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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운동학생회 창립 선언문]
1. 우리 배달겨레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고 고유한 글자를 창조하였고, 어느 나라 사람보다도 먼저 활자도 발명하여, 우리 자손 만대의 복지 사회 건설은 물론 세계 문화 건설에 이바지하도록 은혜 받은 자랑스런 겨레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대주의에 젖어 있던 이 겨레의 옛 지도자들은 이 거룩한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긴 잠에만 빠져 있다가, 마침내는 외세의 침략으로 얼룩진 겨레의 수난사만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이제라도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이룩하지 못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또 욕된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손 만대의 한을 더는 남기지 않기 위해서, 여기 뜨거운 배달겨레의 피가 용솟음치는 젊은 지성들이 모여 새 역사에 찬란할 국어 운동의 거대한 횃불을 드높이 쳐드는 것이다.
2.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1) 조국 현대화를 완수하기 위해서
2) 민족 문화 발전과 국가의 주체성을 살리기 위해서
3) 극심한 국제적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다음 세 가지 목표를 향해 대학생으로서 가능한 우리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대학 안에서부터 대학 밖으로, 나로부터 이웃으로, 나아가 정부 당국으로 하여금 한글전용의 법제화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때까지, 조국 현대화의 대열에 참가한 온 국민의 이해와 협조를 촉구하고자 한다.
[ 3대 목표 ]
첫째, 한글전용에 대한 바른 인식과 그 생활화에 앞장서자.
둘째, 글자 생활의 기계화로 조국 현대화를 촉진하자.
셋째, 국어정화와 우리말 애호로 배달겨레의 얼을 간직하자.
1967년 3월 16일
[회원 신조]
1. 우리는 풍요하고도 내일이 있는 복지 국가 건설을 이상으로 한다.
2. 우리는 국어 운동과 한글만 쓰기를 배달겨레의 첫째 과제로 알고 적극 펴 나간다.
3. 우리는 민족 문화 선양과 그 발전에 이바지한다.
(1968년 9월)
"국어 운동이란 나랏말을 깨끗하게, 쉽게, 바르게, 풍부하게, 너르게(널리 펴는) 하는 일이다."
[국운회 노래 "내말 내글"]
국어운동학생회 작사
금 수 현 작곡
(행진곡 풍으로 부를 것)
1. 제 것일랑 버려 두고 남의 것만 찬양하던 조상이 예 있었어 검은 구름 펴 놓았네 배달이여 잠을 깨어 이 땅을 밝게 하세 내 말 내 글 내 마음이 그 얼마나 빛나는가
2. 제 것 여기 없었던들 남의 속에 묻혔을걸 핏줄이 살아 있어 풍랑조차 물리치니 젊은이여 힘을 모아 겨레탑 쌓 올리세 내 말 내 글 내 조국이 그 얼마나 굳셀손가
[전국 국어운동 대학생 연합회 해적이]
1967년 3월 16일 17시
서울 대학교 문리과 대학(동숭동) 본2강의실에서 "국어 운동 횃불 점화식"이라는 이름으로 학생 17명과 허 웅 교수님, 신 익성 교수님, 한 갑수 님, 문 제안 님이 참석한 가운데, "국어운동 학생회 선언문"을 채택하는 국어운동 학생회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이 날 사회는 이 병용 군이 맡았고 발기인 대표로는 국어 운동 학생회 선언문을 기초한 이 봉원 군이 뽑혔다.이것이 국어 운동 대학 동아리의 시발이었으며, 그 뒤를 이어 연세 대학교, 고려 대학교, 동국 대학교에서 국어 운동 학생회가 속속 창립되었다. 동아리의 이름은 대개 ‘국어 운동 학생회’였고, 줄여서 ‘국운회’라 하였다.
