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裵李崗文化(B.C.5500~B.C.4900)
1977년, 하남성 신정현 배리강에서 발견되어 화북 각지, 예중 일대·예북·예남으로 분포하고 있습니다. 배리강유적지는, 하남성 신정현 성서북 약 7.킬로미터의 장소로부터, 교혈·도교·묘장의 유적이 발견 되었습니다. 비교적 작은 유적에서 문화층도 얇고, 조를 재배해, 돼지를 사육하고 있었습니다. 토기류·농공도구도 앙소문화에 비해 종류도 적은 것 같습니다.
토기는, 소성온도가 낮은 홍도로, 채문이 없고, 꽤 무른 구이방법입니다. 농구는, 석제의 t조선마제의 돌도끼·석마반·석봉이 여성의 무덤으로 부터 출토했습니다. 거겸은, 앙소문화는 아니고, B.C.수백년경, 화중으로 청동제의 것이 사용되었습니다. 또, 매의 허벅지의 뼈를 잘라, 구멍을 일곱 개 입을 수 있었던 수직피리 16개가 출토했습니다.7~6 음계를 불 수 있습니다. 정성스럽게 가공된 세공의 골기도 발견되었습니다.
아구북강유적지는, 밀현성 남타수와 행수가 만나는 삼각지대로 부터, 방터· 교혈· 묘장의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주거가 중앙에 집중해, 남부에 교혈, 서부와 북부에 묘지가 있었습니다. 비교적 작은 6좌의 한지 혈거지(수혈식)의, 원형(직경 2.2~3.8m)·방형의 주거입니다.
교혈은 원형·타원형·불규칙형으로, 소성온도는 900~960 ℃입니다. 조를 주로 하는 농업 중심의 경제로, 마제의 석겸·석마반(마봉)이 출토됬습니다. 돼지,개를 사육해, 어업과 채집이 중심이었습니다.
무덤은 장방형의 천수혈로 남북으로 향하고 있었고. 원칙적으로 일인장(앙신 곧 지로, 머리는 남향)으로, 배장품은 1~14건으로, 주로 도기(쌍이호와 3족사발)입니다.
北辛文化(B.C.5300~B.C.4400)
북신유적은, 산동성 등현 동남 25킬로미터의 북쪽신의 대문구문화 유적의 하층으로부터, 1964년에 중국 사회과학원고고연 연구소 산동대·등현 박물관이 발견했습니다 .면적 5만 평방미터에 달합니다. 그리고 1978~79년에 2583 평방미터가 발굴되었습니다.
유물 포함층은 두께가 1.5 m이상 있어, 꽤 오랫동안, 이 장소에 정주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것을 알게합니다. 조를 경작하는 원시적인 농업, 돼지의 사육, 수렵, 열매의 채집의 생활이었습니다.
토기는, 모래 섞인 흙(협사)에서 그릇의 아래는 두껍고, 소성온도가 비교적 낮은 황갈도와 꼼꼼한 흙(진흙질)에서 태질도 세세하고, 소성온도가 비교적 높은 홍도가 주요한 종류입니다. 소량이면서 흑도·회도도 볼 수 있어 몸통에 일종의 선상의 손가락 밀기문·비묘문·손톱 모양문을 볼 수 있습니다. 솥이 가장 많아, 도끼·기대·사발·몸통이 깊고 바닥이 둥근 관형에서, 바닥이 둥글고뾰족한 그릇이 대부분입니다.
석기는 타제의 고석·괄삭기(스크레이퍼)와 마제의 돌,·돌도끼·석겸·석착·마구로, 가루로 만든 식령을 먹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골각기(중국 사회과학원고고연구소 산동대·산동성등현 박물관 「산동등현고유적 조사간보」 「고고」1980-1·「장강하유신석기시대 문화 약간 문제적탐석」 「문물」1978-4)도 출토했습니다.
