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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참사랑연제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부산 갈매기
釜山地域 近代 建築物 現況
( 현존 건축물, 사라진 건축물)
Ⅰ현존 건축물 현황
1) 구 경남도청사
경상남도청(慶尙南道廳, 등록문화재 제41호, 2002. 9. 13 지정)은 1924년 12월 8일 총독부령 제76호로 부산이전이 발표되었다. 부산부에서는 12월 8일 府協議會를 개최하고 釜山府 富民町 2丁目(현 부민동 2가) 자혜병원 신축 건물을 임시청사로 정했다. 당시 경상남도지사는 와다(和田 純, 1923. 2. 24~1928. 1. 31 재임)로, 1923년부터 짓기 시작한 이 건물은 일제가 진주부민들의 반발을 의식한 나머지 병원 건물을 짓는다고 대외적으로 발표하고, 실제로는 도청사로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도청사는 釜山府 中島町 2丁目(현 부용동 2가) 2,575평 5합, 富民町 2丁目(현 부민동 2가) 2,312평 8합 등 8,735.7평 7합의 택지에 벽돌기와 2층 건물이었다. 건물은 3개동(309평, 300평 7합 5약, 71평 2합 5약)이었다.
도청사의 준공일은 1925년 4월이며 정확한 날자는 알 수 없다. 공식적인 도청이전은 1925년 4월 1일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하였고, 이전식은 4월 17일 가졌으며, 실제 업무개시는 4월 25일이다. 일제가 내세운 도청이전의 이유는 부산은 유일한 항만 관문 뿐 아니라 교통의 중심지이며, 산업․교육․문화 등의 시설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었다고 하나 실제는 통치상 교통이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즉 대륙침략의 전초지인 셈이다.
도청은 2층 붉은 벽돌 건물로 서구식 르네상스 양식의 변형된 양식으로, 1983년 도청이 창원으로 옮기기 직전에는 서구 부용동 2가 16번지 일대 4필지와 부민동 1가외 12필지의 대지 9,619평에 도 본청 등의 건물에 있었다.
8.15광복이후 미군정정기를 거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년 10개월만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북한군의 남하로 8월 18일 정부가 부산으로 이전하였고, 9월 28일 서울수복으로 10월 27일 서울로 환도할 때까지 1차로 임시수도로서 경남도청의 본관은 정부청사로, 상무관은 국회의사당으로, 뒤편 경찰국은 군․경합동작전사령부로 쓰였다.
경상남도지사의 관사는 대통령관사로 이용되었다. 1951년 11월 28일 중공군 개입으로 1월 4일 2차로 1.4 후퇴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환도(8월 15일) 때까지 1차 때와 같이 사용되었다.
1963년 1월 1일부로 부산시이 정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경상남도는 부산시에 더부살이 역사가 시작되었다. 1983년 7월 창원의 경남도청사 이전하기까지 58년 3개월간을 사용하였던 건물이며,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주의의 수탈정책의 본거지였던 상징적 건물로서 일제잔재 중 하나이며 대표적인 건물이다. 이 건물은 경남도청이 창원으로 이전과 동시에 부산지방검찰청과 부산지방법원이 인수하여 1984년부터 청사로 사용되다가, 2001년 10월에는 법원과 검찰청사가 연제구 거제동으로 이전하였다. 2002년 동아대학교에서 인수하여 사회과학대학 등이 옮겨와 부민캠프스로 사용되고 있다. 문화재청에서는 이 건물의 역사성과 건물의 양식을 감안하여 2002년 9월 13일 등록문화재 제41호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2) 임시수도기념관
임시수도기념관(臨時首都記念館)은 서구 부민동 2가 22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진주에 있던 경상남도 도청이 부산부 부민동으로 옮겨온 것은 1925년 4월 17일이었다. 그에 따라 부민동 3가 221번지에 경상남도지사 관사가 1926년 8월에 준공되었다.
건물은 목조 2층 일식기와집 양식이다. 그 이후 줄곧 도지사 관사로 쓰이다가,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고 수도가 서울에서 대전․대구로 옮겨지다가 8월 18일에 부산으로 수도가 옮겨져 경상남도 도청이 중앙정부 청사의 중심부가 되고, 도지사 관사가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게 되었다.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고, 도지사 관사가 대통령이 집무하는 관저가 된 것은 1950년 8월 18일 이후였다. 그러나 그해 9월 28일 서울 수복과 함께 임시정부는 10월 27일 서울로 환도하였다. 하지만 중공군 개입으로 1951년 1월 4일의 1.4후퇴로 다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었고, 1953년 7월 27일의 휴전협정 성립되면서 8월 15일 서울로 재차 환도할 때까지 부산은 중앙정부의 임시수도 역할을 맡고 있었다.
1963년 부산시가 정부직할시로 승격되면서 경상남도의 관할에서 벗어나고, 경상남도 도청은 1983년 7월 창원에 새청사를 신축하여 옮겨갔다. 옛 경상남도청은 부산지방검찰청과 부산지방법원청사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도지사 관사는 1984년 6월 25일 임시수도 당시의 역사적인 사실과 유물전시를 위하여 임시수도기념관으로 지정되었다. 기념관에는 임시수도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의 유품을 중심으로 하는 소장품이 여섯개 방에 전시되었다.
임시수도기념관은 6.25전쟁 44주년을 맞아 1997년 6월 24일에는 한국전쟁의 내용과 임시수도로서의 부산의 의미를 되새기는 뜻으로 새롭게 단장하여 기념관으로서 민족상잔의 역사를 이해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새천년을 맞아 시에서는 건물의 개․보수와 한국전쟁 당시의 생화유물 등을 수집, 구입을 토해 새롭게 단장하여 재개관 하였다.
부산시에서는 2000년 건물 내외부를 전면 개․보수를 통하여 전시공간의 재단장을 위한 시설공사를 마무리 하여 2002년 4월 다시 문을 열어 많은 시민들이 찾고 있다. 이에 단체 관람객들의 관람 편의를 위해 인근 사유지를 매입하여 주차장을 조성하였다. 2002년 5월 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3호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3) 부산지방기상청
우리나라는 기원전 1세기경부터 안개, 일식 등이 관측된 기록과 삼국시대 들어와서는 천둥번개와 홍수로 기상재해가 발생하였다는 상세한 기상기록도 전하여 오고있다. 조선 세종 23년(1441)에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를 발명하여 8도감영에 설치함으로써 과학적인 전국의 강우량 측정망을 구성 강우량을 측정하여 보고하게 되었다.