1967년 5월 8일
서울 대학교 국운회 주최 제1회 고운 이름 뽑기 시상식이, 당시 문화방송 공개홀로 쓰이고 있던 서울 종로예식장 특실에서 어머니날 행사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대한어머니회 회원들 앞에서 있었다. 첫 금상 수상자는 ‘금 난새-내리-누리-노상’(작곡가 금 수현의 아들딸) 남매였고, 은상 수상자는 '민 달래', '오 귀염' 그리고 장려상 수상자는 '신 봄메', '김 송이', '장 푸르메-슬기로-다사로-하아루' 남매, '박 한미리-한누리-한서리-한기리-한수리' 형제였다. 이 행사에 여러 언론과 많은 국민이 관심을 보여 주었다.
고운 이름 뽑기 연례 행사 안내 요지
주 최 : 서울 대학교 국어 운동 학생회
취 지 : 아름다운 우리말을 찾고, 쉬운 한글만을 쓰는 국어 운동의 첫걸음으로 우선 내 이름부터 한글로만 쓰기로 하고, 될 수 있으면 새 이름은 순우리말로 짓기를, 국민 여러분께 호소하는 뜻에서 이 행사를 마련한다.
심사대상 : 1945년 8월 15일 이후에 태어난 대한민국 국민으로 지금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으로서, 호적에 한글로 오른 이름.
심사기준 : ㄱ. 순우리말이거나 또는 음향이 아름다운 이름 ㄴ. 성과 잘 어울린 이름 ㄷ. 돌림자도 참작했음.
행사의 뜻 : ㄱ. 문화 자존심을 해치는 한자 이름에, 우리 모두 부끄러움을 느끼고,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ㄴ. 남의 비웃음을 받아가면서도 뚜렷한 주체의식을 가지고 한글이름을 지어준 어버이들을 격려한다. ㄷ. 출생신고서에 한글로만 이름을 적을 수 있다는 법적 사실을 전 국민에게 일깨워 준다. ㄹ. 한글이름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그 방향을 모색한다.
1967년 10월 9일
한글날에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의 국운회가 공동으로, 대통령에게 보내는 한글전용 건의문을 채택하고, 한글운동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는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서울대 국운회에서는 한글전용과 국어순화에 대한 표어 모집 시상식을 서울시민회관에서 열고, 인쇄한 표어 57,000장을 전국에 배포하였다.
그 뒤 바로 고려대, 동국대, 서울대, 연세대의 국운회가 합동으로 강연회, 성명서, 한글전용 촉구 대회를 잇달아 열고, 거리 간판 말글 바로잡기, 한글전용 여론 조사 활동 등을 펼쳐 언론이 주목하고 크게 보도하였다.
1967년 11월 6일
고려대 국어운동학생회는 총학생회 후원으로 이 은상과 정 인섭 선생을 연사로 초청하여 대강당에서 대강연회를 열었다.
1967년 11월 13일
‘한문 약자 시안’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동국대의 국운회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1967년 11월 26일 19시
서울 대호다방에서, 서울대 이 봉원과 고려대 박 노용, 연세대 정 중헌이 모여 국어운동 학생 연합회로는 최초로 발기 모임을 열었다.
1967년 11월 28일
연세 대학교 국어운동 학생회는, 총학생회와 공동 주최로 "한글 운동 학생 대회 취지문"(총 학생회장)과 선언문(국운회 회장)을 낭독하고, 국회의장· 국무총리· 신문 잡지 편집인 협회에 보내는 건의문과 결의문도 채택했다.
1967년 12월 22일
청주시에서 연합회 창립 준비 행사로, 정 인섭 선생과 허 웅 교수를 초청하여 한글 강연회를 열었다(청주시 문화원과 공동).
1968년 3월 18일
정부의 단계적 한글 전용 5개년 계획 시안에 대한 환영 성명서를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동국대의 국운회가 공동으로 발표하였다.
