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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석(高昌錫)
고창석은 재성의 아들이고, 광두의 손자이다. 광두의 생부는 언주이고 그의 양부는 방주라. 창석은 제해의 증손자이고, 시현의 현손이며, 임진왜란의 의병대장 제봉 고경명으로부터는 14대손이다. 창석은 무녀 독남이었다. 영광 김씨 가문으로 혼사를 하였는데 이 분도 무남 독녀였으니 참 이상한 인연이라 하겠다. 이 두 분 사이에 5남매를 두었으니, 큰아들 영국, 둘째 아들 영묵, 고명 딸 효남, 세째 아들 택, 네째 아들 영준이다. 이 중 네째 아들 영준은 창평으로 양자를 보냈다. 창석은 장흥면의 면장으로 역임하다가 읍으로 승격함에 따라 읍장이 되었다. 이후 48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창석은 성품이 너그러운 분이었다. 한 번은 재기, 기석 두 숙질이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가산을 탕진한 뒤에 읍장인 창석의 도장을 도용하여 보증을 세운 것이 원인이 되어 가산 300석을 한꺼번에 잃게 되었다. 그러나 두 분에 대하여 책임을 묻지 아니하고 원망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창석은 세상을 밝히 보는 식견이 있는 분이었다. 그 분은 당시 소학교 2학년의 학력에 한문을 공부하였다. 일기장에 세계 대전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여 기록하는 등 국제 정세에 대한 식견이 있었다. 일기장은 세째 아들 택이 소장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시국이 불안정한 때라 자녀들을 가르치는 데도 법률이나 정치 등 문과를 가르치지 않았다. 첫째 아들, 영국은 서울약전을 보내어 약사로 키웠으며, 둘째 아들 영묵은 서울공전을 보내 섬유공업을, 세째 아들 택은 전기공학을 공부하게 하였다. 창석의 공직에 있으며 남긴 업적은 참으로 위대하다. 그의 공적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33세 되는 때에, 순지들의 경지를 정리하였다. 오늘날 각종 중장비를 동원하여 벌이는 경지정리도 어려운 데, 반반한 수레 하나 없이 인력과 축력으로 이루어 낸 사업이니 그 어려움이 얼마나 컸으며 남다른 수고를 했겠는가를 생각할 때, 참으로 위대하다 할 것이다. 둘째, 탐진강 제방을 축조하였다. 현재 장흥 5일장이 서는 곳은 상습 수해지였다. 현 읍사무소로부터 약 500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약 2미터 높이로 제방을 쌓았으니 이는 장흥 면민의 대역사였다. 셋째, 읍사무소를 신축하였다. 장흥 읍사무소는 독특한 형태의 건물로써 50여년이 지난 1990년까지 읍사무소로 사용되었다. ‘너무 크다’는 당시 사람들의 반대도 있었지만, 그 동안 비좁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사용하였다는 읍사무소 직원들의 말을 들으니, 이 분의 앞을 내다보는 높은 통찰력에 감탄할 뿐이다. 넷째, 장흥 시가지 도로를 정비하였다. 현재 장흥읍 다리에서 장흥 중학교로 가는 길과 유치면으로 빠져나가는 도로를 정비하였다. 당시에는 이 곳에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무모한 사업이라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현재는 장흥군청을 비롯하여 우체국, 교육청, 장흥국민학교와 장흥 중학교, 농업협동조합 등 각종 관공서가 들어서고 장흥 정류소가 옮겨옴으로써 가장 번화한 거리가 되었다. 다섯째, 장흥읍에서 평화로 들어가는 농로를 확장하였다. 당시의 형편에 농로를 노폭 8미터로 약 2Km의 일직선 도로를 개설한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던 시절이었다. 지금과 같은 중장비는 물론 반반한 말수레 소수레 하나 없던 시절이라 공사에 따른 어려움이 컸으리라는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그리고 더 어려운 것은 그 주변에 있는 농토를 가진 사람들이 땅을 내주지 아니하려는 것이었다. 땅은 농부들에게 곧 생명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을 설득하고 달래고 회유하는 데 각종 방법을 동원하였다는 에피소드는 한 편의 소설이었다. 여섯째, 양반과 아전과의 알력을 중재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일어난 전쟁은 급기야 장흥에서도 양반과 아전 사이에 세력 다툼으로 발전하였다. 같은 민족끼리 서로 총을 겨누는 전쟁은 같은 지역에 사는 선량한 백성들의 마음을 두 조각으로 나누고야 말았다. 드디어 신병기와 죽창을 들고 서로의 피를 흘려야 할 급박한 상황이었다. 이 때 창석은 와병 중이라 거동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온 창석을 보고 양반과 아전들은 손에 들고 있던 병기를 놓았다. 이 외에도 창석은 많은 공적을 쌓았으니, 장흥 읍민들은 그 분의 공적을 기려 송덕비를 세웠다. 이 비석은 내가 어렸을 때까지도 평화리 87번지 아래채의 마당에 안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귀한 문화재를 방치해 둔다는 것은 장흥군의 발전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군민들의 뜻이 있어 현재는 문화원 터에 안치되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육의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창석은 마음이 너그럽고 세상을 보는 식견이 있는 분이었다. 그리고 공직에 있으며 많은 공적을 쌓았으며, 무슨 일을 하든지 장래를 생각하여 건실하게 일을 하는 참으로 보기 드물게 훌륭한 분이셨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