1904년 3월 7일에는 기상업무 전담기구인 측우소가 부산․인천․목포에 설치되어 체계적인 기상업무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905년 12월 31일 부산부 榮町(현 영주2동)에 청사를 신축하여, 1906년 9월 1일 기계식 지진계를 설치 지진측정이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1월 복병산에 현 청사를 준공하였고, 건물은 4층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서구양식의 변형된 르네상스 양식이며, 본 건물의 양식은 선박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꼭대기 층과 지붕의 모습은 선장실을 상징하는 형태를 갖추고 있다.
1939년 7월 조선총독부 기상대 부산측우소로 개칭되었다. 1945년 8.15광복 이후 10월 국립 중앙기상대 부산측우소로 개칭하였다가, 1992년 부산지방지방기상청으로 승격하여 부산․경남지역과 남해안 일부의 기상관측을 담당하고 있다. 부산광역시 지방기념물 제51호(2001. 10. 25 지정)로 보존되고 있다.
4) 부산근대역사관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이라 칭함) 부산지점 건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동척은 1910년(명치 43년)에 마산출장소를 설치하여, 1920년(대정 9)에 마산지점으로 승격되었다.
1921년(대정 10) 부산 榮町[현 대창동(범정동), 영주2동(행정동)]으로 이전하여 1929년(소화 4) 지금의 대청동에 3층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건축은 근대합리주의 양식이며, 외벽 기초에는 대리석을 벽면에 두르고 바닥에도 대리석을 깔아 웅장함이 느껴진다.
건물의 1층과 2층 사이에는 문양을 넣었다. 실내는 전형적인 은행 건물형태로 대형 기둥을 세우고 문양을 넣어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하였고, 창틀은 서구 건축의 대표적인 르네상스 양식 형태로, 건물 옥상을 철근콘크리트로 마무리하였다. 동척 부산지점은 일제가 우리나라 경제를 독점․착취하기 위하여 설립한 국책회사로 토지수탈의 선봉 역할을 맡아 전국 각지의 토지를 강제로 매수․착취하였다.
이 건물은 당시 토지조사를 한다는 미명아래 부산․경남지역의 토지 및 경제 침탈을 자행하였던 식민지 정책의 대표기관의 건물로 사용되어왔다. 8.15광복 이후 이 건물은 미군이 진주하여 주둔지 건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48년 9월 11일 체결된 “한미간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협정”에 따라 미문화원으로 사용하다가 1950~53년까지 한국전쟁기에는 미국대사관으로 사용, 1982년 3월 반미학생운동으로 방화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던 우리나라 근대사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역사의 현장이다.
1984년 1월 부산미문화원 2층에 영사관을 개설하여 부산, 대구, 경남․북, 제주도의 영사업무를 담당하여 오다가 1996년 미대사관으로 통합 운영게 되면서 폐쇄되었다. 미문화원으로 50년 3개월 동안 무상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99년 4월 30일 우리정부에 반환하였다. 6월 10일 재정경제부와 협의를 통하여 시유지와 교환으로 부산시에 이관되었다.
부산시에서는 건물의 역사성과 주변환경을 고려 “부산근대역사관”을 2003년 7월 3일 개관하여, 부산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현장학습의 역사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부산광역시에서는 기념물 제49호(2001. 5. 16 지정)로 보존되고 있다.
5) 구 부산진 일신여학교
부산진에 있었던 사립 일신여학교(釜山鎭 私立 日新女學校)는 호주장로교 선교회 여자전도부가 1895년 10월 15일 오늘날의 동구 촤천동 소재 한 칸의 초가에서 수학년한 3년의 소학교 과정의 설치하였다. 그 학교가 사립 부산진 일신여학교이다. 초대교장으로는 선교사인 Menzies(1895~1902)였다. 부산진에 있는 사립 일신여학교 교사는 1905년 4월 15일 준공하여 이전하였다.
건물의 구조는 2층 벽돌 서구식 서민풍의 건축양식으로 1층 40.35평, 2층 38.25평 총 76.8평이다. 정면 4각형에 가까운 평면은 아무 새로운 것이 없으나, 전면에 벽돌의 장주(長柱)를 2층 처마까지 계속하여 세우고 2층에는 목조의 발코니를 내고 거기에 외부에서 바로 올라가는 계단을 배치하고 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형태였다. 1층 벽체는 4군데의 창문 둘레의 벽돌 외에는 전부 석재(石材)로 되어있고, 2층은 벽돌로 쌓았다.
1905년 준공된 부산 상품진열관과 대비할 때 같은 벽돌 건축물이기는 하나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다 할 것이다. 하나는 경제침략을 위한 중대한 사업으로 추진된 우수한 기술자까지 고용한 것이고, 또 하나는 선교를 위한 교육시설이란 점에 있어서 두 건물이 나타내는 점은 시사하는바 크다 할 것이다.
1909년 8월 9일 학부대신의 인가를 얻어 고등과(수업연한 3년)를 병설하였다. 그 당시로서는 여성이 높은 교육의 기회를 얻는다는 것은 어려운 실정이었다. 1913년 3월 고등과 제1회 졸업생(4명)을 배출하였다.
1915년 8월 7일에는 학칙개정에 의해 수업연한 3개년이었던 소학교를 4개년으로 하고 고등과를 4개년으로 하였다. 이 고등과는 1925년 6월 10일, 동래구 복천동 500번지에 신축교사(현 우성아파트)를 지어 이전하여 동래일신여학교라 불리게 되었으니, 좌천동의 부산진 일신여학교 고등과는 오늘의 동래여자고등하교 전신이 된다. 1987년 1월 19일 현재의 부곡동 교사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舊) 부산진 일신여학교 건물은 현재 부산·경남교역자연수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4호(2003. 5. 2 지정)로 보존되고 있다.
6) 영도대교
부산시민들에게 영도다리로 더 잘 알려진 영도대교(개통 당시에는 부산대교)는 부산 본토와 유인도인 영도 사이를 도선을 이용하여 왕래하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일제시대인 1932년 3월에 착공하여, 1934년 11월에 개통된 부산 최초의 연육교이다.
영도대교의 본래이름은 부산대교로 다리의 길이는 214.63m, 폭은 18m, 교량의 면적은 3,948평방미터, 도개면적은 1,044평방미터이며, 또한 도개속도는 저속일 때 4분, 고속일 때 1분 30초, 도개동력으로는 22마력이다. 그중 부산 내륙측은 31.30㎝를 도개교로 하여 1,000톤급 기선의 운항을 가능하도록 건설되었으며, 그 밖의 부분은 캔틸레버식 강판항교로 하였다. 그리고 항교 아래로 만조시에도 50톤급 이하의 기선이 교량 밑을 자유로이 운항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의 화폐로 총공사비 70만 8천원이 투입되었다.
