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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백족(錫伯族)의 궁도문화
鋒暉(신강사범대학 법경학원)
신강 석백족은 인구가 4만이며, 주로 신강 위구르 자치주 이려(伊䔣)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활은 이 민족의 전통문화 가운데 하나의 중요한 부분으로, 역사가 가장 길고 영향력이 가장 크며 범위가 가장 넓었던 문화유형이다. 그 파급효과는 수렵생산활동으로부터 군사ㆍ풍속 및 예절ㆍ인격교육ㆍ제조기술 등 여러 영역에 두루 미쳤으며, 민족의 역사발전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 활 문화의 역사
오늘날 역사학계에서는 석백족이 동호(東胡)ㆍ선비(鮮卑)ㆍ실위(室韋)ㆍ석백(錫伯)의 순으로 발전하였다고 공인하며, ‘기사’(騎射)를 중요한 문화적 특징으로 삼고 있다. 『한서』(漢書)는 “남쪽에는 한(漢)이 있고 북방에는 사나운 호(胡)가 있다. 호는 천성이 야만스러운 종족이다.”고 하였고, 『사기』(史記)는 흉노(匈奴)와 동호 등 북방의 유목민족에 대하여 “어려서부터 말을 탈 줄 알고 활로 새나 쥐를 쏜다. 조금 자라면 여우와 토끼를 사냥하여 고기를 먹고, 장정들은 활 재주가 뛰어나 모두가 날랜 군대를 이룬다.”고 썼다. 유목과 수렵 위주의 생활방식은 동호족에게 대단히 뛰어난 ‘기사’ 능력을 길러주었기 때문에, 고대 문헌에는 B.C. 307년 조(趙)나라의 무령왕(武靈王)이 “오랑캐 옷을 입고 말 타며 활을 쏘았다”는 전고(典故)도 보인다. 역사의 발전에 따라 동호로부터 유래한 선비족도 유목수렵의 경제생활방식과 활 문화를 이어나갔다. 『위서』(魏書)에는 선비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으며, 물과 초지를 따라 목축하기 때문에 일정한 거처가 없다. 갈대를 엮어 움막을 지으면 항상 해가 뜨는 동쪽을 향했다.”
“선비족은 누구나 활을 잘 쏘았다. 싸움을 낙으로 삼았으며, 전사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겼다. 전투가 임박할 무렵에는 활을 들고 날듯이 말에 올라 환호성을 지르며 서로가 호응하였다.”
선비족은 일찍이 각단궁(角端弓)을 만들었는데, 자기들만 기르는 소를 재료로 한 것으로 아주 정교하고 위력이 강하였다. 또한 재료의 배합이나 제작기술은 당시의 다른 민족들이 갖지 못한 것이었기 때문에 선비족 스스로도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다. 선비족의 옛 성터에서 출토된 인형 가운데 활 당기는 모습이 많은 것은 선비족과 활의 밀접한 관계를 잘 설명하는 것이다.
실위의 단계에 이르러서도 비록 일부 농경이 시작되기는 하였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과거의 생활방식을 고수하였고, 활 쏘기와 사냥을 즐기는 전통을 계속 이어나갔다. 기록에 의하면 실위족은 4~5세 때 작은 활을 끼고 다니며, 더 자라면 사시사철 내내 들판에서 사냥을 하고, 성인이 되면 활과 마구(馬具)를 만들 줄 알아야만 행세를 했다고 한다. 실위의 활 제작기술은 당시에는 매우 뛰어난 것으로, 『구당서』(舊唐書) 실위전에 “실위의 병기에는 각궁호시(角弓楛矢)가 있으며 아주 잘 쏘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호시석노’(石砮: 돌 화살촉)가 유명하였는데, 호시란 호나무로 만든 화살을 말하며, 석노는 목화석(木化石)과 지화석(脂化石)으로 만든 화살촉이다. “단단하기가 쇠를 능가”하고 “길이가 특히 긴 것”을 특징으로 한 실위의 화살은 관동지역 기사민족의 문화적 상징이 되었다.
