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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金氏) - 본관:김해(金海)
김해(金海)는 경상남도 김해시(金海市) 일대의 옛 지명으로 낙동강(洛東江) 하구 남서쪽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가락국(駕洛國)의 문화 중심지로 발전하여 왔다. 532년(신라 법흥왕 19) 신라에 병합되어 금관군(金官郡)이 되었다. 680년(문무왕 20)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이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바꾸어 양주(良州: 梁山)의 관할로 두었다. 940년(고려 태조 23) 김해부(金海府)로 개칭되었고 임해현(臨海縣)으로 다시 강등되었다가 곧 임해군으로 승격되었다. 995년(성종 14)에 김해안동도호부(金海安東都護府)로 개칭하여 영동도(嶺東道)에 속하였다가 1012년(현종 4) 김해군방어사로 강등되었으나 1018년부터는 의안군(義安郡: 昌原)·함안군(咸安郡)·칠원현(漆原縣: 漆原面)·웅신현(熊神縣: 鎭海)등을 영현으로 삼았다. 1270년(원종 11) 방어사(防禦使) 김훤이 인접지역인 밀성(密城)의 난을 평정하여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1293년(충렬왕 19) 현으로 강등되었다. 1308년 금주목(金州牧)으로 승격하였으나 1310년(충선왕 2) 김해부(金海府)로 격하되었다. 1413년(태종 13) 김해도호부로 승격되어 세조 때 진(鎭)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김해군이 되었고, 1918년에 좌부면과 우부면이 김해면으로 통합되었다. 1931년에는 김해면이 김해읍으로 승격되었고 1981년 김해군의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하여 분리 되었으며 1995년에는 김해군과 통합하여 김해시가 되었다.
김해김씨 시조 김수로(金首露)에 관한 설화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나타나 있다.
“서기 42년 3월 가락국(駕洛國)의 아도(我刀), 오도(五刀), 피도(彼刀), 여도(汝刀), 오천(五天), 신귀(神鬼), 유수(留水), 유천(留天), 신천(神天) 등 아홉 촌장이 구지봉(龜旨峰) 산정에 모여 나라를 통솔할 군장(君長)을 얻기 위해 하늘을 향해 의식을 올리자 하늘에서 한줄기 붉은 빛이 내려와 함께 달려가 보니 금합(金盒)에 여섯 개의 알[卵]이 담겨 있었다. 이튿날 알 속에서 여섯 동자(童子)가 나왔는데 그중 맨 먼저 나온 동자를 수로(首露)라고 이름 짓고 금합에서 태어났다하여 성(姓)을 김씨(金氏)로 하니 그가 바로 김해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金首露王)이다.”
김해김씨는 11세손 김무력 대에 이르러 크게 번창하였는데 그는 신라 때 각간(角干)을 지냈고 뛰어남 무장(武將)이었다. 그의 아들 김서현(金舒玄)은 진흥왕의 아우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부인(萬明夫人)과 혼인하여 각간에 올랐고 대양주도독(大梁州都督)을 지냈다. 그의 아들 김유신(金庾信)은 태종무열왕의 딸과 결혼하였고 무열왕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여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데 공헌하여 태대각간(太大角干)에 이르렀고, 죽은 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기도 하였다. 그 후 후손들이 김수로를 시조로, 김유신을 중시조로 삼고 옛 가락국이었던 김해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김해김씨는 신라 김씨의 알지계(閼智系: 경주김씨)와 함께 우리 나라 김씨의 양대산맥을 이루어 명문거족으로 번성하여 왔다.
