로 나누어지는 3층 구조의 건물을 지었습니다. 이 골방들의 숫자는 30개인데(겔 41:6), 이 골방의 용도는 (1) 제사장들이 제물을 먹는 장소, (2) 제물을 보관하는 장소, (3) 제사장들이 옷을 갈아입는 장소, (4) 그리고 봉사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거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겔 42:13~14, 시 134:1). 그리고 나사 모양의 층계를 따라서, 2층과 3층 다락을 만들었습니다.
이 성전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제작한 성막보다는 훨씬 크지만(출36:8-38), 당시의 대건축물에 비교하여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는 크기입니다. 이유인즉 이곳은 일반 백성들이 모여 예배하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거처하는 상징적인 장소로서 오직 제사장들만이 드나드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성전을 건축하는데, 7년이란 시간이 걸렸습니다(38절).
그것은 돌 하나에도 정성을 기울여 다듬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지는 7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게’ 작업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을 때 말씀하신 것을 지키고자 함입니다.
출 20:25 “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산 27:55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이 말씀을 지키면서 아름답게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예, 치수를 미리 재서 채석장(採石場) 현지에서 완벽하게 치수에 돌을 다듬은 후 건축 장소까지 이동해 온 뒤에 쌓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현대에도 딱 맞게 자르기 쉽지 않은데, 그 당시에 얼마나 시간과 정성을 들여 정확하게 다듬질하였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제단’을 쌓을 때 쇠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는 고귀한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철은 '피를 흘리게 하는' 무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었습니다. ‘하나님의 제단’이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과 인간 간의 화해 등을 상징하는 거룩과 평화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솔로몬도 성전을 건축하면서 날카로운 철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치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붕을 백향목 널판을 덮는 데 시간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9절 “성전의 건축을 마치니라 그 성전은 백향목 서까래와 널판으로 덮었고.”). 게다가 백향목을 멀리 두로에서부터 바닷길을 통해 운반해 왔으니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성전 내부를 금으로 입히고, 그룹들과 종려와 핀 꽃 형상을 정교하게 아로새기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29-30).
<하나님의 말씀이 임함>
이렇게 솔로몬이 정성으로 성전을 건축하는 와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솔로몬에게 임했습니다.
11~13절 “여호와의 말씀이 솔로몬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12 네가 지금 이 성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내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 13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에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더라.”
하나님이 성전을 건축하는 솔로몬에게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전을 짖는 와중에 주신 말씀이라 더욱 깊은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내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한 언약을 확실히 이루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윗과 맺은 언약의 내용(삼하 7:12-16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둘째,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에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솔로몬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심은 성전을 짓는 일에 몰두해 있습니다.
그리고 아름답고 화려하게 짓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즉 눈에 보이는 성전을 아름답고 화려하게 지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큰 은혜를 내려 주실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을 아름답고 화려하게 건축하면 하나님이 성전에 거하시면서 이스라엘과 영원히 함께하실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생각에 빠지지 않게 하려고 경고를 주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전에 오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와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는 것’이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영원히 함께하시는 비결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성전의 참된 가치는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순종한다는 조건 하에서만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배우는 교훈>
오늘 본문을 통해 저는 두 가지 교훈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성전 내에서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라는 말씀에서 큰 교훈을 얻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신앙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도 적용되어야 할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들리지 말아야 할 소리가 있고 들려야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특히 서로 자기 의(자랑)를 드러내려고 다투는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서로 다투는 파당과 분열의 소리가 컸습니다. 나는 바울파, 나는 베드로파, 나는 아볼로파, 나는 그리스도파라고 생각하며 서로를 비판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여 늘 시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1:10)고 당부하였습니다.
빌립보교회에서는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빌4:2)고 특별히 당부하였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성도들 역시 여러 가지 각자의 살아온 경험들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그것들을 전부 다 드러내고 말하면 배가 산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되도록 질서를 따라 하나 되고 말도 한목소리를 내려고 힘써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성령 안에서 하나 되고, 무엇보다 말씀 공부하는 소리, 찬양하는 소리, 기도하는 소리, 그리고 기쁘게 담소하며 삶을 나누는 소리만 들리는 성령 충만한 신앙 공동체로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은 아름답고 화려한 성전 안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점점 고급스러워지고 화려해지고, 성가대는 좋은 악기로 점점 웅장해지는데 정작 예배드리는 성도들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성전은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내 몸입니다.
서울구치소 경비교도대장을 지내신 박효진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는 전국 교회에 다니면서 ‘그들은 들킨 죄인! 우리는 안 들킨 죄인!’이란 주제로 죄수들을 전도한 경험을 간증하시는 분이십니다(저서 ‘하나님이 고치지 못할 죄인은 없다’). 그분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집의 장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아내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는 아내를 따라서 교회에 다녔지만, 술고래고 담배 골초였습니다. 그는 교회는 다녔지만, 실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당시에 여고 학생과장이었던 이덕진 집사를 만납니다. 당시 박 집사는 이 집사에게 성경에 술을 취하지 말라는 말은 있지만, 술을 먹지 말라는 말은 없지 않은가? 담배 피우지 말라는 말은 더더욱 없지 않은가 질문합니다. 그러자 이덕진 선생은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는 말씀을 줍니다. 성전인 우리 몸에 담배 연기를 채울 수 있는가? 술을 채워 넣을 수 있는가 묻습니다. 그 말을 들은 후 공감했는데 이튿날 담배를 피우는데 담배 맛이 씁니다. 담배 연기도 냄새 맡기 싫습니다. 성령이 마음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 이후로 그의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훗날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포로 귀환 후, 스룹바벨 성전도 로마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예수님 당시, 헤롯 대왕이 지은 헤롯 성전도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건물은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건물 안에 갇히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모임 속에 거하십니다. 우리의 몸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의 몸이 주님 거하시는 성전이자, 우리 몸이 그 성전에 드려지는 제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성도의 모임인 교회에 거하심으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몸에 거하시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우리의 몸을 성전 삼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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