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시에는 아들들이 아버지를 묻고 전시에는 아버지들이 아들들을 묻는다."
어느 영화의 주인공이 하는 대사를 옮겨본다. 옳고 정곡을 꿰뚫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요즘 평시에 성산 일출봉 해설사 다니고 있다. 전시가 되면 나는 무슨 일을 하고 다닐까, 민방위로 포탄 나르는 노역자 ?
동기생 서울에 있는 ㅅ 예비역 소장의 아내가 근 5개월간 투병생활을 하다가 오늘( 2024.2.13) 저녁 22시 반경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예전에는 사모님 으로 대접 받았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온갖 의료기기에 쌓여서 기계적인 방법으로 생명의 끈을 이어오던 중이었는데 이식한 간마져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온몸에 각종 호수와 기계의 도움으로 연명을 해 오다가 지친 그가 강화도에서 아내를 사별한 동기가 섬 주변의 둘레길을 걷고 있는 중에 장례 절차를 문의 해 왔다고 하는 말을 들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에 그의 아내가 운명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더 이상의 연명 장치의 연결을 포기한 시간이 그 시간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들의 나이에 5개월 간의 기간동안 아내의 병상을 지켜본 그의 삶도 정말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이된다. 그의 아내도 지난 기간동안의 긴 투병 생활은 살아 있다고 해도 그 건 살아 있음이 아닐 것이다. 황달이라고 하는 병을 진단 받고 결혼하여 아이가 셋이나 있는 딸의 간을 7퍼센트나 이식을 받았는데도 살아나지 못하고 그 딸은 앞으로도 1년여 기간동안 더 진료를 받아야한다고도 하는데 ..... 오랜 기간 투병생활을 하는 아내의 병상을 지켜온 그 동기생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무슨 위로가 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오늘 낮에 며칠째 연락을 하지 않았던 ㅇ에게 전화를 했었다. 설 연휴를 잘 보냈느냐고 했더니 혼자 지냈지만 잘 보냈다고 하는데.... 생전에 내가 먼저 전화를 하지 않으면 먼저 전화를 걸어 오지도 않는 사람이다. 서로 연락 없이 사는 것은 그가 살아 있다고 해도 나를 기준으로 본다면 죽어서 연락이 오지 않는 사람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삶이란 거울에 비친 것처럼 누군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의식속에 비치고 있을 때만이 살아 있다고 인정을 받는 것과 같다고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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