파명(派名)을 살펴보면, 중시조 김유신의 후대에서 가세가 크게 번창해짐에 따라 148여 개 파(派)로 분파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김목경(金牧卿)을 중조로 하는 경파(京派)와 아우 김익경(金益卿)을 중조로 하는 사군파(四君派), 김관(金管)을 중조로 하는 삼현파(三賢派)이다. 그리고 김수로왕을 1세로 하여 56세손 김유공(金維公)을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 51세손 김지서(金之瑞)를 파조로 하는 승사랑공파, 김평(金平)을 파조로 하는 양의공파가 있다. 이후의 파로는 40세손에서 김명택(金明澤)의 후손 판전공파, 김불비(金不比)의 후손 판서공파, 김만희(金萬希)의 후손 좌정승공파, 김종정(金宗貞)의 후손 숭정공파, 김천익(金天翼)의 후손 부호군파, 김을동(金乙棟)의 후손 판결사공파, 김문(金汶)의 후손 진사공파, 김이장(金以章)의 후손 충정공파가 있으며, 51세손 김운(金芸)의 후손 유수공파, 57세손 김대진(金大震)의 후손 운은공파, 54세손에서 김탁(金琢)의 후손 문경공파, 김근(金瑾)의 후손 부사공파, 김관(金{王+寬})의 후손 한림공파, 김구(金球)의 후손 충정공파, 김련(金璉)의 후손 도사공파, 김현(金現)의 후손 숭정공파, 김호(金琥)의 후손 휴은공파, 김선(金璇)의 후손 장사공파와 56세손 김인서(金麟瑞)의 후손 참봉공파, 51세손 김득하(金得河)의 후손 대제학공파, 50세손 김경신(金敬臣)의 후손 도총관공파, 22세손 김천려(金天與)의 후손 중 김덕휴(金德休)로 이어지는 첨정공파 등으로 나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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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김해김씨는 1,295,080가구 총 4,124,934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연원(淵源)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서기 42년(중국 후한 건무 18) 3월 가락국(駕洛國)의 아홉 촌장이 구지봉(龜旨峰) 산정에 모여 나라를 통솔할 군장(君長)을 얻기 위해 하늘을 향해 의식(儀式)을 올리자 하늘에서 한줄기 붉은 빛이 내려와 함께 달려가 보니 금합(金盒)에 여섯 개의 알(卵)이 담겨 있었다. 이튿날 알 속에서 여섯 동자(童子)가 나왔는데 그중 맨 먼저 나온 동자를 수로(首露)라고 이름짓고 금합(金盒)에서 태어났다하여 성(姓)을 김씨(金氏)로 하니 그가 바로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시조(始祖)이신 김수로왕(金首露王)이시다. 군왕(君王)이 된 수로왕(首露王)은 나라이름을 대가락(大駕洛)으로 정하고 남천축(南天竺 : 고대 인도의 행정지역)에서 바다를 건너온 허(許) 여인을 왕비(王妃)로 맞아 10명의 왕자(王子)와 2명의 공주(公主)를 두었다. 그후 10세(世) 구형왕(仇衡王)이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항복하고 상등(上等)의 작위(爵位)와 가락(駕洛)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았으며, 그의 아들 무력(武力)이 각간(角干)을 역임했다. 구형왕의 증손(曾孫)이고 서현공의 아들 유신(庾信)은 신라,무열왕과 함께 삼국통일의 대업(大業)을 달성한 명장(名將)으로 무열왕의 딸 지소부인(智炤夫人)과 혼인했다.
김해김씨는 신라김씨의 알지계(閼智系)와 함께 우리나라 김씨의 양대산맥(兩大山脈)을 이루어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변성하여 왔으며 족세(族勢)가 크게 번창해짐에 따라 148여파로 분파(分派)되었고, 그 중에서 금녕군파(金寧君派=京派)와 감무공파(監務公派=四君派),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三賢派), 문경공파(文敬公派)의 후손들이 가장 번성하다.
각파별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금녕군파(경파)의 중조(中祖)인 목경(牧卿)이 고려 충정왕(忠定王)때 금녕군(金寧君)에 봉해졌다. 목경의 맏아들 보(普)는 공민왕(恭愍王)이 세자(世子)로 연행(燕行;국가의 사절로서 중국의 북경에 감)할 때 시종(侍從)한 공으로 충근량절보리공신,수시중(忠勤亮節輔理功臣,守侍中)에 이러렸고 목경(牧卿)의 6세손 영견(永堅;吏曹參判) 영서(永瑞;橫城縣監)·영정(永貞;大司憲知敦寧府使)·영순(永純;石城縣監) 4형제가 빼어났으며 숙종(肅宗)때 명신(名臣) 김우항(金宇杭)은 영정(永貞)의 후손으로 1713년(숙종 39)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감무공파(監務公派)에서는 중조(中祖)인 익경(益卿)의 손자 진문(振門)이 고려말에 예의판서(禮儀判書)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올랐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이 색(李 穡)·박자검(朴自儉)등과 함께 은거하여 절의(節義)를 지켰으며, 그의 둘째 아들 추(錘)는 도총관(都摠管)을 넷째 아들 석(錫)은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막내 조( )는 세종때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을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랐으며,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할 때 장영실(蔣英實)과 함께 간의대(簡儀臺)·자격루(自擊漏)·혼천의(渾天儀) 등을 만든 것으로 전한다.
