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일자에 관하여Ⅱ
선과 일자는 꼭 같은 것이다. 첫째는 그들 자체가 사물들이 아니며 그들이 지시하는 것도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는 것. 둘째는 그들이 지시하는 바의 것 즉 모든 이름들 너머에 놓여 있는 알려지지 않는 최고의 어떤 것에 속하는 상호 보완적이지만 서로 구분되는 두 측면을 지적한다는 것이다. 일자는 어떤 통일화의 과정에 의해 다소 완전하게 성취된 통일성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분유된 통일성의 근원이고 원인이며, 또 이로 인해서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원인인 것이다. 일자는 대단히 강력한 원리로 모든 것을 유출할 수 있으며 또 사실상 모든 것을 유출한다. 일자를 강력함의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제 1원리는 선이라고 올바로 불려질 수가 있다. 그래서 제1원리는 "일자 다음에 오는 것, 즉 다수성"에 대한 원인으로서의 일자이지 선인 것이다. 모든 것이 일자로부터 나오는 이유는, 그것 안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만큼 존재가 있기 위해서는 일자 자체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아버지이어야만 하며 그래서 존재는 그의 첫 아이인 것이다.
플로티누스의 선과 일자를 기독교의 신인 존재와 동일화하면서 일자로부터의 다수의 플로티누스적 유출을 존재로부터 존재들의 기독교적 유출로 바꾸는 바로 그 순간에 그들 마음 속에 생겨난 것이다. 존재가 있다 로부터 나오는 교설 내에서는 존재들과 그들의 원리 사이의 어떠한 본질적 공통성이라도 필연적으로 일원론을 수반할 것이며, 만약 그들의 원리가 신이라면 범신론을 수반할 것이다. 플로티누스의 일자가 신인지의 여부를 가리는 미묘한 문제는 보류해 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최소한 그것이 존재가 아니라는 것만은 안전하게 확언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있다가 하나로부터 파생되는 교설 속에서는 어떠한 일원론도 없다. 다시 말해 존재와 그 자체로는 존재를 갖지 않는 제 1원리 사이에는 존재에 관한 어떠한 공통성도 있을 수 없다.
플로티누스는 인식이 있는 곳에는 존재가 있고 존재가 있는 곳에는 인식이 있다. 즉 있다는 것은 사유 가능하다는 것, 즉 있다는 것은 하나의 가능적인 사유 대상이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속성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통일성을 플로티누스는 누스라고 하였다. 그것은 지성과 인식 모두를 넘어서는 일자가 아니라 지속하는 원리들의 계열에 있어서 일자 다음에 즉시 나오는 것이다. 일자는 어떠한 사물도 아니며 모든 사물들이 일자의 귀결로서 있는 것이다. 플로티누스에 있어서 "일자는 때때로 하나의 신이다" 일자가 참으로 하나의 신이라고 할지라도 플로티누스를 특별히 중요한 사람으로 인상짓지 않는다. 그의 교설 내에서 신이라는 명칭을 받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은 지성이며 이것을 플로티누스의 교설 속에서는 지성이 현저하게 신이다.
프로클로스의 교설 속에서 형이상학은 결정적인 전회를 하는데 신학뿐만 아니라 종교로의 전회인 것이다. 후기 중세의 신학자들 사이에서 누린 대단한 인기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일자는 신이다"라고 덧붙여 "선과 일자가 똑같은 것이고 선과 신이 똑같은 것이기 때문에 일자가 어떻게 신이 아닐 수 있겠는가?" 이렇게 신, 선, 일자를 등식화한 후에 프로클로스는 플로티누스 뿐만이 아니라 플라톤 자신도 등식화했다는 것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는다.
빅토리누스의 기독교 신은 존재를 낳는 하나의 비존재이다. 신은 존재의 원인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신이 참으로 있다고 말해질 수 있다. 신은 하나의 최고의 비존재이며 모든 존재의 원인이다. 빅토리누스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원인으로서의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 안에 잠재적으로 있는 존재는 신의 이러한 자기 생성 덕분으로 현실적인 존재로 된다. 신은 결코 낳은 신보다 열등하지 않다. 신은 그 자신의 원인이며 신이 신인 것은 그 자신을 통해서이다. 에크하르트는 신은 스스로가 있기 때문에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기 때문에 있다고 말한다. 그 분의 사고의 현실이 그 분의 존재의 뿌리이다. 신은 플로티노스의 일자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그의 최고의 지성과는 매우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