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영국인 소장 명품 고려청자, 기와집 400채 값 내고 되찾았죠
입력 : 2022.04.28 03:30
간송미술관 설립자 전형필
▲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에 있는 신윤복의 ‘미인도’예요. /간송미술관
우리나라 대표적 사립 미술관인 서울 성북동의 간송미술관에서 7년 만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어요. 이 미술관은 '훈민정음 해례본'과 고려청자, 신윤복의 '미인도' 등 국보 12점을 포함해 1만60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한 곳이죠. 누가 이 귀중한 유물들을 모아 미술관을 세웠던 걸까요? 숱한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내 '문화 독립운동가'로 불린 교육자이자 문화재 수집가 간송 전형필(1906~1962)이었습니다.
논 1만마지기 내놓으며 지킨 고려청자
1937년, 일본 도쿄에 살던 한 영국인은 몹시 불안한 심정이었습니다. '이거, 아무래도 일본을 뜰 때가 된 것 같은데.' 1930년대 들어 일본은 노골적으로 제국주의 본색을 드러냈고, 한 해 전인 1936년에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한 2·26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중일전쟁이 눈앞으로 다가온 상황이었죠. 이 영국인은 귀족 출신 변호사 존 개스비였는데, 한국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빠져 고려청자 명품들을 많이 수집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청자들을 처분할 때가 된 건가!'
그때 이 소문을 듣고 그의 앞에 나타난 조선 청년이 있었습니다. 서른을 갓 넘긴 간송 전형필이었죠. 개스비의 소장품을 본 전형필의 눈이 번쩍였습니다. 아기 원숭이가 엄마에게 칭얼거리며 뺨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표현한 '청자 모자(母子) 원숭이형 연적', 상상 속 동물의 자태를 기품 있게 나타낸 '청자 기린형 향로', 고려청자 특유의 상감 기법(표면에 무늬를 새겨 그 속에 보석이나 자개 등을 박아 넣는 기법)이 유감없이 구현된 '청자 상감 포도동자문 매병'.
그의 눈에 비친 청자들은 모두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명품이었고, 귀중한 우리 문화재를 지킬 기회였습니다. "제게 파십시오! 조선에도 이렇게 찬란한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 동포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마침내 전형필은 '개스비 컬렉션'의 청자 등 도자기 20점을 40만원에 사들인 뒤 전세 비행기에 싣고 돌아왔습니다. 당시 기와집 400채 값이었다고 하는데, 1930년대의 1원을 현재 가치 약 12만원으로 친다면 480억원이 됩니다. 전형필은 이 거래를 위해 논 1만마지기(약 661만㎡)를 내놓았다고 하는데 그가 물려받은 토지의 4분의 1 정도였습니다.
'문화유산 지키는 독립운동' 펼쳐
서울 출신인 전형필은 소위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는 한국 문화유산의 역사에서 무척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나라 없는 백성을 돕는 변호사가 되라"는 부친의 뜻에 따라 일본 와세다대에서 법학을 공부했는데,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위창 오세창(1864~1953)을 만나 큰 감화를 받습니다. 오세창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조선은 꼭 독립되네.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가 영원히 합병되는 역사는 동서고금에 없네. 그래서 일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 유물을 가져가려 하는 것이지."
전형필은 "서화(글씨와 그림), 전적(책과 문서)과 골동(오래됐거나 희귀한 예술품)은 조선의 자존심"이라고 확신한 뒤 문화유산을 감식하는 눈을 키웠습니다. 그는 겸재 정선의 '인곡유거'를 시작으로 우리나라 고서적과 고미술품 수집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김홍도·김득신·심사정의 그림들과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 같은 도자기, '동국정운' 같은 귀중한 고서들이 그에 의해 안전하게 보전될 수 있었습니다. 이미 오사카 골동품상의 손에 넘어간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을 되찾아온 것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가 지킨 우리 문화재는 어느 것 하나 귀중한 유물 아닌 게 없습니다만, '보물 중의 보물'이라 할 수 있는 유물은 역시 훈민정음 해례본입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한글 연구자들이 탄압받던 1943년 전형필은 위험을 무릅쓰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입했습니다. "기와집 한 채 값인 1000원을 달라"는 소장자에게 "그건 그 책의 가치에 비해 말도 안 되는 가격"이라며 그 10배인 1만원을 내밀었다고 합니다. 해례본은 한글이 어떻게 창제됐는지 그 과학적인 제작 원리를 설명한 책입니다. 그가 이 책을 구입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 원리를 여전히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6·25 때 북한 약탈 간신히 막아내
전형필은 수집품을 관리하고 전시하기 위해 1938년 서울 성북동에 '보화각'을 세웠습니다. 1945년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맞은 뒤 조선어학회 학자들을 보화각에 초청해 훈민정음 해례본을 공개하는 감격스러운 순간도 있었죠.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보화각은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전형필이 수집한 문화유산을 평양으로 가져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전형필은 근처 빈집에 몸을 숨겼고, 북한군은 미술사학자 최순우와 고미술 수집가 손재형에게 유물 포장 업무를 맡겼습니다. 이들은 "목록을 작성해야 한다" "더 튼튼한 상자가 필요하다"는 둥 온갖 핑계를 대며 포장하고 꺼내기를 반복하며 시간을 끌었고, 미 군정 시절 손님 접대용으로 마련했던 미제 위스키를 꺼내주면서 술판을 벌이게 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인천상륙작전 직후 서울이 빨리 수복되면서 북한군은 유물을 그대로 놔둔 채 달아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듬해 1·4 후퇴 때 전형필은 중요한 유물을 기차에 싣고 피란을 갔지만, 이 과정에서 상당수 유물이 흩어지는 것은 막지 못했습니다. 이후 교육 사업을 벌였던 그는 재단이 재정난에 빠졌을 때도 끝까지 보화각의 유물을 지켜냈다고 합니다. 전형필은 만 56세에 급성 신우염으로 세상을 떠났고, 2014년 그에게 금관문화훈장이 추서(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훈장 등을 줌)됐습니다.
[간송미술관과 보화각]
보화각(葆華閣)은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란 뜻이에요. 1938년 간송 전형필이 고미술품과 고서적 등 문화유산을 전시하기 위해 지었죠. 건축가 박길룡(1898~1943)이 설계한 모더니즘 양식 2층 건물입니다. 한국의 대표적 문화유산을 지켜냈다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건물 자체도 2019년 등록문화재가 됐습니다. 보화각은 1966년 '간송미술관'이란 간판을 걸었습니다. 오랜 기간 1년에 두 차례 특별전 때만 문을 열어 일반인이 접하기 어려운 미술관으로 인식됐었는데, 대구 간송미술관이 내년에 개관하면 좀 더 많은 사람이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보화각은 이번 전시가 끝나는 6월 이후 약 1년 반 동안 보수 공사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국보 ‘청자 모자(母子) 원숭이형 연적’이에요. 아기 원숭이가 엄마에게 칭얼거리며 뺨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표현했어요. /간송미술관
▲ 청자 특유의 상감 기법이 구현된 보물 ‘청자 상감 포도동자문 매병’. /간송미술관
▲ 국보인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미술관
▲ 간송 전형필의 모습이에요. /간송미술관
기획·구성=조유미 기자 유석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