원대(元代)에 석백족은 몽고 귀족의 통치를 받았다. 기마술과 궁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석백족은 전장에 나갈 때마다 다수의 궁수가 몽고군에 편입되었고, 기사의 우수성과 기동하며 싸우는 방법은 원나라 군대전술의 한 부분을 이루었다. “남아의 세 가지 예(藝)”(활 쏘기, 말 타기, 씨름)는 두 민족이 공유하는 특기로서, 남자가 반드시 익혀야 할 과목이 되었다. 두 민족이 가지고 있는 활 문화도 활발하게 교류가 이루어져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모두가 ‘모르껀’(莫日根)이라 불렀다. 이 시기에 몽고족의 문화는 석백족의 발전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쳤다. 원대 활의 다양한 형태와 종류는 세계의 냉병기 가운데에서 으뜸으로 꼽히거니와, 석백족의 활 문화 발전에도 상당한 작용을 하였다.
청(淸) 초, 황제인 복림(福臨)은 북경으로 천도하여 중원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밖으로는 제정러시아가 국경을 침범하여 영토를 강점하는 일이 빈번하였고, 안으로는 각 지방정권이 분열하여 권력을 탈취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부족한 병력을 채워서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통치자는 석백족의 “말과 활에 능하고 언어가 같은” 특징에 착안하였다. 강희 31년, 거금을 들여 ‘커르신(科爾沁) 몽고’로부터 모든 석백족을 사들인 다음 “출정할 때는 군대고 들어오면 백성이 되는” 팔기(八旗)에 편입시켰던 것이다. 이들은 국가의 관리 아래 정부가 지급하는 급여를 받으면서 정벌군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안으로 내란을 진압하는 한편, 밖으로 외세의 침략을 격퇴함으로써 청조의 통치기반을 유지하는 중요한 역량으로 자리잡았다. 통치자는 전쟁에서 활의 효용성을 인식하고 ‘국어기사’(國語騎射: 언어가 같으면서 말과 활에 능한 사람) 우대정책을 대대적으로 시행하였다. 팔기에 속한 각 부족에게 “활 쏘기는 절대 폐기할 수 없음”을 교육하였는가 하면, 여러 형식을 통해서 말 타기와 활 쏘기 훈련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관(官)과 민간을 막론하고 ‘국어기사’가 시종일관 기인(旗人)들 사이에서 문화의 정통적 지위를 차지하도록 함으로써 일종의 군사문화 통치형태로 발전하였다.
청조 중기에 서북 변경인 신강(新疆)에는 주둔병력이 없는데다 제정러시아가 계속 침범을 해 왔기 때문에 황실은 상당한 위협을 느꼈다. 이에 1764년 건륭황제는 석백족 가운데에서 정예병 1,000여 명을 선발하고 그 가족들까지 포함한 총 4,030 명을 서북지역으로 이주시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주민들은 변경 방위를 위해 1,082 자루의 활과 23,770 대의 화살을 휴대한 채 수많은 산과 강을 넘고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그 이듬해 이려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려의 영서(寧西: 지금의 차뿌차르(察布査爾) 현)에 8개의 성채(우록(牛錄)이라고 부름)를 쌓고 18개의 망루를 설치하여, 남으로 카산바르(喀什噶爾)에서 북으로 타르바하타이(塔爾巴哈臺) 사이의 2,000여 리나 되는 넓은 지역의 방어를 맡았다. 청대에 석백족이 거주하는 마을을 ‘니우루’(牛錄)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강한 활”이란 뜻이다. ‘니우루’는 하나의 생산단위이자 행정단위이며 또한 하나의 전투단위로서 선명한 군사적 색채를 띠었다. 이러한 지명은 신강 석백족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사용해 오고 있다. 청대에 석백족이 여러 차례 이주를 했던 것은 모두 이들의 기사능력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고 하겠다.
청 정부는 석백족의 탁월한 기사능력을 십분 이용하여 운남(雲南)에 출정해서는 ‘미엔디엔’(緬甸: 미얀마)을 몰아내고, 서북 출정으로 ‘준가르’(准噶爾)부족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사천(四川)에서 대소금천(大小金川)부족 토사(土司: 토호)들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또한 19세기에는 신강 장꺼르(張格爾) 반군을 섬멸하여 4개 성을 수복하였고, 이려의 쑤단칸(蘇丹汗)을 격파하였으며, 제정러시아의 침략을 격퇴하고 이려 등지를 수복하였다. 이와 같이 숱한 전투를 거치면서 석백족의 기사능력은 청 정부가 변경통치를 실현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던 것이다.
