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의 감동, 손으로 이어가길”전세계 고통받는 어린이와 함께 한 10여년 기록… “사랑은 망설이지 않아”
기분전환 삼아 가벼운 마음으로 나선 아프리카 여행길. 인기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를 막 빠져나온 탤런트 김혜자씨는 초원 위를 달리는 사자떼를 그리며 1992년 여름 비행기에 올랐다. 비영리 기독교 구호단체인 월드비전 코리아의 친선대사를 수락한 그는 몇 번 얼굴마담 역할이나 하면서 아프리카 여행을 즐기려 했다.
그러나 달콤한 환상은 아프리카에 가까이 오면서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그를 대한 건 웅장한 초원이나 야생동물들의 질주가 아니었다. 얼굴에 붙은 파리를 떼낼 힘조차 없이 늘어져 죽어가고 있는 아이들과 여자들이었다. 도대체 왜 싸우는 지 모를 정도로 변해버린 잔인한 전쟁과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절대빈곤에서 아이들과 여자들은 방어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죽어가고 있었다.
김혜자씨는 여정 내내 눈물을 달고 다녀야 했다. 아이들은 먹을 것이 없어 독이 든 풀을 씹으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13살 어린 소녀는 5년동안 반란군 대장과 진압군 대장에 번갈아 성폭행당해 아버지가 다른 남매를 안고 있었다. 그 소녀보다 더 어린 소년들은 어른들이 준 마약을 아무것도 모른채 먹고 환각상태에서 사람들의 팔과 다리를 개미의 그것처럼 즐기며 잘랐다.
그 극심한 고통의 현장에서 김혜자씨가 ‘하나님, 왜 이러시는 거예요? 왜 이 모든 일을 보고도 침묵하세요’라고 절규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고통을 전해들은 어느 목사가 “이 모두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분의 뜻을 인간인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라며 위로하자 ‘목사님은 참 좋겠다. 그렇게 간단히 이해할 수 있으니까’라고 한숨 쉰 것도 그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준다.
김혜자씨, 아니 김혜자 권사의 신앙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릴만큼 충격적이었던 경험을 묶은 한 권의 책이 나왔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오래된미래 펴냄). 교육학자 프란시스코 페레의 유명한 교육사상을 전한 또 다른 책에서 이름을 빌어 온 책 제목은 김 권사가 정말 전하고픈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프리카는 물론 전세계의 고통받는 아이들과 함께한 12년의 기록을 오롯이 담은 이 책은 대학노트 6권 분량에 꾹꾹 눌러쓴 눈물의 기록이다.
첫 번째 경험이 너무 고통스럽고 불편해 차마 다시 가기 두려웠던 전쟁과 기아의 현장에 무수히 드나들면서 김 권사는 우리가 얼마나 비본질적인 것에 매달려있는 지를 발견했다. 최고의 보석, 다이아몬드가 아프리카에서 자행되는 모든 대학살의 주범임을 김 권사는 알게 된다. 광산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잔인한 전쟁이 반복되고 다이아몬드는 곧 대량 살상 무기로 바뀐다. 다이아몬드는 수많은 어린아이와 여자들의 피이기도 하다. 그 사실을 안 김 권사가 ‘피 묻은 보석’을 달고다닐 수 없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람의 온기가 뭔지 몰라 선뜻 품 안에 들어오길 망설이는 아이들을 안으면서도 울고, 비스킷 한봉지에 커다란 눈망울을 두리번거리던 아이를 보면서도 울고, 우는 것 밖에 할일이 없었다는 김 권사의 눈물은 수많은 생명을 살린 샘물이었다. 이미 20여년전부터 소리소문없이 국내 어린이 후원활동에 열심이었던 김 권사는 그 무거운 짐에 세계 50여 어린이 후원이란 또 다른 짐을 짊어지고 있다. 아무리 그가 유명한 배우라해도 혼자 감당하기엔 버거운 일이다.
“아이들이 죽은 것이 숫자로만 기록되는 게 가슴아프다”는 김 권사는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바로 가슴에서 손까지의 거리” 라고 말한다. 수많은 연민과 애정이 단 한번의 실천으로 이어지기 힘들다는 말이다.
인세 모두를 구호사업에 쓸 것이라는 김 권사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책 맨 뒤에 있다. 구호단체 연락처가 적힌 4쪽의 주소록엔 세상에서 가장 멀기도 하지만 가장 가까울 수도 있는 거리에서 우리를 달음박질시킬 것 같다.
'애정은 사진설명에도 있다'
“아이들은 꿈이다”
- 책을 펴낸 출판사 편집자는 김 권사의 열정에 감동했다. 책을 펴내는 김혜자 권사의 열심은 흡사 아이를 낳는 어머니와 같았다. 김 권사가 직접 챙긴 책 사진의 설명 몇 구절에서 그 열정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아이들에게도 뛰는 심장과 꿈이 있다. 이들이 전쟁사망자 통계의 숫자가 되어선 안된다.
-아프리카에서는 자기 몸의 반이나 되는 물통을 이고 30킬로미터도 넘는 길을 걸어오는 아이들을 흔히 만날 수 있다. 만일 내가 비라면 물이 없는 곳으로 가리라.
-구호의 손길에서 방치되었던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은 낯선 사람들을 경계의 눈초리로 보거나 도망가곤 한다. 차라리 배가 고프다고 울거나 보챘다면 나는 덜 가슴 아팠을 것이다.
-땅에 내려놓아도 발자국이 생기지 않을 것 같은 이 아이는 ‘영양실조’라는 팻말을 목에 걸어주어야 한다. 신은 왜 아프리카를 만들었을까. 이렇게 모른 체 할 것이라면.
-인류가 화장품 소비에 180억 달러, 향수 소비에 150억 달러, 애완용 동물 사육에 170억 달러를 쓰고 있을 때, 그 뒤편에서는 아이들이 전염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1만 달러면 이 도시의 아이들을 모두 예방 접종시킬 수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