이 대교 가설공사는 당시 매우 어려운 토목공사로서 현재 영선초등학교와 해동고등학교 자리의 산을 깎아 영도대교 호안 매립공사를 하면서 산이 무너져 많은 한국인과 중국인 노무자들이 비명에 목숨을 잃었는가 하면 다리 자체공사 때에도 희생자가 속출하여 밤이 되면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퍼졌을 정도였다.
1934년 11월에 개통된 이 다리는 하루에 일곱 번씩 도개 부분이 하늘로 치솟는 신기한 다리로서 개통식날 신기한 이 도개식 다리를 보기 위하여 부산을 비록 인근 김해․밀양 등지에서 6만 인파가 운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부산 인구가 16만명이고, 영도의 인구가 5만여명인 점을 생각하면 이날 모인 인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과연 이 대교가 들어올려질 수 있느냐로 신문에까지 여론화되었던 움직이는「마법의 다리」는 개통당시 하루 7번씩 하늘로 치솟으면서 영도발전을 재촉했으나, 1966년 도개폐쇄 직전에는 하루 2번(오전, 오후) 들고 내렸다고 한다. 우리 민족에게 또 다른 애환을 심어주었던 다리로 기억되기도 한다.
일제시대에는 일제의 가혹한 수탈에 시달렸던 한인들이 이 다리에서 투신자살을 하기도 했고, 8.15광복과 6.25전쟁 때는 생활고에 지친 파난민들이 한 많은 인생을 마치기도 했다. 특히 이북에서 피난온 당시 피난민들은 이 다리 난간 위에 비친 초생달을 보며 하염없는 망향을 달랬고, 이때「굳세어라 금순아」라는 대중가요가 유행, 임시수도 부산시민의 심금을 울린바 있다.
이곳에서 자살자가 속출하자「잠깐만」이라는 팻말이 곳곳에 붙어 있었고 경찰관이 배치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의 학정과 한국전쟁의 비극을 말없이 지켜본 영도대교는 전설 같은 옛 이야기만 남기고 지난 1966년 8월 31일을 마지막으로 도개를 들고, 9월 1일부터는 하늘로 치솟는 도개식의 다리가 폭주하는 차량으로 그 기능이 멈추자 옛 모습을 잃어 버렸다.
1976년 개항 100주년을 맞아 착공한 부산대교가 1980년 1월 30일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자 이 다리는 부산본토와 영도를 잇는 유일한 연육교로서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명칭도 영도대교로 바뀌어 버렸다. 영도대교는 보존이냐 철거냐의 기로에 서있다. 현재는 인근의 롯데월드 신축과 더불어 영도다리의 보존이냐 철거냐를 갈등은 있었으나, 시민들의 여론 등을 감안 부산광역시에서는 보존키로 하였다. 부산광역시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56호(2006. 11. 25)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앞으로 영도대교는 도개부분을 복원하여 옛 모습을 되찾아 관광 명소로 거듭날 것이다.
7) 성지곡수원지
어린이대공원이 자리 잡고 있는 동천의 상류계곡으로 상류에는 성지곡수원지가 있다. 부산의 이름난 경승지로 전설에 의하면, 신라시대 유명한 풍수지리 지관인 성지라는 사람이 전국의 명산을 찾던 중 경상도에서 가장 빼어난 골짜기를 이곳에서 찾고는 성지곡(聖知谷)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한다.
우리나라에 있어 상수도의 도입은 부산에서 비롯되었다. 부산은 원래 음료수가 부족했고 강우량이 적은 겨울철이면 항상 물이 부족하였다. 개항이후 일본전관거류지내에서는 왜관 내에 과거부터 내려오던 2갱의 정호수(井戶水)를 사용해 오다가 1880년 처음으로 보수천 상류로부터 대흠통[竹管]에 의한 도수설비를 하여 물을 받아쓰기 시작했고, 1886년에는 이를 나무통[木管]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시설만으로는 거류민의 급증과 다수의 일본어선들에 대한 급수수요를 감당할 수 없는데다가 청일전쟁의 반발로 다수의 일본군인들까지 상륙하게 되자 1894년 6월부터 보수천에 집수언제(集水堰堤)를 축조하여 자연여과장치로 하는 한편 일본거류지 내의 대청동배수지를 만들어 내경(內徑) 약 15㎝(6인치)의 토관(土管)으로 이를 송수하는 공사를 시작하여 1895년 1월에 준공하였다. 이것이 부산상수도의 효시이며, 서울 상수도보다 약 13년이 앞선다.
성지곡 수원지는 1907년 일본인들에 의해 착공되어 1909년 9월에 완공(면적 7,920㎡)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상수도원의 수원지로서 제방의 높이가 27m에 이르는 철근콘크리트로 축조된 시설이다. 당시로서는 거대한 토목공사였고, 서면에서 초량왜관(현 용두산공원 일대)이 자리 잡고 있었던 지금의 동광동까지 급수한 유명한 수원지에 해당된다. 1972년 물금에 낙동강 상수도 취수공사가 완공됨에 따라 이 수원지는 유원지와 어린이대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8) 동래별장
동래별장(東萊別莊)은 동래구 온천1동 126-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동래별장은 일제강점기 부산 제일의 땅부자인 하자마(迫間房太郞)가 지은 박간별장(迫間別莊)으로 박간탕원(迫間湯源)이라 불렀다. 건물의 건축시기가 언제 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1924년 9월 10일 조선총독부 시정(始政) 20년을 기념 박람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는데, 그때 일천왕을 대신하여 왕족인 閑院宮이 부산에 와서 동래온천장에 숙박하게 되었다. 당시 부산의 일본인 대지주였던 하사마(迫間房太郞)는 그를 접대하였는데, 閑院宮은 박간별장에서 숙박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로 보아 별장은 1920년대 초에 신축된 것으로 보인다.
하자마는 부산상공회의소 특별위원, 경상남도회부의장, 부산번영회장을 역임하고, 부산토지주식회사 사장, 부산상업은행과 조선저축은행 이사를 지내며 부산경제를 좌지우지하였다. 하자마는 1880년 5월 부산 개항 직후 우리나라에 건너왔다. 그는 1850년 일본 화가산현(和歌山縣) 출신으로 오사카시(大阪市) 오백정장(五白井長) 상점의 부산지점 지배인으로 부산에 왔다.