2. 전통 활의 제작기술
활 제작에 있어서 석백족은 매우 까다로운 조건과 절차를 요구하고 있다. 석백족은 활을 ‘beri’라 하고 시위를 ‘uli’라고 부른다. 옛날의 석백인들은 거의가 자작나무를 주재료로 한 단궁(순목으로 만든 활)을 사용하였다. 가죽으로 시위를 만들었으며, 화살은 자작나무를 깎아서 살대로 썼다. 활의 몸통은 증기에 찐 다음 초승달처럼 구부렸다. 그러나 이런 활은 탄력이 약하고 몸통은 긴데다 쉽게 부러져서 사용하기에 상당히 불편하였다. 이 때문에 끊임없는 발전과 개선을 통해서 훗날 속칭 ‘각궁’이라 부르는 복합궁이 나오게 되었다. 이 각궁은 뿔(角)∙ 나무 줄기(杆)∙ 풀(㬵)∙ 칠(漆)∙ 힘줄(筋)∙ 뼈(骨)∙ 가죽(皮) 등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들었으며, 제작에도 매우 까다로운 요구조건이 있었다.
뿔로는 활의 탄력을 결정하는 몸통조각을 만드는데, 대부분 북산양(岩山羊)의 뿔을 사용한다. 재료로 쓰이려면 길이는 3 자 정도에 전체적으로 광택과 윤기가 있고 금이 가서는 안 된다. 줄기는 몸통에 쓰이는 목재를 가리키며, 여기에 뿔로 만든 조각을 붙여 탄력을 높인다. 풀에는 사슴풀∙ 말풀∙ 소풀∙ 쥐풀∙ 물고기풀 등이 있는데, 이 중에서 물고기풀이 많이 쓰인다. 풀을 쓸 때는 온도 조절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힘줄은 덩치가 큰 동물의 힘줄을 고른다. 짐승의 몸에서 떼어낸 후 그늘에 말렸다가 나무망치로 두드려 기름기를 제거하고 근섬유가 실처럼 부드러워지게 한다. 작은 힘줄은 길고 실처럼 만들어야 하며, 꼬아서 끈을 만든 다음, 가닥을 모아 기름을 입히고 몸통에 감아서 탄력을 높이는 데 쓴다. 큰 힘줄은 한 가닥으로 연결되어 있고 광택이 나야 하며, 몸통의 탄력을 높이거나 시위를 만들 때 사용한다. 뼈는 활의 줌통 부분에 놓아 목재와 몸통조각을 단단히 고정시키고 탄력을 높이는 데 쓴다. 칠은 활의 몸통을 보호하고 비바람의 침식에 충분히 견딜 수 있게 한다. 가죽은 보통 가느다란 가닥으로 자른 다음, 비틀어서 줄 모양을 만들고 시위로 사용한다. 어떤 사람은 모피나 뱀 껍질∙ 물고기 껍질을 손잡이에 감아서 마모되는 것을 막기도 한다.
각궁은 제작공법이 복잡하고 재료에 대한 요구도 까다롭다. 목재는 섬세하게 갈고 문지른 과정을 거친 후 몸통조각∙ 골재와 함께 풀로 붙여서 뼈대를 이루고, 여기에 다시 힘줄로 단단히 묶은 다음 칠을 입히게 된다. 각궁 가운데 ‘보사궁’(步射弓)은 길이가 165~170㎝인데 비해, ‘기사궁’(騎射弓)은 150~165㎝로 약간 짧다. 완성된 활의 모양은 호형(弧形)이지만, 거꾸로 구부려 시위를 얹게 되면 활의 장력이 크게 증가되어 최대 170 파운드까지 낼 수 있으며, 사거리는 200~300 야드에 이른다. 활은 장력에 따라 보통 강궁과 연궁으로 구분하는데, 사용자가 자신의 체형이나 힘 또는 성격에 맞추어 잘 어울리는 것을 선택하도록 요구한다. 예를 들면 성격이 급한 사람은 연궁을 써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만약 강궁을 잡고 버티지 못하여 당기자마자 발시하면 명중률이 떨어진다. 따라서 활은 사람의 특성에 따라 선택적으로 사용해야만 활의 살상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가 있다.
