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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개선문(Arc de Triomphe)
설계는 장 에뚜알 광장(place de l'Etoile)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개선문은 샹젤리제 거리(avenue des Champs-Elysées)를 바라보고 있다.
1806년 오스테를리츠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가 개선문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군인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주며, 고대 로마 개선문의 양식을 개선문에 보여주고 싶어 했던 나폴레옹의 개선문은 근세 고전주의의 걸작으로 꼽힌다.
설계는 장 프랑소아 샬그랭(Jean François Chalgrin)이 맡았으며, 로마의 티터스(Titus) 개선문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전해 진다. 50m 높이에 총 234개의 계단으로 지어진 개선문 위에 올라서면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파리의 전경을 감상 할 수 있다.
1921년부터 아치의 중앙 부분 밑에는 무명 용사들의 묘비가 세워져 있으며, 매일 18시30분까지 그들을 기리기 위한 불꽃을 밝힌다. 파리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개선문은 건축물이나 예술품의 가치 그 이상의 상징성을 파리 시민들과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선사한다. 분주하며, 복잡한 파리의 일상 속에서 정신적인 버팀목과도 같은 역할을 해준다.
프랑스 국립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에뚜알 광장(place de l'Etoile)중심으로 12거리가 있는데 시계의12시간과 같다
• 관람 중 휴식 가능 장소 구비 • 화장실 • 부띠끄 구비
• 버스 파킹 가능 (avenue des Ternes, place de la Concorde)
• 방문 가능한 층수: 3개 층 • 승강기 이용 가능(문의 필수)
• 관광 및 장애인 라벨 인증 제도 사용
교통
• 지하철: Charles de Gaulle-Étoile, 라인 1 - 2 - 6
• RER A: Charles de Gaulle-Étoile
입장료
17세까지 : 무료
그룹 (어른) : 7 ?
25세까지 : 5.5 ?
일반 요금: 9 ? 휴관 : 1월1일, 5월1일, 12월25일
노트르담
원 뜻은 "우리의 귀부인" 이라는 뜻
그러니까 성모 마리아에게 바쳐진 성당 을 의미한다
남쪽과 북쪽의 장미창이며 스테인드글라스
노트르담은 1239년 성 루이가 "그리스도의 가시 면류관" 을 안치했고 1302년에는 필립4세가 최초로 3부회 를 개최했으며1455년 잔다르크의 명예회복 재판과 1572년 개신교도 위그노 와의 종교전쟁 1,572년 8월 18일에 개신교도인 앙리4세와 가톨릭 인 마그리트의 결혼식이 열린 곳이다 엿새후 왕모 카트린느 드 메시스는 "성 바르톨로메오의 축일" 파리의
결혼식에 참가한 개신교도(위그노) 들을 기습하여 학살하니 역사에는 이른바 "피의 결혼식" 으로 기록되었던 것,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네델란드로 도망가고 프랑스는 "완전무결한 가톨릭 국가" 프랑스 혁명시 가톨릭에 분노한 민중에 의해 한때 사료창고 로 쓰이기도 했으나, 나폴레옹이 미사를 부활시키고 황제 대관식을 거행한 곳으로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곱추’로 한층 더 유명해진 곳
그 규모와 오랜 역사로 유명하며, 고고학과 건축학적 관심의 대상이다. 파리 센 강에 떠 있는 시테 섬에 있다. 파리 주교 모리스 드 쉴리가 이전에 있던 2개의 바실리카식 교회당을 합쳐 하나의 큰 건물을 지을 계획을 세웠고, 1163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머릿돌을 놓고 1189년 대제단이 봉헌되었다. 서쪽 앞면의 성가대석과 네이브[身廊]는 1240년 완공되었고 그뒤 100여 년에 걸쳐 포치(porch), 예배당, 그밖의 여러 장식물들을 지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수세기를 지나면서 흠집이 생기고 약해졌으며 18세기 프랑스 혁명 때 크게 파손되어, 19세기에 서쪽 정면 '그랜드 갤러리'의 28개 조상과 3개 출입문 측벽에 서 있는 조상 등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했다. 트랜셉트[翼廊]와 네이브 사이에 높이 솟은 첨탑은 19세기에 복원된 것이다.