1899년 독립하여 5년후 부산에 본점을 두고 블라디보스토크․마산․청진 등에 지점을 설치하는 등 활동범위를 넓혀갔다. 1918년에는 부산부 동광동에 박간총본점겸 주택 2층짜리를 세우는 등 그는 특히 토지와 가옥 등을 수매, 굴지의 부동산업자가 되어 부산 제일의 재벌이 되었다. 그는 부산뿐만 아니라 1930년대에는 경남지역에도 780만평의 토지를 소유하여 도내 소작지의 3.5%를 차지할 정도였다.
1945년 8.15 광복과 함께 9월에는 미군이 부산에 진주하면서 박간별장(迫間別莊)에는 경상남도 양산․밀양․울산 등지를 관할하는 경상남도 제3지구 미군정청이 자리하면서 군정사무를 보게되었다. 인근에 있었던 지금의 농심호텔 자리에는 미군 G-2부대가 주둔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때에는 부통령의 관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동래별장”으로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동래별장은 아름다운 경승지인 금정산 자락에 3000여평의 자리를 잡아 별장을 지었다. 별장은 정원을 가꾼 담장이 높다. 담장을 높이 쌓은 이유는 주변의 좋은 경치를 별장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의도이다. 별장을 둘러싸고 있는 역시 일본양식인데 지금도 남아 있다. 높은 담장 안에 나무를 심고 연못을 파서 금정산 계곡의 물을 끌어들여 이곳을 흐르게 하였다.
동래별장은 본관 목조 2층 건물의 200평 규모와 별채, 정자, 석탑, 석등, 부도 등을 세우고 마당에 모래를 깔아 인공장식을 만들었다. 연못 옆에는 높이 1.5m인 3층석탑이, 신관 앞에는 10m인 13층 일본식 양식의 석탑이 서있다. 이 석탑은 기단 하부가 3단으로 구성되고 옥개석이 13층으로 쌓아 올린 탑신을 세우고 상륜부는 일본형의 목발이 동서남북에 일장기를 연상시키는 원을 양각하고 그 위에 보주를 꽂아 놓았다. 기단부 아래에는 시멘트로 가려져 무슨 글자가 새겨져 있는지 알 수 없다.
또한 동래별장 입구 오른쪽과 왼쪽에는 일본형 석등 4기가 세워져 있으며, 석등의 몸체에 음각 된 무늬가 특이하고 지붕모양이 뽀족하여 마치 병사의 투구를 연상케 하며 일부는 일본식 지붕의 모양을 하고 있다.
동래별장은 1965년 고급요정으로 영업을 시작하한 이후 한국을 찾은 국빈급 인사는 물론 군사정부시절 부산에 온 대통령도 들렸을 만큼 관광 명소로 유명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온천장의 쇠락과 더불어 휴․폐업을 거듭 해오다가 1997년 11월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지 3년만인 2000년 10월 고급요정에서 전통 국악공연을 보면서 호텔급 수준의 전통 한정식을 제공하는 관광음식점으로 탈바꿈하여 다시 문을 열었다.
9) 가덕도등대
가덕도등대(加德島燈臺)는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0호(2003. 9. 16)로 강서구 대항동 산13-2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가덕도 등대는 1909년 12월에 대한제국 등대국(燈臺局)에서 건립한 것으로 전국의 41개소의 유인등대 중에서 하나이나 불행히도 건설과정에 대한 기록은 현재로서 찾을 수 없다.
대부분의 등대건축이 등탑과 부속사를 별개의 동으로 건립하는 것과 달리 가덕도등대는 등탑과 부속사를 단일 건물로 구축한 경우로서, 8각형의 등탑을 부속사의 중앙에 기초로부터 9.1m 높이로 올려 세운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현상이다. 평면은 정사각형(11m×10m)에 가깝게 구성하고 정면 중앙에 현관을 설치하여 좌우로 사무실과 온돌을 두었으며, 그 후방으로 각기 부엌과 화장실, 다용도 공간, 욕실 등을 설치하였다.
기초와 기단부는 콘크리트로 시공하였고, 벽체는 현재의 벽돌규격과는 일치하지 않는 적벽돌 치장 쌓기로 시공했으며, 등탑은 동체를 콘크리트로 쌓은 위에 원형의 철제 점등실을 원형 철제지붕과 유리로 제작하였다. 지붕은 적벽돌 벽체 위에 목조 트러스를 걸어서 완만한 경사의 4모지붕 형식으로 올리고 함석으로 시공하였으며, 입면은 외벽을 적벽돌로 치장 쌓은 다음 백색 페인트로 마감하고, 네모서리 우각부와 각 입면 가운데는 1~3개소의 버팀벽(버트레스)를 설치하였다.
상부 난간벽(패러팻)은 적벽돌로 쌓아 올리고, 버팀벽의 상부를 더 높게 올려서 고딕건축의 첨탑(피나클)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수평의 난간벽과 그 사이에 낸 일정한 개구부, 적벽돌 모서리를 돌출시킨 수평 돌림띠(코오니스), 수평의 상․하인방을 설치한 외벽 창호 등에서는 중세 성관(Chateau)건축에 사용된 르네상스 풍의 의장수법을 연상시키고 있다.
이와 함께 배면 개부에는 적벽돌 원형 아치쌓기 수법도 보이는가 하면, 정면 현관 캐노피의 지붕은 고딕건축의 첨탑식 지붕에 한국 전통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두와 접시받침이 있는 기둥을 세우는 등 동․서양의 의장적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현관 캐노피 상부 페디먼트에는 창덕궁 인정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오얏꽃으로 추정되는 문양이 새겨져 있어서 당시 일제가 조선황실의 문양사용을 종용했던 사실과 관련지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덕도등대를 제외하면 수차례의 개․보수를 거쳐서 원형을 제대로 보존하고 있는 등대는 거의 없는 상태이고, 그밖에 도심에 건립된 초기 근대건축물도 대부분 훼손․철거되거나 크게 변형된 상태라는 점을 고려하면 가덕도등대는 보존상태가 상당히 양호하고, 건축세부를 통해서 당시의 건축기법과 조영의도 등을 고찰할 수 있는 소중한 유구라고 판단된다.
특히 평면, 입면의 구성방식과 근대적 양식건축에서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철, 시멘트, 콘크리트, 적벽돌, 유리 등의 건축재료 사용, 의장수법 등은 부산지역의 근대건축 도입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일 뿐 아니라 한국근대건축사의 서술에서 결코 소홀하게 취급될 없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가덕도등대는 대한제국 시대에 건립된 여러 유인등대와 같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 건설되었지만, 국가의 명운이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단적으로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덕도등대의 건축이 차지하는 한국 근대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결코 간과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가덕도등대는 근대 서구건축의 양식과 건축재료, 의장수법 등이 최초로 사용되던 건물들 중의 하나였으나 당시에 건립된 여러 등대들이 대부분 이후의 개․보수로 원형이 크게 훼손된 데 반해서 가덕도등대는 오늘날까지 상당 부분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또는 건축사적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돋보이는 문화유산이다.
