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현은 늘 공손하고 예의바른 학생이었다
증 언 자 : 고광윤(남)
생년월일 : 1928.(당시 나이 52세)
직 업 : 전남대수위(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8. 12
개 요
5월 17일 밤 공수부대원의 전남대 도서관 수색상황과 정문 앞의 상황 등 목격.
어렵게 살아온 젊은 날
나는 일제하에서 당시 전남 광산군 서방면 용봉리(현재 전남대학교 본부 앞 당산나무 자리)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1975년 12월이후 1976년말까지 동네가 철거되어 학교부지로 되었다. 철거 당시 보상금 220만 원을 받아서 현재의 거주지(광주시 신안동)에 집을 짓고 1975년부터 살고 있다.
학교는 일제 때 국민학교 과정으로 오치학원을 졸업했다. 당시 국민학교 과정은 산수와 조선어를 배웠는데 조선어는 3학년까지만 배우고 4학년부터는 일본말을 배웠다. 졸업 후 15세가 되어 형님 대신 강제징용으로 함경북도 청진에 있는 제철소(삼영제철소)에 가서 1년을 살았다. 징용된 사람들 중 가장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작업도 못 하고 심부름이나 하면서 지냈다. 그때 징용되어서 왔던 어른들은 제철소 건설공사의 주로 잡역부로 일하였다.
그 후 군대갈 나이가 되어 일본으로 징용될 것 같아 형님은 만주로 먼저 가셔서 기반을 잡고 계시다가 농사를 짓고 있던 가족 모두를 만주로 모셔가 살았다.
만주에서 8개월 정도 살고 나니까 해방이 되어 다시 광주로 왔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당시 광산군 서방면 용봉리로서 전체가 농경지였는데, 상봉, 중봉, 변봉, 반룡, 용주 등 5개 부락을 용봉리라고 하였다. 그때 현재 서방시장 있는 곳이 면소재지였고 그곳에 면사무소와 주재소가 있었다.
6·25 이후에는 주조장 배달부를 10년 이상 했다. 그러다가 이웃에 사는 전남대학교 행정직에 근무하는 박학주 씨의 소개로 전남대학교 박물관 사환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그때가 1965년이었는데 처음에는 임시직이었다. 1970년도에 정식 발령을 받아 도서관에서 근무하다가 1983년말에 정년퇴임했다.
젊었을 때는 연탄장사, 막걸리장사, 국수장사 등을 전전하면서 산전수전 다 겪고 몹시 고생했다.
한밤중에 들이닥친 공수대
1980년 5월 17일 밤에 나는 이문거 선생(현재 중앙도서관 근무)과 함께 도서관에서 숙직을 하고 있었다. 17일 밤 10시가 되어서 학생들을 열람실에서 내보낸 다음 현관문을 모두 잠그고 잠이 얼핏 들었는데 발걸음 소리가 났다. 곧이어 숙직실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 '누구여' 하고 나가니까 20여 명 정도의 무장 군인들이 서 있었다. 군인 한 명이 다가와서 '숙직자냐' 면서 '학생들이 도서관 내에 없느냐'고 물었다.
문을 모두 연 다음 전부 수색을 하더니 공대 본관을 물어 그쪽으로 갔다. 새벽 2시경에 군인들이 들어왔었는데 그 이후로는 웬지 무서운 생각에 잠을 못 자고 현관에서 밖을 내다보며 서성거렸다. 한편으로는 무슨 도난사건이나 일어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태를 제대로 짐작하지 못하고 있던 때라 그 정도밖에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학생회관에서 군인들에게 붙잡힌 학생들이 본부 쪽으로 열을 지어서 끌려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날이 밝은 후 동료 직원들에게 들으니까, 저녁에 잡힌 학생들은 전부 본부 3층 회의실에 가두어두었다고 한다. 집에 가서 아침 식사를 하고 출근하면서 보니까 정문 수위실 위에 기관총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었다. 교문에는 휴교령을 알리는 방이 붙어 있었고, 학생들 50-60명이 책가방을 들고 모여 있었다. 몇몇 학생들은 그냥 돌아가기도 하였지만 더 많은 학생들이 자꾸 모여들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학교 안으로 들어가니 서부경찰서 형사들이 본부 앞에 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당시는 학원사찰이 매우 심했던 관계로 대개 얼굴이 낯익은 형사들이었다. 그들은 주동자급만 연행하기 위해 인수인계차 왔다고 하였다. 계엄군은 문학부(당시 문리대 합동강의실)와 이학부 건물, 정문, 후문에 주둔해 있었다. 종합운동장에 막사를 치고 취사장은 이학부(현재 가정대 건물) 뒤에 설치해 놓고 있었다.
