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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복음침례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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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을 알게된 이야기 스크랩 구원파의 웨슬레 전공자, 구원받기까지
빛별 추천 0 조회 235 07.05.12 14: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월간지 글소리 5월호에 실린 권창순 님의 간증이 좋아서 실어봅니다.

결국은 신학공부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에서 발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신학대학에 입학하기까지

중학교 1학년까지 나는, 내 개인 신상과 가족사항의 종교 란에 항상 ‘유교’ 라고 적었다. 우리 집안에서는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유교가 나와 우리 가족의 종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성실하고 예의 바르고 착하다는 말을 자주 듣고 자란 도덕적인 모범생이었다.

 

중학교 2학년 봄, 처음으로 교회에 나갔다. 마침 부활절 행사 주간이었다. 목사님은 설교에서 ‘기독교에서 큰 명절은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이다. 부활절의 메시지는 기독교 최대의 메시지이다.’라고 하셨다. 그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로 느껴졌다. 시간적으로는 거의 2천 년 전에 일어난 일이며, 장소적으로는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중동에서 벌어진 사건인데 어떻게 내 인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우리 집안에서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기독교의 명절에 교조의 돌아가신 날을 잊지 않고 기념하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편했다.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 최대의 메시지라고 하니, 지금은 교회에 다닌 지 얼마 안 되어 이해하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하며 일단은 덮어 두었다.

 

교회에 나가자 나는 곧 열성 교인이 되었다. 각종 집회에 출석할 뿐만 아니라 새벽 기도회에도 참석하였다. 그리고 성경은 매일 의무적으로 읽었다.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구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정독하였다. 특히 마태복음 5장에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는 말씀에, 나는 마음의 고통이 많았다. 그래서 등하교 길에서 여학생을 보면 기도를 하곤 했다. ‘주님, 저는 마음에 간음죄를 지었습니다. 이 죄를 용서해 주세요.’ 이렇게 매번 기도를 하였다. 그렇게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내 마음의 고통은 더욱 깊어만 갔다.

 

교회에서는 일 년에 한 번 이상 부흥회를 했다. 나는 그때마다 부흥 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부흥회는 특히 성령 체험을 강조했는데, 나에게도 성령 체험이 있기를 간절히 기대했다. 성령을 받으면 죄에 대한 생각이나 욕망이 없어지고 깨끗하게 되어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령 체험을 통해 마음속의 죄가 깨끗하게 될 것을 기대했지만, 나에게 그런 체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교회 활동에 더욱 열심을 내었다. 교회 학생회장을 하면서 대화가 잘 통하는 친구와는 깊은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그 가운데 진정한 우정과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가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시기와 질투가 많이 있음을 알았고, 그 사실에 무척 괴로웠다. 아름답고 거룩한 생각만 할 수는 없을까? 목회자가 되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친구와 함께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나는 위선자다

신학대학 1학년의 기간은 어둠과 혼돈된 시간이었다. 기존에 가졌던 신앙에 대한 파괴 작업이 이루어졌다. 기존에 가졌던 신앙을 모두 의심해보고 회의감을 갖게 하는 수업이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들 중에 초자연적인 현상(바다 위를 걷는 예수, 동정녀 탄생 등)은 자연과학의 어떤 원리에 위배되는가 라는 질문들을 던져, 전에 가졌던 믿음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듯이 신앙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가졌던 숙제(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나와의 관계)가 있었고, 신앙생활 중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생각과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다는 양심의 가책)만도 큰 짐인데, 그나마 가지고 있던, 지금까지 열심을 냈다는 자부심까지 기초부터 흔들리는 속에서 지내다 보니, 내 마음은 지쳐만 갔다. 같이 입학한 친구를 만나도 대화 한 마디 할 수 없었다. 그렇게 1학년을 마치고 나는 군에 입대하였고 그 친구는 2학년으로 진급하였다.

 

입대하여 처음 휴가를 나왔을 때 그 친구는 “지난 학기에 권신찬 목사를 모셔다가 학교 채플에서 부흥회를 가졌다. 정행덕 박사도 부흥 강사와 같은 주장을 하는데, 제대하고 복학하면 관심을 가지고 들어 봐라” 하며 내게 권하였다. 그리고 내가 전역했을 때 그 친구는 졸업을 했다. 그 친구가 시골 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하러 가기 전에 만났는데, 자기는 구원받았다면서 구원의 4단계를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내가 듣기에 그것은 당시 빌리 그래함 목사가 말하는 내용이었고, 구원에 대한 교리를 정리한 것 정도로만 생각했다.

 

전역 후 복학하여 2학년을 다니면서 두 가지 일에 열심을 내었다. 학교에서는 정 박사님의 강의에 열중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까운 교회에 나가 열심히 봉사하였다. 학교에서 정 박사님의 성경에 대한 명쾌한 해석은 좋았지만 열정이 느껴지지 않았고, 그 교회에는 열정은 많았지만 명쾌한 성경 해석과 뚜렷한 메시지가 없는 것 같았다. 이런 두 생활의 양면을 내 안에서 극복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즉 성경을 명확히 알고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이상적인 상태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내가 봉사하던 교회의 주일학교 여교사가 권신찬 목사의 ‘구원파’에 다닌다 하여 문제가 생겼다. 내용을 들어 보니 그들은 ‘사람이 한번 구원받으면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죄가 없으며 한 번 회개하면 다시는 회개할 것이 없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그 구원파는 참으로 이단이구나. 어떻게 죄 많은 세상에 살면서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가? 사람은 매일 죄를 짓는데 한 번만 회개한다니? 완전히 억지 주장이고 정말로 나쁜 이단이구나.’ 하며 울분마저 느끼게 되었다.