10) 옛 백제병원(봉래각)
옛 백제병원(봉래각)은 부산시 동구 초량3동 467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부산역에서 중앙로를 건너 택사스거리로 가는 오른쪽 모서리에는 지금도 5층 벽돌집으로 뼈대만 남아 앙상한 2층 건물이 옛 봉래각으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옛 백제병원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4층으로 연면적 1,478.47㎡, 건물면적 378.74㎡으로 벽돌구조(연와)조로 병원용도로 지어진 건물로 중복도형식이다. 계단역시 목조이며 보존상태는 양호하고 외부의 창문 형식 역시 독특한 당시에는 보기드문 입면에서 평면이 드러나지 않는 계획된 입면디자인으로 보인다.
이 건물은 최용해가 1920년 병원으로 신축하여 백제병원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그 당시만 해도 개인 소유의 건물로는 규모가 가장 컸다.
건물을 세운 최용해는 김해 명지 태생으로 일본망산 경학전문학교를 나와 일본여자와 결혼한 사람이었다. 그는 부산에서 개인으로 종합병원을 처음 열었다. 의료진도 독일인, 일본인들까지 초빙해서 당시의 부립병원, 철도병원을 능가할 정도였다. 병원은 날로 번창했다. 그러나 건물을 지을 때의 부채와 병원운영의 지출이 과중했다. 그런 그 위에 행려병 사망자로써 인체표본을 만들어 병원 5층에 둔 것을 인륜으로써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비방을 받자 내진객이 급격히 줄어들어 마침내는 병원을 빚에 넘기고 1932년 야간도주를 하다시피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으로 귀화했다.
1930년대에 중국인 소유의 봉래각이란 중국요리점이 되었는데 봉래각 주인 양모민(楊牟民)은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이 가열해지자 1942년 집을 철창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부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인 아까즈끼 부대가 접수하여 장교숙소로 사용했다.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일본군이 물러나고 광복을 보자 우리의 치안대 사무실이 되었다. 한국전쟁 후에는 개인에 불하되어 신세계예식장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72년 뜻하지 않은 화재로 건물 내부는 불타고 외부만 남게 되었다. 현재는 상업시설로 식당과 사무실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11) 정란각
정란각은 부산시 동구 수정동 1010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부산 제일의 땅부자인 하자마(迫間房太郞)가 지은 박간별장(迫間別莊)으로 정란각이라 불렀다. 건물의 건축 시기는 1939년으로 건물의 설계자는 미상이고, 건물시공은 김규태가 담당하였다.
건물의 구조와 양식은 목조일본식 주택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잘 꾸며진 정원과 일식기와지붕에 목조구조를 들어낸 모습, 창문 노양과 다다미 등은 일본의 주거양식의 거의 모든 특징들을 나타내고 있다.
박간별장(迫間別莊)인 정란각은 일제강점기 때 고위 관료들의 관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여러 차례의 개․보수를 하였으나,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건물은 축대 위에 건립된 2층 규모로 연면적 332.76㎡에 건축면적 204.79㎡이다. 현재는 상업시설로 음식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12) 회동수원지
회동수원지(回東水源池)는 회동동과 오륜동에 걸쳐 있는 인공저수지로 둘레가 약 20㎞, 직선거리 6㎞, 폭은 넓은 곳이 2㎞로 수영강 상류에 있는 인공저수지로 95,000㎡이고 만수면적은 2,171㎡이다. 총 저수량은 18,509톤이며 이 중에서 유효저수량은 15,700톤이다.
오늘날의 회동수원지 부근에는 수원지가 조성되기 이전에는 아름다운 경치를 지닌 곳으로, 산과 새, 바위의 조화로 병풍을 이룬 기장군 철마면의 개좌산을 비롯하여 사방이 산에 쌓여 있는 골짜기에는 봉황과 백구가 날아 올 듯이 경치가 뛰어난 곳을 “오륜대(五倫臺)”라 했다.
지금은 그 옛날 노래하던 새들과 시인 묵객은 간곳없고, 미나리밭과 따사롭게 반짝이는 호수의 물빛뿐인 산중호수인 회동수원지만 옛 정취를 품은 채 출렁일 뿐이다. 오륜대는 1946년 회동수원지가 만들어지면서 오륜대라 이름했던 옛 풍치는 물속으로 잠겨버리고, 호수를 곁들인 새로운 오륜대의 충기가 생기게 되었다. 지금은 회동수원지의 호숫가에는 담수어를 파는 음식점이 들어서고 산책객들이 한가히 거닐 뿐이다. 1967년 회동저수지 확장공사로 당시의 자연마을은 철거되고, 1971년 극심한 가뭄으로 바닥이 들어나면서 오륜고분군이 발견되어 석실묘, 옹관묘, 철제품 등 귀중한 유물이 발굴되었다.
『동래부지(1740)』고적조에 따르면, “오륜대(五倫臺)는 동래부에서 동쪽자리 사천에 있고 대에서 4.5보 가량으로 시내(溪)에 접하고 암석이 기이하며 아름답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대 부근에 사는 사람이 오륜을 갖추었기에 이를 기려 이름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인 1930년대 후반 대한발이 엄습하자 부산부에서는 상수도시설을 시급히 확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에 양수시설을 증설하는 방안으로 종전의 음료수 부족시 이용하던 수영강 인수책이 다시 거론되어 1938년 12월 수영강 보조수원지에 양수기관을 설치하고 취수를 개시하였다.
1940년 항구적인 한발대책과 일제의 병참기지정책에 따라 상수도확장사업의 일환으로 동래군 동래읍 회동리 수영강 상류에 제언을 축조하고 표고 30m로 저수지 총면적 70만평, 저수총용수량 약1,000㎡로 하였고, 제언의 최저 수위는 표고 27m로 할때는 수심 3m에 유호저수량 400㎡로 하는 등 그 때마다 증고(增高)하여 저수요지를 확장하면 용이하게 증축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워 1942년 준공계획을 세웠다.
1943년에는 회동수원지 확장공사 계획을 확대 변경하였고, 1946년 회동수원지계통 제1차 명장정수장확장공사가 준공되었다. 1957년 1월 회동수원지계통 2차 확장공사를 착공하여, 1959년에 준공하였다. 1962년 직할시 승격과 더불어 급속한 인구 증가로 상수도 원수의 수요가 급증하자 1983년 상수도확장사업의 일환으로 낙동강원수를 송수관을 통해 하루에 1,800㎡를 집수함으로서 거대한 수원지로 탈바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부산시의 행정구역 확장과 인구 증가로 1984년 매리치수장 개통과 덕산정수장의 개소로 회동수원지는 보조취수장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현재는 공업용수를 제공하고 있다.
