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양대학교 문화비평연구회> 20100308
Giorgio Agamben, 《Homo sacer》, 새물결, 2008
요약:
3장 근대 생명정치의 패러다임으로서의 수용소
5) VP(인간 모르모트) 6) 죽음을 정치화하기 7) 수용소, 근대성의 ‘노모스’ 8) 경계영역
발제 김혜선
5) VP(인간 모르모트)
▶5.1. 1941년 5월 5일 고공에서의 구조 작업에 관한 연구를 진행해온 라셔박사는 자기 실험이 독일 조종사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히믈러에게 편지를 쓴다. 그는 실험이 비록 VP(인간 모르모트)의 생명에는 치명적이지만, 그렇다고 동물을 대상으로 유용한 실험을 행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실험을 계속하기 위해 ‘직업적 범죄자 두세 명’을 제공해줄 수 있는지를 물어본다. 이러한 서신교환의 최종적인 결과는 VP를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는 장소에서 실험을 계속할 수 있도록 다카우 수용소에 공기 압축실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37세의 건강한 유대인 여성 VP에게 고도 1만 2천 미터의 기압과 동일한 압력을 가하고 행한 실험 기록이 그대로 남아있다(사진들도 첨부되어 있다).
다카우 수용소에서는 고공 구조 작전에 대한 실험 말고도 얼음물 속에서의 생존 가능성, 바닷물의 음용 가능성에 대한 실험들도 이루어졌는데, 이것들 역시 바다에 빠진 해군이나 조종사들의 구조 목적 하에 행해졌다. 뉘른베르크 재판을 통해 독일의 의사 및 과학자들이 수용소에서 행한 실험들은 국가사회주의 정권의 역사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에피소드들로 알려져 있다.
▶5.2. 생존한 VP들 및 기소된 자들의 증언, 그리고 일부나마 보존되어 있는 실험 보고서 속에 남겨져 있는 기록들을 읽는 일은 너무도 끔찍하기에, 차라리 그러한 실험들은 과학 연구와는 무관한 그저 사디즘적이고 범죄적인 행위에 불과하다는 강렬한 유혹에 휩싸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결코 그렇지 않다. 우선 이 실험들을 행한 의사들 중의 일부는 해당 과학계에서 대단히 명성 높은 연구자들이었다. 바닷물의 음용 가능성에 대한 실험을 이끌었던 슈뢰더, 베커-프라이셍, 바이글뵈크 교수가 누렸던 과학적 명성은, 예컨대 이들의 재판 당시 “뉘른베르크에서 유죄 선고를 받은 여타의 범죄적인 의학자들과 혼동하지” 말 것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제출할 정도였으며,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의화학 교수이자 나치체제에 전혀 동조하지 않았던 폴하르트 교수마저 재판정에서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실험들의 준비 과정은 정말 뛰어난 것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보다 한층 더 당황스러운 것은 20세기에 죄수들과 사형수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들이 여러 차례 대규모로 시행되었으며 특히 (뉘른베르크의 재판관 대다수를 배출한 나라인) 미국에서 그러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20년대 미국에서는 말라리아 해독제 연구 목적으로 800명의 죄수들을 말라리아 원충에 감염시켰거나, 12명의 사형수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는 사형수들이 실험 후에도 살아 있으면 사형을 면제받을 것을 약속받았다.
때문에 이처럼 분명한 기록들을 접하게 된 재판관들은 인간 모르모트들을 대상으로 한 과할 실험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기준의 확정이라는 문제에 대해 끝없는 토론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 대체로 동의 최종적인 기준은 실험에 참여하게 될 주체들의 명백하고 자발적인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죄수에게 자발적 동의에 의한 실험이라는 진술서에 서명을 요구케 했는데, 죄수의 자유의지, 동의 운운하는 이러한 문서들의 위선은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설사 수용소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진술서에 서명한 사례들을 발견했다손 치더라도 그렇게 행해진 시험들이 윤리적으로 허용된다고 말할 수 없음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나치 수용소의 수용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과 미국의 죄수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 모두가 실험의 비인간성이라는 면에서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비록 노골적으로 생명정치적인 지평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전체주의 체제하의 공무원들과 연구자들에게는 이 실험들이 어떤 윤리적 문제도 제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론상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어떻게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와 유사한 시험들이 실시될 수 있었을까?