1968년 3월 31일
회지(내일) 제 1호를 2,000부 발간하였다.펴낸곳: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부산대 국어 운동 학생회주관: 고려대학교 국어운동 학생회
1968년 5월 5일
국어운동 대학생회에서 작사하고 금 수현이 작곡한 <내 말 내 글>이라는 노래를 제정하였다.
1968년 6월 27일
청주시에서 청주 대학 국운회 주최로 초청 강연회(연사, 이 은상 님, 한 갑수 님)가 있었는데 이날 밤에 두 번째 연합회 발기인 모임을 열었다. 참석자는 청주대 강 윤식, 연세대 장 국진, 고려대 김 명학, 서울대 이 봉원 이상 네 대학 대표들이다.
1968년 9월 14일 20시
서울, 석굴암 다방에서 동국대 이 택로, 고려대 김 명학, 서울대 이 봉원이 모여 세 번째 발기인 모임을 열고, 회칙과 회원 신조의 초안을 작성했다.
1968년 9월 22일 10시
민족 문화 협회 사무실에서 다음의 15명이 모인 가운데 ‘전국 국어 운동 대학생 연합회’의 창립 총회를 열었다.
△서울대: 이 봉원, 김 정근, 이 병용, 남 영신, 전 응진. △연세대: 장 국진. △고려대: 박 노용, 김 명학. △동국대: 이 택로(대로), 김 범열. △청주대: 이 인호, 최 재문, 강 윤식. △청주교대: 권 혁노. △대전대: 최 재원
그리고 그 자리에서 회칙을 확정하고 창립 선언문을 발표하였으며, 다음과 같이 임원진을 구성하였다. 지도교수로는 서울대 허 웅 교수를 모셨다.
△회장: 이 봉원(서울대 심리학과 3). △부회장: 김 명학(고려대 상학과 3)․강 윤식(청주대 행정학과 3). △감사: 이 대로(동국대 농경학과 3)․최 재원(대전대 영문학과 2). △총무: 김 범열(동국대 국문학과 3). △경리: 김 정근(서울대 사학과 2). △조직: 최 정호(연세대 국문학과 3)․전 창환(고려대 임학과 3). △섭외: 마 정임(고려대 농경학과 3)․양 영희(연세대 국문학과 3). △편집장: 최 노석(연세대 국문학과 2)
1968년 10월
1968년 8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전국 주요 도시의 학생· 일반인· 공무원 1,66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글 전용 찬반에 관한 기초 여론 조사(설문 3개) 결과를 발표하였다(책임 회원: 박 노용)
1968년 10월 9일
이 해 봄에 서울 덕수궁에 세워진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처음으로 꽃바치기 행사를 가졌다. 참가한 대학은 경희대, 대전대, 동국대, 부산대, 서울대, 숙명여대, 연세대, 이화여대, 인천교대, 청주대, 청주교대였으며, 세종대왕 앞에 꽃을 바치고, 다음과 같은 3개 항의 결의를 하였다. 그로부터 꽃 바치기 행사는 한글날마다 했으며, 대개 한글 학회 등과 함께 하였다.
1968년 11월 1일
회보 1회를 펴내었다. (편집장: 최 노석)
1969년 3월
1968년 10월 9일부터 1969년 1월 31일까지 전국적인 규모로(각계각층 813명을 대상으로) 제2차 여론 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였다. 한글과 호적법상의 여러 문제에 대한 설문 10개, 한글 전용 일반에 관한 설문 3개, 이름을 표기할 때의 한글 전용 실태 등, 모두 열네 문제를 조사하였다(책임 회원: 이 봉원).
1969년 4월 5일
제2차 정기회를 한글학회 회의실에서 열었다. 앞 회기의 결산 보고, 회칙 개정, 임원 선출, 미래의 사업 계획 토의 등을 하였다. (제2대: 회장 김 명학, 부회장 박 연백)
1969년 4월 5일
회보 제2호를 펴내었다(편집장: 최 노석).