전체 길이 130m, 폭 48m, 천장 높이 35m, 탑 높이 69m의 대건축물로 탑 위에 뾰족탑을 덧붙이기로 되어 있었으나 아직 그대로이다. 4각형 쌍탑과 쌍탑의 선을 따라 정면을 3부분으로 나눈 버팀벽의 수직선과, '그랜드 갤러리'의 수평선이 '장미창'(薔薇窓)을 중심으로 비할 데 없는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면에 3개 입구와 그 입구의 이름과 관련지어 만든 조각, 그 위에 유대 왕과 관련있는 조각이 들어서 있는 갤러리, 직경 10m에 가까운 장미창, 그 위에 긴 열주(列柱), 좌우의 탑 등 양식은 고딕 건축의 전형으로 성당 건축의 규준이 되었다. 내부는 아일[側廊]이 2층으로 되어 있고 네이브는 거대한 원주가 끝에서 3개의 기둥으로 나뉘면서 천장으로 뻗어 있어 전체적으로 밝고 높은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장엄한 종교적 공간을 연출하는 스테인드 글라스는 북쪽 정면의 장미창을 제외하고는 후세의 작품이다. 오른쪽 출입구의 〈성모자 聖母子〉(1165~70경), 왼쪽 출입구의 〈성모대관 聖母戴冠〉(1210~20경), 중앙 출입구의 〈최후의 심판〉(1220~30경), 북쪽의 〈붉은 입구〉, 내진(內陣) 주위를 장식한 진한 색깔의 〈그리스도전(傳)〉(14세기)이 유명하다. 이 성당은 나폴레옹의 대관식(1804), 파리 해방을 감사하는 국민예배(1944. 8. 26) 등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콩코르드 광장(프랑스어: Place de la Concorde, 프랑스어 발음 plas də la kɔ̃kɔʁd)은 프랑스 파리의 광장으로 샹젤리제 거리 동쪽에 튈르리 공원과 사이에 위치한다. 면적은 86,400m2(8.64ha)로 파리에서는 가장 넓은 광장이다
1755년, 앙제 자끄 가브리엘에 의해 설계된 이 광장에는 원래 루이 15세의 기마상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루이 15세 광장”으로 불리었다. 이후 프랑스 혁명의 발발로 기마상은 철거되고, 이름도 “혁명 광장”으로 고쳐졌다. 1793년 1월 21일 프랑스 혁명 중에는 루이 16세가 이곳에서 처형되었고, 10월 16일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참수된 형장이기도 했다. 1795년 현재 “콩코드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시작했고, 공식 이름이 된 것은 1830년이다. 콩코드(Concorde)는 화합, 일치라는 뜻으로, 이 광장의 이름은 이러한 어두운 역사를 넘어 평화화 화합으로 나가자는 프랑스의 염원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한다.
광장의 중심에는 이집트 룩소르 신전에서 가져온 룩소르(Luxor) 오벨리스크(클레오파트라의 바늘)가 놓여 있다. 기원전 1260년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 이집트 테베(Thebes, 현재의 룩소르)의 람세스 신전에 있던 것으로 1829년 이집트의 총독이자 군사령관이던 알바니아 출신의 무함마드 알리가 프랑스에 선물하였다. 오벨리스크에는 프랑스로의 운송 과정이 묘사되어 있으며, 4년의 운송 기간이 걸렸다. 최상단 부분에 소형 피라미드 모습의 금박이 있었으나 아시리아인의 침입과 페르시아인의 점령 과정에서 분실되었는데[1], 프랑스 정부에서 복원 작업을 벌여 1998년 5월 14일 복원이 완료되었다. 복원 자금에는 약 1백 50만 프랑이 소요되었으며, 수명은 약 40년이다. 복원으로 인해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이전보타 2m 가량 높아지게 되었다.
루브르 박물관(Musée du Louvre)
유명한 피라미드, 방대한 갤러리와 소장품 등으로 잘 알려진 세계적인 루브르 박물관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연발하게 할 것이다.