 

1년 반 동안의 수업 중에서 배운 것도 있고, 교회 봉사 활동을 하면서 전하고 싶은 내용도 생겼기에 연습 삼아 내가 직접 교회에 봉사해 보자는 결심을 했다. 그래서 학교 선배가 추천한 교회에 가 보았는데 상황이 어려운 교회였다. 내 나름대로 사명감도 생기어 결심을 하고 초여름에 그 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그 해 겨울방학을 맞이하여 부흥회를 열기로 하고 교회의 직분을 맡은 분들과 회의를 가졌다. 그런데 그분들이 강사를 추천하며 얼굴이 잘 생긴 분이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기에 나는 실망감을 느꼈다. 그리고 여러 의견이 있었지만 그 지방의 감리사가 추천하는 목사로 결정되었다. 부흥 강사를 선정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의 인맥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각에,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부흥회를 마치고 신년이 다가왔다. 교회의 한 해 목표를 세우고 세부 실천 항목을 제시하며 표어도 걸어야 했다. 꼭 이렇게 하여야만 하나?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목회자와 교인들의 욕심을 채워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신년 목표와 실천 항목을 정할 때는 교인의 숫자를 늘리고 헌금을 많이 내게 하여 부자 교회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 ‘나는 위선자다’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내가 교회에 봉사한다고 하면서 돈과 명예를 바라고 있구나. 돈이 목적이라면 사업을 하고 명예를 바란다면 정치를 하는 것이 솔직한 것이 아닌가? 목회자가 되면 신령하고 성결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신학대학에 갔는데 이것이 무엇이냐?

 

 

 

생명이 있어 움직이는 말씀을 깨닫고

괴롭고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전에 그 교회를 시무했던 분이 찾아왔다. 그분은 서울로 올라가, 서울 어느 교회의 전도사로 시무하던 중 복음을 깨닫고 구원받았고, 그 후 교회 일은 접은채였다. 그분은 나에게 정행덕 박사님을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교수 중에 제일 가깝게 지낸다고 답했다. 그분은 자기 간증을 했다. 그동안 자신은 구원받지도 않은 채 남을 가르쳐 왔으며, 남들이 보기에는 의로운 목회자였지만 자기 속에는 남들과 똑같이 더러운 것이 있었다는 말을 했다.

 

그의 간증은 나의 현 주소였다. 무엇보다도 내가 비참함을 느끼게 된 것은, 이 분도 분명한 죄 문제의 해결을 보았는데 나는 무엇 때문에 앉아만 있는가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 안에 선이 없는데 만인에게 의인처럼 나타내는 것과 그러면서도 남들을 가르친다는 위선의 죄가 크게 느껴졌고 내 죄가 중(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정 박사님께 편지를 썼다. 모든 문제를 제쳐두고 내 구원 문제를 해결해야 하므로 만나 뵈러 갈 테니 시간 좀 내달라는 내용이었다. 정 박사님 댁에서 상담과 성경 공부를 하였다. 성령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는 시간에 대하여,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성경을 자세히도 읽으시는구나.’ 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런 문제로 정 박사님을 찾아 온 것이 아니었다. 내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시급했다. 정 박사님 댁에서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타고 오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때 마침 철도 건널목을 지나고 있었는데, 기차가 내 목을 두 동강 낸다 해도 아무런 느낌이 없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교회의 운영은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에 의해 인도된다는 기대는 산산이 깨어졌고, 나 개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상처투성인 죄인이었다.

 

이런 상태로 교인들에게 설교하는 것은 더욱 죄를 짓는 것 같았다. 시골 교회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전에 방문하여 간증하였던 그분과 함께 성경을 읽고 대화를 나누었다. 구약 성경 이사야 43장 25절의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이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충족시키셨다는 것을 깨달았고 내 모든 죄가 예수의 십자가 위에서 해결되었다는 믿음이 왔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교회생활에 열심을 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보답으로 내가 가진 귀한 시간과 정성을 드린다고 했지만 그러한 수고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의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100% 그분에게서만 오는 선물이었다. 내가 거들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구속하신 확실한 사건과 약속도 내 몸에 체험으로나 기억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완전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안전한 것인 줄을 알게 되었다. 성령을 받으면 죄가 깨끗하게 씻겨 의인이 된다고 생각하여 부흥회 때마다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던가? 새벽 기도회, 철야 기도회, 금식 산기도회에서의 열심 있는 기도와 교회에 대한 봉사, 그리고 완벽한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노력은 나의 것이었지 주님의 것이 아니었다. 죄 묻은 더러운 나의 기도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시고 깨끗한 어린양 한 분만을 받으셨기에 내가 의롭다고 칭함을 받게 된다는 깨달음에서, 나는 안식과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14년 간 믿는다고는 했지만 그것은 인간의 상식 범위 내에서였지, 주님이 주시는 믿음과는 별개였다. 일반 상식으로 가장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단번에 주신 믿음이었다. 진리를 나의 상식으로만 받아들이고 이해가 안가는 사실은 억지로 믿으려고 할 때는 어둠이더니, 주님께서 자신을 보이시기 때문에 받은 믿음이 온 후로는 그것이 밝음이 되었다. 그간은 성경 말씀을 박물관의 화석처럼 귀한 것으로만 느꼈지, 생명이 있어 움직이는 줄을 몰랐다. 나는 새로 태어난 것이었다. 많이 부르던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새롭게 부르게 되었다. 1977년 3월 1일 오전 11경 이전과 그 이후의 나는 확실히 구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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