1969년 9월 20일
연합회(전국 17개 대학동아리) 회지 '내일'을 2,000부 발간하였다(4×6배판, 42쪽).
1969년 9월 22일
제3차 정기회를 한글 전용 국민 실천회 회의실에서 열었다. 회칙에 따라 새 임원 선출, 앞 회기의 결산 보고, 회칙 개정, 미래의 사업 계획 논의 등을 하였다. (제3대: 회장 최 노석, 부회장: 신 현숙 외 2인)
1969년 10월 8일
무교동 "한밭식당"에서 17 대학의 대표자들이 모여 523돌 한글날 행사를 위한 최후 점검을 하였다.
1969년 10월 9일
523돌 한글날을 기념하여 덕수궁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두번째 꽃바치기 행사를 가졌다.
1969년 10월 26일
회원· 지도교수와 대화하고 회원끼리의 친목을 위해, 가을 들놀이를 북한산성에서 개최하였다. (허 웅 교수 참석)
1969년 11월 13일
덕성 여자 대학교 국어 운동 학생회 창립 총회를, 오후 4시에 연합회 지도 교수 허 웅 교수와 연합회 임원, 각 대학 대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개최하고(회장: 이 미자, 부회장: 구 명자), 이튿날 기념 강연회를 열었다. (최 노석: 한글 전용의 생활화)
1969년 11월 15일
서울대 국어 운동 학생회가 문교부 장관 표창장을 받았다.
1969년 11월 20일
숙명 여자 대학교 국어 운동 학생회 창립 총회(회장: 고 영숙, 부회장: 이 순임. 지도교수: 이 을환)와 기념 강연회를 가졌다. 이 봉원, 김 명학 등이 강연하였다.
1969년 11월 29일
상명 여자 사범 대학 국어 운동 학생회 창립 총회를 개최하였다(회장: 신 현숙, 부회장: 국 인숙. 지도교수: 윤 재천). 이어서 창립 기념 강연회를 열었다. (윤 경혁: 건축상의 외래어 조사)
1969년 12월 3일 17시
연세대 학생회관 제1회의실에서 회원들이 모여 연합회 창립 첫돌 잔치를 열었다. 연세대 전 규태 교수와 문 제안 선생도 참석하였다.
1970년 2월 12-14일
청주 충북 여성 회관에서 첫 번째 ‘전국 순회 계몽 강연회’를 가졌다. 연사는 문 제안 선생, 김 계곤 교수, 최 노석 회장이었다. 그리고 간판 말글을 조사하고, 한글전용과 국어정화에 대한 전반적인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다.
1970년 2월 16-17일
대전 호수돈 여자 고등학교에서 강연회를 열었다. 연사는 허 웅 교수와 한 갑수 선생이었다.
1970년 2월 18-19일
전주에서 간판 조사와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전주시 문화원에서 강연회를 열었다. 연사는 정 인섭 교수와 허 웅 교수였다. 그리고 전주문화방송에 출연하여 국운회 전반에 대한 좌담회를 가졌다.
1970년 2월 27일
춘천에서 간판 조사와 여론 조사를 실시하고, 강원도 여성회관에서 강연회를 열었다. 연사는 한 갑수 선생과 연세대 박 영준 교수였다.
1970년 3월 27일
외솔 최 현배 선생의 사회장에 참석하였다. 회원 전원이 장례 당일 손님맞이와 그 밖에 여러 가지 일을 거들며 가신 임의 명복을 빌었다.
1970년 3월 28일
새 회원 맞이 큰잔치를 열었다. 연합회에 딸린 대학 국운회의 새 회원을 연세대 학생회관 제1회의실에서 모아 환영 잔치를 베풀었다.
1970년 3월 29일
제4차 연합회 정기총회를 열었다.