화살은 무거운 화살과 가벼운 화살로 구분된다. ‘niru’라고 부르는 화살은 길이가 길고 무거우며 살촉이 크고 넓어서 주로 근거리에서의 전투나 사냥에 쓰이며, ‘sirdan’이라는 화살은 가볍고 살촉이 작으면서 예리하여 원거리에서 적을 추격하는 데 사용한다. 살촉은 ‘kacilan’이라 부르고, 살상용과 비살상용으로 나눈다. 살상용은 전투와 사냥에 쓰이며, 초기에는 나무와 돌과 뼈로 만들었다. 나무살촉은 일명 ‘전령’(報馬子)이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가래나무(楸)로 만들고 크기가 1자도 안 되지만 성질이 단단하여 쇠못을 대신할 수 있다.” 돌촉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소나무와 송진이 강물에 들어가 천 년을 지나면 “무늬가 생기고 쇠도 돌도 아니면서 쇠를 자르거나 돌을 깨뜨릴 수 있다.”고 하였다. 나중에는 쇠촉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잎사귀 모양이나 삼각형 등 형태가 다양하였고, ‘촉경’(鏃茎)과 ‘역자’(逆刺)가 붙어 있었다. 비살상용은 훈련이나 시합 혹은 전투시 신호수단으로 사용되었으며, 소뿔로 만드는데 엄지손가락 크기에 가운데가 비었고 머리 부분에 3~4개의 구멍이 있어서 공기와 마찰하면 맑은 소리를 내기 때문에 속칭 ‘향전’(響箭) 혹은 ‘명적’(鳴鏑)이라 불렀다.
화살대는 일반적으로 도목(桃木)ㆍ양목(楊木)ㆍ송목(松木)ㆍ사류(沙柳) 등을 쓰며, 이 중에서도 도목이 가장 좋다. 오니(尾翎)의 수는 보통 3개이고, 그 길이는 활에 따라 결정된다. 흔히 매나 독수리의 깃털로 만드는데, 오니의 길이는 대략 화살 길이의 1/6이 보통이다. 또한 오니의 재질은 화살 주인의 사회적 지위를 반영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지위가 높을수록 그 재질이 고급스럽고 휘귀하였다. 깃털이 없을 때는 오니를 붙이는 곳에 홈을 깎아서 움푹 들어간 홈통이 와류(渦流: 소용돌이)의 저항력을 갖게 하여 화살이 안정되게 날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중원에서는 이러한 화살을 속칭 ‘풍우전’(風羽箭)이라 불렀는데, 그 설계가 상당히 과학적이라 할 수 있다.
전대(箭袋: 살대(撒袋)라고도 함)는 ‘jebele’이라고 한다. 청대에는 관가의 전대 양식을 통일하되, 관가의 등급에 따라서 활의 등급도 다르게 표현하였다. 민간의 전대는 모양이 매우 다양하고 여러 가지 도안을 덧붙였다. 전대는 대부분 소가죽으로 만들어 허리나 등에 맬 수 있도록 하였고, 그 크기와 길이는 활의 크기에 좌우되었다. 이처럼 제작공법이 매우 복잡했기 때문에 옛날 석백족의 풍속에서 활은 대단히 귀중한 선물의 하나였다.
깍지(扳指)는 ‘fergetum’이라 부르며, 활을 쏠 때 엄지손가락에 끼워서 사용하는 일종의 보호장구이다. 골(骨)ㆍ철(鐵)ㆍ동(銅)ㆍ옥(玉) 등 여러 가지 재질로 만드는데, 화살을 얹어서 당길 때 화살과 시위가 엄지손가락에 마찰하여 다치는 것을 막아준다. 오른손 엄지에 깍지를 끼고 걸어서 시위를 당기고, 식지와 중지는 구부려 엄지를 눌러준다. 이때 화살대는 줌통 오른쪽, 쥐고 있는 왼손 엄지 위에 놓인다. 깍지는 보통 깍지주머니(扳指袋)에 넣어 보관한다.
팔 보호대는 대개 가죽으로 만드는데, 길이는 10~20㎝로 일정하지 않다. 팔뚝에 차거나 소매에다 직접 재봉하여 활을 쏠 때 시위가 팔뚝 치는 것을 막아준다. 활은 청대 석백팔기군 장병의 주요 무기였다. 장교는 누구나 다 2자루의 활을 소지하였고, 계급에 따라 70~250 대의 화살을 휴대하였다. 반면 병사는 1자루의 활과 50~100 대의 화살을 소지했다. 또한 각자 화살촉을 예리하게 갈수 있도록 줄(銼)을 하나씩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이밖에도 독(毒)을 가지고 있다가 전투시 필요할 때 사용하였다.
청대에 석백족이 입었던 갑옷은 생사(生絲)로 만들었는데, 화살이 뚫기 어렵도록 촘촘하고 두텁게 짰다. 설령 화살이 맞더라도 실이 촉을 따라 들어가기 때문에 실을 당기면 화살촉을 상처에서 뽑아낼 수 있어서 사람에 대한 살상효과를 감소시켰다.