잔의 기저부와 복부의 조각도 출토 됬습니다 .이 도편에는, 각각 동종의""형태의 조류의 발자국을 많이 닮은 각화 부호가 새겨졌습니다. 이 각화 부호에 대해서, 「진흙질재도기저(H307:52)·니질홍도복편(H1003:11)의 각각 한 개의 각화 부호를 발견, 이것은 도자기를 굽기 이전의 새김그림이다(중국 사회과학원고고연 연구소 산동대·산동성 등현 박물관 「산동현북신 유적지 발굴 보고」 「고고학보」1984-2)」라고 하고 있습니다.
만수영씨는(「진열간개」「등주 박물관」등주 박물관), 허신 「설문」순서에 「황제지사관창힐, 견조수호항지적, 지분리지가상별이야, 첫조수계」(황제의 사관 창힐이, 조수의 발자국을 보고 문자를 생각해 내, 그것까지 줄의 매듭에 의한 부호에 달려 있던 것을 고쳤다) 어떤의 것에 일치해, 반파유적지·강채유적지 보다 4~500 년이나 거슬러 올라간다고 해서, 한자의 기원이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996년 8월 박물관 방문시, 등주박물관 관장 력군여사는, 「이것은 도자기를 구운 이후의 각화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또, 그 후, 1982년에 발굴된 로관대문화의 백가촌 유적지로부터 이것과 닮은 각화문·채도화문이 출토됐습니다. 연대적으로는 북신문화보다 오래된것으로서, 이 도편을 가지고는 한자의 기원이라고는 이야기 할 수 없다고 생각 됩니다.
한자의 기원에 관한 제설에는, 이집트 기원설(중국 고대 문자와 이집트 문자의 유사를 논한다), 바비로니아 기원설(팔괘와 바빌로니아의 설형문자를 비교), 슈메르 문자와 근원이 같다는 설 등이 있습니다.
또 근년, 산동 용산문화에 속하는 「정공촌유적지 출토 각자도편」이나, 청련강문화에 속하는 「용?장 유적지 출토 각자도편」등이 출토했습니다.「정공촌 유적지 출토 각자도편」은, 풍시 씨( 「산동정공용산 시대 문자 해독」 「고고」1994-1)에 의하면, 고이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고문자는 갑골 문자를 기준에 고찰 됩니다만, 한자(=갑골 문자) 이외에, 여러 가지 부족의 문자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靑蓮崗文化 (B.C.5400~B.C.4400)
강소성회안의 청련강·남경시의 북음양영·묘산에서 발견되어 1956년 전국 고고회의에 청련강문화의 칭할것을 제출해서, 1958년 정식 명명 되었습니다. 회하 하류지역, 산동성안·남부, 강소성 북부 문수·사수·기수·목수와 화하의 교차 지구에 분포하고 있습니다. 대문구문화의 전 문화로부터 앙소문화 와 용산문화의 혼합한 문화까지도 발견 되었습니다. 토기의 다리의 형상·점토수혼합·채색 기술도, 앙소문화와 닮았지만 용산문화도 닮았습니다.
청련강유적지는, 강소성 회안현, 회하의 남쪽에서, 1951년, 남경박물관이 발견하여, 발굴되었습니다.
용농장유적지(B.C.5050~B.C.1950)은, 高郵시에서 동북쪽 약 8킬로미터, 주위는 물에 둘러싸여 해발 2.6 m, 면적 약 40,000 평방미터입니다. 주거 자취 4기, 회갱 35기, 묘장 345기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도기·석기·옥기·골격기 등 1200점이 출토 되었습니다. 또, 4000알갱이가 넘는 탄화된 벼가 발견되어 인공재배 된 메벼(japonica)인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평성8년 2월, 사가미하라 시립 박물관에서 개최된 「강남의 지보」에 전시된 각문도편(B.C.1950경)은, 은대 갑골문자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혹은 동서남북·4신에 관계된다고(듯이) 생각 합니다.
大汶口文化(B.C.4300~B.C.2400)
1959년, 寧陽과泰安 사이의 汶河泮·산동성 태산 주위지구로부터, 취락 유적과 분묘떼가 발견되었습니다.대문구문화는, 황하 유역·산동성과 강소성 북부 일대에 분포하고 있습니다.
1962년 중국과학원고고연연구소가 곡부서하후를 발굴해, 1964년, 대문구문화라고 명명했습니다.