4대 회장
김 정수(서울대 언어학과 3년)
부회장
김 태수(연세대 국문과 2년), 정 태연(상명여사대 국어과2년), 김 형년(청주대 국문과 3년)
총 무
김 종구(동국대 국문과 2년)
1972년 10월 9일 9시 30분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꽃바치기 모임을 갖고, “대통령께 드리는 건의문”과 세 번째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1972년 10월 9일 11시
대학 국운회 출신들이 외솔회 회의실에 모여 ‘국어 운동 학생회 동문회’(약칭 ‘국운동문회’)를 결성하였다. 회장: 이 대로. 총무: 강 상구․정 태연. 참석한 동문은 박 노용, 연 경탁, 윤 경혁, 김 정수, 강 상구, 이 근면, 이 환성, 김 정환, 정 지훈, 이 호원, 이 대로, 이 봉원, 유 상길, 장 영숙이었다(모두 14명). 소식지 <소리>를 내고, 후배들을 지도하고, 한글 학회 등 한글 단체와 협조하면서 한글 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하였다. (그 후 <소리> 제1호와 제2호는 연세대 출신 윤 경혁, 제3호는 서울대 출신 강 상구, 제4호는 서울대 출신 김 정수가 편집하여 펴내었다. 후배들의 활동 소식, 동문 소식, 말글 정책 동향 등을 실었으나, 군사 독재 하의 까다로운 검열 때문에 중단되고 말았다.)
1972년 10월 14일 17시
연세대 학생회관 제1회의실에서 연합회 창립 네 돌 잔치를 치렀다.
1977년 10월 27일
한글보람 운동을 시작했다.
1972년의 활동 이후, ‘10월 유신’이라는 비상 조치가 발표되면서 모든 학생 활동도 얼어붙고 말았다. 그런 상황은 1980년 10·26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말글 운동 동아리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이들의 활동은 한글날 행사 중심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대학 단위의 동아리가 그러한 상태였으니 연합회도 한동안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한글보람 운동은 그 역경 속에서 다시 고개를 든 국어 운동의 일환이었다.
한글보람을 가슴에 달자는 운동은 1977년 10월 6일 국운동문회에서 처음 기획· 제안했고, 10월 27일에는 국어 순화 추진회 회원들로부터 이 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를 다짐 받았다. 이어 도안 공모에서 김 정수 동문(현재 한양대 교수)이 고안한 도안이 뽑혔고, 그뒤 우리 동문회는 시제품 35개와 보급품 1천여 개를 잇달아 제작 보급했다. 한글보람은 1978년 3월까지 모두 1,250개가 제작돼 팔렸다. (일반판매가 300원, 회원판매가 100원)
당시 국운동문회가 한글보람 운동을 북돋우기 위해 만든 광고와, 한글보람 도안을 보기
1984년 11월
5개 대학—건국대, 고려대, 상명여대, 서울대, 연세대—의 한말글운동 동아리들이 모여 ‘국어운동 대학생연합회’를 창립하였다. 으뜸빛은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김 슬옹이 맡았으며, 버금빛은 상명여자대학교 한 혜순이 맡았다. 지도교수는 허 웅 교수의 뒤를 이어, 상명여자대학교 최 기호 교수가 맡았다.
1985년 3월 30일
이 병혁 교수(서울시립대)를 초청하여 창립 기념 강연회를 열었다.
1985년 5월
각 대학 축전 때 한글 웃옷을 만들어 팔았다.
1985년 7월
연합회 자료 제1집을 내었다.
1985년 8월
경기도 여주국민학교에서 수련회를 가졌다. 의무 기록(진료 처방전 등) 한글화 움직임에 즈음하여 지지 성명서를 내었다.
1985년 10월 3일
연합회 정기총회를 열고 새 앞선빛을 뽑았다. 으뜸빛: 김 불꾼(건국대), 버금빛: 조 윤경(상명여대).