활이 국방에 필요하고 민족생활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청 정부는 여러 차례 신강의 변방주둔군에게 활과 화살을 공급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건륭 34년 한 해에만 한 번에 329,200 자루의 활이 서안에서 이려의 주둔군에게 보급되었는데, 그 주요 대상은 석백팔기군 부대였다. 아울러 ‘찰현이우록’(察縣二牛錄)에 상당히 큰 규모의 활 제작소를 세우고 다수의 민족장인들이 통일된 규격의 활과 관련장비를 대량생산하여 일상에 사용토록 하였다.
3. 활 쏘기 훈련
“궁도는 힘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 이것은 석백족 궁사들의 좌우명이다. 궁사는 모름지기 극히 위태롭고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표적을 정확히 맞춰야 하는데, 그 관건은 안정된 심리상태와 ‘정심정체’(正心正體)의 사법에 있다. 아직 활을 당길 수 없는 아이에게는 일찍부터 ‘따와’(打瓦: 기와 조각이나 동전을 쌓아놓고 맞추어 떨어뜨리는 놀이)와 같은 놀이를 통해 눈과 팔의 힘을 키우고 담력을 길러준다. 6~7세의 아동에게는 버드나무 가지로 만든 작은 활을 주어 계몽훈련을 실시하고, 15~16세가 되면 각 ‘우록’에서 보낸 ‘뽀리다’(伯力達: 사범)가 집중적으로 정규 습사훈련을 시킨다. 훈련 내용에는 보사(步射)ㆍ포사(跑射)ㆍ궤사(跪射)와 기사(騎射) 등 여러 가지 형식이 있는데, 이 가운데 보사훈련을 기본으로 한다. 석백족의 보사훈련은 잘 정리된 규칙 아래 정심(正心)ㆍ허사(虛射)ㆍ실사(實射)의 3단계와 활ㆍ 화살ㆍ궁사 세 가지의 배합을 중요시 하고 있다.
습사의 첫 단계는 ‘정심’이다. 먼저 활을 쏘는 목적이 나라를 지키는 데 있음을 분명히 하고, 마음에 잡념이 없으면 화살이 빗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계속 주지시키며 심리훈련을 반복한다. 그 다음 호흡 조절을 통해 전신의 긴장을 풀고 잡념을 없애며 정신을 집중시킨다. 정심을 통해서 정체(正體)에 도달해야 비로소 몸과 마음이 활을 쏠 수 있는 상태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습사의 두 번째 단계는 허사, 즉 빈 손으로 활 쏘기를 연마하는 것이다. 석백족의 궁사들은 허사가 초보자에게 매우 유익하다고 여긴다. 만약 아직 기초가 다져지지 않은 상황에서 활을 먼저 쏘게 되면 잘못된 습관이 몸에 배어 고치기가 아주 어렵다. 또 만약 강궁을 당기기만 하고 화살을 쏘지 않으면 첫 째, 궁사의 주의력이 표적이 아니라 대부분 팔 힘에 집중되고, 둘 째는 팔을 뿌려 화살을 쏠 수 없기 때문에 활을 당긴 손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궁사는 팔을 뿌려 발시하는 즐거움도 얻을 수 없고, 무의미하게 활을 쏘는 상태에 빠진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반드시 빈 손으로 연습하는 과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머리 속에서 손 안의 활과 당길 때의 장력ㆍ표적의 거리 및 각종 외부 환경을 연상하고,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연상훈련을 반복해 나가면 나쁜 습관도 바로잡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활을 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습사의 세 번째 단계는 실사로, 다시 신법(身法)ㆍ수법(手法)ㆍ지법(指法) 및 안법(眼法)의 네 부분으로 나눈다. 신법에서는 먼저 정신을 집중하고 머리는 반듯하게 세운 다음, 발은 팔자(八字) 형태로 곧게 서도록 한다. 발 넓이는 넉넉하되 허리가 자연스러울 만큼 벌리고, 발꿈치는 안정되게 땅을 디뎌야 한다. 활을 당기는 자세는 자연스럽고 부드러우며 절차가 일정하도록 한다. 활을 당길 때는 올바른 자세에서 앞 주먹을 미는데, 활과 앞 발에 힘을 동시에 준다. 