13) 녹산수문
녹산수문(菉山水門)은 강서구 녹산동에 있는 해수의 역류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 된 시설로 대동수문과 더불어 서낙동강 김해평야의 관계배수와 조절배수 역할을 하고 있다. 낙동강 제방축조 전에는 서낙동강 김해평야 대부분이 갈대밭이었고, 삼각주에 위치한 삼차강이라 불리우는 세 갈래의 물줄기는 자주 범람하여 홍수의 피해를 빈번히 입고 있었다. 낙동강 하류의 홍수는 삼각주에 비가 오지 않아도 강의 중류나 상류에 홍수가 나면 그 물이 흘러내려 어김없이 하류지역을 덮쳤고 해일로 해수가 역류하였다.
이러한 낙동강 하류는 오랜 세월 홍수의 반복은 하구에 유사(流砂)의 퇴적으로 삼각주를 형성으로 하중도(河中島)가 생겨 기름진 농토로 변하였다. 그러나 홍수 때마다 삼각주는 물바다가 되기 마련이었다. 조선시대 이래 제방공사는 계속되어 왔으나 홍수 때마다 범람은 연례행가 되었다. 낙동강 본류의 하폭을 넓히고 높은 제방을 축조하여 물의 흐름을 바꾸는 한편 서낙동강 분기점에 수문을 막아 김해평야의 관개용수와 담수를 흘러 보내는 한편 하류에 바닷물의 역류를 막기 위해 남쪽에 수문을 만드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31년 낙동강 제방 축조 공사가 착공하였다. 제방축조는 강바닥을 낮추고 강폭을 넓히기 위하여 축조용 토양을 강변의 하천부지에서 채토(採土)하여 임시로 가설한 철로를 이용하여 바퀴가 달린[일천식(一轍式)] 궤짝에 담아 운반하는 엄청난 큰 공사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1933년 2차에 걸친 홍수와 1934년 7월 대홍수가 몰아치자, 아직 완전히 굳어지지 아니한 제방이 터져 대저동일대가 물바다가 되기도 하였으나, 1935년 새 제방이 축조 준공된 이후에는 제방이 터진 일은 없었다. 제방공사와 더불어 구포와 대저를 잇는 구포대교(구포다리) 공사가 1930년 9월 13일 착공하여 1933년 3월 7일 준공하였다.
낙동강 제방축조 공사와 더불어 대동수문(1934. 4)의 설치와 녹산수문(1934. 9) 설치로 역류하는 바다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서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담수를 조절하여 김해평야의 농업용수를 확보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 두 수문의 준공으로 관개면적이 무려 13,000정보에 이른다. 녹산수문 준공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개폐식수문(開閉式水門)으로 배수문비는 10련으로 1련의 문비당 높이 4m, 너비 10m이며, 수문의 총중량은 25톤, 전동기 15마력(10대에 각 1대)이다. 수문의 길이 118m, 높이 14m, 너비 10m인 녹산교도 동시에 만들어져 부산-진해간 국도로 이용하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이 수문이 바닷물을 막는다고 하여 일본말로 씨메끼리(締切)라 불리기도 했다.
부산시에서는 녹산수문의 명지쪽에는 제2 녹산수문을 1989년 6월 착공하여 1992년 5월 준공하였다. 수문은 6문으로 1짝의 세로 6m, 길이 8m이며, 1짝의 무게가 무려 30톤로 권양기의 능력은 35톤이다. 제2 수문 설치로 과거 침수 시 펌퍼 시간을 과거 24시간 걸리던 것을 6시간으로 줄여 김해평야 침수피해방지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수문위의 너비는 35m로 순아도 - 구 녹산수문 사이 너비 35m의 769m의 접속도로가 연결되어 있다.
Ⅱ 사라진 근대 건축물 현황
1) 구 부산시청사
釜山府廳舍는 알제강점 당시 釜山理事廳 廳舍를 사용하였는데 그 건물은 1904년 일본영사관 건물로 건축된 것이다. 그 위치는 오늘날 중구 동광동 용두산 남쪽 중턱(기업은행 동광동지점 뒷편 언덕)에 있었다.
1929년 부청사 이전계획이 구체화되어 일단 예산에 올랐으나 府財政이 어려워 시행되지 못하다가, 1933~34년의 계속사업으로 추진하여 총독부 부담 18만원과 부산부 부담 12만원으로 계획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다. 그 위치는 지금의 롯데월드 자리인 龍尾山터에 자리 잡게 되었다.
부청사의 부지는 국유지 660평, 인접 부유지 507.5평 합계 1167.5평으로 충당하였다. 청사 신축설계는 수정을 걸쳐 1934년 2월 23일 확정하고, 준공일을 1935년 10월 18일로 결정하여 추진하였다.
이후 공사는 설계변경과 부대공사로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하여 준공일을 1936년 1월 24일로 다시 연기하였다가 부청사 부속창고 등 기타 시설공사로 준공기한을 1936년 3월 31일로 연기하여 총공사가 1936년 3월 31일 준공을 보았다. 이리하여 4월 1일부터 사무를 시작하였다. 건물의 양식으로는 서구의 전형적인 공공건물 양식으로 특별한 특징은 없는 근대 합리주의양식으로 보여진다.
8.15광복 이후 부산시청사로 사용되어 오다가 1998년 1월 20일 연제구 연산동 1000번지 신청사로 이전하면서 중앙동시대를 마감하고 21세기 환태평양 중심도시에 걸 맞는 연산동시대를 맞이하였다.
이 건물은 일본제국주의의 수탈정책과 대륙침략의 교두보 역할을 담당하여 우리 민족에게 수많은 압박과 민족의 자주정신을 말살하는 정책을 펼친 일제의 잔재로 다시는 치욕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의 현장이다. 1998년 10월 옛 부산시청사는 건물의 철거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려 한 시기를 대표했던 근대건축물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안이하게 처리한게 아닌가한다. 2009년 12월 17일 롯데백화점 광복점이 문을 열었고, 지금은 호텔, 쇼핑, 놀이시설, 해상공원 등을 갖춘 복합공간인 107층 높이의 제2롯데월드를 조성 중에 있다.