몇 년 전부터 박물관은 작품과 관람객간의 원활한 교류와 소통 위해 다양한 관람 코스와 서비스를 제안하고 있다. 효율적인 관람을 위한 안내는 입구를 비롯한 박물관 곳곳에서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루브르 박물관(Le musée du Louvre)은 프랑스 파리의 중심가인 리볼리 가에 있는 국립 박물관이다. 소장품의 수와 질 면에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과 대영박물관와 함께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박물관이다. 지금의 건물은 루브르궁을 개조한 것으로, 파리의 세느강변에 포함하여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루브르 박물관 앞의 유리 피라미드 조형물은 근대에 건설된 것으로 한 때 어울리지 않다는 평이 많았으나 현재는 루브르를 대표하는 조형물이 되었다. 프랑스어로 뮈제 뒤 루브르, 그랑 루브르, 또는 단순히 루브르 라고도 불린다.
루브르 박물관은 루브르 궁전 내부에 위치해있다. 루브르 궁전은 12세기 후반 필립 2세의 명으로 착공되었는데, 그당시만 해도 궁이 아닌 요새였다. 아직도 당시의 요새 잔재들을 볼 수 있다. 이 요새가 루브르 궁이 되기까지 수차례에 걸친 건물 확장 공사가 이루어졌다. 1672년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에 거주하기로 결정하고 루브르를 왕실의 수집품을 전시하기 위한 장소로 쓰도록 했다.
1692년 루브르 건물에 왕립 아카데미가 들어서고 1699년에는 첫 번째 살롱전이 개최되었다. 아카데미는 루브르에 100년동안 남아있었다. 프랑스 대혁명당시, 국민회의는 루브르가 박물관으로서 국가의 걸작을 전시해야 한다고 선포하였다.
박물관으로서의 루브르는 1793년 8월 10일 537점의 회화를 전시하며 첫 문을 열었는데 전시된 작품은 대부분 몰락한 귀족과 교회에서 징발된 수집품들이었다. 박물관 건물 내부의 구조적 문제로 인해 박물관이 1796년에서 1801년까지 문을 닫았다. 나폴레옹이 통치하던 시기에 소장품의 규모가 크게 늘었고 이름도 뮈제 나폴레옹으로 바뀌었다가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대패하자 나폴레옹 군대에 빼았겨 루브르로 보내졌던 많은 작품들이 고국으로 돌려보내졌다. (사실 당시 박물관장이 지하실에 빼돌려 돌아가지 못한 작품도 여럿 된다고 한다.) 루이 18세와 샤를 10세 재위기간에 다시 한번, 더 큰 규모로 소장품이 늘었고, 제2 제정(나폴레옹 3세 통치기간)중에 20,000여점의 수집품이 들어왔다. 소장품은 제3 공화정때 부터도 기증과 선물로 계속해서 규모가 커지고 있으며 2008년 기준으로는 8개의 전시관에 나뉘어 있다. 이집트 고대유물관, 근동 유물관, 그리스와 에트루리아, 로마 유물관, 이슬람 미술관, 조각 전시관, 장식품 전시관, 회화관 그리고 판화와 소묘관 등이다.
이 전시관은 50,000여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데, BC 4000년부터 AC 4세기까지의 나일강 문명의 산물들로 채워져 있다. 이 세계 최대규모의 이집트 컬렉션은 이집트의 고대 왕조로부터 중왕조시대 그리고 신왕조 시대와 로마, 프톨레마이오스, 비잔틴 제국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이집트인들의 삶을 관통하여 보여준다. 이 전시관은 본래 국왕 소유의 컬렉션들로 시작하여 1798년 나폴레옹이 원정길에 도미니크 비방트(후에 루브르 박물관장이 됨)를 동행시키면서 규모가 커졌다. 장프랑수아 샹폴리옹이 로제타석을 번역하자 샤를 10세는 이집트 고대유물관을 조성하도록 명령하였다. 샹폴리옹은 세가지 컬렉션을 사들이도록 조언하였는데, the Durand, Salt 그리고 Drovetti였다. 카이로에 이집트 박물관을 세운 오귀스트 마리에트 덕에 전시관의 규모가 더 커졌는데, 마리에트는 멤피스를 발굴하고 나서 앉아있는 서기를 포함한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품들을 상자에 넣어 루브르로 보내왔다. 이 전시관 입구는 BC 2000년경 제작된 커다란 스핑크스가 지키고 있으며 전시관 내부에 20여개의 방들에 전시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소장품의 종류는 미술품, 파피루스 두루마리, 미이라, 도구들, 옷가지, 보석, 게임, 악기 그리고 무기 등이다.