1985년 10월 9일
“539돌 한글날을 맞이하여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글”을 발표하고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85년 10월
“틀리기 쉬운 말”과 “이런 말은 이렇게 씁시다”란 내용의 알림글과 작은 외침을 적은 쪽지를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85년 11월
“직업명 개선에 대한 우리의 의견”이란 성명서를 발표하고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85년 12월 16일
‘전국 국어운동 대학생연합회’(가칭)의 결성을 알리고 동참을 바라는 공문을 전국 대학의 국어운동 동아리에 보내었다.
1986년 1월
서울지역 대학의 동아리들로만 꾸렸던 ‘국어운동 대학생연합회’의 이름을 ‘서울․인천지구 우리말운동 대학생연합모임’으로 바꾸었다.
1986년 1월 15일
서울․인천지구 우리말운동 대학생연합모임에서 <겨레입김>이라는 신문 해오름호(제1호)를 펴내었다.
1986년 1월 15-17일
대구 가톨릭 문화 회관에서 전국 10개 대학—건국대, 경기대, 경북대, 계명대, 고려대, 대구교대, 부산여대, 상명여대, 연세대, 영남대—의 동아리 회원이 모인 가운데 ‘전국 우리말 운동 대학생 연합 모임’(딴이름: 한말글)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연합을 재창립하였다. 서울대, 인천교대, 한국외대, 우리마당, 대구대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가입 동의를 하였고, 이로써 참여 학교는 15개가 되었다. 1972년 이후 중단되었던 국어 운동 전국 연합 활동이 재개되는 순간이었다.
으뜸빛: 김 불꾼(건국대), 지도교수: 최 기호(상명여대).1월 16일에는 ‘전국 우리말운동 대학생연합모임’의 회칙을 통과시켰고, 창립 선언문과 함께, 대통령께 드리는 건의서—대중매체와 거리 간판에서의 한자혼용, 무분별한 트기말과 신조어 사용을 막아 달라는 내용—를 만들었다.
1986년 3월 15일
전국연합 대표자 회의를 서울 한글회관에서 열어 ‘우리말 사랑의 길—전국 순회 강연회’를 열 것을 결의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1986년 4월 21일
한국어문교육연구회 등 5개 단체에서 낸 “86 행사에 즈음한 거리 간판 등 개선에 대한 건의문”에 관하여, “우리나라의 거리를 외국말 전시장으로 만들 것인가!”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내어 반박하였다. 그 성명서를 전국연합 15개 대학—건국대, 경기대, 경북대, 계명대, 고려대, 공주사대, 대구교대, 부산여대, 상명여대, 서울대, 연세대, 영남대, 우리마당, 충남대, 충주건대—의 동아리 이름으로 정부 기관에 보내고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86년 4월 28일
“KBS 시청료 거부 운동에 대한 지지 성명”을 내었다.
1986년 5월 17일
“우리는, 이렇게 주장한다”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만들어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86년 5월 23일
서울연합 앞선빛을 새로 뽑았다. 으뜸빛: 김 해보(서울대), 버금빛: 이 미금(연세대).
1986년 5월
문교부에 “외래어 표기 학생용품 안 쓰기 지도 협조” 건의서를 내었다.
1986년 6월 7일
부산 수산대에서 부산 연합 모임 창립 총회를 열어 앞선빛을 뽑고, 초청 기념 강연회를 가졌다. 허 웅 교수: 말과 정신. 박 지홍 교수: 학생 국어 운동의 방향성.
1986년 7월 5~16일
세 번째 ‘우리말 사랑의 길―온나라 순회 강연회’를 열었다. 그 기간 동안 여러 말글 현상에 대하여 국민 여론 조사를 실시하였다. (1970년 2월의 ‘전국 순회 계몽 강연’을 그 첫 번째로 쳤다.)
1986년 7월 17~20일
전북 무주 구천동에서 ‘온나라 순회 강연회’ 결과 보고 및 평가회와 전국연합 수련회를 가졌다.