특히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그에게 평소의 소원을 묻자 "백년동안 날마다 어탑(御榻;임금이 앉는 제구)을 모시고 금규화(金葵花) 앞에 진퇴를 엎드려 묻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한 것으로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전한다.
한편 진문(振門)의 6세손 극희(克禧)가 명사수로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막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한산도 싸움에서 전사했으며, 그의 조카 완(完;학천군 극조의 아들)은 역전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임진왜란 때 남원대첩(南原大捷)에 공을 세웠던 그는 1624(仁祖 2)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平定)할 때도 창성,방어사(昌城,防禦使)로 길마재 결전에서 공을 세우고 진무3등공신(振武3等功臣)에 올라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우 우(宇)는 병자호란 (丙子胡亂)때 벽동성(碧潼城)을 사수했던 명장(名將)으로 이름이 높았다.
우(宇)의 아들 여준(汝峻)은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인평대군(麟坪大君)을 호종(護從)한 18장사(壯士)의 한 사람으로 심양(瀋陽)에 갔을 때 옥하관(玉河關)에서 세자(世子)를 소리내어 울렸다는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읊어 더욱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용력에 힘을 뽐내며 목숨을 건 결투를 신청해 온 청나라 장수 우가(禹巨)의 코를 문질러 이김으로써 병자호란의 굴욕과 인질로 잡혀가는 세자를 호종하는 비애 등 백성들의 원한을 풀었다고 한다.
그후 세자가 돌아와 즉위한 다음에도 이 슬픈 기쁨과 옥하관의 달밤 일을 못잊어 과거의 시제(詩題)에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자주 출제하였다 한다.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三賢派)의 중조(中祖)인 관(管)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학교를 건립하여 유학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玄孫) 극일(克一)은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극일(克一)의 아들 맹(孟)은 세종 때 문과에 올라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준손(駿孫)·기손(驥孫)·일손(馹孫)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金氏三珠)>로 일컬어졌다.
1486년(中宗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김일손(金馹孫)은 일찍이 당대의 거유(巨 )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감사(全羅監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고, 연산군(燕山君)이 등극하여「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이 당상관(堂上官)으로 참여하여 사초(史草)를 살파게 되니 김일손(金馹孫)의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이극돈이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한치형(韓致亨)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일손은 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 등과 함께 참수(斬首) 당하였다.
김일손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증종조(中宗朝) 영의정 남 곤(南袞)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김일손 의 호)같은 이가 또 나올수 있을까. 그의 문장(文章)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계천에 지나지 못하다."라고 김일손의 짧은 생애(生涯)를 애석하게 여겼다.
삼현(三賢)의 한 사람인 김대유(金大有)는 김일손의 조카이며 김준손의 아들이다. 무오午士禍)에 숙부 김일손이 참수당하자 부자(父子)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中宗)때 풀려나와 평생을 강개한 지절(志節)로 살았으며, 3개월 간의 칠원현감(漆原縣監) 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의 운몬산(雲門山) 속 삼족당(三足堂)에서 73세의 일생을 마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김경서(金景瑞)장군과 소전공(少佺公)김덕승(金德承;春秋館編修官). 예직(禮直;三道 水軍統制使) 홍도(弘道; 朝鮮風俗畵의 祖宗) 진희(晉熙;忠孝旌閭를 賜額받은) 외 <해동가요(海東歌謠)>를 남기고 「청규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한 김천택(金天澤)등이 명문거족의 김해김씨를 빛냈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김해김씨는 남한에 총 892,328가구, 4.125,86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