루브르 박물관의 회화 소장품은 13세기부터 1848년까지의 작품들로 약 6,000점 이상이며 소장품의 전시를 총괄하는 12명에 이르는 큐레이터에 의해 관리된다. 이중 약 2/3는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이고 약 1,200점 이상이 북유럽 작품이다. 이탈리아 회화는 대부분 프랑수아 1세와 루이 14세의 유품으로 남겨진 소장품들로 구성되었고 몇몇은 나폴레옹시대의 전리품으로 들여왔다가 그대로 남은 것들이며 몇몇은 사들인 것들이다. 소장품의 수집은 프랑수아 시대에 시작되었는데 그는 라파엘이나 미켈란젤로와 같은 이탈리아의 거장들로부터 작품을 들여왔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그의 궁정으로 데려오기도 하였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왕실의 수집품은 루브르의 핵심을 이루었다. 1986년 오르세(d'Orsay) 기차역이 오르세 미술관(Musee d'Orsay)으로 개장되자 루브르의 소장품을 1848년 혁명이전과 이후의 작품으로 나누어 1848년 이후에 완성된 작품들을 새로운 미술관으로 옮겼다. 프랑스와 북유럽 작품들은 리슐리외 관(Richelieu Wing)과 Cour Carree에 전시되어 있고 스페인, 이탈리아 작품들은 드농 관(Denon Wing)에 전시되어 있다.
프랑스 미술품들 중에는 앙게랑 콰르통의 아비뇽 피에타, 장 푸셰의 King Jean le Bon 후고전시대 이래 남아있는 서유럽 작품중 가장 오래된 독립 초상화인 하시엔디 리고의 루이 14세,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외젠 들라크루아의 자유는 민중을 바리케이드로 이끈다 등이 있다. 북유럽 작품들로는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레이스 짜는 여인과 천문학자, 캐스퍼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Trees of Crows, 렘브란트의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 욕실의 바세바 그리고 도살되는 소 등을 소장하고 있다. 이탈리아 작품들의 수집은 주목할만 한데 르네상스 시대의 소장품들이 특히 훌륭하다. 작품들 중에는 리얼리즘과 세밀함(위대한 영적 세상의 중요한 사건을 세밀히 묘사한다는 의미로)이 투영된 안드레아 만테냐와 조반니 벨리니의 기병대가 있다. 르네상스의 이름높은 소장품중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성 안나, 성 요한과 성모 그리고 아기예수, 그리고 바위위의 마돈나가 있다. 카라바조의 작품으로 점성술사와 동정녀 마리아의 죽음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루브르는 16세기 베니스의 화가 티션(티티안, 티치아노 베첼리)의 전원의 합주, 그리스도의 매, 가시 면류관을 전시하고 있다. 라 카스 컬렉션은 1869년 루이 라 카스가 루브르 박물관에 유품으로 남긴 것으로 루브르 역사상 최대규모의 개인 기증이다. 라 카스는 개인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584점의 회화를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이중에는 앙투안 와토의 Commedia dell'Arte player of Pierrot가 있다. 이 기증품들을 주제로 2007년 1869:Watteau, Chardin...entrent au Louvre. La Collection La Caze 전시회가 열렸다.
입장권 구매는 박물관 관람 시간 종료 30분 전까지 가능
나폴레옹 홀(Hall Napoléon): 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픈, 9시부터 22시까지
나폴레옹 홀과 들라크루아(Eugène-Delacroix) 미술관은 특별 요금
매달 첫 번째 주 일요일과 7월14일은 무료 입장(나폴레옹 홀 제외)
오픈 시간 및 요금
연중 무휴
월요일, 목요일, 토요일, 일요일: 09:00 - 18:00
수요일, 금요일: 09:00 - 21:45
매달 첫 번째 일요일: 09:00 - 18:00
입장 요금
일반 요금: 10 ? 17세까지: 무료 휴관: 1월 1일
각 입구마다 입장할 수 있는 요일과 시간 그리고 입장이 가능한 입장권이 다르다.