허벅지는 단단히 아래로 굳히고 옆구리는 뒤쪽으로 보내면서 가슴을 곧게 세우되 신체의 각 부위가 하나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호흡도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서 활을 당기고 숨을 멈춘 후에 시위를 놓는다. 수법에서는 양 팔의 긴장을 풀어 딱딱하지 않도록 하고 표적의 원근에 따라 활의 경사를 조정하게 한다. 활을 당긴 다음 시위를 가슴 가까이 붙이고, 왼손에 잡은 활은 밖을 향해 비스듬히 눕히면서 오른손의 시위는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 후 오른손이 시위를 놓을 때 왼손에 아무런 느낌이 없는 정도를 터득하고 도달해야 한다. 지법에서는 손가락이 화살을 적당한 힘으로 조절하여 살대를 익숙하게 다룰 수 있도록 요구한다. 엄지로 화살을 받히는 힘과 식지가 눌러주는 힘은 화살이 시위에 확실히 걸리게 만든다. 이때 오른손 중지는 엄지에 붙이고 나머지 손가락은 말아쥔다. 시위는 가슴 가까이 당기고 화살은 얼굴에 붙이며 활을 쥔 손은 평온해야 한다. 안법에서는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을 요구한다. 눈은 표적에 온통 집중하고, 풍향ㆍ거리ㆍ화살의 궤적ㆍ빈도 등 각 요소를 파악하여 표적이 잡히는 순간 주저없이 발시해야 한다.
자신의 역량과 활의 성능을 발휘하는 데 있어서 석백족은 활ㆍ화살ㆍ궁사 이 3요소가 일체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 하나로, 활의 장력과 궁사의 팔 힘이 최적의 조합을 이루도록 강조한다. 만약 궁사의 힘에 비해서 활의 장력이 너무 크다면 궁사가 활을 당기더라도 오래 버틸 수가 없고 명중률도 떨어진다. 또한 머지 않아 심신이 지치게 되고 기량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반면, 궁사의 힘에 비해 장력이 너무 낮으면 표적까지 충분히 갈 수 있으면서도 화살이 미치지 못하며 정확히 표적을 맞출 수가 없다. 따라서 궁사는 이 점을 신중히 헤아려야 하며, 만용을 부려 무조건 장력이 큰 활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최대로 당길 수 있는 장력에서 20~30%를 줄인 활을 선택해야 가장 뛰어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또 하나는 활과 화살이 서로 잘 어울러야 한다는 것이다. 강궁에는 강시(硬箭)를 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표적을 맞출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활과 화살이 손상을 입을 수 있다.
이밖에도 석백족은 궁사의 힘이 기량을 닦는 바탕이라 인식하고 팔 힘의 배양을 매우 중요시 한다. 강궁을 당긴다든지, 무거운 물건을 어깨에 얹는다든지, 끈으로 어깨를 매다는 등의 훈련을 함으로써 팔의 안정성과 당기는 힘을 늘려 나간다. 특히 양 팔에 무거운 물건을 매다는 훈련은 매우 엄격하다. 궁사들의 양 팔에 무거운 물건을 매달아 놓고 평행을 유지하게 한 다음, 동시에 올리고 내리도록 하여 상호간 지구력을 경쟁시키는 것이다. 이때 타이밍 훈련용 음악을 사용하는데, 노래의 악절 속에 리듬을 삽입하여 활 쏘는 타이밍을 깨닫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이 훈련에서는 양 팔의 평행을 끝까지 유지하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
4. 궁도대회