가능한 유일한 대답은 두 경우 모두 VP들의 특수한 지위가 결정적이었다는 것이다(이들은 사형수이거나 수용소의 수감자로서, 그곳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곧 정치 공동체로부터의 최종적인 배제를 의미했다). 이들은 우리가 통상 인간 존재에게 부여하는 권리와 희망을 거의 대부분 박탈당했지만 생물학적으로 여전히 살아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생과 사, 내부와 외부의 경계 지역으로 내몰렸는데, 그곳에서 이들은 단지 벌거벗은 생명에 불과했다. 따라서 사형수와 수용소 수감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신성한 인간들’, 즉 죽여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는 자들과 무의식적으로 동일시되곤 한다. 예외 공간 속에서 실험은 마치 속죄 의식처럼 실험 대상의 생명을 회복시켜주거나(사면이나 감형은 생사에 대한 주권자의 권한의 표현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니면 그가 이미 속해 있던 죽음으로 그를 최종적으로 보내버리는 무대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는 근대성의 특징인 생명정치적 지평하에서는 과거 오로지 주권자만이 진입할 수 있던 이 경계지역 속으로 의사와 과학자들이 진입해 들어오고 있다는 점이다.
6) 죽음을 정치화하기
▶6.1. 1959년 프랑스의 두 신경생일학자 몰라레와 굴롱은 그때까지 알려져 있던 코마(혼수상태)의 현상학에 ‘심층코마’라고 명명한 새로운 극단적인 형상을 추가시킨 짧은 연구 논문을 발표한다.
즉 ‘심층 코마’를 추가하려고 한다. (……)이는 관계적 생명 기능들이 완전히 정지된 데 이어, 식물 상태의 생명 기능들마저 장애 상태가 아니라 완전히 정지된 상황을 말한다(몰라레 · 굴롱,「심층코마」, p.4).
이러한 정식(모든 생명 기능이 정지된 저 너머에 존재하는 단계의 생명)은 심층 코마가 전적으로 새로운 소생 기술(인공호흡, 아드레날린 정맥 주사를 동한 심장 혈액 순환의 유지, 체온 조절 기술 등)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시사해준다. 심층코마 상태인 자는 소생 요법 처치가 중단되면 자동적으로 생명을 멈춘다. 하지만 소생 요법을 계속할 경우 생존이 연장되는데, 이것이 과연 진짜 ‘생존’일까? 코마 너머의 영역의 생명이란 무엇일까?