루브르 박물관은 유리 피라미드 입구부터 시작하여 회화실, 조각실, 고대 도양실 다양한 테마로 구성되어 있는 드넓은곳. 제대로 둘러보려면 하루는 고사하고 2-3일은 오롯하게 시간을 집중해야 한다.
루브르 박물관은 크게 3 곳의 컬렉션으로 이루어진다. 리슐리외관Richelieu, 쉴리관Sully, 드농관Denon 이며, 지하 2층 나폴레옹 홀, 반지층, 0층(우리나라 기준 1층), 부터 시작하여 2층까지 총 5개의 층에 걸쳐져 있다.
세 컬릭션 모두 한 층 당 기본 20개에 달하는 방으로 구성되어 있어 총 4개층이면 한 관당 기본 80개의 방은 넘는다. 워낙 방대하고 많은 양의 예술품이 기다리고 있지만, 시간 관계 상 모두 둘러볼 수 없으니 전체적인 테마와 반드시 보고 가야 할 작품들 위주로 골라 보면 크게 훑어볼 수 있다.
에펠탑(Tour Eiffel)은 노트르담(Notre-Dame)과 함께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 명소이자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이다. 에펠탑은 건축가 소브스트르와 교량 기술자 에펠이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 완공 당시에는 외관으로 많은 이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곧 파리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324m 높이에 18 038개의 금속, 2 500 000개의 리벳으로 만들어진 에펠탑은 철의 여인이라고도 불린다.
탑의 전망대에서는 인근에 위치한 샹 드 막스(Champ de Mars), 샤이요 궁(Palais de Chaillot), 인류학 박물관을 비롯해 몽마르트의 사크레 꾀르(Sacré-Cœur) 대성당, 샹젤리제 거리, 개선문...까지 조망 가능하다
1 665개의 계단을 오르면 2층(우리 3층)으로 된 전망대에 도착한다.
7년마다 한번씩 에펠탑은 이곳을 찾는 수 천만 명의 관광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새 단장을 한다.
휠체어 등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들은 1층과 2층까지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이동할 수 있다. 안전상의 이유로 정상까지는 올라 갈 수 없다.
교통
RER C 샹 드 막스 뚜르 에펠(Champs de Mars Tour Eiffel)
지하철: Bir-Hakeim, Trocadéro 또는 Ecole militaire
오픈 시간
6월15일 금요일부터 9월1일 토요일까지 09:00 - 00:00
9월2일 일요일부터 12월31일까지 09:30 - 23:00
입장료
일반 요금: 13.4 ? 12-24세까지: 11.8 ? 4-11세까지: 9.3 ?
장애인(어른): 9.3 ? 0-3세(어린이): 무료
프랑스의 건축가 알렉상드르 귀스타브 에펠(Alexandre Gustave Eiffel, 1832~1923)이 만
든 철골 구조의 탑. 프랑스, 더 넓게 보면 유럽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1930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프랑스가 보불전쟁에서 독일에게 패한 치욕을 만회하고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1889년 만국박람회에 전시할 목적으로 세워졌다. 때문에 원래는 20년만 설치했다가 해체할 예정이었다.
자유의 여신상과 더불어 에펠의 2대 걸작으로 꼽히지만, 만들 당시엔 온갖 욕이라는 욕은 다 먹은 건물이다. 대표적으로 "저거 무너지면 사람 다 죽는다"는 일반인들의 공포, 그리고 "뼈대만 앙상한 저딴 건물이 파리에 있는 걸 참을 수 없다"는 예술가들의 항의가 있었다. 임페리우스: "신성, 아니 파리 모독이다!" 덤으로 "비쩍 마른 피라미드"라는 혹평과, "예술의 도시인 파리의 미관을 망치는 흉물"이란 소리도 들었다. 실제로 파리에 가서 보면 흉물이란 소리가 나온 것이 이해가 갈 정도로 다른 건물과 이질적인 분위기이기는 하다. 주변 건물은 모두 육중한 석조 건물 양식인데, 에펠 탑은 선으로 이루어진 철탑이니.
