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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열려한즉 보검이 지나감이로다”
一條杖倚靑天 (일조주장의청천)하니 別向一乘敎外傳 (별향일승교외전)이로다 未眼時遭鐵棒 (미잡안시조철봉)이요 擬開口處過寶劒 (의개구처과보검)이로다 한 가지 주장자가 푸른 하늘을 기대니 달리 일승의 법을 49년 설한 밖에 전함이로다. 눈을 깜짝하기 전에 철방망이를 만남이요 입을 열려한즉 보검이 지나감이로다. 시회대중은 알겠느냐? 여기에서 알아갈 것 같으면 금일 결제가 곧 해제이거니와 여기에서 알지 못할진댄 각자 화두를 뚜렷이 챙기고 챙겨서 일념이 지속되게끔 혼신의 정력을 쏟을지어다. 도를 깨닫는 길이 여러 가지가 있음이나 가장 힘을 덜 들이고 짧은 시간에 도를 성취하는 길은 활구참선법이니, 이 활구참선은 가지가지의 깨닫는 방편 중에 가장 으뜸가는 참선법이로다. 이 활구참선의 깨닫는 요체는, 화두와 의심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일념이 간절히 지속되는 과정이 올 것 같으면 보는 것도 잊어버리고 듣는 것도 잊어버리고 앉아 있어도 앉아 있는 줄도 모르고 화두일념삼매가 지속되다가 홀연히 일기일경상(一機一境上)에 보는 찰나, 듣는 찰나에 화두가 타파가 되나니 활구참선법은 의심이 깨닫는 열쇠가 됨이로다. 고인(古人)이 이르되, ‘활구하(活句下)에 깨달아 갈 것 같으면 불조(佛祖)의 스승이 됨이라’ 하심이로다. 어떤 것이 활구(活句)냐고 물을 것 같으면, 일천성인(一千聖人)의 정액상(頂額上)의 일구(一句)를 투과(透過)해야사 옳다. 겨울안거 석 달 동안 대중은 이렇게 화두를 잘 지어갈지어다. 우리 부처님께서 설산에 들어가시어 일념삼매에 드셔서 새가 머리에 집을 지어도 모르시다가 납월 팔일 동쪽하늘에 샛별이 반짝이는 것을 보시고 대오견성을 하신 후에 첫마디 말씀이, “내가 삼칠일 동안 생각하고 생각하여도 법을 설하지 않고 열반에 드는 것과 같지 못하다” 하셨으니, 이 무슨 뜻인고? 천신만고 끝에 대도를 깨달아가지고 어째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부처님께서 49년간 인연을 따라 그릇을 따라 소승ㆍ대승법을 설하시다가 열반할 즈음에 이르러 말씀하시기를, “사십구 년간 만인에게 가지가지의 법을 설함이나, 실로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느니라”하시니, 부처님 살림살이가 이 두 마디(“내가 삼칠일 동안 생각하고 생각하여도 법을 설하지 않고 열반에 드는 것과 같지 못하다” 하심과 “사십 구년간 만인에게 가지가지의 법을 설함이나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느니라”하신 것)에 있음이로다. 이 두 말씀은 일천성인도 설하지 못한 참법문이로다. 이 두 마디의 낙처를 아실 것 같으면 부처님의 살림살이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일일(一日)에 대중을 운집하고 법상에 오르시어 좌정하고 있는 차제에 제석천왕이 꽃 한 송이를 부처님 전에 올리니 부처님께서 그 꽃을 받아가지고 대중에게 들어 보이셨다. 가섭존자가 빙긋이 웃으니 부처님께서, “정법안장 열반묘심(正法眼藏 涅槃妙心)을 가섭에게 전하노라”하셨다. 또 하루는 대중에게 법을 설하시려고 법상에 앉아 있는 차제에 가섭존자가 들어오니 부처님께서 자리를 반틈 비켜 앉으셨다. 가섭존자가 즉시 옆에 가서 앉으니 부처님께서 가사를 같이 둘러서 대중에게 보이셨다. 꽃을 들어 보인 뜻은 무엇이며 자리를 분(分)해 앉으신 도리는 무엇이냐? 대중은 알겠는가? 부처님이시여, 똥 위에 뾰족함을 더함을 또한 알지 못함이로다(屎上加尖을 也不知로다). 금강경에 이르되, 첫머리에 부처님께서 발우를 들고 일곱 집에서 걸식을 해가지고 돌아오신 후에 공양을 다해 마치시고 발을 씻고 자리에 앉으셨다. 수보리가 합장공경 예배하고, “희유세존이시여”하니, 수보리가 무슨 도리를 보았건대 “희유세존이시여” 함이닛고? 대중은 알겠는가? 적신(賊身)이 이로(已露)로다. 