▶6.2. 몰라레와 굴롱은 심층 코마의 의미가 소생에 관한 기술적·과학적 문제를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을 즉각 깨달았다. 여기서 쟁점은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이다. 실제로 그때까지 사망판정을 내리는 임무는 의사들에게 주어져 있었으며 전통적인 진단 방법, 즉 심장박동의 중단과 호흡 기능의 정지라는 기준을 사용해오고 있었다. 심층 코마는 다름 아니라 과거의 두 가지 사망 판정 기준을 무효화시켰으며, 또한 코마와 사망 사이의 중립 지대를 열어젖힘으로써 새로운 기준을 개발하고 새로운 규정을 확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 문제가 한층 더 복잡하고 시급한 것으로 변하게 된 것은 우연이라고 해야 할 어떤 역사적 일치 때문이었는데, 심층 코마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던 소생 기술의 발전이 장기 이식 기법의 발전 및 완성과 동일한 시기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심층 코마 상태는 장기 적출의 가장 이상적인 조건에 해당하지만, 장기 이식 수술을 시술하는 외과 의사가 살인죄로 고소당하지 않으려면 환자의 사망 시점을 명확히 정의할 필요가 있었다.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해짐에 따라 1968년 하버드 의과대학의 특별위원회는 ‘뇌사’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하게 되는데, 이 보고서에는 “회복 불가능한 코마를 새로운 사망 기준으로 정의”하는 것이 자신들의 “일차 목표”라고 쓰여 있다. 일단 적절한 의학적 시험을 거쳐 뇌 전체가 죽은 것(즉 신피질뿐만 아니라 뇌간까지도 사망한 것)이 확인되면 설사 소생기술을 통해 호흡을 계속하고 있다 하더라도 환자는 사망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6.3. 1974년 권총으로 사람을 살해한 혐의로 캘리포니아 법정에 기소된 앤드류 라이언스의 변호사는 피해자의 사망 원인은 의뢰인의 권총 발사 때문이 아니라 뇌사 상태에서 장기 이식을 위해 외과 의사 노먼 셤웨이가 심장을 제거한 것 때문이라는 반론을 펼쳤는데, 의사 셤웨이는 기소되지 않았지만 그가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기 위해 법정에 제출한 진술서를 아무런 불편함 없이 읽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맹세컨대, 뇌사 상태의 인간은 죽은 것이다. 이것만이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유일한 잣대인데, 왜냐하면 외는 이식할 수 없는 유일한 장기이기 때문이다(앞의 책, p.75).
그의 곧 논리적으로 소생 기술과 장기 이식 기술이 발견된 까닭에 심장 박동의 중지가 더 이상 타탕한 사망 판정 기중을 제공할 수 없듯이, 가정컨대 어젠가 최초로 뇌 이식 시술이 행해지는 날에는 뇌사 또한 더 이상 죽음의 기준일 수 없게 되리라는 말을 함축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죽음의 부유 현상의 완벽한 사례는 바로 심층코마 상태에 빠진 채 수년 동안 인공호흡기와 인공영양 공급으로 생명을 겨울 유지하고 있던 미국인 소녀 카렌 퀸란의 사례이다. 부모의 요구를 받아들여 법원은 이 소녀가 이마 죽은 것으로 간주된다는 이유로 마침내 인공호흡기 제거를 허락했다. 하지만 그 이후 카렌은 여전히 코마 상태에서 스스로 숨을 쉬기 시작했으며, 인공적인 영양 공급을 통해 1985년까지 ‘살다가’ 자연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분명한 점은 카렌 퀸란의 신체는 실제로 ‘삶’과 ‘죽음’이라는 단어가 의미를 잃어버린 비식별역으로 진입하였으며, 적어도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 영역은 벌거벗은 생명이 거주하는 예외공간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6.4. 그것은 오늘날 삶과 죽음은 고유한 과학적 개념이 아니라 정치적 개념, 즉 그 차제로서는 오로지 결정을 통해서만 정확한 의미를 얻게 되는 정치적 개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몰라레와 굴롱이 말하는 “근심스럽고 끊임없이 밀려나는 경계선들”은 유동적인 경계선인데, 이는 그것들이 생명정치적인 경계선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생명정치적 경계선들의 재규정을 핵심 목표로 삼는 방대한 과정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은 곧 주권 권력의 행사가 이제 이전 어느 때보다도 그러한 경계선들을 가로지르며, 다시 한번 의학 및 생물학과 교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시체’, 심층 코마 ‘환자’ 및 ‘거짓 생명체’가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드는 공간인 소생실은 바로 인간과 인간의 기술에 의해 완벽하게 통제된 순수한 벌거벗은 생명이 최초로 등장하는 예외적 공간을 경계짓고 있다. 또한 그것은 다름 아니라 물리적 신체의 문제가 아닌, 호모 사케르의 극단적인 구현의 문제이기 때문에(코마 상태의 환자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중간적인 존재”로 규정되고 있다), 쟁점은 또다시 죽여도 살인죄로 처벌되지 않는 생명에 대한 규정 문제로 되돌아오게 된다.