조를 중심으로 한 농업 경제가 주로, 돼지·개를 사육해, 소·양을 보유하고, 수렵·어업도 실시 했습니다. 후기 단계에서는, 양식은 상당한 경제적 풍요함을 가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각 시기를 통해서 후두골을 인공적으로 변형시키거나, 성년이 위의 앞니를 발치하거나 하는 현상이나, 거북이 등껍질을 떼거나, 사망자의 손에 어금니를 쥐게 하는 습속도 볼 수 있어 대문구문화에 특유종족의 습속의 흔적( 「고고」1981-1)을 볼 수 있습니다.
초기(B.C.4300~B.C.3500)은, 모계 씨족공동체의 단계(왕인묘지·서하후·정자·야점 등 )입니다.토기는 고형기·3발기·높은대가 달린 두·홍도정(釜形鼎・鉢形鼎・盆形鼎・罐形鼎)·채도등에서, 모두 소성온도는 낮고(800℃~1000℃), 홍도가 압도적입니다.
그릇의 종류는 적고, 기형도 간단합니다만, 「八角星紋彩陶豆」에는 성형문양이 있어, 밤하늘을 바라보고, 오는 날의 기후를 점친 증명( 「 고 궁」)을 보이고 있습니다. 천문학을 배워, 계절의 변천을 천문 역법에 따라 나타내, 농경의 도표로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중기(B.C.3500~B.C.2800)는, 부계 씨족공동체로 과도기적·확립의 단계(대문구·능양하·전채등 )입니다.토기는 회도·흑도의 비율이 증가해, 태질이 치밀한 재백도도 출현했습니다.
기종도 증가해 전체가 둥글고 큰 배호·다리가 없는 그릇· 큰 투명한 조각을 한 대좌를 가지는 콩 등, 기형도 동물의 형태 등 변화가 풍부하고 복잡한 것으로 변화합니다.
연평균 기온이 지금보다 4~5 도 높고, 비도 많아 나무도 우거져 있던 것( 「동남 문화」1991-5) 같습니다. 중기부터 말기에 걸쳐 서근처의 하남의 앙소계의 문화의 본지에 진출( 「고고」1992-2)했습니다. 토기·조각의 발전 상황으로부터 안·말기에는 수공업과 농업은 분리되어, 전문화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말기(B.C.2800~B.C.2500)은, 부계 씨족공동체의 말기에 해당합니다. 토기는 홍도가 차지하는 비율이 감소해, 회도·흑도가 우세(삼리강등 )하게 됩니다. 녹로의 사용이나, 모양을 길게 만들기가 정교하고 器胎도 얇은 흑색 도기잔 등이 출현해, 그 조형·기술은, 후의 용산문화의 알껍질도기 출현의 기초가 됩니다.
도기두께가 얇고 태질이 딱딱하고 색깔이 선명하고 균형이 잡힌 조형의 백도는, 소성온도는 1200℃으로, 발견하기 힘든 소재인 고령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부장품에 암돼지의 머리가 있어, 돼지가 개인의 자산을 대표하는 것의 하나인것 부터, 빈부의 차이의 발생·사유재산 사회의 출현이 나타납니다.
토기 등에 볼 수 있는 도기상의 기호는 10종을 넘습니다. 검출된것 중 90기 넘는 대문구문화 말기의 무덤으로부터 출토품은, 泰山・沂山脈 以南의 려하·사하 유역의 동시기의 문화와 분명하게 달라, 용산문화가 대문구문화의 후계 문화인 것이 확인 되었습니다. 또, 층 위의 관계로부터 악비문화가 용산문화 보다 시대가 늦다는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북경 대학 고고 실습대 「산토우 아키라락추가장유적지 발굴간보」 「고고」1987-5) 대문구문화의 유적지에는 다음의 것이 있습니다.
대문구묘지(B.C.3500~B.C.2500)는 산동성 태안현 대문구진에서 발견되어 면적은 82만 평방미터에 미칩니다.1959년, 산동성 문물 관리소·제남시 박물관 양자범이 발굴해, 133 기의 묘장( 「대문구」1974 문물 출판사)을 발견했습니다. 유적지는 태산의 남쪽의 태안시와 녕양현의 경계로 흘러 﨩河(도하)의 양쪽 해안에 위치합니다. 토기는, 흑도·백도·회도·홍도·채도입니다.
