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듣고, 느끼고. 여행은 삶을 다시 구성할 수 있는 기회이기에 모두가 떠나고 싶어 한다. 희로애락이 그 곳에 있고 자극제가 되고 청량제가 될 수 있어 꿈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
먼나라 얘기: 몇 장의 신문을 훑어보고 있는 동안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가까운 나라'다. 뉴욕행을 JAL을 이용할 경우 1인당 왕복여비가 100만원이나 절약된다는 상품이 인기를 끌었다. 단 하네다 공항에서 1박하는 조건이다. 70년대 초 기억이다. 파리에서 동경을 거쳐 귀국하기 위해서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때 일본 쇼핑 관광단은 앞 다투어 파리 백화점을 휩쓸면서 기세를 부리고 있었다. 알라스카 들쥐 떼 같이 몰려다니는 '쇼핑구매단'을 맞아 현지에서는 신바람이 났으나 우리 교포들은 어깨를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드골 공항에서 이륙한 JAL이 안전권에 들어서면서 일이 벌어졌다. 쇼핑 보따리를 풀고 품평회가 열린 것이다. 서로 비교하면서 박수치고 소리 지르고 난장판이 됐다. 승객의 대부분은 일본의 20대 여인들이다. 부(富)를 만끽하고 있는 일본의 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놀라움은 계속됐다. 특히 동경역 앞에서였다.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상이군인의 외마디 소리에는 냉기가 돌았다. '일본 만세, 천황 만세-그는 분명히 '그 날의 영광'을 다시 꿈꾸고 있었다. 충격적이었다. 봄비까지 내리고 잇었다. 가로등도 네온사인 불빛도 찾아볼 수가 없다. 에너지 절약대책 때문이라고 했다. 5월 초였으나 호텔방은 썰렁했다. 창가를 두들기는 빗줄기에 희미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행렬-동해 바다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작은 돌섬-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절규하고 있는 한(恨) 많은 '조선의 딸'들 모습이 오버랩되고 있었다. 일본은 역시 '먼나라'임이 틀림없다.
카메라 눈깔: JFK공항의 분위기는 싸늘했다. 세관 입국 심사대 앞에는 한글로 쓴 경고문(?) 팻말이 서 있다. '오른손, 왼손, 검지 손가락으로 지문을 찍고 눈은 카메라를 보십시오' -9.11사태 이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 중이다. 맨허튼 메트로폴리탄 전철 대합실 안 가운데는 단독무장을 한 군인이 황소만한 세퍼드와 함께 오고가는 승객들을 일일이 감시하고 있었다.
서부로 가는 국내선 세관에서는 승객들이 허리띠까지 풀었다. 미국의 고민이다. 입국순서를 기다리던 중 실리도 없이'반공이면 어떠냐'고 선동하고 있는 반미(反美) 장사꾼들이 쏘아버린 화살이 내 가슴에 박히고 있는 것 같아 씁쓸했다.
자랑스런운 날: 딸이 통계학 박사학위를 받는 날이다. 갈등과 뼛속으로 스며드는 고통, 부족함과 좌절을 극복한 끝에 드디어 얻은 결실이다. 딸이 유학을 '선언'했을 때 나는 반대했다. 결혼이 먼저였고, 유학 뒷바라지를 할 자신도 없었다. 5년 전의 일이다.
학위식이 시작되면서 실내악단이 경쾌한 행진곡으로 분위기를 돋우었다. 제자의 손을 잡고 등단하고 있는 교수님은 흐뭇했다. 신출 박사들의 호화로운 예복 역시 인상적이다. 코발트 불루 색깔 가운데 사각모 대신 고전악대의 둥근 모자를 쓰고 있다. 황금색 옷단으로 길게 장식한 가운 앞자락은 황홀했다. 교수가 들고 있던 주름 장식용 후두를 제자 목에 걸어주고 가볍게 포옹하자 강당이 떠내려 갈 듯 박수가 터졌다. 감격스러운 장면이다. 5월의 아카시아 향기보다 더 짙었다. 존경받고 사랑하는 캠퍼스의 분위기가 부러웠다.
오늘은 영광스러운 날-Great Day로 시작된 여자 총장님의 치사는 어머니의 속삭임같이 다정했다. 학교에서 마련한 다과 축하파티 역시 예상 밖의 즐거움이었다. 다정한 잔칫날이다.
숲속의 풍경: 딸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교회를 찾았다. 까다롭고 콧대 높다는 뉴요커들의 그림같은 단독주택이 숲속에 숨어 있다. 가끔 빨간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다. 교회 앞 뜰에는 주말 야드 세일 좌판을 벌이고 있다. 어린이 옷가지 몇 점, 세발자전거와 유모차, 쇼파와 책걸상 등, 살고 있던 중고품들이 전부다. 수입금 전액을 교회 헌금이나 불우이웃을 돕는 일에 쓴다고 자랑하고 있는 미국할머니의 모습은 여유가 있었다.
주택가 뒤편에는 정리된 공동묘지가 버티고 있다. 1800년대 것부터 최근 세운 비석까지 다양했다.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 십자가가 한 울타리 안에서 함께 속삭이고 있다. '생(生)과 사(死)' 몸 덩어리는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 혼(魂)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라고 했다. 불가(佛家)에서는 단지 '이 방에서 옆방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고향까치: 한국에서 왔다면 우선 반갑던 시간은 지나갔다. 대부분 교포상점이 자리잡고 있는 뉴욕 상업지역인 퀸스 후라싱(Queens-Flushing) 구역에 있는 상가의 간판은 90% 이상 한글로 바뀌었다. LA 코리아타운같이 영어를 한 마디 사용하지 않아도 불편이 없다. 유대인들이 잡고 있던 이 지역의 상권이 교포들로 바뀌면서 현지 언론에서는 '제2의 유대인'들이 점령했다고 떠들석했다. 수다 떨고 있는 여자주인의 자랑이다. 케네디공항 2층 JAL 출국 라운지에는 여행객을 위한 매점이 성업중이다. 한국인 점포 유리창에 붙어 있는 메뉴는 낯이 설지 않았다. 김치, 김밥, 무국, 라면, 만두국 등, 강남고속버스터미널 같았다.
한국인 사절: 몇 년 동안 관광가이드를 했던 후배의 기억이다. 식사 때마다 풀어놓고 있는 고추장이나 김치 냄새까지는 양보할 수밖에 없었으나 항상 팁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구미사람들에게 팁은 1700년대부터 내려온 습관으로 불문율이다. 팁 수준은 보통 세금 전 가격의 15% ~ 20%, 고급업소에서는 20% ~ 25% 수준이다. 한국인 관광단의 경우는 호텔이나 음식점에서 1인당 1달러로 합의하고 있으나 이 약속(?)마저 잘 지키지 않아 코리안 사절 캠페인이 벌어졌다. 최소한의 룰은 지켜야 할 줄 아는 관광객이 됐으면 좋겠다는 불평이 후배의 지적이다.
여행 끝에는 항상 여운을 남긴다. 어제-오늘-내일을 연결할 수 있는 고리가 풀리는 것 같은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노래했다. 여행은 힘과 사랑을 그대에게 돌려준다고, 다른 이는 '단 한 번이라도' 평생 혼자 훌쩍 여행을 떠나라고도 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