이 때문에 뇌사와 근대의 생명정치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 중의 일부는 국가가 사망 시점을 판정하도록 함으로써 소생실에 있는 거짓 생명체에게 무제한으로 개입하는 것을 막는 일체의 장애물을 제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결코 놀라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최후의 순간을 규정해야만 하고, (……)오로지 뇌사라는 기준을 고수해야만 한다. (……)이로부터 거짓 생명체에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이 도출된다. 오로지 국가만이 그것을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 (……)신체 조직들은 공적 권력에 귀속된다. 즉 신체를 국가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다고네,『통제』, p.189).
7. 수용소, 근대성의 ‘노모스’
▶7.1. 수용소에서 벌어졌던 일은 범죄에 대한 법적 개념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기에 종종 그러한 사건들이 일어난 특수한 법적·정치적 구조에 대한 검토가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 즉 그곳에서 벌어졌던 사건들로부터 수용소에 대한 정의를 연역해내는 대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것이다. 도대체 수용소란 무엇인가? 수용소에서 그런 일들을 가능케 하였던 법적·정치적 구조는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해 수용소를 역사적 사실이자 이미 과거에 속하는(물론 여전히 재생될 가능성이 있지만)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정치적 공간의 숨겨진 모형이자 노모스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수용소는 관습법이 아니라(우리가 흔히 생각해온 것처럼 형법의 변화와 발전에서 생겨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예외 상태와 계엄령에서 유래했다. 강제 구금의 법적 기반이 관습법이 아니라 예비 검속(예방적 구금)이며, 이는 프로이센에서 유래하는 법제로서, ‘개인의 신병을 구금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나치 법학자들은 이를 흔히 경찰이 가진 일종의 예방 수단으로 분류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독일 최초의 수용소는 나치 체제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정부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을 잊지 않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사회민주주의 정부는 1923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나서 ‘예비 검속’에 근거해 수천 명의 공산당 활동가들을 감금했으며, 또한 코트부스-질로프에 ‘외국인 집단 수용소’를 세워 주로 동유럽의 피난민들을 수용했는데, 따라서 이것이 20세기 최초의 유대인 수용소(물론 학살 수용소는 아니었다)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예비 검속의 법적 근거는 계엄령 혹은 비상사태의 선포, 그리고 그에 상응해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독일 헌법 조항들의 효력을 유보시키는 것이었다.
공공의 안전과 질서가 질서가 심각하게 방해받거나 위협받을 경우 제국의 대통령은 공공의 안정을 재확립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으면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군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 제국의 대통령은 (……) 명시된 기본권들을 잠정적으로 유보할 수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 제48조)
이에 바이마르 정부는 수차례 비상사태를 선포했으며, 어떤 때에는 연장하기도 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나치가 권력을 장악한 후 1933년 2월 28일에 ‘국민과 국가 보호령’을 선포해 개인의 자유, 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 등을 무제한 유보시킨 것 역시 이전의 정부들이 확립해 놓은 관행에 따른 것에 불과했던 셈이다.
하지만 법리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명령의 조문이 당시 이 명령이 비상사태의 선포와 다를 바 없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이 명령의 첫 문장은 “독일 제국 헌법의 제114, 115,117,118,123,124 및 153조는 새로운 명령이 있을 때까지 효력이 정지된다”로 되어 있다), 이 명령의 조문 속에 ‘비상사태’라는 표현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명령은 사실상 제3제국이 붕괴할 때 까지 유효했고, 제3제국은 “12년 동안 지속된 성 바르톨로메오의 (대학살의)밤”으로 정의되기도 했다. 이처럼 비상상태는〔예외상태〕는 더 이상 외부적이고 잠정적인 실제적 위협 상태를 가리키지 않으며, 법적 규칙 자체와 뒤섞이게 되었다. 법학자 베르너 슈포르는 “기본권의 유보를 통해 이 명령은 국가사회주의 국가의 수립을 위해 모두가 소망한 비상사태를 창출해냈다”고 말했다.