수장품으로서 손뼈 부근으로부터 발견된 精牙觚形器, 허리부근으로 부터 발견된 주홍색으로 칠해진 구멍을 뚫린 귀갑이 발견 되었습니다 일종의 습속이라고 생각됩니다.
녕양현 堡頭에서는, 표면에 모필과 같은 공구로 그린 적색의 부호가 있는 도배호가 출토 되었습니다.
莒県陵陽河유적지는, 산동성 여현에서 발견되었습니다.1960년, 도기위에 기호가 새겨 있는 大形灰陶尊 10예( 「 고 궁문물 월간」1994·「대문구」)가 출토되어, 양안문화와 교착한 관계가 인정되었습니다.( 「사 림」1973-5)
산동성 문물전 「대황강문명의 흐름」1986 세이부 미술관·아사히 신문사에서 전재
諸城県前寨유적지는, 말기의 B.C.2500경의 대문구 문화로, 산동성 제성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1973년, 程子・都吉台(斗鶏台)・凉台・前寨・尚庄을 조사해, 대문구문화·용산문화·상·주의 유적지를 발견했습니다.돌도끼·석도·석초·정·격·그물돌·석환·석주등이 출토(제성현 문화관 임일신 「산동제성현전채유적지 조사」 「문물」1974-1)되었습니다.
그 중에 그림기호가 새겨 있는 회도단지(여현능양하유적지와 동종의 명문)이 있었습니다. 그림기호는, 가장 눈에 띄는 위치에 새겨져 있는 것 부터, 형상이 상대의 청동기의 명문에 가까워, 문자라고도 합니다. 또, 부호의 각선내에는 빨강색의 안료가 새겨져 있습니다.
제성현 문화관임일신「산동제성현전채유적지 조사」 「문물」1974-1보다 전재
莒県大朱家村유적지는,여현의 동쪽 약 7.5칼로미터에 위치해, 면적은 6만 평방미터입니다. 1979년, 농전개발 시에 발견되어 발굴의 결과, 묘장 36좌, 도기·석기 700여건이 출토(산동성 문물 고고연 연구소·?현 박물관 「?현대주홍이에무라대?입문화묘장」 「고고학보」1991-2) 되었습니다.
그림기호가 새겨 있는 흑도단지(채:01) 복상부·회도단지(M17:1) 복상부·갈도단지(M26:3)의 단지 3건이 출토 되었습니다.그림기호는 밑바닥에 가까운 위치에 새겨져 있습니다.
산동성 문물 고고연연구소여현박물관 「여현대주홍가촌대문구문화묘장」 「고고학보」1991-2보에 전재
山東龍山文化(黒陶文化)(B.C.2500~B.C.2000)
1928년, 山東省章丘龍山鎮의 성벼랑에서 발견되어 1930년~1931년에 발굴 되었습니다.그리고, 흑색 토기를 가진 문화, 흑도문화가 출토 되었습니다. 황하안·하류역에 분포해, 대문구문화와 분포 범위가 대략 일치하고 있습니다. 무덤등의 면에서도 대문구문화의 습속을 계승하고 있습니다.많이, 하나의 유적에서는 산동 용산문화가 대문구문화 위에 퇴적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일로부터, 이행기의 특징적인 유물의 발견으로 여겨져 대문구문화 말기부터 산동 용산 문화 초기에의 전승 관계가 명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문구문화·산동 용산문화는, 중국 동부 황하 하류 지구에 거주하고 있던 동부지역 무사의 부족 문화가 발전해 형성한, 서로 앞뒤로 하는 두 개의 문화인 것이 밝혀졌습니다.
