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아지는 밤처럼 고드름 줄어들며 그믐달에 숨는다 햇살 드린 쪽문 열고 툇마루에 걸터앉아 바람에 제비 깃털 찾아낸다 왜가리 백로 온 논을 휘젓더니 강아지처럼 쫓아다니며 곁눈질로 짝을 찾기 바쁘다 나뭇가지 둥지가 마르면 어린 새끼 다 키워 앞세우고 논 한가운데 내려앉는다 하얀 깃털 수줍게도 휘젖던 목까지 자란 벼들 넘실거리며 가득 채워질 곡간을 마중하고 있다
눈 감고 살까 / 민진홍
맘껏 온몸에 술을 퍼붓고 지쳐버린 몸을 적신다 내리쬐는 태양은 흔들리는 현기증을 느끼게 한다 나의 만용인가 세상의 거짓인가 작아져 버린 육체에 마음을 잃고 헤매고 지금은 늦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하면서도 그래도 남이 볼까 두려워 온통 거짓으로 몸을 움츠린다 왼 새끼줄를 엮을 때나 내 마음 알까
다 주지 못해 미안하다 / 민진홍
얼마나 많이 주려 그리도 크게 피워내고 한 아름 담아 주려 넓게 펼쳤나 혹여나 못 보는 이 없어라 높이 올려내고 세상 사람들 주고도 남는 몽우리 갖고 있다 많아서 그냥 주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나를 위해 끝까지 꽃잎 하나 놓지 않는 너를 본다 접시꽃. 당신이 그리운 이유다
네모난 꽃 / 민진홍
실가지 위 하얀 망초 명지바람에 몸을 실었을 뿐인데 나비는 그것도 모르고 쫓아오기 힘에 겨워 이리 너플 저리 너플 내려앉아 숨을 고르라고 동그랗게 펴주고 있다 네모난 꽃이 있으면 더 편안하게 쉴 수 있을까
서걱거리는 밤 / 민진홍
베갯잇 적시는 비켜간 옛 시간만큼 서걱거리는 밤 빗소리 홑청 속을 파고들어 가슴을 두드린다 당신이 보고 싶다 아니지 아니다 거부하는 나를 뒤로하고 흔적을 좇고 있는 쓸쓸함 떠오르는 그리움 아니다 아니지 고개 젓는 나를 뒤로하고 그려지는 얼굴 어쩌라고
늦게 들어가면 안 되는 이유 / 민진홍
땡 엘리베이터 도착하는 소리에 촉각을 세우고 마음은 어느새 현관 문고리를 잡고 있다 그런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건너편 다른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는 초인종 소리 순간 모든 안도와 기대는 엘리베이터에 실려 떨어져 내려간다 거실 등불은 바람도 없이 흔들려 정신은 혼미해지고 머리카락을 곤두세운다 오늘도 밤이 깊어질수록 소설을 쓰며 벽에 걸린 시계 초침에 악마의 날개를 매달고 같이 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