▶7.2 수용소의 본성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예외 상태〔비상상태〕와 수용소 사이의 이러한 구성적 연결 관계를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예비 검속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자유의 ‘보호’란 역설적으로 긴급 사태의 특징인 법의 유보로부터의 보호를 말한다. 여기서 새로운 점은 예비 검속이라는 장치가 이제는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예외 상태로부터 분리되면서, 정상 상태에서도 유효한 것으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수용소란 예외 상태가 규칙이 되기 시작할 때 열리는 공간이다. 예외상태란 본질적으로 실제의 위협 상황을 근거로 법질서를 임시로 유보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수용소라는 지속적인 공간적 배치를 획득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 자체는 정상적인 질서 외부에 남아있다. 그러니까 수용소가 예외라는 특수한 공간 내부에 위치하기 때문에 게슈타포의 총책임자인 딜스는 이렇게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용소는 어떤 명령이나 지시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워진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이미 거기에 있었을 뿐이다.(드로비쉬 · 비란트, 『체계』, p.26)
독일에서 수용소라는 것 자체는 상시적인 현실이 되었다.
▶7.3. 예외적 공간이라는 수용소의 역설적인 지위에 대해 고찰해보아야만 한다. 수용소로 추방된다는 것은, 자신의 배제를 통해 포함되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가장 먼저 법질서 속에 포함되는 것은 바로 예외 상태 그 자체이다. 예외 상태가 ‘모두가 소망한’ 것인 한, 그것은 규칙이 예외와 구별되지 않는 새로운 법적·정치적 패러다임을 도입한다. 따라서 수용소는 예외 상태가 규범적으로 실현되는 구조이다. 더 이상 주권자는 바이마르 헌법의 정신에서처럼 특정한 실제 상황(공공의 안전에 대한 위협)에 대한 인지에 기반해 예외를 결정하는 것으로 자신을 한계짓지 않는다. 주권자는 그의 권력을 특징짓는 추방령의 은밀한 구조를 노출시킴으로써, 이제 예외에 대한 결정의 결과물인 실제 상황을 창출해낸다. 수용소는 법과 사실의 혼합물로서, 그곳에서는 이 두 용어가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한나 아렌트는 수용소를 두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수용소는 법이 완전히 유보될 뿐만 아니라 사실과 법이 완전히 뒤섞인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예외적 공간을 구축한다는 이유로 인해, 수용소에서는 진정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일종의 안정적인 예외의 창조를 과제로 삼는 수용소의 이처럼 특수한 법적·정치적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곳에서 벌어진 믿기지 않는 일들 역시 완전히 이해되지 못한 채로 남을 것이다. 누구든 수용소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은 내부와 외부, 예외와 규칙, 합법과 불법이 구별되지 않는 지역으로 들어서는 것이며, 거기서 개인의 권리나 법적 보호라는 개념들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 수용소 수감자들이 모든 정치적 지위를 박탈당하고 완전히 벌거벗은 생명으로 축소되어 있는 한, 수용소는 또한 역사상 단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었던 가장 절대적인 생명정치적 공간으로서, 거기서 권력은 바로 순수한 생명과 어떤 매개물도 거치지 않고 마주치게 된다. 정치가 생명정치가 되고 호모 사케르와 시민이 거의 구분되지 않게 되자마자 수용소가 정치 공간의 패러다임 그 자체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7.4. 만약 새로운 본질적인 정치적 주체로 구성된 생명정치적 신체가 사실문제(예컨대 특정한 생물학적 신체의 확정)도 또 법률문제(예컨대 적용해야 할 특정한 규범의 확정)도 아니고, 대신 사실과 법의 절대적인 구별 불가능성 속에서 행사되는 주권적인 정치적 결정의 장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면, 국가사회주의의 인종 개념의 특수성을-이와 더불어 그것의 특징인 특유의 모호함과 부정합성까지도-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본질적인 생명정치적 범주들의 특성을 칼 슈미트만큼 명료하게 표명한 사람은 없었는데, 그는 국가사회주의적 인종관(슈미트의 말을 빌리자면 ‘혈통의 평등’)과 같은 개념은(‘위험한 상황’ 혹은 ‘미풍양속’과 유사하게) 어떤 특정한 외부의 사실적 상황을 가리키는 대신에, 사실과 법을 즉각적으로 일체화하는 일반 조항으로 기능하고 있다. 판사, 공무원 또는 그러한 개념을 다루어야 하는 사람은 모두 더 이상 규칙이나 실제 상황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오로지 독일 국민 그리고 총통과 함께 자신을 자신의 인종 공동체에 결박시킴으로써, 생명과 정치, 사실문제와 법률문제의 구별이 말 그대로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 영역으로 이동해 간다.