이게 건설되기 시작하자 꼴도 보기 싫다며 정말로 파리를 떠난 예술가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에펠 탑 까는 대문호 기 드 모파상이었는데, 얼마나 싫어했는지 에펠 탑이 안 보이는 방향으로 창을 낸 집에서 살 정도였고, 에펠 탑에 있는 음식점에서 자주 식사를 하는 그에게 이유를 묻자 모파상 왈, "파리에서 에펠탑이 안 보이는 데가 여기 뿐이라서."라고 한 일화가 전해질 정도. 에펠탑 근처의 몽소 공원에 세워진 모파상의 동상도 에펠탑과 등을 돌린 방향으로 세워졌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 에펠 탑을 파리의 흉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시 시대가 석조 건축에서 철과 유리, 콘크리트 건축이 막 도입되던 시기였다는 것도 고려해야 하며, 결국 기차역 등 많은 거대 시설들은 에펠 탑과 같은 철골 구조를 사용하여 지어졌다. 야경은 특히 아름답다. 파리의 야경은 간접 조명을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건물들이 아름답고 운치있게 보인다. 에펠 탑도 예외는 아니다. 게다가 일정 시간이 되면 에펠 탑에 장식된 수많은 전구들이 빛을 내기 시작한다. 트리에 붙은 그 전구들이 반짝이는 것을 보는 느낌. 이것을 보면 다들 감탄을 하곤 한다. 예전엔 10분 정도 불빛이 반짝였는데, 지금은 줄어들어서 5분 정도 반짝거리곤 꺼진다.
에펠은 자신보다 더 유명해져서 질투한다고 했지만 토머스 에디슨도 이걸 보고 신의 기술이라 극찬했을 정도의 건축물. 겨우 20년간 쓰고 해체할 건물을 짓기 위해 수천 장의 도안을 만들 만큼 정성을 쏟았으며 현재의 기준으로 봐도 그 정교함은 수준급이라 한다.
위에 올라가면 에펠과 에디슨이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내용이 있다
세느강 유람선
바또 파리지엥 가격표
반값세일! 명품세느강 유람선 ‘바토 파리지엥’
3세~12세는 어린이 요금이 적용됩니다. 3세 미만은 무료입니다.
※ 티켓 유효기간 : ~ 2015. 07. 18까지바토파리지앵 바또파리지엥 바토파리지앵
성인 ? 7.00 어린이 ? 6.00
바또 파리지엥 (? 14.00)
에펠탑 래이져쇼는 1시간마다 정각에 실시 야간에 마지막날 파리를 정리하는 기분으로
승선하는 것이좋고 겨울에는 옷을 따뜻하게
베르사유궁전
베르사유에 최초로 궁전이 들어선 것은 1624년으로 U자형의 날개건물 구조의 궁성으로 외벽은 회칠만 한 상태였으나 1634년 모서리쪽에 방을 증설하면서 현재의 정면부 파사드의 기초가 되는 붉은색 벽돌과 회색빛 뒤퉁이 벽인 우석과 일정 간격으로 늘어진 조각상으로 된 파사드로 바꿔졌다. 이 때는 루이 13세의 사냥용 별장으로 지어진 것이어서 큰 의미는 없었다.
루이 13세 사후 한동안 방치되다가 1651년 루이 14세가 한 번 방문한 이후 1661년 실질적인 권한을 장악하면서 보 르 비콩트를 척도로 삼고, 푸케가 자신의 궁성을 설계한 예술가들인 루이 르 보와 샤를 르 브룅, 앙드레 르 노트르를 시용해 각각 건축, 실내 설비, 정원 정비 들을 맡기면서 1665년까지 베르사유 궁성의 확장공사를 시작해, 궁성 남쪽에 궁성의 파사드와 비슷한 건물 몇 체를 신축했고, 옛날 궁성의 손님맞이 뜰을 대리석 포장을 했다.
