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시 (詩 Poetry)
연도 : 2010
제작 : 한국
감독 : 이창동
배우 : 윤정희(미자 역), 이다윗(종욱 역), 문희라(강노인 역), 김용택(시인 역)
일상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로 인간군상들의 아픔을 날카롭게 묘사하는 이창동 감독. 눈에 보이되 보지않고 살아가는 현실 세계를 표현함으로써 그 예술적 의미와 해석을 관객들에게 전가하는 이창동 감독. <초록물고기>의 ‘막둥이’, <박하사탕>의 ‘영호’, <오아시스>의 ‘종두’, <밀양>의 ‘신애’라는 주인공들을 통해 왜곡된 삶의 이면과 그 속에서 고통받는 서민들의 아픔을 직시하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달하는 이창동 감독.
발표하는 작품마다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주목을 끄는 그의 다섯번째 작품은 <시>이다. 그가 그려내는 인물의 아픔은 언제나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 아픔들을 면밀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너무도 일상적이다. 너무도 깊이 있게 우리가 보고싶지 않은 상처를 덤덤하게 그러나 낱낱이 드러낸다. 그래서 더 아프고 힘들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잔인하리만치 현실적이고 참담하다. 또 그래서 희망적이다. 밑바닥에 이르러봐야 더 내려갈 곳이 없고 그제서야 다시 꿈틀대고 일어설 수 있는 게 삶의 이치이므로. 사회적 약자가, 서민이, 민중이 언제나 바람보다 먼저 쓰러지고 풀잎처럼 밟혀 쓰러져도 언제나 먼저 일어나듯이 말이다.
그의 최근작 <시> 역시 그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순결한 영혼들의 속절없는 피해와 인간성의 근원, 그리고 죄악과 구원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건드린다는 점에서 <밀양>의 연장선에 있다고도 보겠다. 그의 작품 경향은 <밀양> 이전과 이후로 나뉠 수 있겠다. <밀양> 이전까지, <초록 물고기>부터 <오아시스>까지는 사회구조적 모순과 역사적 질곡, 그리고 그 때문에 빚어진 인간성 왜곡 속에서 억압받고 고통받는 서민들을 그렸다면, 그 이후는 사회.역사적이라는 무게를 내려놓고 인간의 근원적 심성과 본능, 죄의식 및 양심의 문제로 방행타를 돌리고 있다. 물론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들은 언제나 착하고 여리다. 그래서 더 쉽게 피해를 당하고, 더 깊게 고통을 받고, 더 많이 괴로워한다.
<시> 역시 순수한 영혼이 삶 속에서 견뎌내는 상처의 고백이자 자기 치유를 그린 성찰의 노래이다.
한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의 어느 작은 도시가 영화의 배경이다. 영화의 시작은 강물을 따라내려오는 여학생의 시신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여학생은 같은 학교 남학생들로부터 집단 성폭행을 당한 뒤 자살한 소녀이다. 한편 중3인 손자 종욱과 함께 살아가는 미자. 그녀는 꽃 장식 모자부터 화사한 의상까지 멋부리고 치장하는 것을 좋아한다. 마치 소녀처럼. 하지만그녀는 호기심도 많고 엉뚱하기까지한 할머니이자, 신체마비 강노인을 간병하는 파출부이며, 점점 치매가 오는 노인이기도 하다.
미자는 어느 날 동네 문화원에서 '시' 강좌를 신청하고 난생 처음 시를 쓰려고 한다. 강좌 마칠 때까지 시 한편을 써야하는게 숙제이다. 시를 쓰기위해 일상을 관찰하고 주시하며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미자에게 손자가 성폭행 가해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녀는 괴로워한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피해 가족에게 합의금으로 5백만원을 마련해야 하고, 손자새끼 밥 챙겨줘야 하고, 집안 살림해야 하고, 치매 치료도 받아야 하고, 성폭행 사건을 취재하려는 기자도 피해다녀야 하고, 시도 써야하고...정말이지 삶이 녹녹치 않다.
결국 그녀는 강노인을 위한 성행위의 대가로 돈을 구하고 소녀의 죽음을 위로하는 <아녜스의 노래>라는 시를 쓴다. 하지만 현실은 달라지거나 변한 것이 없다. 손자는 형사에게 잡혀가고 또 다른 소녀는 다리 난간 위에 있을 뿐이다.
영화감독 이전에 국어 교사를 하고 82년 <전리(戰利)>로 소설가 데뷔를 한 이창동. 작품집 <녹천에는 똥이 많다>로 전업 소설가의 길을 가던 그가 어느날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에 늑깍이 조감독으로 참여한다. 힘들고 고단한 영화판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박광수 감독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시나리오를 쓰고 97년 <초록 물고기>로 감독 데뷔를 한다.
<초록 물고기>는 한국적 느와르라는 새로운 형식미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느와르가 갖고 있는 암울하고 답답한 분위기가 당시 신도시 개발과 경제성장이라는 미명 하에 도시 소시민과 깡패 등의 룸펜들에게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데 효과적이었다.