▶7.5. 오직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만이 법의 즉각적이며 그 자체로 완전한 원천을 총통의 말 속에 두는 국가사회주의 이론이 완전한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총통의 말은 규칙으로 곧장 변형되는 사실적 상황인 것이 아니고 그 자체가 살아 있는 목소리로서 규칙이듯이, 생명정치적 신체(유대인의 신체와 독일인의 신체, 다시 말해 살 가치가 없는 생명과 충만한 생명이라는 이중적인 모습으로서의 신체) 역시 규칙의 참조 대상인 생기 없는 생물학적 전제가 아니고, 규칙인 동시에 그러한 규칙 자체의 적용 기준 즉 규칙의 적용 여부를 결정짓는 사실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법적 규칙이다.
정치는 이제 말 그대로 비정치적인 것에 대한(즉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결정이 되었다.
수용소 내에서의 모든 동작과 모든 사건은 가장 사소한 것에서부터 가장 예외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결정이며, 독일인의 생명정치적 신체는 이를 통해 실현된다. 유대인의 신체를 분리시키는 일은 곧장 독일인 고유의 신체를 생산하는 일인데, 이는 규칙의 적용이 곧 규칙의 생산인 것과 다를 바 없다.
▶7..6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즉 만약 수용소의 본질이 예외 상태의 물질화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로서 벌거벗은 생명과 규범이 하나의(식별 불가능한 경계 속으로)진입하는 공간의 창출에 있다며, 우리는 그러한 구조가 만들어질 때마다 그곳에서 자행되는 범죄의 성격과는 무관하게 또 그곳의 이름이나 특수한 위치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우리가 잠재적으로 수용소의 현존과 마주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1991년 이탈리아 경찰이 알바니아 불법 이민자들을 본국으로 송환하기 전에 임시로 수용했던 바리의 축구경기장, 비시 정권이 유대인들을 독일로 돌려보내기 전에 집결시켜두었던 장소이 벨디브, 그리고 프랑스의 국제공항 내에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를 희망하는 외국인들을 억류시키는 곳인 ‘대기 구역’ 또한 마찬가지로 수용소에 해당한다. 이 모든 경우 겉보기로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공간이, 실제로는 정상적인 법질서가 사실상 정지되어 있고, 잔혹한 일이 벌어질 것인지 아닌지 여부는 법이 아니라 그 시점에 임시적으로 주권자로 행세하는 경찰의 예의 바름과 윤리 감각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 공간을 경계짓고 있다.