2) 부산우편국
1876년 11월 1일 부산에 제국우편국을 창설하여 초기에는 관리청내에 두었다. 1884년 업무를 개시한 전신국과 우편사무를 통합하여 부산우편전신국이라 하였다. 1905년 5월 한일통신기관합동협약이 체결되면서 한국소속의 통신기관부산우편사 및 부산전보사의 사무를 계승하여 부산우편국이라 개칭하였다.
우편국청사는 벽돌 2층 건물로 신축하여 1910년 5월 25일 준공된 건물로 연면적이 848평(1층 485평, 2층 351평, 3층 12평)이다. 건물의 표면에는 화강석 러스티카(Rustica) 대석위에 벽돌을 쌓고 표면을 몰탈로 바른 러스티카 형식으로 하였다.
이 건물은 전형적인 르내상스양식의 건물로 르네상스식 요소는 모두 갖추었고, 주현관문의 角部의 상부에 8각형 드럼(Durm) 위에 도움(Dome)을 올려 위풍을 도우고 있다. 그리고 여타 작은 출입구 측부에는 단개주를 붙였다. 2층 창은 홍예창으로 하고 지붕은 만사드로우프로 되어있다.
건물의 전체적인 특징으로 볼 때 기발한 점은 없으나, 큰 규모에 안정되고 장중한 감을 주는 건물이었으나 애석하게도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전 대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이 건물은 당시 부산역사, 부산세관청사와 더불어 부산 3대건축이라 불리었다. 이후 1959년 준공한 부산우체국청사를 신축하여 사용하다가, 현청사는 1985년 12월 착공하여 1989년 3월 준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부산세관
釜山稅關의 효시는 1878년 9월 27일 지금의 동구 수정동에 설치되었던 두모진해관이다. 조선정부에서 두모진해관을 설치해 일상들에게 관세를 징수하자 일본관리관은 10월 9일일 해관 설치가『병자수호조규(강화도조약)』에 위배된다고 동래부사에게 철폐를 요구하였다. 그날 일본상인 135명이 동래부로 몰려와 항의 시위를 벌였고, 11월 24일에는 대리공사 하나부사는 군함을 이끌고와 사람을 살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계속되는 철폐요구와 시위에 12월 해관폐쇄와 관세징수를 중지하였다.
1883년『조일관세협정』체결되면서 1883년 11월 부산해관이 개설되면서 관세사무를 담당하였다. 1905년『신한일협약(을사조약)』맺어지면서 외교권이 박탈당하면서 부산해관 사무가 일본에 넘어갔다. 그 명칭도 부산세관으로 바뀌었다. 본 건물은 1905년 세관확장공사의 일원으로 추진되었으나, 착공일자는 알수가 없으나, 그 우람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10년 11월이다. 건너편에 있었던 부산역 건물과 더불어 부산의 대표적인 건물로 쌍벽을 이루었던 건물이었다.
총면적 308.4평에 건물은 146.9평으로 2층 벽돌건물로서 길모퉁이를 따라 그 평면이 ㄱ자의 건물로 우측 모퉁이에는 8각의 4층탑이 세워져 있었다. 건물의 양식은 영국풍의 르네상스 양식이며, 벽돌과 다듬은 화강암을 잘 조화시킨 외관을 갖춘 건물이다. 이 건물은 비대칭 구성을 이루고 있으면서 안정감이 잘 배려되어 있을 뿐 아니라 건물이 우리에게 주는 안정감은 잘 고려된 비례관계의 소치이다.
건물의 중앙 현관문 좌우측에 있는 창출부는 우측에 비하여 좌측이 작은데, 그 상부에 좌보다는 2배 높이의 탑을 얹음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건물모퉁이의 탑신은 별다른 장식도 없이 쌓여있는 한편 아치 창문을 내달아 아담한 모습이 돋보이게 해놓았다. 이 건물은 1973년 6월 7일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었다가, 도시행정관료의 문화유산에 대한 무치로 인하여 1979년 6월 22일 부산대교의 건설과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확장 공사로 철거되면서 사라져버렸다. 건물 지붕위의 철탑은 부산경남 본부세관에 보관되어 있다.
4) 구 부산역사
1901년 6월 창립된 경부철도주식회사는 8월 초량과 영등포에서 동시에 경부선 철도부설공사를 착공하였는데, 1903년 러일관계가 악화되자 일본정부는 공사를 서둘러 1904년 11월 전 노선을 준공하여 1905년 1월 1일부터 영업을 개시하였다. 당시 남쪽 기점이 초량이어서 교통상 매우 불편하였다 한다. 1908년에는 철도를 부산까지 연장하여 동년 4월 1일 임시 부산역사에서 철도업무를 개시하였다. 1909년 1월 8일 순종황제의 순행이 있어 처음으로 궁정열차를 운행하였다.
釜山驛舍(지금의 무역회관 부근)는 1908년 6월에 착공하여, 1910년 10월 31일 준공하였다. 건물의 평수는 370.6평에 처마 높이가 34척, 둠(Doum) 지붕의 꼭대기까지는 75척 높이에 이른다. 역사건물은 대단히 아름다운 건축으로 맞은편의 부산세관청사와 함께 부산의 대표적인 건축물이었다고 한다. 본래 매축지로 지반에서 25척 땅속 깊이까지 말뚝을 숱하게 박고 요소요소에 콘크리트를 비벼 부어서 붉은 벽돌 말장을 걸친 다음에 기초부분 전부를 연결시켜 놓았다.
건물은 철저한 서구식 건축기법에 따른 붉은 벽돌 건물로서 외관 장식은 벽돌벽의 상반부에 화강암으로 세 겹의 테두리를 둘렀고, 처마 밑에는 벽돌과 화강암을 엇갈린 사라센 계통의 건축물을 연상시키는 르네상스 양식 건물이었다. 건물의 지붕은 슬레이트로 이었고 옥상에는 시계탑과 창문을 내단 각탑(角塔)이 있었다. 구내에는 대합실, 매표실, 욕실, 화장실 등이 마련되어 있는가 하면 일반승객의 숙박을 편하게 해주는 설비까지 갖추었다고 한다.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전 대화재로 애석하게도 소실되어 사라져 버렸다.
5) 부산 상품진열관
商品陳列館은 부산항 개항이후 부산에 모습을 들어냈던 서구식 건축물 가운데 가장 완벽한 최초의 신축 건물이었다. 오늘날의 중구 신창동(현 새부산예식장 자리)에 1903년 6월 착공, 1904년 12월에 준공하여 4개월 뒤인 1905년 4월 17일에야 성대하게 개관식을 가졌다 한다. 건물의 건평 65평에 3층까지의 연건평은 165평으로 총공사비는 8만여원을 들여 건축하였다 한다.