토기의 소성온도는 높고, 태질은 딱딱한 것이 특징입니다. 녹로의 사용이 일반적으로 되어, 기 태의 두께가 균일하고, 기형도 균정을 잡혀지고 있습니다. 도·회도가 주로, 홍도·백도는 희소 합니다.흑도에는 알의 껍질과 같이 얇은 알 껍질흑도도 볼 수 있습니다.알 껍질흑도는 산동 용산 문화의 토기의 전형으로, 태질은 치밀하고, 표면은 검게 광택이 있어, 그릇벽의 두께는 0.5~1센티미터, 만들기는 정교하고, 조형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표면은, 무문으로 닦아지고 광택이 있는 것과 돌대문·투각·비묘문·붙이기문등의 문양이나, 작은 귀, 리벳형의 장식을 붙이고 있는 것,2 종류가 있습니다. 구름뇌문·중국고대 청동기에 표현된 무늬에 유사한 문양도 출현해, 은·주의 청동 제기로 보여지는 문양의 선구적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기형은 3 개의 다리나 高臺가 붙여진 것, 바닥의 평평한 것으로, 날카로운 바닥이나 환저의 그릇은 볼 수 없습니다. 뚜껑·손잡이·대소의 귀· 크고작은 주입으로 입등을 붙인 것 등, 조형적으로도 변화가 풍부해, 또 실용적으로도 제작 되었습니다.
석기는 마제로, 모든 유적에서 반달형·장방형의 쌍공의 석포정이 발견되었습니다. 곡물을 수확하는데 이용한 신형의 도구입니다.되었 습니다. 유엽형·능형으로, 중앙에는 등이 툭 내밀어져, 화살대에 들어갈 수 있는 부분은 몸과 분명하게 구별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자른부위는 사살하기 위해서 예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옥은, 초기는 수혈식 주거로, 통제를 취하는 주체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거기에 계속 되는 시대는 평지상의 가옥입니다. 벽으로 하는 부분에 도랑을 파, 거기에 기둥을 세워 도랑에 흙을 되돌려, 쌓아 올려 굳힙니다. 마루에 석회를 1~2밀리 덧칠 하고 있습니다. 또, 횡혈식 주거도 발견되었습니다.
경제 생산이나 사회 발전 후로, 대문구문화보다 높은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동물의 견갑골로 점을 하는 습속도 출현했습니다. 원시 종교의 새로운 발전입니다.
동기의 놋쇠(동과 아연의 합금)의 송곳이 발견되어, 광석의 풍부한 곳 즉 감숙성 남부, 청해성 동부의 문화( 약기원 전 2300년~전 1900년)이 양·종류 모두 풍부( 「북방 문물」1989-2·「고고여문물」1990-3·「고고여문물」1991-2·「고고학보」1981-3)입니다.그러나, 이 문명이 夏文化다 라고 하는 것은 잘못(범문란 「중국 통사간편」수정본제1편 인민 출판사 1953)입니다.
산동 용산문화는 2개의 유형으로 분류됩니다.
城子崖類型은, 산동성 중부의 구릉지대 및 서부 평원 지대에 분포하고 있습니다 .회도의 비율이 비교적으로 크고, 흑도는 상대적으로 작습니다. 극히 소지가 적지만 알 껍질도도 별로 볼 수 없습니다. 즐문·방격문등의 문양이나, 鬲・斝 등의 그릇형태도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로부터, 산동 용산문화와 그 서부의 다른 원시문화의 두 개가, 서로 서로 영향을 주어 출현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両城鎮류형은, 산동성 동부와 연해지구에 분포하고 있습니다.
城子崖遺跡地는, 1928년, 山東省章丘県(旧歴城県)龍山鎮의 성자애에서 呉金鼎이 발견되었습니다.1930년~1931년,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가 발굴했습니다. 판축기법으로 쌓아 올려진 성벽이 발견 되었습니다. 토기는 흑도·회도가 주로, 소성온도는 1000℃전후입니다.성자애 벼랑 유적지 하층으로부터 도문이 출토했습니다.또, 소·사슴의 견갑골의 복골도 출토되었습니다.
兩城津遺積地는, 山東省日照県 동북, 영성진의 서북에서 1934년 발견되어 1936년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윤들이 발굴했습니다.그리고 1954년 이래, 산동성 문물관리소·산동대학등이 조사했습니다. 도기는, 진흙질과 협사의 磨光黑陶입니다.