그날 점심을 먹으러 가면서 보니 정문 앞에 시민, 학생들이 각목을 들고 7, 8명의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어쩐지 평소의 학생들 데모와는 달리 상황이 이상하고 무서운 생각이 들어 근무처로 그냥 돌아왔다. 그 뒤의 상황은 지켜보지 않고 근무처로 돌아와버렸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
정문에 참혹한 시체가
19일(날짜가 불확실함) 시내 국민은행에서 돈을 인출하기 위해 나갔다. 시내는 어수선한 분위기였고, 깨진 돌조각이 여기저기 널려져 있는 금남로에서 계엄군들이 행인의 통행을 막고 있었다. 나는 학교에서 근무하는 직원인데 급히 은행에 갈 일이 있다고 하니까 보내주었다.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여 학교로 곧장 돌아왔다. 전남대 사대 부속고등학교 쪽과 정문 앞에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운집해 있었다. 수위실 쪽에서 군인들이 마이크 방송으로 시민들은 자중하고 빨리 돌아가 라고 했다. '000 대령'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나도 광주출신인데 우리는 명령을 받고 온 사람들이다. 시민들은 맨주먹이고 우리는 무기를 가지고 있다. 서로 불상사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라는 내용의 말을 했다. 시위군중들로부터는 '계엄을 해제하라' 등의 구호가 들렸다.
21일쯤, 점심시간에 집에서 점심을 먹고 막 나오려는데 정문 앞 주택지대에서 사람들이 담을 넘거나 지붕으로 해서 도망치는 등 말 아니었다. 그때가 오후 2시 경쯤 되었을 것이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집에 앉아 있었다. 조금 지나 조용해 진 것 같아서 나가보니까 전남대 정문에서 사레지오고등학교 담까지 길은 물론이고 골목골목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길바닥에는 보도블럭 깨진 것이 널려 있어서 자전거를 겨우 끌고 갈 형편이었다. 정문 앞에는 두 명의 군인이 경계를 서고 있었고 수위실 안에도 몇 명의 군인이 있었다. 수위실 앞까지 가니까 몇 사람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기절을 했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지만 사지가 축 늘어져 있었다. 곤봉을 손에 든 군인 한 명이 발로 툭툭 차면서 생사를 확인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고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진 시체였다.
6·25 때도 보지 못한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에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전남대 사대부고 쪽의 왼쪽 잔디밭에 4, 5명의 군인들이 20명 정도의 시민들을 꿇어앉혀 놓고 지키고 있었다.
저녁에 밥을 먹으러 나오면서 보니 시체도 없었고 군인들도 없었다. 나중에 아내에게 들으니, 아내도 그때 밖에 나와 있던 도중 트럭에 발목이 덜렁거리는 시체를 싣고 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또 우리 동네에 사는 안두환 씨가 이유없이 공수부대에게 끌려갔다는 말을 들었다. 안두환 씨는 당시 7남매를 둔 가장으로 어렵게 살고 있었다. 그는 구경하러 밖에 나왔다가 연행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교도소 근방에서 암매장된 것을 발견하여 현재는 망월동 5·18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언젠가 하루는 아침에 정문 주변의 주택가에 대대적인 가택 수색이 벌어졌다. 군인 2명이 한 조가 되어 총을 들이대고 집집마다 수색하고 다녔다. 그때 우리 집에도 대학생들이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군인들이 왔을 때는 전부 사레지오고등학교 다닌다고 말했다.
그 후로는 특별한 일이 없고 가끔 무장을 한 시위대들이 차를 타고 다니면서 정문 앞까지 왔다갔다하는 것을 가끔 보았을 뿐이다.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언젠가는 계엄군이 학교에 있을 때 어느 쪽에서 나는 총소리인지는 몰라도 시위대 차량이 왔다가 갈 때 가끔 총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진상은 꼭 밝혀져야
5·18을 생각해 보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불쌍하기만 하다. 우리 동네 안두환 씨처럼 데모를 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잡혀가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생각 같아서는 그 때문에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도와주고도 싶지만 물질적으로 그런 형편도 못 되기 때문에 마음뿐이다. 나는 어머님이 망월동 공원묘지에 계시기 때문에 그곳에 갈 때마다 5·18 묘역에도 꼭 들러서 전부 둘러보고 오곤 한다. 특히 박관현씨 묘역에는 꼭 들렀다 온다. 5·18 당시 박관현하고는 자주 접촉했었고 대화도 했었다. 박관현은 늘 우리들에게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인사도 잘했으며 고생하신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5·18에 대한 진상이 꼭 밝혀져서 부상자들이나 사망자에 대한 보상이 하루 속히 되었으면 좋겠다.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서 그때 사실들을 알고 있는 시민들이 제보를 자발적으로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그것이 잘 안 되고 있는 것 같다.
5·18 이후에도 계속 학교 도서관에서 근무하다가 1983년말에 정년퇴임했다. 지금은 성장한 자녀들을 출가시키고 빈방을 세주면서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편안하게 살고 있다. 날이 따뜻해지면 심심하고 적적하니까 손놀림으로 포장마차에서 오징어 다리나 팔려고 한다.
(조사.정리 박형호)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