건물은 3층벽돌 건물로 내외부는 물론 건축자재까지 야문 붉은 벽돌과 잘 다듬어진 화강암을 쓴 완벽한 서구식 기법으로 중세 프랑스성관의 스타일이나 외벽의 구성은 오히려 독일풍과 영국풍의 요소를 두루 갖춘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다.
건물의 특징으로는 중앙입구의 아치를 전면폭의 3분의 1가량으로 잡고 그 높이도 2층까지 닿게하고 그 좌우에 원형의 탑형의 室을 3층까지 쌓아 올림으로써 좌우대칭이 엄격하고, 장중한 아름다운을 주었다. 層帶에 의한 가층의 분활을 기의 같은 비례로 하였고, 또한 각 층마다 외관의 구성을 달리하고 있다. 1층은 화강석으로 수개의 폭선을 돌리고, 2층은 단순한 벽면에 미식창(眉式窓, 미닫이 창)을 내고, 3층에는 아아케이드(Arcade)형식의 연속창을 내어 그 중앙부분에 석조난간을 붙이고 있다. 부산 상품진열관에는 분수대와 연못을 중심으로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정원도 마련되어 있었다.
1909년 1월 영남지방에 순행 왔던 순종황제가 1월 9일 부산상품 진열관을 시찰하고 5백만원을 하사하고 갔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 1910년 정부에서도 2천원의 지원금을 주었다. 4월 21일 신장개관 때 2층에는 일본수입 상품과 부산지방 생산 상품을 진열했고, 3층에는 우리나라 곳곳의 상품과 참고자료를 진열해 놓았다. 1층에는 우리나라 농상공부에서 기증한 조선지리 모형을 진열해 두었다 한다. 2층 원탑형방에는 신문열람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부산상품 진열관은 부산최초의 서구양식의 건축물로서 그 가치는 대단하였으나 건물이 개인에게 넘어가면서 도시심의 상권발달로 인해 신축건물 건립에 따라 철거되어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1963년까지는 현존하고 있었으나, 그 이후 어느 시기에 철거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현 새부산예식장 자리로 지금은 전문 도매상가인 미라지오로 개장하여 영업을 하고 있다.
6) 구 조흥은행 영주동지점
구 조흥은행 영주동지점 건물은 釜山府 榮町3丁目 71(현 동구 초량동 1210-15번지)에 위하였던 건축물이었다. 1892년(명치 25) 7월 第五十八銀行 釜山支店이 개업하여 영업을 시작하였다. 1909년(명치 42) 第五十八銀行과 第百三十銀行의 합병으로 百三十銀行 釜山支店으로 개편되었다가, 1923년(대정 12) 1월 安田銀行 釜山支店으로 개칭하였다.
본 건물은 1926년 6월 착공, 1927년 8월에 준공하여 安田銀行 釜山支店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부산지역의 대다수 공공건물들이 그랬듯이 서구양식의 건축물로 2층 벽돌의 서구식 르네상스 양식이며, 외벽은 잘 다듬은 화강석을 잘 조화시켰고, 실내는 철골 콘크리트로 마무리하고 있다.
건물은 비대칭 구성을 이루고 있으면서 안정감이 잘 배려되어 있을 뿐 아니라 창틀과 창틀사이는 원형으로 화강석을 둘러 웅장감을 느낄 수 있다. 건물이 우리에게 주는 안정감은 잘 고려된 비례관계의 소치이다.
본 건물은 1928년 大邱銀行과 慶南銀行이 합병한 주식회사 慶尙合同銀行 釜山支店이 1936년 5월 1일 이곳으로 옮기면서 사용되었다. 1941년 10월 1일 漢城銀行과 慶尙合同銀行의 통합으로 漢城銀行 北釜山支店으로, 1943년 10월 1일 漢城銀行과 東一銀行 합병으로 朝興銀行 北釜山支店 이후 계속하여 은행 건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88년 5월 2일 1년여의 공사 끝에 현대식 건물을 신축준공으로 당시까지 보존되어오던 부산의 대표적인 근대건축물이었으나, 행정기관의 무관심과 기업의 영리목적에 의해 주요 문화유산이 사라져버렸다.
7) 구포다리
구포다리로 더 잘 알려진 이 다리는 1930년 9월 13일 착공되어, 1933년 3월 7일 준공되었으며, 길이 1,060m, 폭 8.4m(중앙차도 5.4m, 좌우도로 각 1.5m)의 게루바식판항교로 교각이 56개이다. 강서구 대저동과 북구 구포동을 잇는 다리로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다리였으므로「낙동장교」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공사 총인원은 7,760명, 공사비 70만원(정부보조 40만원, 지방비 19만원, 지방지원부담 11만원)이 소요되었다.
이 다리는 건설하기까지 구포와 대저 사이는 나룻배로 왕래하였다. 사람은 물론 화물도 나룻배로 건넜으니 그 불편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배를 기다리는 시간과 건너는 시간이 매우 많이 소비되었으며 홍수로 물이 불어나면 나룻배의 운항은 중지되어야 했다.
이 다리가 가설된 이후의 구포는 상업경기가 실질적으로 다소 쇠퇴하기는 하였으나 경남지방과 경부선을 통한 내륙지방과 연결하는 교통요지를 이루어 새로운 면모로 바뀌었다. 지금은 건설 당시 동양 또는 국내에서 제일 긴 다리라던「제일」이란 칭호도 사라지고 이 다리의 상․하류에 계속하여 교량들이 가설됨에 따라 그 기능이 약화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이 다리는 그 동안 부산과 경남을 잇는 대동맥으로 산업․경제․문화․정치의 교량역할을 해왔으며 한국전쟁 때에는 전쟁물자 수송에 큰 몫을 해낸 귀중한 것으로 낙동강과 더불어 수난의 역사와 함께한 역사의 현장이다. 1997년 12월 첨단공법을 이용한 구포대교의 준공으로 구포다리는 노후화가 지속되어 붕괴의 우려로 차량통제를 하고 있다.
구포다리는 노후화가 지속되어 붕괴의 우려로 차량통제를 하고 있다. 2003년 9월 13일 태풍 ‘매미’로 인한 상류지역 강우로 다리발 붕괴로 100m 상판 유실로 철거여부를 검토 중에 있으나, 일부 시민들은 역사유적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2005년 6월부터 길이 1,060m, 너비 9.15m인 구포다리의 상판 철거작업을 시작하여, 11개 상판 가운데 9개 상판이 2008년 2월 25일 현재 철거됐다. 3월 16일까지 상판 2개를 완전 철거하였다. 나머지 교각 부분은 12월까지 완전히 철거되어 77여년의 애환을 뒤로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려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