이후 광주민주항쟁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터널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변화와 변절을 해야만하는 한 남자의 상처를 그린 <박하사탕(1999)>, 전과자와 뇌상마비 장애인 여자와의 사랑을 환상적 리얼리즘으로 그려내 베니스 영화제 특별 감독상을 수상한 <오아시스(2002)>,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종교적으로, 인간적으로 가능한지 통렬하게 그려낸 <밀양(2007)> 등 그의 필모그라피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모순된 사회 구조에 대한 담담하지만 한(恨)이 서린 비판적 시선이다. (이는 그의 소설에서도 공히 느낄 수 있는 정서와 시각이며, 특히 재미있는 것은 '녹천에는 똥이 많다'를 보면 그의 단편소설에서 영화적 모티프를 가져온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 모순 속에서 피해를 당하고, 좌절하고, 추락하는 평범한 소시민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나운규, 김수용, 이만희, 유현목, 하길종, 박광수 감독 등의 한국적 리얼리즘의 계보를 잊고 있는 그가 있어 다행이고 한국영화의 버팀목이어서 자랑스럽다.
이 영화에서는 특별한 배우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게 또 다른 매력이다.
첫째는 25회에 이르는 한극영화 최다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그야말로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독보적 전설인 윤정희의 컴백이다. 60년대 문희, 남정임과 함께 제 1 세대 트로이카로 한국영화 황금기를 이끌었던 최고의 여배우가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올드 팬들의 가슴은 설레일만하다. 수십년 동안 연기생활을 접었던 그녀가 이창동 감독의 요청으로 은막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그녀의 연기력은 녹슬지 않고 더욱 깊어져 있어 보기 좋다. 또한 재미있는 사실은 극중 미자라는 이름이 실제 윤정희의 이름이라는 사실인데, 이는 감독인 이창동도 전혀 모르고 시나리오를 쓸 때 쓴 이름이라고 한다. 게다가 윤정희의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 역시 극중 미자의 언행이 소녀같은 자신의 아내와 너무도 똑같다는 후일담을 하기도 했다.
둘째는 70년대 카리스마 넘치는 액션 배우 김희라의 출연이다. 당시 박노식, 장동휘와 함께
액션 배우의 대명사였던 그를 볼 수 있음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그는 <마부> 등으로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한국 영화계의 명배우 故 김승호의 아들이다. 부전자전으로 연기력을 물려받은 그는 1969년 영화 <독 짓는 늙은이>로 연기자로 데뷔하고 연예인 2세 시대를 최초로 화려하게 열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후 김희라는 <깃발 없는 기수>, <10대의 영광>, <초분> 등의 수많은 영화를 통해 그만의 선 굵은 연기를 선보인 것으로 유명하다. 이 영화에서도 뇌졸중으로 쓰러졌지만 마초 기질이 있는 강노인으로 나온다. 환갑을 넘겼음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남성의 욕망과 권위주의, 권력과 부를 상징하는 연기를 능숙하게 선보이고 있다.
셋째는 김용택 시인의 출연이다. 미자가 다니는 문학강좌 시간에 강사로 나온다. 극중 이름은 재미있게도 시인 ‘김용탁’이다.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인 그가 생애 처음으로 영화에서도 시인으로 등장한다. 다행히 연기도 자연스럽고 기대 이상이어서 놀랍다.
영화 속 술취한 시인의 말처럼 시가 죽어도 싼 세상. 그러나 세상이 있기에 시는 죽지 않는다. 가슴 한 켠이 살아있다면 영화 속 뜨거운 시를 감상해보자.
<그리운 부석사>
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쇠 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하나 짓네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연탄재를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시를 쓴다는 것>
조영혜
시를 쓴다는 것은
동지섣달 이른 새벽
관절이 부어 오른 손으로
하얀 쌀 씻어 내리시던
엄마 기억하는 일이다
소한의 얼음 두께 녹이며
군불 지피시던
아버지 손등의 굵은 힘줄 기억해내는 일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깊은 밤 잠 깨어 홀로임에 울어보는
무너져 가는 마음의 기둥
꼿꼿이 세우려
참하고 단단한 주춧돌 하나 만드는 일이다
허허한 창 모서리
혼신의 힘으로 버틴
밤새워 흔들리는 그 것, 잠재우는 일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퍼내고 퍼내어도
자꾸만 차 오르는 이끼 낀 물
아낌없이 비워내는 일이다
무성한 나뭇가지를 지나
그 것, 그 쬐끄만한
물푸레 나뭇잎 만지는
여백의 숲 하나 만드는 일이다
* 힐링 포인트
1. 문학강좌 수강생들이 '내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을 말하는 장면.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줘서, 바로 내 모습 같아서 더욱 감동적인 장면.
2. 손자 종욱의 성폭행 사실을 알고 마치 대신 괴로워 하고 참회를 하듯이 샤워하는 장면
3. 미자가 강가에서 시를 쓰기 위해 노트를 펼쳤지만 마치 비가 시를 쓰듯이 빈 노트 위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장면
짧은 컷이지만 여운이 강렬한 장면
4. 죽기 전에 남자구실을 시켜주기 위해 강노인과 정사를 하는 장면. 아마 세상에서 가장 슬픈 정사 씬일 것 같다.
5. 미자가 쓴 시 <아녜스의 노래>가 흐르는 마지막 장면. 성폭행으로 다리에서 떨어져 자살한 소녀의 세례명이 아녜스
(아그네스)이다. 아녜스 '순수한'이란 뜻으로 13세기에 실존했던 동정녀이자 순교자라고 한다.
* 덤으로 볼 추천 영화
인어 베러 월드, 토리노의 말, 르 아브르, 킹스 스피치, 세상의 모든 계절, 무산일기, 피에타, 똥파리, 파수꾼, 도가니,
오늘, 마더, 그리고 이창동 감독의 전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