日照県東海峪遺址는, 산동성 일조현의 동남부, 東海峪村西北에서 발견되었습니다.1973년에 2회로 1975년에 산동대학 역사계 고고전업이 발굴 면적 800평방미터를 발굴(산동박물관·일조현 문화관동해욕발굴소조 「일구75년 토카이욕유적지적 발굴」 「고고」1976-6)했습니다. 원시적인 판 축조의, 장방형의 토대를 가지는 건축이 출토되었습니다. 건축기술의 진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饕餮(도철)을 새긴 연옥의 도끼( 「중국문물 정화」1992·「고고」1972-4)이 발견되었습니다.
瑤県三里河遺址(B.C.2405?B.C.2030)에서는, 1975년, 인공적으로 주조한 소형의 동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송곳과 같은 공구로, 새로운 야금기술이 출현한 것을 나타냅니다.
泗水尹家城遺址는, 제남의 남 100킬로미터 泗水縣尹家城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작은 강사이에 남북 약 130 m, 동서 약 90 m의 언덕으로 부터 발견 되었습니다. 초기는 수혈식 주거로, 입구를 남서구석에 남향으로 만들어, 각각의 가옥이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지어져 있습니다.통제를 취하는 주체의 존재( 「사수윤가성」)을 나타냅니다. 거기에서 계속되는 시대는 평지상의 가옥입니다. 벽 부분에 도랑을 파, 거기에 기둥을 세워 도랑에 흙을 되돌려, 쌓아 올려 굳히고 있습니다. 마루에 석회를 1~2밀리 두께로 덧 칠 하고 있습니다.
鄒平県丁公遺址는, 산동성 북부, 성자애유적지의 동북동 50 킬로미터의 추 추평현정공에서 발견되었습니다.1991~992년에 산동대학 역사계고고실습대가 발굴 면적 630평방미터를 발굴했습니다. 그리고, 방자리 47좌, 회갱 697 좌, 도랑 9 조, 도교 1 좌, 묘장 42좌, 석·골·방·도·동기 등 2000여건이 출토되었습니다.
또, 횡으로7센티뿐인 각문도편(H1235:2)이 발견되어, 문자( 「출판 다이제스트」 1993-9-30)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발의 평평한 바닥의 일부에, 날카로운 것으로 새기고( 「고고」1993-4) 있습니다. 馮時씨는 彝族의 문자(古彛文) ( 「산토우정공용산 시대 문자 해독」 「고고」 1994-1)라고 해독하고 있습니다. 고이족의 문자라고 하는 것은, 전술의, 대문구문화·,산동 용산문화는, 중국 동부 황하 하류 지구에 거주하고 있던 동부지역 무사의 부족의 문화가 발전해 형성한, 서로 전후로 하는 두 개의 문화인 것부터, 충분히 가능성이 높고, 현재 異論은 없습니다
남북 약 350 m, 동서 약 310 m의 성벽( 「중국 문물보」1991-1-12·「중원 문물」1993-1)이 발견되어, 용산문화의 중기에 쌓아 올려져 후기에서 수리되고 있습니다. 성내에 주거자취는 있습니다만, 궁전자취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襄汾陶寺遺址는 산서성 남부어서 발견 되었습니다.목제의 기물, 연옥기가 출토되었습니다. 양 저구 문화의 영향을 볼 수 있습니다만, 饕餮은 새겨지지 않았습니다.L자형의 대형 석기가 출토했습니다만, 농기구가 아닙니다. 큰북, 용?의 무늬가 있는 토기의 큰 접시, 앙소문화의 토기의 鈴과 동형의 동의 방울이 출토 되었습니다.
辺綫王遺址는, 山東省 寿光県 辺綫王에서 1984년, 철도건축중에 발견 되었습니다.산동 용산문화의 성벽이 발견되었습니다.
岳石文化(B.C.1900~B.C.1600)
1950년대말, 발견되어 1980년대 초, 엄문명 씨에 의해서 명명이 제기(엄문명 「용산 문화여용산 시대」 「문물」1981-6)되었습니다. 청동의 창칼·쌍 날개족 등, 완전하게 청동기문화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번역 및 정리 -도불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