활이 민족문화의 단면임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으로는 무엇보다 민간에서 성행하는 활 쏘기 시합을 꼽을 수 있다. 각 우록에는 모두 활터가 있는데, 공터의 끝에 여러 개의 장대를 세우고 장대 사이에 끈과 마포(麻布)와 모전(毛氈)을 연결한 뒤 과녁을 걸어 놓는다. 과녁(氈牌靶)은 말 가죽과 모전으로 만드며, 5~6 가지 색깔의 천으로 된 둥근 고리를 크기에 따라 끼우는데, 중앙이 붉은 색이다. 안전을 고려하여 시합용 화살은 특별히 제작한 향전(響箭: 시위를 떠나면 맑은 소리를 내는 화살)을 사용한다. 화살이 과녁에 맞으면 맞은 부분의 고리가 땅에 떨어지므로 점수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민간에서는 매년 중추절과 ‘서천절’(西遷節: 청대 석백족이 서북으로 이주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명절로 4월18일이다)이 되면 먼저 각 우록마다 대회를 열어 우승자를 뽑고, 이들이 다시 우록간 대회에 참가하는데, 학계에서는 이것을 일컬어 ‘민싸이’(民賽)라고 부른다. 대회는 나이에 따라 노년ㆍ장년ㆍ청년부로 나누어 진행하며, 표적의 거리는 짧은 것도 있고 긴 것도 있다. 경기종목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릎꿇고 쏘기(跪射)ㆍ서서 쏘기(立射)ㆍ달리며 쏘기(跑射)ㆍ말타며 쏘기(騎射) 등이 보편적이다. 무릎꿇고 쏘기는 30~50보의 거리에 과녁을 놓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궁장’(弓長: berida라고 부름)의 지휘아래 먼저 30보 과녁에 3발을 쏜 뒤, 다 맞으면 50보 과녁에 다시 3발을 쏜다. 서서 쏘기는 30~50보의 거리에 과녁을 놓고 먼저 옆으로 서서 30보 과녁에 3발을 쏜 뒤 다 맞으면 50보 과녁에 다시 3발을 쏘아 6중을 한 사람이 이긴다. 달리며 쏘기는 50보의 거리에 과녁을 세우고 궁장의 구령이 떨어지면 화살을 재워 천천히 달리면서 보통 3발을 쏘는데, 다 맞춘 자가 이긴다. 말타며 쏘기는 말이 달리는 통로와 50보 떨어진 곳에 과녁을 세워 놓고 궁장의 구령이 떨어지면 질주하면서 보통 3발을 쏘아 다 맞춘 자를 1등으로 한다. 기사 경기에서는 양 손을 다 쓰는 자가 특히 존경을 받는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한 손을 사용하는 습관이 있어 말에 오르면 몸을 마음대로 돌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만약 어느 한 쪽으로만 활을 잘 쏘면 경기 중 많은 사각(死角)이 발생하게 된다. 이 때문에 양 손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사람이 매우 드물고 그만큼 존경을 받는 것이다. 대회가 열리면 부근의 각 민족들이 구경하러 몰려들고 심지어 100리 밖 먼 곳에서 말을 타고 오기도 한다. 선수들은 노소를 불문하고 모두가 고무되어 투지를 불태우고, 화살 소리 날 때마다 인산인해를 이룬 관중들의 탄성이 터져 나오며 박수 소리가 멀리까지 들릴 만큼, 활 쏘기는 민족 행사 가운데 가장 열기가 뜨겁고 치열한 종목인 것이다.
“예로 시작하여 예로 끝난다”. 이것은 석백족 궁도문화의 준칙이다. 대회기간 동안 석백족은 예절을 대단히 중요시 한다. 우록과 우록간의 시합이 있을 때 방문팀이 도착하면 주최측의 대표는 우록 입구까지 나가 극진히 영접하고, 시합 전 관공(關公: 삼국시대의 관우) 사당에서 함께 참배하며 국가의 안녕과 인간의 행복 및 대회의 원만한 성공을 축원한다. 시합이 시작되면 방문팀이 먼저 활을 낸 다음 규칙에 따라 진행하는 것이 관례다. 승부가 결정되고 나면 패한 쪽 사람들이 징과 북을 치고 ‘페이차커’(飛察克)와 ‘둥뿌르’(東布爾)를 연주하며, 아녀자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모커나’(墨克納)를 불러 승자에게 축하를 표시한다. 시상은 대회장이 승리를 상징하는 커다란 붉은 비단을 이긴 쪽에게 수여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참가자를 연회에 초대하여 함께 즐기는데, 이 자리에서 대회장이나 덕망 높은 노인이 대회 입상자에게 상품을 수여한다. 상품에는 규정된 활ㆍ가죽장화ㆍ모전 외에도 우록에서 자발적으로 준비한 물품이 있다. 모든 일정이 끝나면 주최측 대표는 방문팀을 정성껏 배웅하여 존경을 표시하고, 앞으로 더욱 기량을 연마하여 함께 발전하자는 희망을 전한다.