도적의 몸이 이미 드러남이로다. 일일에 부처님께서 대중에게 법을 설하기 위해 법좌에 오르시니 문수보살이 나와 예삼배를 올리고 말씀하시기를, “법왕법(法王法)을 보니 법왕법이 이와 같습니다.” 하니, 부처님께서 즉시 하좌(下座)하셨다. 또 하루는 부처님께서 많은 대중이 운집한 가운데 설법을 다해 마치시니 대중은 각자 자기 처소로 돌아갔는데 웬 여인이 부처님 근좌(近座)에 앉아 있거늘, 문수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어 말씀하시기를, “모든 대중은 법문이 끝나서 각자 처소로 돌아갔는데 저 여인은 어째서 부처님 근좌(近座)에 앉아있습니까?” 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문수, 문수야. 저 여인이 정(定)에 들어 있으니 문수 네 신력(神力)으로 저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 해 보아라.” 이에 문수가 백천 신통을 나투고 위요삼잡을 하고 탄지(彈指)를 해 보아도 그 여인이 정에서 나오지 않거늘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문수야, 네 신력을 가지고는 저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 하지 못하느니라. 하방세계(下方世界) 42국토를 지나갈 것 같으면 망명 초지보살(初地菩薩)이 있어 그이라야 능히 저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 할 수 있느니라.” 부처님 말씀이 끝나자마자 망명보살이 땅에서 솟아 나와서 부처님께 합장예배를 올리니, 정에 들어있는 그 여인을 가리키며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망명 네가 저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 해 보아라” 하니, 망명보살이 여인 앞에 이르러 손가락을 세 번 튕기는데 여인이 정에서 나옴이로다. 대중아, 문수는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스승인데 무엇이 부족해서 백천 신통을 나투고 탄지를 해도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 하지 못하였으며, 망명은 초지보살[초지, 2지, 3지 ~ 10지, 등각, 묘각의 닦아 깨닫는 과정이 있는데 초지는 맨 처음 닦아가는 수행단계]인데 무슨 장처(長處)가 있어 손가락 세 번 튕기는데 여인이 정에서 나왔느냐? 이 두 법문은 부처님 49년 설법 중에 가장 고준(高峻)한 법문이라 알기가 어려움이로다. 여기에서 알아 가실 것 같으면 모든 부처님과 모든 도인과 더불어 미래제가 다하도록 대열반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문수보살은 과거칠불의 스승인데 무엇이 부족해서 그 여자를 정에서 나오게 하지 못하였으며, 망명은 초지보살인데 어째서 그 여자가 정에서 나오게끔 했느냐? 여기에서 분명히 바른 답을 하는 이가 있을 것 같으면 산승의 이 주장자를 두 손으로 부치리라. 알겠는가? 海枯終見底 (해고종견저)이니 人死不知心 (인사부지심)이로 바다가 마름에 마침내 바다 밑은 볼 수가 있음이나 사람은 죽어도 그 마음은 알지 못함이로다. 주장자로 법상을 치시고 하좌하시다.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 진제스님 “화두 타파 위해 목숨을 걸어야” 1967년 묘관음사 하안거 해제법회. 젊은 진제(眞際)수좌는 당대의 선지식 향곡(香谷)선사(1912∼1978)와 당당하게 법거량(法擧揚)하고 있었다. 조용히 앉아있던(默坐) 향곡선사에게 진제수좌가 물었다. “불조(佛祖)께서 아신 곳은 여쭙지 아니하거니와, 불조께서 아시지 못한 곳을 스님께서 일러주십시오.” “구구는 팔십일이니라.” “그것은 불조께서 다 아신 곳입니다.” “육육은 삼십육이니라.” 진제수좌가 다시 물었다. “불안(佛眼)과 혜안(慧眼)은 여쭙지 아니하거니와 어떤 것이 납승의 안목입니까” “비구니 노릇은 원래 여자가 하는 것이니라.” 