1986년 10월 4일
서울연합 정기총회를 열어 앞선빛을 새로 뽑았다. 으뜸빛: 김 해보(서울대), 버금빛: 정 귀원(연세대)․정 민구(건국대).
1986년 10월 7일
“남북 언어 회담 제의와 남북 언어 특별 대책위원회 설치에 관한 일”이란 제목으로 대통령께 건의서를 내었다.
1986년 10월 9일
덕수궁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한글학회 등 여러 단체들과 꽃바치기 행사에 참여하고, 남북 언어 회담 제의 발대식을 가졌다.
1986년 11월 14일
“국어교육에 대한 우리의 주장” 건의서를 제5차 교육 개혁 심의회에 내었다.
1987년 2월 13일
“한말글 창립 첫돌을 맞이하여”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87년 2월 13~15일
전국 연합 정기 총회를 한글회관에서 열어 회칙을 일부 고치고, 새 앞선빛을 뽑았다. 으뜸빛: 김 해보(서울대). 그날 국민학교 한자 교육 반대에 대한 알림글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87년 4월 3일
한국 교육 개발원 간담회에 참가하고, 국민학교 한자 교육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87년 4월 25~27일
전국 연합 임시 총회를 한글 회관에서 열었다.
1987년 4월 27일
서울 종로에 있는 태화 기독교 사회 복지관에서 국민학교 한자 교육 반대 강연회를 열고, 강연회를 마친 뒤에는 종각까지 행진하는 시위를 하였다. 연사는 전 택부 선생과 문 제안 선생, 그리고 김 불꾼이었다.
1987년 5월 21일
전국 연합 회지 <한말글> 해오름호(제1호)를 펴내었다.
1987년 6월 6~7일
대구 경북대에서 전국 연합 임시 총회를 열어 네 번째 ‘우리말 사랑의 길―온나라 순회 주제 발표회’와 전국 연합 수련회를 열기로 결의하였다.
1987년 7월 20일
“헌법을 한글로 씁시다”라는 제목으로 성명서를 내고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87년 8월
독립 기념관의 말글 실태 조사를 하였다.
1987년 8월 3~10일
네 번째 ‘우리말 사랑의 길―온나라 순회 주제 발표회’를 열었다.주제: 말글의 폭력화(서울), 남북한 말글 달라짐(대구), 말글의 얽매임(부산).
1987년 8월 11~14일
전북 무주 구천동에서 주제 발표회 보고 및 평가회와 전국 연합 수련회를 가졌다.
1987년 8월 28일
이 영일 국회 문공 위원장에게, ‘국어 교육 월보 창간호에 국회를 대표하여 한자쓰기를 옹호하며 응원을 보낸다는 식의 글을 써 공인으로서 한쪽 편을 드는 것은 옳지 않으니 사과하고, 잘못되었음을 해당 잡지에 글을 써 밝히라’는 내용의 공개 글월을 내었다. 부산 연합에서 총회를 열어 앞선빛을 새로 뽑았다. 으뜸빛: 김 석태(부산 수산대), 버금빛: 이은임(부산여대).
1987년 9월 5일
‘헌법은 한글로 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정부에 내었다.
1987년 10월 3일
서울 연합에서 정기 총회를 열고 앞선빛을 새로 뽑았다. 으뜸빛: 민 병근(고려대), 버금빛: 최 충현(서울대).
1987년 10월 9일
덕수궁에서 한글날 기념식을 열고 서울 연합에서는 “신문은 국민을 속이고 있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전국 연합에서는 “한자 섞인 헌법은 국민의 것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발표하고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987년 10월 19일
‘한자 섞인 헌법은 국민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헌법을 비롯하여 모든 공문서는 한글로만 써야 한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정부에 내었다.