▶7.7.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 시대의 수용소의 탄생은 근대서의 정치적 공간 그 자체를 결정적으로 표시하는 사건으로 등장한다. 다시 말해 국민 국가의 구조가 다음의 세 가지 요소ㅡ영토, 법질서, 출생ㅡ에 의해 정의된다면, 과거의 노모스와의 단절은 슈미트가 말했던 두 영역(영토 질서와 법질서)에서가 아니라 이 두 영역 속에 벌거벗은 생명을 기입하는 지점(출생, 따라서 이것은 국민이 된다)에서 이루어진다. 수용소는 생명을 정치 질서 속에 기입해 넣는 새로운 숨겨진 관리자로서 등장한다. 출생(벌거벗은 생명)과 국민 국가가 점점 더 분리되는 것이 우리 시대 정치의 새로운 사실이며, 우리는 이 간극을 일컬어 수용소라고 부른다. 탈영토적 위치 확정으로서의 수용소는 정치의 숨겨진 모형으로서,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모형 속에서 살고 있으며, 또한 공항의 ‘대기 구역’이나 우리 도시들의 일부 외곽 지역의 형태로 완전히 변신한 수용소의 이러한 구조를 인식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수용소는 국가-국민(출생)-영토라는 과거의 삼위일체에 추가되면서 그것을 파괴시켜버린 제4의 불가분의 요소이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수용소뿐만 아니가 국가 속으로의 생명의 기입에 관한 항상 새롭고 점점 더 착란적인 규범적 정의들을 예견해야 한다. 이제 국가 공동체 내부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수용소는 전 세계의 새로운 생명정치적 노모스이다.
8)경계영역
이 연구 과정에서 다음 3가지 테제가 잠정적인 결론으로 도출되었다.
1. 근원적인 정치적 관계는 추방령(외부와 내부, 배제와 포함 사이의 비식별역으로서 예외상태)이다.
2. 주권 권력의 근본적인 행위는 벌거벗은 생명을 근원적인 정치적 요소이자 자연과 문화, 조에와 비오스 사이의 결합의 비식별역으로 산출하는 것이다.
3. 오늘날 서양의 생명정치적 패러다임은 국가 공통체가 아니라 수용소이다.
서양의 생명정치적 신체는 극단적인 형태 속에서 법과 사실, 규칙과 생물학적인 생명 사이의 절대적으로 식별 불가능한 경계선으로 등장한다. 총통의 인격 속에서 법이 생물학적 생명과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자신을 생명으로 전면적으로 변형시키려고 하는 법과 사멸하다시피 되어 규칙에 굴복한 생명이 마주치는 일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서양의 정치적 공간을 재사유하려는 모든 시도는 다음과 같은 사실, 즉 조에와 비오스, 사생활과 정치적 실존, 단순히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가정을 고유한 공간으로 삼는 인간과 정치적 주체로서 국가를 고유한 공간으로 삼는 인간 사이의 고전적인 구분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명료한 인식을 출발점으로 삼아야만 한다. 수용소에서는 고전적인 정치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용소에서는 국가와 가정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며, 우리의 생물학적 신체와 정치적 신체 간의 구별 가능성, 그리고 소통 불가능하고 침묵하는 것과 소통 가능하고 말할 수 있는 것 간의 구별 가능성이 영원히 박탈되었다. 우리는 푸코의 표현대로라면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의 우리의 생명이 정치에서 문제시되는 동물일 뿐만 아니라, 역으로 정치 그 자체가 자연적 신체 속에서 문제시되는 시민이기도 하다.
또한 벌거벗은 생명에 다름 아닌 이 생명정치적 신체 자체가 벌거벗은 생명 속에서 완전히 고갈된 생명 형태로, 또한 다만 자신의 조에에 불과한 비오스의 구성과 설립의 장으로 바뀌어야 한다. 현존재에 대한 하이데거의 정의에서 본질이 실존 속에 위치하듯이, 오늘날 비오스는 조에 속에 위치한다. 하지만 어떻게 비오스가 오로지 자신의 조에일 수 있을까? 어떻게 생명의 형태가 서양 형이상학의 과제이자 수수께끼에 해당하는 이 순순 존재를 포착할 수 있을까? 만일 단지 자신의 벌거벗은 실존에 불과한 이 존재, 그리고 자아의 형식이기 때문에 그것과 분리될 수 없는 이 생명을 ‘생명-의-형식’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정치와 철학, 의학적·생물학적 과학과 법학 사이의 상호 교차를 출발점으로 정의 내려진 연구 영역을 뛰어넘는 새로운 연구 영역이 열리는 것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