진제수좌가 이에 “오늘에야 비로소 큰스님을 친견하였습니다”고 하자,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보았느냐”고 향곡선사가 되물었다. “관(關)”(진제수좌) “옳고, 옳다”(향곡선사) 법거량은 이렇게 끝났고, 경허- 혜월- 운봉- 향곡선사로 이어진 법등(法燈)이 마침내 진제수좌에게 전해졌다. 진제스님은 이후 부산에 해운정사를 창건(1971)하고, 동화사 금당선원 조실로 추대(1994)되는 등 선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해왔다. 조계종 원로로 교단발전을 위해서도 노심초사하고 있는 진제스님을 지난 11월6일 해운정사에서 뵙고, 미혹한 중생의 안목에서 이것저것을 물었다. 간화선은 최상의 수행법 - 한국선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당당한 선 진미의 본래 기풍은 우리 나라에만 이어지고 있습니다. 실낱같은 흐름이 한국에만 남아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전해집니다.” - 진미의 기풍이 그대로 전해진다면 선지식들이 많이 나와야 되는데, 세간에서는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평가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법(法)에는 인정사정이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말하겠습니다. 눈 밝은 납자(明眼衲子)가 드물다는 점은 산승(山僧. 스님은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도 인정합니다. 납자들을 제접.지도할 본분종사가 부족하고, 신심있는 수좌들이 적어서 그렇습니다.” - 전통 수행법인 간화선에 혹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간화선은 최상의 수행법입니다. 위파사나.묵조선 등으로는 몇 생을 수행해도 견성을 못합니다. 화두일념이 지속되면 미세망념이 홀연 타파(打破) 됩니다. 간화선법은 문자나 언어를 여의고 수행의 단계나 점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증과(證果)를 얻는 경절문(徑截門)이며, 최상승의 수행법입니다.” - 당.송대에 만들어진 화두가 여전히 중요하고, 의미가 있다는 것이죠. 우리 시대 상황과 근기에 맞는 화두를 창안할 수는 없습니까. “화두는 제불제조(諸佛諸祖)께서 깨달으신 경계를 만인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교외별전의 진리를 표현한 것이 바로 화두입니다. 깨달은 진리의 세계에 고금(古今)이 있습니까. 중국의 위대한 도인들은 부처님의 살림살이를 바로 알았기 때문에, 부처님과 같은 법을 써서 천칠백공안을 베풀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면 호리(豪釐)도 착오가 없습니다.” - 옛날 스님들은 납자들에게 화두를 줄 때 상대방의 근기에 맞게끔 주셨던 것 같은데, 요즈음은 천편일률적으로 화두를 내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확고한 신심(信心)이 있으면 화두가 무엇이든 괜찮습니다. 참학자(參學者)에게 의심을 물어서 한 마디 던져주나, 천칠백공안 중의 한 화두를 던져주나 상관없습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만큼 온전히 받아들이고, 신(信)을 가지고 참구하느냐가 문제이지, 이 화두 저 화두에 혹은 선지식이 일러주는 것에 공부가 달려있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나 신심을 가기고 실답게 참구하느냐 여기에 무게가 있는 것이지, 절대 화두에 비중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 의심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 화두를 주는데, 의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발원 없는 수행은 있을 수 없어 “화두는 바랑 속에, 혹은 벽장 속에 넣어두기 위해 타는 것은 아닙니다. 