이후 1668년 르 보의 개축 계획을 실행해 1670년까지 양측면에 아파트먼트인 두 로이(Du Roi), 드 라 라헨느(De La Reine)라는 두 채의 날개건물을 증개축해 대리석 외피로 된 파사드로 바뀌었고, 정원쪽도 마찬가지로 양면에 새로 증축된 날개건물과 연결되는 두개의 날개건물을 증축했고, 양측면과 마찬가지로 대리석 외피로 된 파사드로 되었다. 이때 나중에 거울의 방이 들어설 부분이 발코니로 양쪽의 날개건물과 연결되었다.
이후 1677년 루이 14세는 베르사유를 왕궁으로 삼겠다는 결정을 했고, 죽은 루이 르 보를 대신해 쥘 아르두앵 망사르를 베르사유 궁전의 수석 건축가로 임명해 베르사유 궁전의 다음 증축을 계획하게 했다. 그리고 1682년, 루이 14세가 파리에서 베르사유 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계속해서 대대적인 건설을 하여 1686년 후면측 발코니를 개축해 거울의 방을 완성했고, 동쪽 측면측에서 새로 aile du midi라는 새로운 날개건물을 신축, 다시 궁전 남쪽으로 대마구간(Grande écurie)와 작은 마구간(Petite écurie)가 완공, 궁전과 두 마구간 사이에 aile des ministres라는 l자형의 건물 두 체를 신축했다.
뒤이어 aile des ministres와 aile du midi 사이에 정사각형에 중정이 있는 Gande commun이 세워졌고, 다시 서쪽 측면에 북쪽 날개(Aile Du Nord)라는 새로운 날개건물이 신축되어 베르사유 궁전의 전체모습은 지금의 ㅠ형의 구조가 완성되면서 화려한 궁전으로 거듭났다. 또한 귀족들의 권력을 누르고 절대왕정을 확립하려는 루이 14세의 의도에 따라 대귀족들은 강제로 베르사유로 거처를 옮겼으며, 베르사유 시에는 귀족들의 저택이 즐비하게 들어서서 번영을 누리게 된다. 이후로 프랑스 앙시앵 레짐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
1710년 북쪽 날개에 왕실 성당인 생루이 성당이 신축되면서 봉헌되었다. 1715년, 루이 14세가 사망하고 증손자 루이 15세가 왕위에 올랐다. 루이 14세의 조카 오를레앙 공 필리프 2세가 섭정을 했기 때문에 오를레앙 가의 저택인 파리의 팔레 루아얄이 중심이 되고 루이 15세는 튈르리 궁에 거처했다. 1722년, 성인이 되자 루이 15세도 베르사유로 옮겨와서 다시 베르사유가 정치의 중심이 되었고, 몇몇 방을 제외하고, 기존의 바로크 양식의 인테리어 대신 로코코 양식의 인테리어 리모델링 되었고, 1770년 다시 북쪽 날개 끝으로 왕식 극장이 신축되었다.
1789년, 루이 16세 때 일어난 프랑스 혁명으로 왕가가 민중의 압력에 밀려 거처를 파리로 옮겨오면서 베르사유는 방치되었고 이후 루이 18세나 샤를 10세를 비롯한 부르봉 왕조의 국왕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및 루이 나폴레옹 같은 황제들도 여기에 머물지 않아 궁전으로서의 기능이 정지했고, 오를레앙 왕가의 루이 필리프에 의해 박물관으로 개장되었다.
그러다가 보불전쟁이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나면서 빌헬름 1세가 이곳의 거울의 방에서 독일 황제로 즉위한 흑역사(…)가 있다. 이후 1919년에 똑같은 거울의 방에서 1차 세계대전 종전 강화회의가 열려 베르사이유 체제가 형성헸다
마리-앙투아네트 소유지 Domaine de Marie-Antoinette
그랑 트리아농 Grand Trianon
루이 14세가 맹트농 부인과 살기 위해 만든 별채이다
쁘띠 트리아농 Petit Trianon
루이 15세가 몽파두르 부인을 위해 지은곳. 하지만 그보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곳을 너무 좋아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