1987년 10월 23일
한자 헌법 반대 운동에 들어갔다. 각 대학에 붙박이, 대자보 등을 붙이고, 전국 연합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해 선거 관리 위원회 진입 농성을 시도하며 “우리는 선관위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헌법은 한글로 되어야 하며, 한자 섞인 공문서는 국민을 우롱하는 정치 도구이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87년 12월 1일
말글 정책에 대하여 통일민주당과 간담회를 가졌다.
1988년 2월
전국연합 정기총회를 열어 새 앞선빛을 뽑았다. 으뜸빛: 김 재광(경희대).
1988년 6월 1일
“국회 의원의 이름패를 한글로”라는 청원서를 국회와 정부에 내었다.
1988년 6월 9일
“국민학교 한자교육은 망국의 지름길”이라는 성명서를 내었다.
1988년 7월 1일
전국 연합 회지 <한말글> 둘째 호를 펴내었다.
1988년 7월 6일
“우리의 연하장엔 한글만 씁시다”라는 건의서를 체신부에 내었다.
1988년 7월 14일
“국회 의원의 이름패를 한글로”라는 청원서(6월 1일)에 대한, 국회 운영 위원회의 회신—‘40여 년 동안 불문율로 정립되어 온 것이므로 신중해야 한다’는 내용—에 대하여 항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때 서명한 대학 동아리는 모두 22개였다. 서강대 국어 운동 연구회, 서울 시립대 우리말 사랑 모임 강다리, 영남대 한글물결이 새로 가담하였다.
1988년 8월 3~6일
경북 구룡포에 있는 경북대 수련장에서 전국 연합 수련회를 가졌다. 그 수련회에는 재창립 이후 광주· 전남 지역에 새로 생겨난 동아리의 회원들이 처음으로 참석하였다.
1988년 9월 17일
한글 회관 강당에서 ‘전국 국어운동 대학생 동문 모임’을 새로 만들었다. (1대 회장 이 대로)
1988년 11월 28일
국회의원의 이름패를 한글로 바꿔줄 것을 한 번 더 강력히 요청하며 공개 질의서를 보내었다. 그때 서명한 대학 동아리는 모두 25개로 늘어났는데, 강원대 말글사랑터, 서울 산업대, 전남대 우리말 동아리, 충북대 우리말 사랑패 등이 새로 동참하였다.
1989년 2월 17일
전국 연합 정기 총회를 열어 회칙 내용을 일부 바꾸고, 전국 연합의 이름도 ‘전국 우리말 운동 대학생 연합 모임’에서 ‘전국 한말글 운동 대학 동아리 연합’으로 바꾸었으며, 앞선빛을 새로 뽑았다. 으뜸빛: 문 승준(건국대).
1989년 7월
문 승준이 개인 사정으로 으뜸빛에서 물러남에 따라 임시 총회를 열어 김 한빛나리(경기대)를 새 으뜸빛으로 뽑았다.
1989년 8월 10일
전국 연합 회지 <한말글> 셋째 호를 펴내었다.
1991년 1월 11일
전국 연합과 서울 연합이 공동으로 ‘한글날 공휴일제 폐지 반대 비상 대책 위원회’를 꾸려 그때부터 3월 2일까지 활동에 들어갔다.
1991년 3월
서울 연합 출신 90학번 동문들이 모여 <열려 있는 서울연합 소식지> 해오름호를 펴냈다.
1998년 9월 26일
서울 한강 둔치에서 동문 20여 명이 모여, 동문회 4대 회장으로 대학교 국운 연합회 초대 회장이었던 이 봉원을 선출했고, 새 이끔빛은 동문회 누리집(홈페이지)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1999년 10월 9일
전국 국어운동 대학생 동문회 누리집을 이 병철 동문의 특별한 애씀으로 완성하여 공개했다.
2013년 1월 11일
전국 국어운동 대학생 동문회 5대 회장으로 김 슬옹(1984년 11월 ~ 1986년 1월, 국어운동대학생연합회 으뜸빛)을 추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