견성(見性)을 위해 출가했음을 명심해 화두일념에 들어가야 됩니다. 항상 “대오견성 하여지이다”며 발원해야 됩니다. 발원 없는 수행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의심이 돈발(頓發)되면, 이를 지속시켜 견성대오하도록 해야 합니다. 흐르는 시냇물처럼 화두가 끊어지지 않도록 발원하고 수행해야 됩니다.” - 하나의 화두를 타파하면 다른 화두들도 모두 상통하지 않습니까. “역대 조사 스님네들을 보면 두 번 세 번 깨달은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일념무심삼매(一念無心三昧)에 들어가 해결되면 여지없이 깨닫게 되는데, 일념무심삼매가 안되고 홀연히 깨닫는 수가 더러 있습니다. 그것은 힘이 미약해 낱낱 법문을 다 보지 못합니다. 두 번 세 번 깨닫게 되는 원인이 거기에 있습니다. 일념무심삼매에서 깨달으면 더 깨달을 것이 없습니다.” - 화두 타파에 출가 재가의 차이가 있습니까. “화두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일생을,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나쁜 습기가 모두 제거돼야 타파가 되는데, 재가에 있으면서 하기는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일념이 순일(純一)해져야 가능한데 재가에 있으면 이것이 힘들어요.” - 혹시 원(願)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뜻이 상통하는 지음자(知音者)를 만나는 것입니다.” 진제스님 은사 석우스님 조계종 초대 종정 역임 호는 석우(石友), 법명은 보화(普化). 김해 교도에서 1875년 5월11일 태어난 스님은 어릴 때 유학을 비롯한 백가의 서적을 읽고, 유랑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1912년 범어사에서 〈보조어록〉을 보다 “대도(大道)는 실로 이 문중에 있구나” 하며 출가할 뜻을 세워, 곧 금강산 장안사의 연담응신(蓮潭凝信)스님에게 출가했다. 당시 38세였다. 이 해 유점사의 동선정의(東宣淨義)스님에게 구족계를 받고, 응신스님의 법을 이어받았다. 금강산 영원암(靈源庵)에서 30년을 지낸 뒤, 사제 상월(霜月)과 함께 지리산 칠불암, 사천 다솔사에 머물렀다. 남해의 해관암(海觀庵)을 창건하고, 해인사에 있다 1955년 8월 대한불교 조계종 초대 종정에 취임했다. 3년 간 재임하며 혼란한 교단발전에 큰 힘을 쏟았다. 1958년 2월15일 동화사에서 세수 84세, 법랍 46세로 입적했다. 진제스님 법사 향곡스님 운봉스님 법이어 선풍진작 호는 향곡(香谷), 법명은 혜림(蕙林). 경북 영일군 신광면 토성리에서 1912년 태어난 스님은 1927년 16세에 천성산 내원사에서 득도했다. 1929년 성월(性月)스님을 은사로 수계하고, 1931년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운봉성수(雲峰性粹)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출가 이후 내원사 성수스님 문하에서 수행하던 어느 날 산골짜기의 돌풍이 창을 칠 때 문득 깨달았다. 뒤에 운봉성수스님의 인가를 받고 임제의 맥을 이었다. 이로부터 각지를 편력하며 총림에서 사자후를 토했다. 묘관음사 선원을 열어 선지를 펼치자 납자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선암사, 불국사, 동화사, 선학원 등의 조실을 지내는 등 20여 년 동안 종풍을 떨치다 1978년 12월18일 묘관음사에서 세수 68세, 법랍 52세로 입적했다. |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