관(官)에서 개최하는 기사대회는 ‘쥔싸이’(軍賽)라고도 부른다. 매년 봄과 가을에 석백족 각 기(旗) 우록의 장병들은 ‘쭈어링위에삥’(佐領閱兵)이라 부르는 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여기에서는 50M 떨어진 곳에 과녁을 세우고 주로 ‘보전’(步箭)과 ‘마전’(馬箭)으로 실력을 겨루었다. 규정에 의하면 각 병사는 보사 10발과 마사 5발씩 쏘았는데, 보사 7중ㆍ마사 3중자를 상급, 보사 5중ㆍ마사 2중자를 중급, 둘 가운데 어느 하나가 0점이거나 둘 모두 0점인 자를 하급으로 분류하였다. 또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쭝관위에삥’(總官閱兵)에서는 ‘쭈어링’에서 선발된 병사 가운데 보사와 기사의 합격자에게만 최종 시험에 참가할 자격을 주었고, 여기에서 선발된 자는 ‘우커신’(伍克辛) 즉 “정예용사”에 뽑혀 정부가 부여하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5. 현 석백족 궁도문화의 발전상
석백족의 궁도문화는 역사적으로 중국의 각 민족문화가 교류하고 융합된 산물이자, 유목문화와 농경문화가 융합된 산물이다. 오늘날 국제화와 활발한 문화교류의 추세에 따라 많은 소수민족의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외래문화의 충격 역시 상당히 심각하다. 이에 석백족의 궁도문화를 보호하고 전승하기 위해서 정부 부처로부터 민간조직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적극적인 노력과 실천이 진행되고 있다.
1954년 차뿌차르 현이 설치되면서 국가는 석백족 가운데에서 우수한 민간궁사를 선발하여 전국대회에 참가시키고 또한 인재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제 4ㆍ5회 전국 체육대회에서는 석백족 선수인 곽매진(郭梅珍)과 여광(汝光)이 이름을 떨쳐, 이후부터 국내외의 각종 대회에 초청을 받았다. 1973년 차뿌차르 현에 아마추어 궁도팀이 창설되었는가 하면, 1979년에는 정부가 차뿌차르 현에 궁도청을 만들어 우수한 전통을 살려 나가도록 격려하였다. 현재 석백족 집단거주지역에는 2개의 궁도팀과 많은 애호가들이 있다. 비록 인구는 4만에 불과하지만 다수의 뛰어난 선수들을 배출하여, 이 중에는 국제적으로 알려진 선수가 3명, 국가대표가 15명, 자치구대표가 56명에 이른다. 이들은 국내외의 정규대회에서 68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것을 비롯하여 세계신기록 1번, 국내기록 20여 번을 경신하는 등, 국가 궁도사업의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민간에서는 소규모의 궁도대회가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으며, 최근 갈수록 많은 사회인사들이 궁도문화의 발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2002년에 민간조직인 ‘시리딴’(錫力旦)이 발족하여 전통 궁도문화 연구 및 활 공예품 생산활동을 활발히 펼치는 가운데, 2004년 <석백족의 궁도문화>를 주제로 한 논문 발표와 홍보책자 출판이 있었고, 2006년에는 『중화궁도문화』가 출간되었다. 또 2007년 1월, 자치현 문화체육국은 석백족의 활 제작기술을 자치구 정신문화유산으로 신청하여 지정 받는 데 성공하였다. 2007년 2월에는 신강사범대학에 중화전통활연구소가 설립되었으며, 아울러 석백족의 궁도문화가 시대발전에 부응할 수 있도록 많은 인사들이 노력하여 연구소ㆍ회사ㆍ협회의 삼각발전모델을 형성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연구개발 분야에서는 활연구소를 설립하여 궁도문화에 대한 연구를 활성화 하는 한편, 관련산업의 발전과 문화활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문화의 전통성을 확보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 산업경영 분야에서는 공장과 회사를 세워 “상업으로 문화를 육성하고 문화로 상업을 촉진한다”는 사명감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궁도관 건립 및 문화상품 생산판매망을 구축하고 있다. 문화활동 분야에서는 각종 협회와 동아리를 결성하여 민족 전통의 활 쏘기 훈련이나 시범 및 대회 등 내용을 되살리고, 문화교육사업으로 확대해 나가며, 시대적 추세에 맞도록 체계적인 육성제도와 단위제도(段位制)를 수립하고, 학교의 교과과정에 포함하도록 전파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모델과 실천을 통해야만 민족 전통의 궁도문화가 자리를 잡고 계승될 수 있으리라 믿으며, 아울러 궁도문화에 관심이 있는 각계 인사들과의 교류협력을 통해서 전통 궁도사업 발전을 함께 추진하기를 희망한다.
첫댓글 잘 봤습니다.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정말 좋은 글입니다..제가좀 빌릴게요..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